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부채처럼
이경희 (2022. 11.)
이른 더위에 깊숙이 넣어두었던 부채를 꺼냈다. 반원 모양인 접부채를 펼쳐 놓고 먼지를 털어냈다. 오래 사용한 탓일까, 부챗살이 많은 탓일까? 주름 사이로 깊숙이 숨어든 먼지는 꿈쩍 않는다. 이방인처럼 마음껏 펼쳐 보지 못하고 살아온 내 모습 같다.
드문드문 나뭇잎 문양이 그려진 한지로 만든 접부채는 몇 년 전, 수강생이 선물한 부채다. 강의하면서 유난스럽게 땀을 많이 흘리는 내가 안타까웠는지 부채 집에 이름까지 써넣어 선물해 주었다. 그 정성과 관심이 너무 소중해 아끼며 사용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부챗살은 탄력을 잃어가고, 주름 한지도 너덜거려 바람이 예전만 못해 안타까웠다.
포항이라는 도시에 정착해 산 지 어언 21년이다. 결혼하면서 포항에 자연스럽게 터전을 잡았다. 부산에서 태어나 30년의 긴 항해를 끝내고 마침내 포항이라는 항구에 닻을 내린 것이다. 부산과 포항이라는 항구도시만 전전하는 내가 묶인 배 같다는 생각은 가끔 든다. 같은 점이 있어 참 다행이다 싶다가도 이내 낯선 마음이 든다. 그래서인지 늘 조심성이 몸에 베어 있다.
하지만 천성이 사람을 좋아하는 탓에 인연 맺은 이들과 겉돌지 않고 잘 섞였다. 아이들과 남편이 곁에 있어 그 어떤 것들도 별반 생경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불안과 낯섦에 자꾸 몸과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텃세려니, 지역적인 다른 정서 탓이려니 하면서 자신을 다독였다. 접부채의 주름처럼 마음을 펼쳐내 보이지 못하고 안으로만 마음을 자꾸만 접어 넣었다.
나는 이곳에 온전히 정착한 배였던가, 닻을 잡아준 이는 있었던가, 불안했던 마음 탓이었는지 하루아침에 가장이 되었다. 아이들과 살아야 했다. 그때부터 나는 마음을 접는 법을 배웠다. 부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처럼, 자신을 억누르고 상대의 말을 수긍하며 따랐다. 내 생각과 달라도 개의치 않았다. 어렵사리 이어진 친분의 고리가 끊어질까 조바심 났다. 자칫 그들의 눈 밖에 나면 가차 없이 괄호 밖의 이방인으로 될까 두려웠다.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선뜻 다가가기 힘들었다. 살가운 마음도 정겨움을 나누지도 못했다. 그럴 때마다 상실감과 자괴감에 고통스러웠다. 언젠가는 제대로 펼칠 수 있으리라 희망하며 고통받은 마음을 접부채 주름 사이로 꼭꼭 접어 두었다.
설상가상으로 고등학생인 아들이 자퇴했다. 힘들게 잘 버티더니 졸업을 몇 달 앞두고 결단을 내리고 말았다. 음악을 하고 싶었던 아들을 형편 때문에 공고에 보냈으니 그 고통이 오죽했으랴, 아들의 방황이 내 탓이라 생각하니 죄책감은 더 옥죄어 왔다. 다행히 아들이 검정고시 준비를 하더니 대학에 들어가서 꿈을 펼칠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다. 묵묵히 곁을 지키던 딸아이도 모범생으로 공부에 전념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꼭꼭 눌러두었던 마음을 이제 펼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을 숨기기 위해 접어두었던 마음을 펴는 것도 내가 해야 할 일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마 아이들은 접고 또 접힌 엄마가 닫아버린 마음의 감옥 속에서 살고 있었으리라, 이제야 또렷이 보인다. 꿈을 가진 아이들은 다행히 너무도 맑고 투명했다.
때론 내 안의 마음 부채를 펼치기로 했다. 아픔도 고통도 이제는 한바탕 바람으로 날려 보내 버리기로 했다. 흩어져있다고 생각했던 인연의 고리를 조심스레 다시 엮어 나갔다.
모질게 마음먹고 눌러두었던 마음은 생각처럼 잘 펴지지 않았다. 지금 펴지 않으면 아이들은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는 나를 보지 못 할 것이다. 두려움을 이기고 마음의 부채를 활짝 펼치니 멀어졌던 인연들이 다가왔다. 따뜻한 정을 가진 이들이었다. 아낌없이 나누는 나무 같은 존재들이었다. 너무나 인간적이 그 모습이 참이었음을 알고는 코끝이 시큰했다. 이방인이라 생각하며 변두리에서 서성거렸고 지역을 탓하고 사람들을 탓하고. 나는 혼자고 그들이 문제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이제 접어두기만 했던 수많은 마음 부채를 꺼낸다. 먼지가 뒤덮이고 곰팡이가 쓸어 그동안의 아픔이 얼룩으로 남아 있었다. 탈탈 먼지를 털고 햇살 좋은 창가에 둬야겠다. 올여름 더위도 만만찮다는 일기예보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어떤 폭염도 기꺼이 이겨내리라, 아팠던 만큼 더 단단해졌을 부챗살을 믿어보리라, 바람 없는 세월을 잘 견뎌준 아들과 의지가 되었던 딸에게도 푸른 바람을 불어주리라, 나는 이제 아낌없는 푸른 바람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첫댓글 이경희 선생님.
2022년 11월 <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과 등단을 축하드립니다.
따뜻한 나날 되시길 빕니다.^^
남정언선생님.
따스한 선물같은 하루되셔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