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레 천년을 울다/ 김금만
오늘은 우리 아가 맨발로 걸어가네
계단에 가지런히 꽃신을 벗어 두고
보슬비 오는 하늘에 무지개를 건너네
티끌로 넘쳐나는 세상이 되어갈 때
해맑은 울음으로 맑힌 귀 뚫어놓고
산 넘고 물을 건너던 맥놀이가 돌아오네
아직도 엄마 찾는 에밀레 에밀레는
천년을 울었어도 목소리는 그대로고
오늘 밤 반달이 뜨면 배를 타고 가겠네
*********
고장 나다/ 김수엽
에어컨 고치러 온 숙련된 기사님이
꽤 많은 시간 동안
땀 뻘뻘 흘린 뒤에
적당한 부품이 없어
못 고친다 짜증이다
대기업 제품인데 부속이 없다는 말에
아니 그게 말이 되냐
내 이마 땀이 때든다
고쳐도 고친다 해도 덥긴 마찬가지란다
왜냐고 물으니까 지구의 체온 때문이라
병원에 가야 하는데
울컥하며 말 줄임표
걱정은 병 고칠 병원도 의사도 없어서란다
**********
끼니/ 김혜경
꼬리조팝 꽃송이에 내려앉은 표범나비
천 길 낭떠러지가 무섭지도 않은갑다
겁없이 허공을 딛는
걸신들린 저 숟가락
바람 타고 다가가 가만가만 손 뻗는다
사흘 굶어 뒤집힌 눈 뵈는 게 없다던가,
간 크게 나를 눈감고
고봉밥을 비운다
***********
연지(蓮池)의 아침/ 박복영
안개는 거친 숨을 쏟으며 깼다지요
청개구리 뛴 순간은 살고픈 질주여서
연잎은 아무 말 없이 야윈 몸을 뉘었고
실잠자리 연꽃에 내려앉는 집중은
때 놓친 설움을 토닥이는 마음이니
고요는 비린내 물고 견뎌야만 했지요
떡붕어 뛰는 소리 안달 난 분주라고
깨어나 질펀하게 살아보자 난리네요
몸 낮춘 나무 그림자 함께 세상 꿈꾸자며
*******
밑바닥 들여다보다/ 송영일
배꽃 같은 함박눈이 서설로 날리는 날
흰 도화지 펼쳐놓고 묵상 중인 공원 안에
축축한 하루를 짚는 떠돌이 길고양이
밑바닥 끌어안는 비틀거린 걸음으로
메아리 없는 울음 고개 숙여 드러낸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 숫눈 위 시린 자화
어디로 가야 할까? 이정표 없는 난장
눈에 밟힌 그날 그때 오늘도 되작대는
서울역 그 퀭한 동공 그림자 일렁인다
********
낙타와 유리병/ 서은숙
유리병이 건너오자 사막도 함께 왔다
낯선 모래바람이 줄줄 흘러내렸다
밤마다
우리 안에서
낙타가 울었다
잔별을 서녘에 남고 형광불빛만 쏟아져
유리병 뚜껑을 열자 낙타가 뛰쳐나왔다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검붉은 모래성이
*******
일몰/ 우은숙
잘 익은 하늘길을 머리 위에 받쳐 들고
일순간 붉게 차린
꽃물 내력 줄기마다
성글게 한 뼘씩 재는 하루치의 반성문
*******
63시티에서 만장굴을 보다/ 유순덕
우리 좀 더 빌딩 속을 견딜 수만 있다면
용암 유선 꿈을 꾸는 금빛으로 반짝이자
아치형 천장이 되어 덧없이 흘러가자
한쪽 귀를 펼럭여 줄 도시 따윈 없었다고
현무암과 석순 사이 방 하나 그려놓고
차갑고 축축한 바닥 몸 부비며 살자 가자
끝내, 견디지 못할 중력으로 아팠다면
마그마 가스층 밀고 전망대에 올라보자
붉은 강, 오름 오르는 달큼한 바람이 되자
**********
폭설/ 이상익
누구의 그림일까
밤새 꼬박 내린 눈에
하늘땅 경계 없이
여백으로 가득한데
철새 몇,
말줄임표로
수묵화를 그리고
*********
폭설(暴雪)/ 이순자
흰눈이 소리 없이 온 세상을 덮었다
태양도, 염화칼슘도 효과는 미약하고
지난밤 다시 덮었다
숱한 걱정 쌓인다
여기저기 부르짖는 사람들의 아우성
정치보도 시장경제 거짓말 꾹꾹 눌러
아무 말 하지 못하게
엄동설한 되었다
************
억새 풀/ 이승훈
비바람 젖어 드는 우뚝우뚝한 세월
맥박은 거칠어져 쓰러질 듯 부대끼다
기어이 흐렸던 냇물은 정화수로 흐른다
본디 태어나길 가느다란 몸뚱어리
먹구름 두르고도 빛을 새겨 품었더니
온 천치 훤한 마음 밭 그 숨결은 은물결
날이 저물어도 은하수 따라 저어가고
샛강에 시나브로 흐르는 조각배
억새 풀 짤막한 이력서 무명 치마 너울너울
**********
가을 풀밭/ 이요섭
가을엔 풀밭이 운다.
벌레들도 성토한다.
풀씨 만한 소리들이 수천 개 모여들어
오염된 세상을 안고
밤 새고 울어댄다.
무성한 황무지의 가을은 구슬프다.
누구도 볼 수 없는
벌레의 마을 안엔
너절히 주검들이 쌓여
도태되는 가을이 운다.
*****************
헌책 수집상 얘기 듣고/ 이택회
한 트럭을 실어가면 4만 원을 받는단다.
동전 한 닢보다 책 한 권이 가볍다.
한 트럭 땀을 흘려야 책 한 권이 나오는데.
나무에서 종이까지, 원유에서 잉크까지,
무슬림 기독교인 불자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일꾼들의 땀은 셈하지도 않았는데.
**************
11월, 단풍/ 이행숙
너무 가까이는 다가오지 마셔요
푸석하고 주름지고 검버섯 핀 얼굴
죽어도 그대에게는 내보이기 싫어요
쓱 한 번 훑어보고 지나치면 어쩌나
그대 시선 잠시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립스틱 벌써 몇 번씩 덧바르고 잇어요
이런 나도 괜찮다면 우리 사랑할까요?
너무 속속들이 알려고는 하지 말고
모른척 덮어주면서 예쁜 것만 볼까요?
***********
슬픈 맛/ 정진희
칠산바다 한 접시에 무인도 두어 점
쇠갈매기 쉰 목소리 파도 열 접 툭 얹어
불갑사 끓어오르는
꽃무릇에 바쳤느니
우리가 헤어질 때 약속이 있었던가
그늘을 헤집는 열나흘 눈빛 아래
내 몸은 묻고 또 묻어도
일어나고 일어나느니
눈으로 삼켰으나 삭히지 못했던 맛
허물어진 울대에 굴비처럼 매달자
육십 년 냉골이었던 몸
달궈지고 있는 중
***********
초록의 근육/ 황보림
빈 들녘 채워 넣는 자투리 미나리꽝
동지섣달 살얼음이 가슴까지 차올라도
진흙 속 갓 올라온 새순
음계처럼 피어난다
제 몸 얼지 않으려 비비는 마디마디
거머리 떼 아무리 빨판을 붙여대도
한겨울 초록의 근육
수렁논을 일으킨다
시린 발 개흙 속을 비틀대는 구릿빛
안개 속 헤매던 실업의 긴긴 날
귀농한 둠벙골 홍씨
하루해가 짧다
************
카페 게시글
함께 가는 길
전북시조 제3호/ 전북시조시인협회/ 신아출판사/ 2024
바보공주
추천 0
조회 27
25.02.21 15:18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