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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에 한수행 하려면
“괴로움을 보는 자만이 열반을 볼 수 있다.” 니까야강독모임에서 전재성박사가 한말입니다. 괴로움에 대하여 철저하게 아는 자만이 지혜가 열려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탐욕적 성향이 강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성격이 급해서 성냄의 성향이 강합니다. 지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떤 이는 예리한 지혜를 가지고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둔중합니다.
지혜를 갖춘 자만이
청정도론에 따르면 지혜를 갖춘 자만이 이 생에서 도(magga)와 과(phala)를 이룰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청정도론을 펼치면 제1장 제1절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Sīle patiṭṭhāya naro sapañño
cittaṃ paññañca bhāvayaṃ,
Ātāpi nipako bhikkhu
so imaṃ vijaṭaye jaṭanti.
“지혜로운 사람은 계행에 정초하여
마음과 지혜를 닦는다.
열심히 노력하고 슬기로운 수행승이라면,
이 얽힌 매듭을 풀 수 있으리라.”(Vism.1.1)
이 게송은 상윳따니까야 ‘매듭의 경(S1.23)’과도 병행합니다. 붓다고사가 청정도론을 편집할 때 이 게송을 첫머리에 언급한 것은 계, 정, 혜 삼학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석을 보면 “사람이 땅 위에 서서 잘 드는 날카로운 칼로 대나무가 엉킨 것을 잘라내듯, 수행승은 계행 위에 서서 집중의 돌로 잘 갈아진 통찰적 지혜라는 칼을 잡고, 정진의 힘에 의해 발휘된 실천적 지혜의 손으로, 갈애의 얽힘을 자르고 부수어 버린다.”(Srp.I.50)라고 했습니다.
‘매듭의 경’에 실려 있는 게송은 청정도론에서 대단원의 마무리에서도 나옵니다. 총 2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방대한 청정도론에서 마무리 게송 모두에 다시 한번 게송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이 게송에서 계, 정, 혜 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계, 정, 혜 삼학은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는 것일까?
지혜는 타고난 것
대승불교에서는 불성이 있다고 합니다. 불성이 있어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어서 대승열반경에서는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청정도론에서 계, 정, 혜 삼학은 타고난 것이라 합니다. 후천적으로 얻어지기 보다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임을 말합니다.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알 수 있습니다.
“‘계행에 정초한다.’라는 것은 ‘계행에 입각하고’라는 뜻이다. 계행을 원만히 충족시킨 자만이 여기서 계행에 입각한 자이다. 그러므로 ‘계행을 원만히 충족시킴으로써 계행에 입각하고’라는 뜻을 가진다. ‘사람’은 뭇삶을 뜻한다. ‘지혜를 갖춘 자’는 행위에서 생겨난 세 가지 원인으로 결생한 지혜에 의해서 지혜를 갖춘자이다.”(Vism.1.7)
게송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빠알리어 ‘naro sapañño’를 번역한 것입니다. 빠알리 나로(naro)는 ‘a man’의 뜻으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보통사람이 아닙니다. ‘지혜를 갖춘 자’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를 갖춘 자’의 뜻을 가진 빠알리어가 ‘사빤냐(sapañña)’입니다. 이를 ‘유지혜자(有智慧者)’ 또는 ‘구유지혜자(具有智慧者)’라 합니다. 그래서 ‘naro sapañño’는 ‘지혜를 갖춘 자’의 뜻이 됩니다.
세 가지 원인을 갖춘 자
지혜를 갖춘 자는 태어날 때 부터 지혜를 갖춘 자입니다. 이를 생이지자(生而知者)라 볼 수 있습니다. 학습을 통하여 앎이 생겨나는 학이지자(學而知者)와 다른 것입니다. 이는 전생의 수행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주석에서는 ‘세 가지 원인으로 결생한 지혜’라 했습니다. 세 가지 원인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탐욕을 여읨, 성냄을 여읨, 어리석음을 여읨의 세 가지 원인이 있는 선업의 과보로서 생겨난 세 가지 원인이 있는 이숙식(異熟識)인데, 존재지속의 고리(有分: bhavaṅga)의 흐름속으로 가라 앉았다가 언제든지 그것에 조건지어지고 항상 일치하는 존재지속의 고리를 계기를 통해서 나타난다.”(Vism.1.7, 각주)
세 가지 원인을 한자어로 표현하면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癡)입니다. 전생에 이 세 가지를 목표로 수행한 자만이 세 가지 원인으로 태어남을 말합니다. 무탐, 무진, 무치 수행한 자가 이번 생에 지혜를 갖추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게송을 보면 지혜가 세 번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지혜로운(sapañño), 지혜를(pañña), 슬기로운(nipako)로 표현 되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첫 번째 ‘지혜로운(sapañño)’이라는 말은 ‘생득적 지혜’를 말합니다. 두 번째인 ‘지혜를(pañña)’이라는 말은 통찰적 지혜를 말하는데 ‘위빠사나 지혜’를 뜻합니다. 세 번째인 ‘슬기로운(nipako)’이라는 말은 일체의 해야 할 일을 선도하는 ‘획득적 지혜’를 말합니다. 이와 같이 세 가지 지혜가 갖추어져 있을 때 엉킨 매듭을 풀 수 있다고 했습니다.
누가 이 매듭을 풀 것인가?
무명과 갈애로 엉킨 매듭을 풀 수 있는 자가 빅쿠입니다. 이와 같은 빅쿠에 대하여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까닭에 빅쿠(saṃsāre bhayam ikkhati bhikkhu)”라 했습니다. 매사에 사소한 행위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보는 자, 즉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만이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를 들어 남자가 땅 위에 서서 잘 드는 칼을 들어서 커다란 대나무 덤불을 잘라내는 것처럼, 이와 같이 계행의 땅에 입각해서 선정의 돌로 연마된 통찰의 지혜라는 칼을 정진력으로 책려된 획득적 지혜의 손으로 움켜잡고 일체의 상속 중에 생겨난 갈애의 결박을 풀고 절단하고 파괴해야 한다. 길(道: magga)의 찰나에 그는 결박을 벗어나고, 경지(果: phala)의 찰나에 그는 결박을 벗어난 자가 되어 신들을 포함한 세상에서 최상의 공양받을 만한 님이 된다.”(Vism.1.7)
이것이 빅쿠가 금생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 빅쿠에게 지혜는 이미 갖추어져있습니다. 지혜를 갖춘 자(sapañño)이기 때문에 이번 생에서 수행정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그에게 해야 할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숙업의 힘에 의해서 그에게 이미 성취되어 있기 때문이다.”(Vism.1.8)라 했습니다. 이 말은 대승열반경에서 말하는 ‘일체중생실유불성’과 대비 되는 말입니다. 이전 생에 무탐, 무진, 무치 수행을 한자가 이 세 가지 원인을 갖추고 결생한 자만이 이 생에서 엉킨 매듭을 마치 무사가 단칼에 베어 버리듯이 무명과 갈애를 끊어 버릴 수 있음을 말합니다.
아라한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자
지혜를 갖추고 태어난 자는 전생에 수행을 하던 자입니다. 무탐, 무진, 무치라는 세 가지 원인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타고난 지혜를 갖춘 자, 생이지자라 합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원인을 가지고 태어난 자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파아옥 사야도의 법문집 ‘업과 윤회’에서도 실려 있습니다. 먼저 금생에서 아라한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자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다음과 같이 ‘나는 더 이상 태어나고 싶지 않아! 나는 붓다의 진정한 제자가 되고 싶어!’라고 생각한다고 해보자. 그리고 우리는 금생에 아라한이 되기를 바라면서 수행을 한다. 그러나 다시 태어남을 끝내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바라밀, 특히 지혜(pañña) 바라밀에 의존한다. 우리가 과거-생에 얼마나 많은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닦았느냐? 만약 과거-생에 충분히 지혜를 개발했다면 금생에 정말로 아라한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우리는 더 이상 태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아라한이 되고자 수행한다. 그러나 우리의 지혜는 심오하지 않고, 아라한이 되고픈 열망이 사실은 그렇게 강하지 않다. 아직도 존재하고픈 욕망(bhava-taṇhā)이 잠재되어 있다. 존재로 남고 싶은 갈애가 잠재되어 있다. 오로지 아라한도의 지혜(Arahatta-Magga-ñāṇa)만이 무명에 얽힌 존재하고픈 갈애를 남김없이 파괴한다.”(업과 윤회 96-97쪽, 파아옥 사야도)
불교를 믿는 목적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행복 평화 등을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근본 가르침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이 불교수행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라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존재에 대한 갈애(bhava-taṇhā) 때문이라 합니다.
무탐, 무진, 무치의 수행을 해야
세세생생 존재하고픈 갈애가 있는 한 불교수행의 목적은 달성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대로 무탐, 무진, 무치 수행을 하는 자는 아라한이 되어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경지에 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탐, 무진, 무치의 수행을 해야 합니다.
무탐, 무진, 무치의 수행을 하다 죽은 자는 다음 생에 이 세 가지 원인을 조건으로 태어납니다. 선천적으로 지혜를 갖추고 태어난 자(sapañña)라 합니다. 선천적으로 지혜를 갖추고 태어난 자가 수행을 합니다. 지혜를 갖추고 태어나지 않은 자는 수행을 할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잘 설해져 있습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는 수 많은 수행센터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무관심합니다. 설령 관심을 보였더라도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혜가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무탐, 무진, 무치라는 세 가지 원인 중에 무치라는 한 가지 원인이 결여 되어 무탐과 무진이라는 두 가지 원인을 가지고 태어난 자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금생에 수행도 할 수 없을 뿐더러 선정에 들 수도 없음을 말합니다.
원하는 때 언제든지 가질 수 있는 것
삼월 두 번째 니까야강독모임에서는 ‘베나가뿌라의 경(A3.63)’을 독송했습니다. 꽤 긴 길이의 경입니다. 하늘사람(dibba)의 높고 큰 침대, 하느님(brahma)의 높고 큰 침대, 고귀한 님(ariya)의 높고 큰 침대 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하늘사람의 침대는 네 가지 선정에 대한 것이고, 하느님의 침대는 사무량심에 대한 것이고, 고구한 님의 침대는 무탐 무진 무치에 대한 것입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수승한 것이 고귀한 님의 침대입니다. 고귀한 님의 침대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나는 그곳에 있는 풀이나 나뭇가지를 한곳에 모아 그 위에 앉아 결가부좌하여 몸을 바로 세우고 앞으로 새김을 확립하고는, 이와 같이 ‘나에게 탐욕은 버려지고, 뿌리째 뽑히고, 종려나무 그루터기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는다. 나에게 성냄은 버려지고, 뿌리째 뽑히고, 종려나무 그루터기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는다. 나에게 어리석음은 버려지고, 뿌리째 뽑히고, 종려나무 그루터기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압니다.”(A3.63)
네 가지 선정을 닦아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것보다, 네 가지 무량한 마음을 닦아 범천에 태어나는 것 보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소멸하여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수승함을 말합니다.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이 궁극적 목적임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탐, 무진, 무치의 수행을 해야 할 것입니다.
탐, 진, 치를 소멸한 거룩한 님의 일상은 유여열반상태입니다. 거닐거나,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 있거나 일상이 열반입니다. 특히 누워 있는 것에 대하여 “그 때에 나의 누워 있음은 고귀한 님의 높고 큰 침대입니다.”(A3.63)라 했습니다. 그 침대에 대하여 ‘지금 원하는 대로 얻되 힘들이지 않게 얻고, 어려움 없이 얻는 것’이라 했습니다.
원하는 때 언제든지 가질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것과 같습니다. 원하는 때 선정에 든다면 자신 안에 ‘보석’을 가진 것과 같습니다. 원하는 때에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원하는 때에 힘들이지 않고 열반에 든다는 것은 고귀한 님들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탐, 무진, 무치의 수행자들이 가능합니다.
괴로움을 철저하게 알아야 지혜가 열린다
“괴로움을 보는 자만이 열반을 볼 수 있다.”이 말은 전성박사가 니까야강독모임에서 한 말입니다. 이 말은 사성제에서 괴로움을 꿰뚫어 보는 자는 나머지 세 가지 즉, 집성제와 멸성제, 도성제도 꿰뚫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에서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발생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도 본다.” (S56.30)라는 가르침을 근거로 합니다.
괴로움을 철저하게 아는 자만이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문제를 풀려면 문제가 무엇인지 먼저 파악이 되어야 하듯이, 지금 당면한 괴로운 문제를 해결하려면 괴로움의 본질을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이것이 고성제입니다.
초전법륜경에서 고성제는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S56.11)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전재성박사는 괴로움을 철저하게 안다는 것은 일체가 괴로움인 것을 아는 것이라 했습니다. 또 “괴로움을 철저하게 알아야 지혜가 열린다.”라 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아라한의 수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행고성’이라 볼 수 있습니다.
디가니까야 ‘합송의 경(D33)’에 “세 가지 괴로움, 곧, 고통의 괴로움, 형성의 괴로움, 변화의 괴로움이 있습니다.”(D33)라 했습니다. 본래 괴로워서 괴로운 것인 ‘고고성’이 있고, 변화하기 때문에 불만족해서 괴로운 ‘괴고성’이 있습니다. 가장 이해 하기 어려운 것이 형성의 괴로움, 즉 ‘행고성’입니다. 괴로움의 자성이 없는 조건지어진 것의 괴로움을 말합니다. 아라한의 괴로움이라고도 합니다.
즐겁다고 하는 것을 괴로운 것으로 보아야
행고성을 알면 일체가 괴로운 것임을 안다고 했습니다. 일체가 괴로운 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괴로움에 대한 지혜가 생기면 “즐거움도 괴롭다.”라고 아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 말은 상윳따니까야 ‘형상의 즐거움에 대한 경(S35.136)’에서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사실의 모든 것들
원하는 것, 사랑스런 것, 마음에 드는 것,
존재라고 하는 모든 것.
그것들은 하늘사람과 인간의 세상에서
즐거운 것이라 여겨지지만
그들이 소멸될 때가 되면
그들은 그것들을 괴로운 것이라 여기네.
개체가 소멸하는 것은
거룩한 님에게는 즐거운 것이라 여겨지지만
모든 세상을 통해 보이는 것은
거룩한 님에게 그와는 정반대가 되네.
다른 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괴롭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이 괴롭다고 말하는 것,
고귀한 님은 즐겁다고 하네.” (S35:136)
게송을 보면 부처님은 세상사람들의 삶과 반대로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에서 즐겁다고 하는 것은 현명한 자들에게 있어서는 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괴롭다고 말한다.”라 했습니다. 괴로움에 대하여 철저하게 아는 자들은 이렇게 봄을 말합니다.
하와이안 커피를 선물받고
전재성박사가 가족이 있는 하와이에 다녀 왔습니다. 가족 행사에 짧은 일정으로 참여하고 왔는데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하와이에서 생산된 커피입니다. 분쇄된 것으로 내려 마시는 커피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커피의 왕이라는 문구가 보입니다. 아라비카 원두를 세밀하게 갈아서 맛과 향이 풍부한 것이 특징이라 합니다.
커피를 내려서 마셔 보았습니다. 향과 맛이 문구 그대로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 같습니다. 강독모임을 하면서 이것 저것 먹거리를 가져 온다거나 차나 커피 등 선물을 받습니다. 무언가 주는 행위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가장 남는 것은 가르침입니다. 강독모임을 통하여 빠알리 삼장의 의미 있는 문구를 듣는 것이 가장 큰 선물일 것입니다.
이번 생에 한수행 하려면
삼월 두 번째 강독모임에서는 괴로움에 대하여 길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괴로움에 대하여 토론했습니다. 괴로움을 제대로 알면 지혜가 생겨난다는 것이 가장 큰 수확입니다. 그런데 지혜는 누구에게나 갖추어진 것이 아니라 숙업(熟業)에 따른 결과라는 것입니다.
과거생에 무탐, 무진, 무치 수행을 한 자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지혜가 갖추어집니다. 그렇다고 타고난 지혜가 문제를 다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게송에 따르면 ‘생득적 지혜(sapañña)’와 더불어 ‘통찰적 지혜(pañña)’와 ‘획득적 지혜(nipaka)’도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누구나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할 조건을 갖춘 자가 이 생에서 수행할 수 있고 선정에 들 수 있음을 말합니다. 전생에서 지혜수행을 한자가 이 생에서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생에서 수행하지 않는 자는 이 생에서 선정에 들 수 없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이는 법구경에서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Dhp.372)라는 말과 일치합니다.
이 생에서 한 수행하는 자들은 과거생에서 선정수행을 하던 자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생에서 선정수행하는 자는 다음 생에서도 지혜를 갖추고 태어나기 때문에 선정수행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런 말은 대승열반경에서 말하는 일체중생실유불성이라는 말과 배치됩니다. 그러나 엄연한 사실입니다.
수행은 수행에 관심 있는 자들이 수행합니다. 관심도 없는 자들은 수행하지 않습니다. 경전공부도 관심 있는 자들이 경전공부합니다. 관심없는 자들은 경전이 있는 줄 조차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가 수행을 하고 경전공부한다는 것은 과거생에 한수행 했던 수행자였음에 틀림 없습니다.
2018-03-2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