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베트남화 정책에 의해서 미군의 철수는 계속되고 북베트남과 협상을 모색하고 있어 이제 남베트남의 운명은 스스로 해결해야 하였다.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도 끝까지 싸워 국가를 지키겠다는 국민들의 의지와 단합이 선결요건이며 이 같은 불굴의 전의를 가지고 전 국민이 단합할 수 있는 민족만이 나라를 지킬 수가 있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남베트남은 너무나 여러 갈래로 제각기 가고 있었다. 스스로 민족주의자임을 자칭하는 많은 인사들이 민족해방전선(NLF)에 가담하거나 동조하고 있었고 정치가, 불교도, 카톨릭 교도, 노동자, 학생 등의 사회 각 계층들은 그들대로 정치적, 사회적 불만을 표출하여 반정부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구정공세에서 남베트남은 승리를 쟁취하였고 이 승리를 잘 활용하였다면 승전을 할 수 있는 전기가 될 수도 있었으나 남베트남 국민들은 그렇지 못하였다.
이제 다시 사이공의 대학생들이 혼란을 주도하고 나섰다. 미국에서 대학생들이 반전운동을 주도하여 미국의 전의를 감소시키고 있었고 남베트남 대학생들은 격렬한 반정부 운동을 주도하여 혼란을 조성하였다.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에서 전쟁영웅이 없는 대신 국민들과 언론들의 격찬을 받는 반정부 운동을 주도하는 학생영웅들은 많았다.
매달 수천 명의 젊은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남베트남의 대학생들은 징집이 연기되어 상아탑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의 젊은이로서 국가의 가장 큰 특혜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그들도 국가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했다. 그들의 이론은 국가 존망의 기로에 서있는 나라의 대학생들이 이대로 학업만을 계속해서는 안 되고 나라를 망하게 하고 있는 독재정부를 타도하여 나라를 구하려는 노력에 개입할 도덕적 의무가 그들에게 있기 때문에 그들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학생들은 비밀리에 돌아다니는 공산주의 서적, 문학을 읽었고 호치민 전기도 읽었다. 미군이 본격 개입하면서 범람하기 시작한 PX물자가 사회를 타락시킨다고 생각하였고 사회의 부패상, 부조리, 빈부 격차 등의 문제가 토론되었다. 민족해방전선의 선전에 그들은 매료되어 동조하였다. 공개적으로 민족해방전선을 지지하는 학생도 늘어났다. 반공을 표방하는 학생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를 이용하여 북베트남 노동당 비밀당원 후인 탄 맘(Huynh Tan Mam, 사이공 의대 학생으로 남베트남 패망 후 북베트남 노동당 비밀당원으로 밝혀졌음)을 중심으로 하는 수명의 대학생, 민족해방전선에 정식 가입한 수명의 학생들이 교묘하게 학생운동을 조종하고 있었다. 그들의 정체는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후인 탄 맘
구정공세 이후 제정된 국민 총동원법에 의하여 사이공 정부가 범국민적 투쟁의 일환으로 대학생들을 학도호국단 같은 조직을 편성하려고 시도하자, 학원의 병영화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나 이 시도는 폐기되었다. 대학생들의 시위는 이제 발전하여 반정부 투쟁으로 발전되었다. 학생회 간부는 구속되고 징집영장도 발부되었다. 남베트남 정보기관에서 시위를 배후조종하는 맘을 구속하였다. 이들을 석방하라는 시위는 계속되었고 수업거부가 한 달씩 계속되었다. 남베트남 사법부는 학생들의 조국에 대한 의무는 유용한 시민이 되기 위해 학업에 열중하여야 한다는 다짐을 주고 모두 석방하였다. 그들은 환영 나온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학원으로 되돌아왔다. 그들은 민중의 영웅이었다.
이제 학생들은 과거에 공산주의자로 지목되어 구속되었던 모든 학생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하였다. 달라트(Dalat)와 후에(Hue)에 있는 대학생들도 일어났다. 학생들은 다시 국회 의사당을 점령하였다. 캄보디아 월경 작전이 한창일 때 시위의 구실을 찾고 있던 학생들은 캄보디아 대사관을 점령하였다. 캄보디아에서도 북베트남군이 크메르 루즈(Khmer Rouge)군을 지원하여 내란이 계속되자 반베트남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고 양 민족은 역사적으로 적대시하던 민족들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이를 나쁘다고 할 수 없는 시의적절한 운동이었다. 이들은 한 달 동안 캄보디아 대사관을 점거하면서 경찰에 대항하였다.

크메르 루즈
학생들은 정부와 전쟁을 하고 있었다. 캄보디아에 친남베트남 정권이 들어서서 북베트남을 배격하는 정책을 쓰고 있는데도 이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시위의 구실을 삼은 것 뿐이었고 그 목적은 현 정부를 불신하고 약화시켜 이를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명목은 티우(Thieu) 정권이 이상과 희망을 주는 정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1971년 10월 3일 남베트남의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티우는 이 선거에서 다른 혼란의 불씨를 심었다. 입후보자는 티우, 구엔 카오 키(Nguyen Cao Ky) 부통령, 1963년 디엠 정권을 붕괴시킨 쿠데타 주동자였고 이후 중립노선을 표방하여 온 두옹 반 민(Duong Van Minh) 3인이었다.

두옹 반 민. 남베트남 최후의 대통령이 된다.
이 3인 중에서 키 부통령이 후보등록에 필요한 추천자의 미비를 이유로 대법원에서 후보 실격판결을 받았다. 민족해방전선측이 즉각 민에게 후보를 사퇴하도록 압력을 가하여 민은 후보사퇴 성명을 발표하고 말았다. 다음 날 대법원은 키 후보에 대한 실격판결을 뒤엎고 후보 등록을 승인한다는 판결을 내려 티우의 단독후보 선거를 막아보려 했으나 키도 불출마를 선언하고 티우와 자신은 현직에서 물러나 처음부터 선거를 다시 시작하자고 요구하였다.
선거는 그대로 실시되어 투표율 87.9%, 득표율 94.3%로 티우는 재선되었다. 전국이 들끓었다. 불교도, 민이 이끄는 정치단체, 키를 지지하는 일부의 군부 세력, 카톨릭 교도, 그렇지 않아도 벼르고 있던 대학생들 모두 들고 일어나 반 티우 전선에 합류하여 사회적 혼란은 계속되었다.
1968년 구정공세 이후 베트남전은 모두 4개의 전선에서 전쟁이 수행되고 있었다. 전장에서, 파리의 협상테이블에서, 미국의 반전운동 전선에서, 그리고 사이공의 반 티우 전선에서 각기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로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미국 전선과 사이공 전선은 북베트남을 위한 전선이었으므로 북베트남에게는 승산이 확실한 전쟁이었다. 나머지 두 전선에서도 우세를 점하기 위하여 북베트남은 준비를 계속하고 있었다.
첫댓글 나중에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면(솔직히 언제될지 궁금하긴 하네요;; 지금같으면 제가 죽을때가지 안될수도 ㅎㅎ;;)과거에 남파간첩이 학생운동을 이용하려했던 자료가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학생들은 그런의도가 없었지만 그걸 북한쪽에서 이용하려고 시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을테니까요;; 그렇다고 5.18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건 절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길....... 학생들의 의도야 순수했다고 하지만(솔직히 요즘 총학이나 그때 운동권 출신 정치가보면 그렇지도 않다는 생각이.....) 그걸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정치세력이야(북한이든, 야당이든, 여당이든)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충분히 가능성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몰라도 한국전쟁 이전의 대학가나 노동계에는 그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