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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환 열린 창을 넘어온 바람이 벽에 걸린 달력을 펄럭이며 봄이 왔음을 알린다. 하지만 TV에서는 한라산 눈꽃 소식, 대관령 눈길에서 비틀거리는 차량행렬을 보여준다. 집 앞 공원의 목련과 개나리 꽃잎은 떨어진지 여러 날이고, 벚나무까지 꽃망울을 터뜨렸지만 봄 향기를 느끼지 못하는 날씨다. 아무리 짧은 봄이라지만 감흥 없이 넘어가나 싶어 바라본 하늘은 미세먼지로 도배된 회색빛이다. 이렇게 봄이 지나는가 싶은데 삼국유사유적답사회 카페에 4월 답사계획이 올라왔다. 연이은 총무님의 답사일정을 알리는 메시지는 ‘비발디의 봄 2악장’을 들을 때처럼 닫혔던 가슴을 열어준다. 잃어버릴 것 같았던 봄을 확인하러 가는 날이다. 아름다운 블루로드 트레킹코스를 품고 있는 영덕지역이다. 봄 바다에 풍덩 빠지고 싶은 부푼 가슴의 답사회원들을 가득 태운 버스는 첫 답사지인 신돌석 장군 유적지에 멈췄다. 일제가 단발령을 내렸을 때 의병을 결성하여 항쟁에 앞장섰던 장군의 항일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역사교육의 전당이다. 이어 조선조 목은 이색이 태어난 괴시리 전통마을을 찾았다. 봄 내음이 가득한 맛난 점심을 든 다음에는 신라 자장율사가 창건한 유금사에 들러 나옹스님과 자장율사의 행적을 살피고 나니 주지스님이 손수 감로차를 끓여주신다. 다음 도착한 곳은 어질고 인자한 현인(賢人)들이 많이 배출되어 인양리(仁良里)라 부르는 전통마을이다. 마을 앞길까지 나와 계시던 이장님이 일행을 반갑게 맞아 마을로 안내한다. 먼 길 찾은 일행에게 선조부터 이어져 내려온 마을의 자랑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여기저기 돌아보고 되돌아 나오며 길섶의 고사리 밭으로 들어가더니 한 뼘쯤 자란 고사리를 뜯어 보인다. 이를 본 몇몇 회원들도 고사리를 채취하려고 봄 속으로 들어갔다. 밭 언저리에 돋아난 고사리 순을 본 순간 나의 머릿속은 헤아리기 가마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해 봄, 5학년 같은 반이 된 우리는 운동장에 한 줄로 늘어섰다. 자그마한 키에 턱수염이 더부룩한 새로운 담임선생님은 우리의 키를 비교하며 앞뒤로 자리를 바꿔 세우고는 앞에서부터 차례로 번호를 외치게 했다. 외친 순번이 일 년 동안 각자가 사용할 번호다. 교실에 들어가 나의 자리를 찾아 가방을 풀며 곁에 앉은 아이와 마주보며 알은체하였다. 옆자리 친구는 머리 모양새부터 우리와는 달랐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대다수의 우리는 머리를 빡빡 깎았다. 그런데 곁의 아이는 곱상하게 기른 머리칼이었다. 부잣집 아이답게 뽀얗고 윤기 나는 얼굴, 검정교복에는 흰 칼라를 덧붙였다. 나는 괜스레 어깨가 움츠려 들었다. 점심시간에 그 아이가 여는 속이 흰 도시락은 나를 더욱 주눅 들게 하였다. 시커먼 보리밥으로 채워진 나의 도시락 뚜껑을 차마 열지 못했다. 배가 고파 밥을 먹지 않을 수가 없으니 한 숟갈 뜨고는 뚜껑을 닫으며 눈칫밥을 먹었다. 게다가 습자 시간에 쓴 붓글씨는 그 아이의 얼굴처럼 반듯했다. 교실 뒤 벽은 그 아이가 쓴 글씨로 채워졌고 우리 반 모두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6학년이 되어 우리는 다른 반으로 갈라져 더 이상 만난 적이 없었고 나는 그 아이를 말끔히 잊어버렸다. 헤어져 각자 나름의 길을 걸었던 어릴 적 친구들이 하나둘 만났다. 모두들 밤을 낮 삼아 지내느라 머리엔 서리가 내렸고 이마에는 골 깊은 주름을 군대시절 계급장처럼 자랑스레 달고 있었다.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느니 어쩌니 하면서 새로운 모임을 만들었다. 모임이 만들어지고 만나는 횟수가 잦아짐에 따라 필요한 게 하나씩 늘어갔다. 인터넷 세상이 되다보니 남들 다 하는 카페도 만들었다. 사이버 공간에는 세상의 여러 가지 볼거리들이 올려졌다. 잊고 지냈던 친구들의 삶을 엮은 이야기도 있고, 오래된 졸업앨범에서 골라낸 사진도 있었다. 앨범을 한참 들여다보던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옆자리에 앉았던 아이의 얼굴을 발견하였다. 늦깎이 친구와 만난 술자리에서는 지난날의 이야기가 우리들의 안주거리였다. 여러 차례 만나며 우리의 대화는 차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초등학교 시절 앨범이야기를 끄집어내었다. 공교롭게도 늦깎이 친구는 나의 초등학교 시절 옆자리에 앉았던 아이의 시골마을 친구였다. 술잔이 몇 순배 돌아 얼큰해지자 친구는 어릴 적 사연 들어있는 먼지 쌓인 보자기를 풀었다. 예전, 시골에 살았을 때 집에서 방앗간을 하였고 집 근처 논과 밭을 많이 소유한 부잣집이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노름꾼에게 속아 방앗간과 많은 땅을 잃어버렸다고 하였다. 돈을 따간 사람이 앨범 속 시골친구의 아버지라고…. 몇 잔 마신 술 탓으로 미루기는 일렀지만 나의 머릿속은 어지러워졌다. 큰돈을 움켜쥔 아버지를 따라 그의 가족들은 야반도주하듯 대구로 나와 정착하였고, 학교도 전학하여 1년 동안 나의 짝이 된 것이었다. 봄이 한창이던 날 친구는 나를 불러내어 그의 고향마을로 향했다. 그리고는 그의 기막힌 사연을 간직한 시골 방앗간 뒤편의 작은 밭으로 내 손을 이끌었다. 친구 아버지가 미처 탕진하지 못하고 자식에게 남겨진 손바닥만 한 밭이었다. 그곳에는 고사리 순이 지천으로 올라와 있었다. 친구는 비닐봉지와 헌 면장갑 한 짝을 나에게 건네며 고사리 뜯는 요령을 알려주었다. 만감이 교차하고 엉킨 실타래 같은 마음을 억지로 가누며 고사리 새순을 꺾었다. 갓난아이의 오므려진 손 같아 하나하나 꺾기가 애처로웠다. 고개 숙여 고사리를 꺾다 보니 흐르는 땀이 눈앞을 가렸다. 엔간하다 싶어 고만 뜯자 하니 잠시 쉬자며 나무그늘로 안내했다. 담배를 꺼내는 친구에게 한 대 달라고 하였다. 몇 해 전 끊은 담배였지만 마음 삭일 요령으로 담배를 피웠으나 재채기만 튀어나왔다. 다시 밭으로 들어가 커다란 비닐봉지에 고사리를 가득 채웠다. 밭에서 나온 친구는 자동차 트렁크를 열더니 비닐봉지 하나를 꺼내었다. 그리고는 자기가 뜯은 고사리의 반을 덜어서 비닐봉지에 담아 나에게 내민다. 한사코 사양했으나 친구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차를 타고 되돌아 처음 만났던 곳까지 와서 나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 차창 너머의 친구는 내가 자리 잡은 것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집 방향으로 곧장 나아갔다. 자신의 고사리를 덜어주는 작은 온정이었지만 나의 가슴에 큼직한 우정을 가득 채워놓고 친구는 멀어져갔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친구가 가르쳐준 고사리 삶아 말리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생고사리를 처음 보는 아내는 삶느라 애를 쓰면서도 신기해하였다. 며칠이 지났다. 아파트 베란다에 널어놓은 고사리는 본래의 색깔을 잃어버렸고 한 아름이던 게 한 움큼으로 변했다. 손에 쥔 고사리가 좁은 어깨의 친구 얼굴로 오버랩 되며 ‘측은지심’이 일어난다. |
첫댓글 순간순간의 정경이 마치 잠자리의 날개짓 처럼 애잔하게 펼쳐져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파정 선생님.
좋은 작품 고멉습니다.
흔적 7집 회원 문단에 싣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