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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2.24 프랑스 왕위에서 쫓겨나다
루이 필리프는 여러 호칭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공작이었지만, 대혁명 당시에는 '평등한 자의 아들(Égalité fils)‘이라고 불렸다. 그는 육군 중장으로 전쟁에 나갔지만, 곧 적에게 투항한 반역자가 되었다. 7월 혁명 때 그는 '시민왕'이라 불렸지만, 2월 혁명 때는 '늙은 독재자'라고 불렸다. 그가 역사에 남긴 이름은 '프랑스의 마지막 왕'이었다.
권력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늘 권력으로부터 배척당하는 오를레앙가의 후계자
루이 필리프는 1773년 파리의 팔레 루우얄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 은 스푼을 입에 물고 태어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루이 필리프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외할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발루아 공작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작 중에서도 가장 서열이 높은 6대 오를레앙 공작이 될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18세기 프랑스에서 오를레앙 공작 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은 왕 밖에 없었다. 원래 오를레앙 공작은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왕족이었다. 루이 14세는 자신의 동생 필리프에게 공작이라는 작위와 함께 프랑스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을 봉토로 주었다. 그가 바로 초대 오를레앙 공작이었다.
루이 14세는 자식 복이 없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의 아들과 손자들은 일찍 죽어버렸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왕위를 증손주인 루이15세에게 물려주어야 했다. 만약 이때 루이 14세의 자손이 끊겼다면, 다음 왕위에 오를 사람은 바로 2대 오를레앙 공작이었을 것이다. 오를레앙가의 세력은 왕실을 위협할 만큼 컸다. 그 때문에 루이 15세와 그의 뒤를 이은 루이 16세는 이 부유한 친척의 세력이 더 이상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항상 오를레앙 공작들을 견제했다. 덕분에 오를레앙 공작들은 권력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늘 권력으로부터 배척당하는 좌절감을 맛보아야 했다. 어쩌면 그러한 좌절감이 프랑스 왕이 되어야겠다는 은밀한 욕망을 낳게 했는지도 모른다. 루이 필리프가 오를레앙가의 후계자로 태어났다는 것은 이러한 가문의 염원을 짊어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프랑스 대혁명 후 스스로 작위를 버린 '평등한 필리프'와 '평등한 자의아들'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났다. 루이 필리프의 아버지인 5대 오를레앙 공작은 인간적인 약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시대를 읽는 눈이 있었다. 그는 프랑스혁명 전부터 시민의 편에 섰고, 혁명이 성공하자 놀라운 변신을 한다.그는 자신의 작위를 버리고 스스로 평민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살던 궁전, 팔레 루우얄을 혁명정원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그는 ‘평등한 필리프(Phillipe Egalité)’라고 불리며 시민의 영웅이 됐다. 덕분에 그의 아들 루이 필리프는 ‘평등한 자의 아들(Égalité fils)’이라고 불리게됐다.
'평등한 필리프'로 불린 루이 필리프의 아버지
프랑스혁명은 루이 왕조의 몰락을 가져왔다. 시민들은 루이 16세를 재판정 위에 세웠다. 평등한 필리프는 이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여해 루이 16세에게 사형을 내리는 데 찬성했다. 그는 그렇게 오래된 가문의 원한을 풀었다. 그러나 그가 루이 16세의 사형에 찬성한 것은 꼭 사적인 복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새로운 왕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전왕을 제거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혁명은 성공했지만 앞으로 프랑스를 어떻게 이끌어갈지에 대해서는 혁명 세력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라졌다. 어떤 사람들은 영국과 같은 입헌 군주제로 가기를 희망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공화제로 가기를 원했다. 프랑스가 입헌 군주제로 간다면 새로 왕이 될 사람은 바로 평등한 필리프였다. 그런데 불행히도 평등한 필리프는 왕위에 오르지 모르고 단두대 아래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이러한 비운을 맞이한 것은 바로 자신의 아들, 루이 필리프 때문이었다.
아들 때문에 단두대에 오른 평등한 필리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루이 필리프의 나이는 고작 열여섯 살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때부터 차근차근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는 열여덟 살 때 육군 대령이 되었고 열아홉 살 때 육군 중장이 되어, 오스트리아-프랑스 전쟁에 참여했다. 혁명 후 루이 16세가 실각하자, 왕정을 유지하고 있던 주변 국가들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유럽의 군주들에게 프랑스 왕이 권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결국 1792년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때 프랑스 군을 지휘했던 것은 뒤무리에 사령관이었다. 루이 필리프는 이 뒤무리에의 부하였다.
왕 재위 시절의 루이 필리프
문제는 뒤무리에 사령관이 엄청난 야심가였다는 것이었다. 그는 프랑스를 외세로부터 지키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프랑스의 권력을 잡고 싶어했다. 거기다가 그는 루이 필리프이라는 아주 좋은 패를 가지고 있었다. 뒤무리에의 계획은 이랬다. 적군인 오스트리아와 연합해, 파리로 진격한 뒤 혁명 정부를 무너뜨린다. 그런 다음 루이 필리프를 왕으로 내세우고 실제적인 권력은 자신이 차지한다. 그러나 혁명정부는 뒤무리에의 이러한 음모를 눈치 채고 그에게 파리로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뒤무리에는 루이 필리프와 함께 냉큼 오스트리아로 도망쳤다.
이제 불똥은 루이 필리프의 아버지에게로 튀었다. 혁명 정부는 평등한 필리프가 아들과 함께 반역에 가담했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결국 평등한 필리프는 1793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아버지가 죽자 루이 필리프는 오를레앙 공작의 작위와 봉토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프랑스를 떠나 여러 나라를 떠도는 망명객인 그에게 작위와 봉토는 그저 그림의 떡이자, 못 먹는 감일 뿐이었다. 그 시절 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가명으로 수학 선생 노릇을 했고 그의 누이동생은 삯바느질을 했다고 한다. 그의 망명 생활은 21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는 망명생활을 하면서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세와 화해를 시도했다. 사실 루이 18세로서는 시민들의 편에 서서 형을 실각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형을 처형하는데 찬성한 오를레앙가를 쉽게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몰락할 대로 몰락한 루이 왕조나 오를레앙가가 다시 싸운다는 것은 양쪽 모두에게 불리한 일이었다. 돌이켜 보면, 루이 필리프가 루이 18세와 화해한 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이었다. 1814년 프랑스가 왕정체제로 되돌아가자, 루이 18세는 프랑스의 왕이 되었다. 덕분에 루이 필리프는 마흔 한 살의 나이에 프랑스로 돌아와 자신의 봉토를 찾을 수 있었다. 루이 18세와 화해를 했지만, 그는 왕당파에 들어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입헌 군주제를 지지하는 오를레앙파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7월 혁명으로 왕위에 오르고 2월혁명으로 왕위에서 쫓겨나다
루이 18세가 죽자, 그의 동생인 샤를 10세가 왕위에 올랐다. 샤를 10세는 프랑스를 절대 왕정 시대로 되돌려 놓겠다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이제 실질적인 힘과 부를 가진 것은 귀족들이 아니라 상층 부르주아지였다. 상층 부르주아지는 1830년 7월 혁명을 일으켜 샤를 10세를 왕위에서 내쫓았다. 그 당시 프랑스의 정치 세력은 세 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첫째는 왕당파였는데, 그들은 왕정을 지지하는 귀족세력이었다. 둘째는 공화주의자들이었데, 그들은 주로 하층 부르주아지, 노동자, 나폴레옹 지지자들이었다. 마지막으로 입헌 군주제를 원하는 상층 부르주아지들이 있었다. 그들은 루이 필리프를 지지했는데, 그 때문에 그들은 오를레앙파라고 불렸다. 오를레앙파 덕분에 루이 필리프는 오십칠 세의 나이로 프랑스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시련의 시작이었다. 그는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도전과 맞서야 했기 때문이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화가 들라크루아는 이 그림을 통해 7월 혁명정신을 형상화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더 이상 농촌에서 일거리를 찾을 수 없었던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공장에 들어가 값싼 임금을 받으며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산업혁명은 산업 부르주아지를 역사상 유래가 없는 부자로 만들어주었지만, 동시에 임금 노동자들을 최악의 생존 조건으로 내몰았다. 루이 필리프는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상층 부르주아지에게만 선거권을 줌으로써 하층 부르주아지와 노동자들이 자신의 주장을 정치권 안에서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막아버렸다. 결국 하층 부르주아지와 노동자들은 테러와 폭동을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루이 필리프는 가혹한 폭력으로 그들을 억눌렀다. 그렇게 루이 필리프는 점점 더 늙은 독재자로 변해갔다. 루이 필리프는 샤를 10세처럼 권위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아버지, 평등한 필리프처럼 구시대 귀족 사회와 방탕과 시민혁명의 이상주의가 뒤섞인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온화하고 인내심 강하고 성실한 군주였다. 만약 그가 백 년 전에 왕이 되었다면, 그는 위대한 계몽군주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고 그는 그것을 쫓아가지 못했다. 1848년, 마침내 하층 부르주아지와 노동자들의 불만은 2월 혁명으로 터져 나왔다. 루이 필리프는 칠십오 세의 나이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1848년 오늘, 그는 프랑스의 마지막 왕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과거의 방식으로는 새로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교훈과 역사의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만 남겨 놓은 채.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아쉽게도 아직까지 우리나라에 루이 필리프의 평전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프랑스혁명을 다루고 있는 책들을 통해서 그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만약 프랑스혁명 전후의 시대상을 알고 싶다면, 타임라이프북스 시리즈 중, <이성의 시대> 를 권하고 싶다. 이 책은 매우 쉽고 체계적일 뿐만 아니라, 풍부한 화보를 가지고 있다. 또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원인과 그 의의를 알고 싶다면, 알레시스 토크빌의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혁명> 을 추천한다. 만약 루이 필리프가 왕이 되었던 7월 혁명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레미제라블> 을 읽어보라. 7월 혁명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만큼 프랑스 혁명 정신을 감동적으로 형상해놓은 책도 없을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루이 필리프에 대한 빅토르 위고의 평가를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