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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다오 2 - 칭다오에 옛날 독일 총독부 청사를 구경하고는 버스로 중산로에 가다!
2025년 9월 11일 산둥성 발해만의 도시 옌타이역에서 기차를 타려는데 후배가 새로 받은 신형
여권에는 여권 번호 8자리 중에 하나는 알파벳으로 바뀌었으니 B 인데 휴대폰 트립닷컴
앱에서 기차표를 예매할 때 “8” 로 잘못 입력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기차를 못탈뻔 했습니다.
30분 가까이 역 직원과 실랑이를 했는데..... 다른 직원이 달려오고 여기 저기 전화를 하더니
후배의 여권 번호 중에서 B 대신에 우리가 잘못 입력한 8 을 키보드에서 치니 비로소
중국 기차 전산망에 후배 이름이 뜨는지라 자기들도 참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통과시켜 줍니다.
칭다오 공항에서 지난(제남) 가는 기차를 탈 때도 중국 공안이 제지하는지라 기차를 못탈번 했고 지난에서
옌타이에 올때와 이번등 3차례나 가슴이 철렁했으니 귀국후 외교부에 건의했는데, 여권 번호를
배분하는 프로그램에 영어 B 와 O, 그리고 I 등 세 글자는 8, 0, 1로 오해할수 있으니 빼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행정안전부에도 건의하고 싶은게..... 저 프로그램에서 B 와 O, 그리고 I 등 세 글자를 뺄수 없다면
각 구청에서 신형 여권을 내 줄때 시민들이 찾으러 오면 당신 여권에 B 자는 8로 오해하수 있으니 주의
하라는 안내를 해 주면 좋겠는데, 이 모두가 상대 소비자의 마음을 생각하는 마인드가 없기 때문인가 합니다?
아니면 여권에 사용하는 "글자체" 라도 저 알파벳과 숫자가 확연히 구별되는 글자체로 바꾸면 좋겠으니 역지사지
하는 마음 가짐이 있으면 좋겠는데....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니 KBS 에서 실시한 6.25 전쟁후 30년이나
지나 방영한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도 단 50분 1회성 행사로 계획했다가.... 폭발적인 반응에 놀란 KBS 는
황급히 방송을 연장하자 여자 아나운서는 7~8시간을 연속하니 화장실 갈 시간이 없는지라 옷에 오줌을 지렸다는?
KBS 가족 찾기 방송은 1983년 6월 30일로 전쟁 23주년에 즈음해 1회성, 1시간도 안되는 기획기사 였는데
텔레비젼 첫 방송이 1961년 12월 31일이니.... 23년간 언론인과 교수, 정치인과 시민단체 어느 누구도
이산 가족의 아픔을 헤아린 사람이 없었고, 김학순 할머니 종군 위안부 첫 기사도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
기자 우에무라 다카시가 1991년 8월 11일 아사히 신문에 처음 보도했으니, 수년간 취재하러 다녔다고 합니다.
옌타이(연대) 역에서 09시 14분에 출발한 고속철 (高速动车) 기차는 도중에 한번도 쉬지 않고 남쪽
으로 달리는 직행으로 1시간 38 분 후인 10시 52분에 칭다오 북역 (靑岛 北站) 에 도착
하는지라 내려 옆 지하철역에 가서는 기계에서 휴대폰 알리페이 앱으로 표를 구매해 3호선을 탑니다.
40분후 5.4광장역 (五四廣場站) 에 내려서 북쪽 B1 출구로 나와 북쪽으로 10분을 걸어서 칭다오
푸신대하 (青岛 府新大厦) 호텔에 체크인후 나와서 디하철을 타러 가다가 도중에 버스
정류소에서 25번 버스 노선을 보니 인민광장역에 가는지라 타는데 2위안을 요금함에 넣으면 됩니다.
도중에 중국인이 옛 독일 총독부인 키이아우초 (胶澳总督府旧址) 는 다음 정거장인 칭다오루
(청도로) 정류소에 내리라고 일러주는지라...... 내려서는 도로를 건너
공원 같은 곳을 지나 다시 계단을 올라가니 언덕에 유럽 바로크풍의 웅장한 건물이 나타납니다.
여긴 서양식으로 웨딩 사진을 찍는 신랑신부가 무려 세쌍이나 보여 놀라는데, 독일 제국이 1898년 부터 1914년
까지 청나라로 부터 산둥반도 이남을 임차받아 통치한 조차지로 독일 제국 해군 아시아 전단의
본거지인데 '키아우초우 (Kiautschou)' 란 만(灣) 이름인 '자오저우 (Jiāozhōu 膠州 교주)' 를 옮긴 것이랍니다.
이는 발음 '갸오저우' 에 유래를 두는데, 당시 중국어는 연구개음 (ㄱ계 자음)의 구개음화 가 완전히
정착하지 않아 '膠 [jiāo]' 의 발음이 '자오 (←쟈오)' 가 아니라 여전히 '갸오' 에 가까웠답니다.
'tschou' 는 한어 병음 'zhou', 웨이드-자일스 표기 'chou' 의 독일식 표기라고 하는데 우리 한국
은 '자오저우만' 을 한국 한자음으로 읽은 '교주만 (膠州灣)' 이라는 표기를 쓰고 있습니다.
영국의 홍콩이나 포르투갈의 마카오처럼 본래 독일 제국은 청으로부터 교주만을
99년, 즉 1997년까지 임차하기로 계약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칭다오 전투로 일본, 영국에 함락 되고 전후 중국에 반환되면서 무산 되었습니다.
다만 아주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독일식 건축이나 문화의 흔적을 여전히 찾아
볼 수 있는데.... 독일 자본과 설비로 탄생한 칭따오 맥주가 대표적 입니다.
19세기 중엽에 독일 제국은 서양 열강들 처럼 식민지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그러나
이탈리아 처럼 국가의 통일이 늦은지라 뒤늦게 시작하다 보니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아시아등 대부분의 지역들은 기존의 열강들이 이미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난감해진 독일 제국은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간신히 아프리카에서 탄자니아를 얻은 다음에
아시아 에서 그나마 침투할만한 곳을 몰색하던 독일 제국은 산동성의 키아우초우 를
발견했는데 키아우초우는 청나라 영토로 낙후된 지역이라 서구 열강들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1888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추진한 '신노선 정책 (Neuer Kurs)' 에
따라.... 독일 제국은 팽창주의적 외교노선을 표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니까 1890년이 되면 식민지 정책에 온건적이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퇴임하고, 본격적으로
세계 정책을 실현하기 시작해 기존의 전통적인 육군 중심에서 해군 중심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독일 제국의 해군력은 대영제국의 대함대 (The Grand Fleet) 보다 열세라 독일 제국은 순양함대를
중심으로 적국의 통상로를 차단하고자 했으니 순양함에 석탄을 공급하기 위한 해군기지가 절시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인들은 깊은 고민 없이 한미 동맹이 6.25 전쟁을 통해 피로써 맺어졌으니
당연히 미일 동맹 보다는 훨씬 강하고 단단하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큰 착각 입니다?
석유가 보편화 되기 이전에 등불과 공장의 기계에는 고래기름을 사용했는데 대서양에서
남획으로 씨가 마르자 포경선들은 태평양으로 진출하는데 워낙
거리가 멀고 몇 달씩 조업하다 보니 석탄과 식수며 식량등을 공급할 항구가 필요했습니다.
게다가 미국도 영국과 프랑스 등이 이미 선점한 중국 시장에 뒤늦게야 뛰어
들었는데.... 하와이에서 태평양으로 배를 보내면 중국에 도착하기
전인 일본 근처에 오면 석탄이 떨어져 버리니 "보급 항구" 가 절실했습니다.
해서 1853년에 일본에 온 페리 제독은 미국에서 출발해 대서양을 건너 아프리카를 돌아
희망봉을 지나 다시 인도양을 건너 말래카해협을 지나 베트남을 지나서
북상해 필리핀을 지나고 대만을 거쳐 일본 규슈를 통과하여 도쿄만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만약에 일본에서 보급항을 구할수 있다면 하와이에서 태평양을 지나 바로 올수 있으니 페리제독은
다음해 1854년에 다시 도쿄만에 나타나 항구도시 도쿄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협박해서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중국으로 가는 요코하마와폭여선 보급항 홋카이도 하코다테를 얻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본의 항구는 미국이 전쟁을 해서라도 반드시 얻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임무이지만, 1871년 신미
양요때 강화도를 침공해 조선군을 박살내고는 개항을 얻지 못하고 돌아간 것은 조선의 서울의 깊숙한
오지에 위치한지라..... 개항하면 좋지만 안해도 일본 항구로도 충분하니 궂이 불편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2차대전때 일본이 항공모함으로 하와이를 기습 폭격하고 미국땅 미드웨이를 점령하려 했으며 일본 잠수함
이 캘리포니아에 출몰하니 미국은 불안에 떨었던지라 미국의 안보를 위해 "태평양 바다를 미국의 내해"
로 만들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미일 동맹이 절실하니 미국에서는 한미동맹 보다 10배는 더 중요합니다!
실제로 러시아가 고종의 조선 조정에 부산의 영도에 석탄의 보급을 위한 저탄장을 확보하자, 인도를 노리는
러시아를 아프가니스탄에서 저지했듯 또 영일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진을 막던 영국은 조선
의 거문도를 무력으로 점령했는데...... 문제는 몇 달이 지나도 조선 조정은 이런 점령된 자체도 몰랐습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중국에서 보급항을 확보하기 위해 청일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청나라에서
독일 해군 소장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은 1896년 부터 1897년 까지 두차례
탐사후, 석탄 매장량과 철도 건설 및 자원 개발의 가능성이 높은 자오저우를 최적지로 선정합니다.
이때 하늘이 내린 기회가 찾아왔으니 1897년 11월 1일 마반장촌에서 다다오회 (大刀會) 의 반양교
운동 중에.... 독일인 선교사 2명이 피살당한 거야 교안 (巨野敎案) 사건이 타지게 됩니다!
살해당한 선교사는 프란츠 크사버 니츠 (Franz Xaver Niez) 와 리하르트 헨레 (Richard Henle)
였으며.... 독일 제국은 "하늘이 내려준 이 사건" 을 빌미로 삼아 청나라를 침략하기 시작합니다.
1897년 11월 7일 상하이에 주둔중인 독일제국 함대 사령관은 독일 황제로 부터 순양함 4척을 이끌고 키아우초우
를 점령하라는 지시를 받고, 11월 14일 도착해 군사훈련을 구실로 해군 600명을 상륙시며 청나라 군대를
창커우 까지 퇴각시켰으며 12월 17일까지 청나라 군대는 독일 해군에 의해 키아우초우에서 완전히 축출됩니다.
이후 독일 제국은 청나라 정부와 교섭하여 '중국- 독일 오조계조약 (中德膠澳租界條約)' 을
체결하여 키아우초우 (칭다오) 를 99년 동안 조차하게 되었으며
조약에 근거해 독일 제국은 칭다오에 거치지 않고 산둥반도 거의 전체를 통제할수 있게 됩니다.
1898년 4월 27일 빌헬름 2세는 키아우초우 지역을 보호령으로 지정한다는 칙령을 반포하고 독일 원동함대
사령관이 키아우초우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독일 해군청이 통치하였는데 독일 외무부 통제하에
있었던 식민지와는 다르니 이는 프랑스가 알제리는 식민지가 아니라 프랑스의 일부라고 생각한 것과 같습니다.
독일제국은 1899년 6월부터 측량을 개시, 동년 9월 23일 자오지 철도(膠濟鐵道) 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니 독일
은행단의 독점 투자기관인 덕화철로공사 (德華鐵路公司) 가 건설하였는데, 1901년 4월 9일 칭다오 -
자오저우 구간이 완공돼 1902년 6월 1일 웨이현 (濰縣) 까지 개통되니 전광석화는 이런걸 두고 하는 말입니다?
1904년 6월 1일, 1896년에 체결된 조계조약에 근거하여 건설하던 선로가 모두 개통 되어 자오지 철도에
의해 독일 제국은 산둥 반도 내부까지 진출할 수 있었고 1913년에는 독일이 철도의 연장선
권리도 얻었으나....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일본 제국이 키아우초우를 점령하면서 무산됩니다.
독일 제국이 키아우초우를 점령한 뒤의 통치는 전체적으로 강압적이었으니 총독부는 유럽인 거주지역
과 중국인 거주지역을 엄격히 분리했으며, 유럽인 거주지역이 식민 통치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시기 1914년 일본 제국이 점령하면서 종료되니 일제는 이곳을 지배하다가 1922년
워싱턴 회의의 결과에 따라 중국으로 반환해 중화민국 칭다오 시청으로 활용했으나 1938년
일본군이 재점련해 1945년까지 점유했고 1949년 이래 1992년까지는 칭다오시 인민정부 청사로 쓰였습니다.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후 경복궁 일부를 헐고 건설한 조선 총독부는
2차대전후 미군정청으로 사용됐고 1948년 이후 이승만 정부의 중앙청사로 사용된 것과 비슷합니다.
김영삼 정부가 중앙청을 허무는 과정에 대한민국 국무회의가 열리던 청사 원형 천장에 일본 건국신 이자나기와
이자나미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수십년간 누구도 이런 사실을 몰랐으며, 조선 총독이 명당을 선정해
건설한 조선 총독부는 그후 하지 중장의 관사로 이승만 정부의 경무대를 거쳐 청와대로 바뀌어 현재에 이릅니다.
'키아우초우 (Kiautschou)' 는 독일이 칭다오를 일컫던 '교오' 란 이름을 붙여 1906년 독일 총독부로 사용
하기 위해 지은 곳인데 일본이 침공해 1914년부터 약 30년간 일본의 침략 과정에서 수차례 탈취당했습니다.
키아우초우는 일본이 망한 1949년에 칭다오 해방후 칭다오시 인민 정부로 사용되었으며 1996년에 국가급
의 문화유산에 제정 되는 '전국중점문물 보호단위' 로 지정된후 현재는 중국인민
정치협상회의 (CPPCC) 사무실로 사용중이니 직원이 정문을 기웃거리는 내게 멀리 가라고 손을 내젓습니다.
붉은색 벽돌 지붕과 좌우 대칭 구조가 특징적인 곳으로, 칭다오에 남아 있는 가장 큰 규모
의 유럽풍 건축물인데..... 정부 기관으로 사용 중이기 때문에 일반인은 출입이
제한되지만, 건물을 배경으로 예쁜 기념사진을 남길수 있어 가볍게 둘러보기 좋습니다.
1999년 박물관으로 전환되어 공개되었는데, 출발점에 해당하는 칭다오역은 독일 조계지 시대의 상징이며
시계탑이 솟아있는 역사는 유럽 자취가 가득하며 여기서 부터 별장지대인 바다관 八大關 (팔대관)
사이에는 진차오빈관이나 옛 시정부, 기독교회, 천주교회, 칭다오시 박물관, 칭다오 영빈관등이 서 있습니다.
그러고는 걸어서 중산로에 도착하는데....... 여기 거리는 차가 다니지 않는
유럽풍 (독일) 오래된 옛 건물들이 늘어선 참 고풍스러운 거리 입니다.
저 언덕 위에는 독일 교회가 있고 쭉 내려오면 쇼핑 가게와 카페에 레스토랑과 식당들이 밀집해
있으며 사진들도 많이 전시되어 있고 아래쪽은 바닷가로 잔차오 棧橋 (잔교) 입니다.
오늘 옌타이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먹은게 하나도 없으니 배가 고픈지라 몇몇 식당 외관을
살펴서는 한곳으로 들어가서 조개 등 해산물 요리에 돼지고기인 듯 한 육고기를
시키니 요리는 먹을만 한데...... 주인은 한국인들이 많이 오는지 한국말을 몇마디는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