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솔바람동요문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향호
2021. <강릉 문학 29집 발표> -강릉 역사동화>
별이 된 충노 문리동
이정순
깊은 계곡 소금강으로 들어가는 길은 눈이 녹은 물로 질퍽거렸다.
등에 무거운 봇짐을 멘 문리동은 진흙탕과 돌에 미끄러질까 봐 여간 신경이 쓰는 것이 아니었다.
“나리 조심하십시오. 미끄러지면 크게 다칩니다.”
앞장서서 걷던 관노 문리동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 아직도 멀었느냐? 소금강이 이렇게 험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강릉 부사 이광준은 다리도 아프고 힘들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부사는 지금까지 전국 방방곡곡 여러 군데를 다녀봤지만, 이렇게 산세가 험한 길은 처음이라 자신을 데리고 온 문리동이 원망스러웠다.
“나리. 이제 다 왔습니다. 여기가 나리가 거처할 곳입니다.”
문리동은 조금 더 길을 가더니 허름한 움막에 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냐, 여기라고?”
“예, 이곳은 골이 깊어 왜놈들이 부사님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응, 그런데 산봉우리마다 저렇게 눈발이 희끗희끗하고 풀들이 말라비틀어졌는데 여기서 어떻게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단 말이냐?”
부사는 바위 한쪽 모퉁이에 자리 잡은 너무나 초라한 움막과 여기저기 온통 기암괴석이 즐비한 이 산속에서 어떻게 먹고 지낼지 앞이 캄캄해 힘이 쭉 빠졌다.
‘한 고을 부사가 왜적과 대적하지 못하고 이렇게 피해 다니다니….’
문리동은 이런 생각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갔지만,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나리,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기는 첩첩산중이지만, 옛날 신라 시대 화랑들이 무예를 닦던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몸과 마음을 닦으며 오로지 나라를 구할 생각만 하십시오. 여기서 잠시 몸을 피해 있으면 다시 관아로 돌아갈 날이 머지않아 올 것입니다. 끼니는 제가 정성 다해 챙겨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안전이 먼저이니 불편해도 좀 참고 견디십시오.”
문리동은 짐을 풀어 시장할 부사에게 챙겨 온 음식을 차렸다.
“너도 같이 먹자꾸나.”
“아닙니다. 저는 아직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나리께서 많이 드십시오.”
문리동은 부사가 함께 밥을 먹자고 몇 번이나 청했지만, 끝까지 손을 저으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저렇게 정이 있는 분이 어떻게 처음엔 나에게 그렇게 섭섭하게 대했을까?’
허름한 움막에서 같이 밥을 먹자고 하는 부사를 보니 갑자기 측은한 마음이 생겼다.
밤이 깊어지고 산을 스쳐 가는 바람 소리만 들려왔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던 부사는 수염을 쓸어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문리동아, 그때 일 생각나느냐?”
“무슨 일 말입니까?”
문리동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땐 내가 너를 잘 모르고 못된 놈으로 몰아서 미안했구나.”
“아닙니다. 이제 다 지난 일입니다….”
몇 달 전 부사가 강릉에 내려온 첫날 관아에는 흥겨운 잔치가 벌어졌었다. 새로운 부사를 맞이하느라 관아가 모처럼 부쩍 댔다. 그러나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난 부사는 화들짝 놀라 큰소리쳤다.
“여봐라. 내 돈주머니가 지난밤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누구의 짓인지 알아보거라.”
부사는 불같이 화를 내며 관아에 있는 관노들을 모조리 불러 모아 잃어버린 돈주머니를 찾아내라 명령했다.
“네가 가져간 것이냐?”
“저는 아니옵니다. 나리. 정말 아니옵니다.”
관아 대청마루 앞에 쪼그리고 앉은 관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짓이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럼 도대체 누가 가져갔단 말이냐? 허허 이 일을 어찌할까? 이 중에 분명 누군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얼굴이 벌겋게 된 부사는 뒷짐을 진 채 마루를 어슬렁거리며 자신의 물건에 손을 댄 사람을 가만두지 않겠다며 얼굴을 붉혔다.
부사가 더 심하게 관노들을 문책할 무렵 행랑채에서 누군가 달려오며 소리쳤다.
“나리, 돈주머니 찾았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돈주머니를 들고 온 사람은 바로 심술이 많은 관노 삼동이었다. 삼동이는 잔머리가 잘 돌아가고 사람을 모함하는 특이한 버릇이 있었다.
“그래, 그래 맞다. 넌 그걸 어디서 찾았느냐?””
부사는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눈이 확 커졌다.
“저기 앉아있는 문리동의 방에서 찾아왔습니다.”
삼동이가 이렇게 둘러대자 부사는 불호령을 내렸다. 얼떨결에 도둑으로 몰린 문리동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정말 내 돈주머니를 네가 가져간 것이냐?”
“저는 아니옵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나리의 돈주머니를 탐내겠습니까? 저는 돈에 욕심이 없습니다.”
문리동은 그런 돈주머니를 본 적도 만진 적도 없다고 말했지만, 부사는 오히려 더 크게 호통을 쳤다.
“관노인 주제에 어떻게 감히….”
관아 앞에 엎드려 있던 문리동은 그 소리를 듣자 자신이 너무나 비참하고 억울했다.
‘내가 관노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도 아닌데….’
문리동은 잠시 자신을 낳아준 부모님이 미웠다. 설움을 당하는 처지도 못마땅했다.
“저는 절대 아니옵니다.”
끝까지 거짓말이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부사는 문리동의 말을 믿지 않았다.
“저놈에게 곤장 백 대를 쳐라.”
문리동은 갑자기 도둑으로 몰려 부사에게 미움을 받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 문리동은 새 부사에게도 두터운 신임을 얻을까 봐 샘을 낸 삼동이가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누명을 벗었지만, 도둑으로 몰렸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문리동아, 그때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너를 도둑으로 몰아서 미안하구나.”
부사가 진심으로 미안한 기색을 보이자 문리동은 그제야 조금 마음이 풀리면서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벌써 며칠째 계속해서 눈이 퍼붓자 문리동은 은근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구해 놓은 땔감은 점점 사라지고 먹을 양식마저도 바닥을 보이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먹을 것이 이렇게 없어서 어찌 살꼬?”
부사는 끼니때마다 밥투정을 부리며 문리동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나리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나리를 굶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
문리동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참고 또 참았다. 찬 계곡물로 허기를 달래며 물고기를 잡아 잡숫게 하고 십 리 산길 걸어 겨우 반찬을 얻어와 부사의 밥을 챙겨 주기 바빴다. 다음 날도 문리동은 높은 산에 올라 몸에 좋다는 나무뿌리를 구해와 부사에게 달여 주었다.
문리동이 밥 먹는 것을 본 적 없는 부사는 혼자 먹기가 좀 미안한지 문리동에게 먹을 것을 덜어주었지만 문리동은 한사코 거절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나리는 이 고을을 위해 큰일을 해야 할 분이니 먼저 나리께서 잘 드시고 기운을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허허, 문리동아, 다 네 덕분에 내가 이렇게 잘 지낼 수가 있구나.”
부사는 점점 문리동이 마음에 들었다. 배가 골지 않도록 챙겨 주고 추위에 떨지 말라고 군불을 지펴주는 문리동이 믿음직스러웠다.
어느새 찬바람이 지나고 계곡의 버들강아지가 나올 무렵이었다.
힘겹게 나뭇짐을 해서 내려오던 문리동은 관아에서 달려온 관리를 만났다. 낯익은 관리를 보자 문리동은 반갑기 짝이 없었다.
“이제나 오나 저제나 오시나 저는 목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문리동이 지게를 내려놓고 환하게 웃으며 관리를 맞았다.
“어서 우리 나리를 관아로 모시거라.”
관리는 왜적들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전해주러 찾아온 것이었다.
부사는 곧장 관리와 함께 다시 문리동을 앞세우고 관아로 돌아왔다.
“문리동아, 그동안 깊은 산골짜기에서 고생 많았다.”
부사는 그동안 고생한 문리동을 아껴주려 했다. 하지만 문리동은 다른 사람들의 시기를 받을까 말을 무척 아꼈다.
어느 날부터 문리동의 몸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날마다 다르게 야위어가고 마당을 쓸 수 없을 만큼 힘도 부쳤다. 부사는 문리동이 자주 보이는 않는 것이 수상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봐라, 어찌 문리동이 요즘 보이지 않느냐?”
“나으리, 지금 문리동이 많이 아픕니다. 큰 병이 난 듯싶습니다.”
심술을 자주 부리던 삼동이가 이렇게 아뢰자 부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큰 병이라고? 그게 사실이냐? 너 또 문리동을 괴롭히려고 일부러 거짓말로 둘러대는 게 아니더냐?”
부사가 몇 번을 물어보았지만 삼동이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리, 이번에는 진짜입니다. 정말 문리동이 많이 아픕니다. 그래서 요즘 일도 못 하고 일어서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부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토록 밝고 씩씩한 문리동이 아플 줄은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무어라, 정말이더냐? 그럴 리가……. 어허 큰일이구나.”
그날 밤 부사는 아무도 몰래 문리동을 찾아갔다. 문리동의 얼굴을 살피던 부사는 깜짝 놀랐다.
“속이 몹시 아픈 게냐? 얼굴이 검고 핼쑥하구나.”
“아,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문리동은 아픈 기색을 참아가며 밝게 웃으려 애썼다.
“사람이 아픈 것만큼 서러운 것도 없다. 그동안 날 위해 애를 썼으니 내가 보약이라도 내려주고 싶구나. 어서 몸을 회복하거라.”
부사는 문리동에게 위로를 건네며 보약을 내려주었다. 문리동은 너무 감격하여 눈물이 어렸다.
‘난 천한 관노일 뿐인데 어찌 양반이 이렇게 큰 정성을 보인단 말인가?’
문리동은 혼자 중얼거리며 소매로 눈가를 찍어냈다.
“몸은 좀 어떠냐?”
부사는 다음날도 다시 문리동을 찾아와 문병했다.
“부사 나리의 은혜를 입고 조금씩 좋아지고 있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문리동이 힘들게 몸을 일으키며 부사에게 예를 갖추려 하자 부사는 문리동의 손을 잡아주며 다독거렸다.
“괜찮아, 그냥 누워 있거라. 은혜는 무슨 은혜. 은혜를 입은 사람은 바로 나다. 네가 아니었으면 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왜란 때 나를 피신시켜주고 나의 목숨을 구해준 정성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단 말이냐?”
부사가 말끝을 흐리며 말하자 문리동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나리, 저는 제가 할 소임을 한 것뿐입니다. 저는 비록 노비이지만 누구에게도 아부하지 않고 정성 다해 살았습니다. 관노로 사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저는 나리를 잘 모셔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만, 이젠 몸이 아파서 그렇게 할 수가 없을 듯합니다. 나리와 함께 피난하러 갔을 때, 저는 먹을 게 없어서 개울물만 마시며 배를 채우던 때도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땐 나리에게 누가 될까 봐 솔직히 말씀을 아뢰지 못했습니다.”
“허허, 이럴 수가! 그걸 왜 이제 와서 말하느냐? 난 네가 같이 먹자고 할 때 거절 하길래 진짜 배가 불러 그런 줄 알았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울 때 나를 보살피느라 고생 많았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먹을 게 없다고 호통이나 쳤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 그때 도망이라도 쳤으면 네가 편했을 거 아니냐?”
부사가 혀를 차며 말을 잇자 문리동은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나라의 주인은 나라님이시고 강릉대호부의 주인은 바로 나리십니다. 저는 나라든 고을이든 충성을 다하는 게 저의 도리입니다. 저는 제가 할 일을 다 한 것뿐입니다.”
“허허, 미련한 내가 너의 충성을 알아보지 못하다니! 내가 원망스럽지 않더냐?”
부사는 미련한 자신을 자책하며 물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나으리, 사람은 먹을 것에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합니다. 나라가 이렇게 어려운데 제가 나리에게 무엇을 바라기만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는 이제 나리께서 이 고을을 위해 잘 다스려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허허, 문리동 너의 마음이 이렇게 갸륵할 수가 있단 말인가? 누구보다 장하고 총명한 네가 있어 든든하구나.”
부사는 크게 칭찬하며 문리동의 손을 쓸어 주었다. 부사는 문리동을 살려 보려고 귀한 보약을 몇 번 더 선물했다. 하지만 문리동은 얼마 살지 못하고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피란 중에 고을을 이끌어 가야 할 부사를 챙기느라 바빴던 문리동은 정작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했다. 병이 깊어진 것을 감쪽같이 감추고 있었다.
부사는 문리동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얼굴을 붉혔다. 너무나 안타까웠다.
“문리동아, 내가 진즉 널 잘 보살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넌 나에게 진정으로 충성했다. 언제나 나를 보살피고 나의 목숨을 구해줘서 고마웠다.”
부사 이광준은 문리동의 행적비를 세워준 뒤 한양으로 떠나면서 흠뻑 눈물을 훔쳤다.
가끔 밖으로 나와 밤하늘을 쳐다보는 이광준 부사는 빛나는 별들이 문리동의 얼굴인 것 같아 오래도록 마주 보고 있었다.*
•충노 문리동 행적비(碑)- 문리동은 조선 시대 관노이다. 임진왜란 때 강릉 부사를 모시고 산골로 들어갔다가 양식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정성을 다해 부사를 섬겼다 한다. 그의 행실을 갸륵하게 여겨 비를 세웠는데 이 비는 강릉 오죽헌 내에 있다.
첫댓글 이정순선생님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