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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heCovenant 원문보기 글쓴이: 김수영1
제 1부 로마서의 문
1. 로마서의 문(門)은 어떻게 열어야 하는가?
2000년 기독교역사에서 로마서는 신구약 성경 중 가장 중요한 성경으로 알려져 왔다. 로마서가 신약성경의 서신서 목록 중에 제일 먼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미 초기기독교에서부터 로마서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음을 보여준다. 오리겐(Origen, 185-254), 암브로시아스터(Ambrosiaster), 크리소스톰(Chrysostom), 어거스틴(Augustine) 등 교부(敎父)들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로마서에 대한 주석을 썼고, 그들의 책은 당대는 물론 후대에 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도 로마서가 중요하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2)
루터(M. Luther)와 캘빈(J. Calvin) 등 종교개혁자들은 로마서를 바로 알게 되면 신구약성경을 바로 알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신구약 성경 중에서 로마서가 그처럼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서의 보화를 맛보기 위해 우리는 로마서를 어떻게 열고 들어가야 하는가? 로마서에 들어 갈 수 있는 문(門)이 있다면 그 문은 무엇인가? 어떻게 로마서에 들어가서, 로마서를 바르게 듣고,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가르치고, 그리고 바르게 설교할 수 있는가?
솔직히 말해서 로마서에 대한 왕도(王道)는 없다. 하지만 누구든지 로마서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열기 위해서는 로마서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인식과 로마서의 역사성과 문학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전자는 우리가 왜 로마서를 듣고, 배우고, 실천하여야하는지에 관한 당위성과 함께 로마서 접근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자세가 어떠하여야 할 것을 가르쳐 준다. 반면에 후자는 우리가 실제로 로마서를 어떻게 접근하여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가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일깨워준다. 지나치게 전자에만 치중할 경우 로마서가 우리의 실제적인 삶을 반영하지 못하는 비역사적 문헌으로 떨어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반면에 후자에만 치중할 경우 로마서가 단순히 한 고대문서로 전락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로마서에 접근하면서 역사-비평적 접근(Historical-Critical Approach) 없이는 로마서가 우리에게 알려질 수 없다는 지나친 학문우월주의도 배제하여야 하겠지만, 로마서에 대한 일체의 학문적 접근을 배제하고 오직 기도와 묵상만으로 로마서를 접근하려는 지나친 경건주의나 영성우월주의도 배제하여야 할 것이다.
로마서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이라는 사실은, 학문 없는 무식한 할머니라 할지라도 로마서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진지한 신앙적인 자세만 있다면, 로마서로부터 얼마든지 하나님의 복음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반면에 아무리 학문을 많이 하고 역사-비평학에 능숙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로마서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정하고 단순히 고대문헌으로만 알고 접근하려는 자는 가장 중요한 로마서의 핵심적인 복음의 메시지를 듣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때때로 스스로 지혜있고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자신의 말씀을 숨기고, 반면에 어린아이처럼 겸손한 자들에게는 나타내시기 때문이다(마 11:25-26).
로마서를 듣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神性)을 가진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분이 또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역사의 예수임을 바로 알지 않는다면 그의 신앙은 역사성이 없는 추상적인 신앙으로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처럼, 로마서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어도 역사적인 편지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로마서에 대한 이해는 추상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로마서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고 해서 하늘에서 갑작스럽게 떨어진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로마서는 분명히 1세기에 활동하였던 사도 바울이 주후 50년대 후반에 로마에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보낸 역사적 편지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3)
이것은 우리가 로마서를 21세기의 작품처럼 생각하여, 우리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옷을 입거나 안경을 쓰고 성급하게 로마서에 들어가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오히려 로마서 자체가 보여주고 있는 저자, 독자의 시대, 문화, 종교와 사회의 배경에 대한 이해와 로마서 자체의 주장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따라서 로마서로부터 하나님의 복음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서는 로마서를 쓸 당시의 사도 바울의 상황, 로마서의 첫 번째 수신자인 로마의 크리스천들의 상황과 로마서의 문학적 구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러한 이해가 깊으면 깊을수록 로마서는 우리에게 친근하게 느껴지며, 쉽게 이해될 것이다. 반면에 로마서의 역사적 배경과 문학적 성격과 구조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빈약하면 빈약할수록 로마서에 대한 이해는 독단적이거나 추상적으로 빠질 수 있을 것이다.
2. 왜 로마서를 들어야 하는가?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3차에 걸친 선교여행을 마칠 무렵인 AD 57년경4)에 고린도에서 로마에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주후 1세기의 로마의 크리스천들은 바울이 보낸 편지를 주일 날 예배 중이나 다른 모임 때, 편지를 가지고 온 사람이나, 교회의 어떤 대표자가 낭독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로마서 결언 부분인 16장 초두에 언급되고 있는 겐그레아교회의 여성 사역자인 뵈뵈가 바울이 코이네 헬라어로 쓴 두루마리 편지를 가지고 로마에 흩어져 있는 여러 기독교 가정교회들을 찾아다니면서 적어도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에 걸쳐 천천히 읽었다면,5) 그들은 낭독하는 편지의 내용을 들으면서 마치 바울이 그들에게 찾아와서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글에 익숙한 현대인들과 달리 그들은 주로 듣고 말하였기 때문에, 기억력과 암기력에 있어서는 현대인들보다도 훨씬 더 탁월하였다고 볼 수 있는 그들은, 바울의 편지를 들으면서 바울이 그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당대 헬라-로마 사회에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 열 명 중에 한두 명에 불과했다는 사실로 볼 때, 로마서는 처음부터 대다수의 독자들이 편지를 직접 읽을 것이라는 전제하(前提下)에서 보다도, 오히려 듣는다는 전제하에서 쓰여 졌을 것이라고 생각된다.6)
이와 같은 사실은 로마서를 분석하려는 자세 보다 로마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로마서 자체로부터 겸손하게 듣는 자세가 선행(先行)되어야 할 것을 보여준다. 물론 로마서를 처음 들은 1세기의 로마의 크리스천과 21세기의 우리들 사이에 언어적, 시간적, 문화적, 종교적 간격이 있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1세기의 로마의 크리스천이 아닌 이상, 그들과는 다른 언어적, 시간적, 문화적, 사회적, 종교적 환경에 살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1세기 로마의 크리스천들이 듣고 이해할 수 있었던 것처럼 로마서를 듣고 이해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서를 듣기 위해서는 로마서의 역사적 배경과 문학적 구조에 대한 어느 정도의 선이해(先理解)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의 기본적인 자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석하고 비판하겠다는 자세가 아닌 듣고 순종하겠다는 자세가 되어야 할 것이다. 로마의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필요로 하는 죄인들이었던 것처럼 우리도 복음이 필요한 죄인들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전체를 통해서 전달되는 복음의 메시지는, 비록 1세기의 콘텍스트(context)를 통해 표현되어 있지만,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로마서에 대해 듣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로마서를 들어야 하는 이유는 로마서가 중요할 뿐만 아니라, 로마서의 메시지가 우리 시대에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로마서가 중요하다는 것은 다른 바울의 서신들이나 성경 각권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示唆)하는 것은 아니다. 신구약 성경 중 어느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성경은 없다. 왜냐하면 각 성경은 고유한 시대적 배경과 메시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 성경이 기독교역사를 걸쳐서 똑같은 가치와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아니었다.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성경도 있었다. 예를 들면, 구약의 아가서는 지나치게 남녀의 에로틱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 때문에, 신약의 야고보서는 지나치게 믿음보다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때로는 성경으로 관주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심도 받았었다.
그러나 로마서는 2,000년간의 기독교역사를 통하여 단 한 번도 그와 같은 의심을 받은 적이 없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이 쓴 로마서는 단연코 최상위(最上位)를 차지하였고,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으며 기독교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역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서구역사의 발전과 변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7) 즉, 오리겐(Origen), 크리스톰(Chrysostom), 어거스틴(Augustine)등과 같은 기독교 초기의 위대한 교부들은 물론, 중세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종교개혁의 문을 연 루터와 캘빈, 감리교회를 창설한 존 웨슬리(John Wesley), 그리고 19세기의 자유주의신학에 조종(弔鐘)을 울리고 말씀의 신학을 연 칼 바르트(K. Barth)에 이르기까지 로마서는 수많은 기독교의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 영향력은 지금도 헤아리기가 힘들다.
『참회록』,『하나님의 도성』등으로 잘 알려진 어거스틴은 32세가 되던 AD 386년 어느 여름날 로마서 13:13-14절에 있는,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을 우연히 읽고, 자신의 방탕한 생활과 마니교생활을 청산하고 회심하여, “성(聖) 어거스틴”이 되었다. 종교개혁의 문을 연 마틴 루터는 본래 로마 카톨릭교회의 신부이며 신학자였지만 오랫동안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죄책과 양심의 고통을 받아왔다. 그러다가 로마서 1:17절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나타난 자비로운 하나님을 발견하면서 죄책과 양심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을 얻었다. 루터는 이때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마침내 나는 하나님의 의는 은혜와 순전한 자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게 해 주시는 그 의라는 진리를 파악했다. 그러자 곧 나는 내가 중생했으며 낙원에 이르는 열린 문을 통과했다는 것을 느꼈다. 성경전체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으며, 이전에 ‘하나님의 의’가 나를 증오로 가득 채웠던 것에 반하여, 이제 그것은 보다 위대한 사랑 안에 있는 이루 형언할 수 없이 달콤한 것이 되었다. 바울의 이 본문은 내게 하늘나라로 이르는 통로가 되었다(Luther's Work, 34, 336-337).”8)
그래서 루터는 로마서주석 서문에서 로마서의 중요성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서신은 실로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참으로 가장 순수한 복음이다. 로마서는 모든 크리스천들이 마땅히 마음으로 모두 알아야할 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 영혼의 양식으로 묵상하여야 할 만큼 가치를 지니고 있다”(Luther's Works, vol. 35, 1960, p. 365). 루터는 로마서에 관한 서문의 결론 부분에서 로마서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 한다:
“이 서신에서 우리는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내용들, 이를테면, 율법, 복음, 죄, 심판, 은혜, 믿음, 의, 그리스도, 하나님, 선행, 사랑, 소망, 십자가는 물론,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그가 의인이든, 죄인이든, 강한 자이든, 약한 자이든, 친구이든, 원수이든,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어떻게 처신하여야 하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내용들은 모두 전 성경으로부터 충분하게 지지를 받고 있음은 물론, 바울자신과 선지자들의 실례를 통해 입증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어떤 다른 것들을 기대할 필요가 없다. 바울은 이 서신에서 전 기독교의 복음적인 교리를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으며, 전 구약성경의 개론을 마련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누구든지 이 서신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면, 그는 실로 구약성경의 빛과 능력을 소유하는 자가 된다. 그럼으로 모든 크리스천들은 로마서를 알고, 로마서의 내용을 지속적으로 실천하도록 힘써야 한다”(Luther's Works, vol. 35, 1960, p. 380)9).
감리교의 창설자 존 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 루터가 쓴 로마서 주석의 서문을 읽으면서 루터와 유사한 은혜의 체험을 하였다. 그 전까지는 그는 성경연구, 자기반성, 공적이고 개인적인 종교수련, 그리고 자선활동 등의 종교적인 열심과 많은 선행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구원의 확신은커녕 오히려 극심한 좌절과 실망감을 가졌다. 그러다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통해 해결책을 발견했다. 웨슬리는 그의 일기에서 당일의 체험을 이렇게 썼다:
“그가(루터)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마음속에서 이루고 계시는 변화를 묘사하고 있는 동안, 나는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구원 받기 위해 실로 그리스도를,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는다고 느꼈다. 그러자 그분이 나의 죄들, 바로 나의 죄를 제거해 주셨고, 죄와 사망의 율법에서 나를 구해주셨다는 확신이 느껴졌다”(John Wesley's Journal, 1738, 5,24).10) 이 후 웨슬리는 로마서를 소개하면서, 로마서는 가장 “순수하고 혼합되지 않은 복음”을 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11)
1919년 칼 바르트는 세계 신학계에 핵폭탄에 버금가는 엄청난 도전과 충격을 주는 책을 출판하였다. 그것이 그의 유명한 로마서 주석이다. 그것은 그의 새로운 신학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인 동시에 그가 배우고 몸담았던 자유주의신학에 대한 과감한 도전장이었다. 그는 한때 인간이성(人間理性)의 힘으로 사회변혁과 과학을 발전시켜 지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낙관주의 사상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 1차 세계대전의 참담한 모습을 보고 인간의 무서운 죄성(罪性)과 인간이성(人間理性)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었고, 그의 스승들이 가르쳤던 낙관론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성의 힘으로 이룩되는 나라가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세워지는 하나님 중심의 나라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인간 이성 중심의 자유주의신학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신학을 세우고자 하였다. 1932년 바르트는 로마서 주석을 통해 추구하였던 것은 그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가 아닌 사도 바울이 무엇을 생각 하는가 이었음을 회상하였다:
“나의 유일한 목적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찾는 것이었다... 나의 영적인 안목, 종교적 입장과 인생관에 관해서는 하등의 관심을 주지 않았다. 나의 책은 오로지 하나의 이슈만을 취급하였다. 그것은 내가 로마서를 해석하면서 바울이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바울과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가?”(Romans, ix.)12)
로마서가 중요한 것은 수많은 신학자와 교회 지도자들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목회자, 신학도, 평신도 등 로마서를 진지하게 읽고 듣는 자들은 누구든지 로마서의 중요성을 곧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로마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선포하시는 메시지는 1세기의 크리스천들에게만 주어지는 메시지가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한 위대한 하나님의 복음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이 복음의 메시지는 시대와 환경과 문화의 장벽을 넘어 로마서를 읽는 개인, 가정, 교회, 사회 등 인류전체와 전 창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이다. 이것은 창조와 타락,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의 인류 구속과 회복은 물론, 하나님의 전(全) 창조세계의 회복과 완성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주권의 선포이다. 그런 점에서 로마서를 어느 특정한 시대나 특정한 시대의 사회와 사람에 한정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모든 시대와 환경과 사람들을 향한 메시지로 보아야 할 것이다.13) 그 어떤 시대의 사람도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그 역시 로마서의 메시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어떤 나라도, 민족도, 사회도 죄와 죽음과 사탄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면 로마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어떤 피조물도, 그 어떤 영역도 하나님의 주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그는 로마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21세기의 한국 사람들과 사회도 이점에서 예외가 아닐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남북의 통일과 이념의 갈등, 지역, 인종, 신분, 성별의 갈등, 극심한 빈부 격차와 노사 갈등, 교육, 환경, 생태계의 파괴, 공해문제, 극심한 비윤리성과 성적 부패 문제 등 수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이 모든 문제들의 근저(根底)에는 로마서가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 불신앙, 죄와 죽음과 고통의 문제가 깔려 있다. 하나님과의 단절이 너와 나의 갈등은 물론, 자연세계와의 갈등을 가져왔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자신과 사회와 우리의 생태계가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답변을 가지고 있어야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들에 적절한 해답을 어디서 얻을 것인가? 비록 로마서가 이 모든 문제들에 관하여 직접적인 답을 주지 않더라도, 우리로 하여금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한 기독교적 답변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가장 좋은 선생과 안내자임이 분명하다.14)
3. 로마서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
편지는 발신자와 수신자의 의사소통 수단이다. 발신자는 편지로 자신의 의사를 수신자에게 전달하고, 수신자는 발신자의 의사를 듣게 된다. 따라서 발신자는 무엇을 전달할 것인지,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어떻게 쓰고 구성하여야할 것인지, 그리고 자신이 쓴 것을 수신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수신자는 어떻게 편지를 들어야 발신자의 의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로마서는 결코 짧은 편지가 아니다. 16장으로 구성된 로마서는 바울의 서신중에서 가장 긴 서신에 속한다.
로마서는 바울의 다른 편지와 달리 바울 자신이 직접 설립하지 않은 그리고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교회에 보내진 편지이다. 직접 방문하지도 않은 크리스천들에게 보내는 편지이므로 바울은 길게, 그리고 신중하게 썼을 것이다. 바울이 살았던 고대 헬라-로마 사회에서 말과 글의 기술인 수사학(修辭學)이 매우 발달하였다.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의 주된 내용이 수사학이었다는 점과 바울이 다소와 예루살렘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는 점은 그가 로마서를 쓸 때, 독자들에게 자신의 목적을 보다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도록 용의주도하게 구성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15)
로마서는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긴 서언(序言)(1:1-17)과 긴 결언(結言)(15:14-16:27)을 갖고 있다. 서언에 나오는 주요내용인 문안인사, 기도, 여행계획, 복음의 진술이 결언에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편지의 본론(Body)인 1:18-15:13절은 복음자체의 설명하는 직설법 부분과 (1:18-11:36)과 그 복음의 구체적인 적용을 말하는 명령법 부분(12:1-15:13)으로 양분되어 있다. 또한 1:18-11:36절이 보편적인 문제(1:18-8:39)와 특수한 이스라엘 문제(9:1-11:36)로 양분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12:1-15:13절도 보편적인 문제(12:1-13:14)와 로마교회의 유대인 크리스천과 이방인 크리스천사이의 특수한 문제(14:1-15:13)로 양분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로마서가 고도의 문학적 구상(構想)에 의해 구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럼으로 로마서의 문학적 구성에 대한 이해는 로마서를 듣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16)
바울이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로마교회에 편지를 썼다고 해서(1:13) 우리는 편지를 보내는 바울이나 편지를 받는 로마의 크리스천들이 서로 생면부지(生面不知)의 관계에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로마의 크리스천들을 직접 방문하지는 않았지만, 그곳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 로마의 크리스천들과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적지 않게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로마서 16장에 언급되어 있는 많은 개인적인 문안인사의 대상들은 이 점을 충분히 가능하게 한다. 로마의 크리스천들도 이 점에서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로마의 크리스천들도 바울과 친분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혹은 로마를 방문하는 사람들로부터 바울에 관한 정보를,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듣고 있었을 것이다. 바울 자신도 로마서를 쓸 때 로마교회의 크리스천들이 자신과 자신의 활동에 관하여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로마서를 쓸 때 바울이 백지 상태에서 쓰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고, 로마의 크리스천들도 바울의 편지를 들을 때 백지 상태에서 듣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오히려 편지를 보내는 발신자나 수신자 모두가 나름대로의 전이해(前理解)와 관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가 로마서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로마서를 어떻게 들어야 바울과 로마의 크리스천들이 가지고 있었던 전이해와 관점을, 그리고 나아가서 로마서를 쓴 이유에 접근할 수 있는가? 먼저 지금까지 로마서 이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사람들이 로마서를 어떻게 읽고, 듣고, 이해하고, 가르치고, 설교하여 왔는가를 간단히 살펴본 다음, 로마서를 잘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대안을 생각해 보자.
전통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로마서를 일종의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교과서(敎理敎科書)처럼 생각하고, 로마서를 통해서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를 찾거나 들으려고 하였다.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이 그랬다. 루터와 캘빈과 루터의 후계자인 멜랑톤(P. Melanchton)은 모두 로마서가 기독교의 핵심적인 구원교리를 가르치고 있다고 보았다. 그들이 로마서에 접근하면서 가졌던 핵심적인 질문은 “죄인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게 되고 구원받을 수 있느냐”는 구원론적인 문제였다. 로마서로부터 가졌던 일차적인 관심은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과의 수직적 관계 문제였다. 그들이 나와 너, 유대인과 이방인, 나와 이 세상 등의 수평적인 관계 문제를 전혀 등한시 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2차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의 근본 문제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와 교제를 막고 있는 죄의 문제로 보았고, 이 죄의 문제가 수직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수평적인 관계 문제도 단절시키거나 왜곡시켰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자들이 로마서로부터 발견한 인간의 근본 해결책, 곧 죄인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람이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 교리(以信稱義敎理)”였다. 인간이 죄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인간 자신의 어떤 노력이나 행위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은혜로“(sola gratia)라는 구호를 내세운 것도 이 때문이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와 같은 “이신칭의교리”의 관점에서 로마서를 읽고, 이해하고, 로마서에 대한 주석을 썼다. 그들이 발견한 이신칭의의 교리를, 한편으로 16세기의 로마 카톨릭교회를 비판하고 공격하는 무기로, 다른 한편으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변호하는 방편으로 삼았다. 그들은 로마서에서 바울이 “사람이 율법 혹은 율법의 행위로부터 의롭다함을 얻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롬 3:21, 22, 28)고 주장하는 사실로부터, 자기 당대 로마 카톨릭교회의 지도자들이 구원의 조건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첨부하여 선행(善行), 이를테면 면죄부 구입을 요구하는 것을 반대할 수 있는 성경적 근거를 찾았다.
종교개혁자들의 눈에는 면죄부 구입 등 선행을 구원의 필수적인 조건으로 제시한 자기 당대 카톨릭교회의 사제들이, 바울 시대에 이방인크리스천들에게 유대교의 ‘율법’과 ‘율법의 행위’와 ‘할례’등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덧붙여 구원의 필수적인 조건으로 요구한 유대주의자들(참조 행 15:1)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1세기 유대주의자들에 대한 바울의 비판과 공격은 자신들이 16세기 로마 카톨릭 사제들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성경적 근거가 되었으며, 유대주의자들의 배후에 있다고 보았던 1세기의 유대교는, 16세기의 로마 캐토릭 교회처럼 행위-구원을 추구하는 율법주의적 종교로 이해되었다. 로마서로부터 기독교의 기본교리, 곧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게 되는가라는 기독교구원론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찾고 들으려고 하는 종교개혁 자들의 구원론적-수직적 로마서 접근은 지금도 기독교 안에 로마서 접근에 대한 하나의 큰 흐름으로 남아있다.
20세기 영국이 낳은 최고의 설교자로서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로이드 존스(Martin Llyod Jones)의 로마서 접근도 이와 같은 종교 개혁 전통의 노선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종교 개혁자들처럼 로마서가 “우리의 신앙의 위대한 중심 교리”를 가르치고 있으므로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로마서에서 찾아 설교하려고 하였다. 14권의 방대한 그의 『로마서강해 설교집』은 각 권의 표제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로마서로부터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를 찾아 설교하고 있다. 로이드 존스는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의 복음 문제”를, 2:1-3:20절에서는 “죄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인간의 비참 문제”를, 3:21-4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속죄와 이신칭의 문제”를, 5장에서는 “구원의 보증 문제”를, 6장에서는 “새 사람, 곧 성화 문제”를, 7장에서는 “율법 문제”를, 8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자의 신분과 궁극적인 보존 문제”를, 9장에서는 “하나님의 주권 문제”를, 10장에서는 “구원하는 믿음 문제”를, 11장에서는 “하나님의 영광 문제”를, 12-14장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 나라에서 사는 신자의 삶에 관한 문제”등을 찾아 설교하였다.
그의 『로마서강해 설교집』은 종교 개혁자들의 경우처럼, 인간과 관련된 기독교의 기본적인 구원교리, 죄, 율법, 하나님의 의, 믿음, 그리스도의 구속, 화해, 성화, 성령 안에서의 삶 등의 문제가 중점적으로 취급될 뿐, 로마서가 편지로서 간직하고 있는 바울 자신과 로마교회의 상황 문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다. 즉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강해는 하나님과 인간의 수직적인 관계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 로마서가 1세기의 편지로서 담고 있는 현안의 문제들, 당시의 바울과 유대교와 유대인들과의 관계, 바울과 로마의 크리스천들과의 관계, 로마교회 내부의 유대인 크리스천들과 이방인 크리스천들과의 관계, 바울의 이방인 교회들과 예루살렘교회와의 관계 등 수평적이고 사회학적인 문제들은 거의 취급을 하지 않고 있다.
20세기에는 종교개혁 전통의 구원론적-수직적인 로마서 접근에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였다. 슈바이처는 아프리카 오지(奧地)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헌신적인 의료 봉사를 한 유명한 의사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는 의사 이전에 유명한 바하 음악 전문가였고, 20세기 초 가장 뛰어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역사적 예수 연구]17)라는 책에서, 당대에 풍미하고 있는 역사적 예수 연구, 곧 교회의 전통과 교리와 철학에 채색되지 않는 순수한 역사의 예수를 찾으려는 운동에 쇄기를 박은 사람이다. 슈바이처는 자기 앞서 200년 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추구해 온 역사적 예수 연구는, 실상 1세기의 역사적 예수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연구자들 자신들의 시대와 사상과 이념을 투영시켜 그들 자신의 예수를 만든 실패작에 불과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역사적 예수 연구를 원점으로 돌려서 역사적 예수는 유대교 전통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찾은 예수는 주후 1세기 유대교의 종말론적 전통에서 자란 유대인 예언자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 당대에 도래하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의 죽음을 자초하였다. 하지만 그가 기대하였던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하지 않았다.
슈바이처는 자기 당대의 역사적 예수 연구의 방향을 전환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사도바울의 신비주의』18)라는 책을 통해 당대의 바울연구를, 특별히 로마서 접근의 큰 방향을 틀게 하였다. 슈바이처는 로마서로부터 무시간적(無時間的)인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찾으려고 한 종교 개혁 전통의 로마서 접근은 근본적으로 무시간적인 원리를 추구하는 헬라사상의 영향 때문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래서 그는 로마서를 헬라사상의 배경이 아닌 1세기 유대교의 종말사상 배경에서 보아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슈바이처에 따르면 역사적 예수가 1세기의 유대인 종말론적 예언자였던 것처럼 사도 바울 역시 1세기의 유대교에서 성장한 유대인 종말사상가인 동시에 복음 전도자였다. 따라서 로마서와 그의 서신들은 헬라적 전통이 아닌 그의 삶과 신앙의 자리인 유대교의 문맥에서 읽고 해석되어야 한다.
그는 『사도바울의 신비주의』에서 로마서를 종교 개혁자들처럼 ‘이신칭의’의 관점에서 볼 것이 아니라, 유대교 종말 사상의 배경에서 나온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중심으로, 곧 크리스천은 세례와 성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였다는 종말론적-연대(連帶)적 사상으로 읽고 해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슈바이처는 이신칭의의 교리가 로마서의 1-4장에서 중요한 주제로 등장 할뿐, 5-8장에서는 오히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중심 주제로 등장하는 것을 실례로 들면서, “이신칭의”의 교리는 실제로 사도바울의 핵심적인 주제가 아니고, 다만 그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한 유대 주의자들을 대항하기 위해 선교 현장에서 만든 일종의 “논쟁 교리”(Kampflehre)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19)
로마서를 수직적인 관점보다 수평적인 관점에서, 개인적 관점보다 공동체적 관점에서, 무시간적인 교리 중심에서 역사적인 문제 중심으로, 헬라적 배경보다 유대적 배경에서 보려는 슈바이처의 시도는 가능한 로마서를 그 자체가 가지고 역사적 문맥에서 보려는 멍크(J. Munck),20) 미니어(P. Minear)21)의 로마서 연구에 영향을 주었고, 스탕달(Stendhal), 센더스(Sanders), 던(Dunn), 라이트(Wright) 등에 의해 제창된 “새 관점의 바울 연구 운동”(“The New Perspective on Paul")으로 이어져 금세기 로마서 접근의 커다란 흐름으로 성장하였다.22)
스탕달은 1963년 『하바드대학 신학저널』에 “사도 바울과 서구 사회의 자기 반성적 양심” (“The Apostle Paul and the Introspective Conscience of the West”)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사도 바울의 주된 질문은, 서구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어거스틴과 루터가 제기한 일반적이고 무시간적인 질문인, “내가 어떻게 은혜로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가”가 하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유대인과 이방인이 어떻게 한 교회에서 함께 살 수 있는가?”라는 공동체적이며, 사회적이며, 선교-역사적 질문이었다고 주장하였다.23) 슈바이처가 그랬던 것처럼, 스탕달도 종교 개혁자들이 로마서의 중심 주제로 본 “이신칭의”교리는 바울 복음의 핵심에 속한 것이라기보다도, 오히려 바울의 이방인 선교 현장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등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2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스탕달에 따르면, “이신칭의”교리도 그 본래의 자리를 찾아,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하는 개인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공동체적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새 관점을 촉발시킨 센더스24)는 1977년 금세기 신학계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는『바울과 팔레스틴 유대교, Paul and Palestinian Judaism』25)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센더스는 주전(BC) 2세기부터 주후(AD) 2세기까지의 방대한 유대교 문헌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그는 예수와 바울 시대의 유대교는, 어거스틴, 루터, 캘빈의 뒤를 있는 전통적인 기독교가 생각한 것처럼, 의(義)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 공로를 쌓아야하는 “율법주의적 종교”(legalism)가 아니라, 우리 기독교처럼 의와 구원의 근거를 인간의 행위에 두지 않고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에 두는 “은혜의 종교”임을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수백 년 동안 자신을 우월한 “은혜의 종교”로, 반대로 유대교를 낮은 “행위의 종교”로 단정하여 “반 유대교 운동”을 조장하는 오류를 범해왔다.
센더스에 따르면, 구약의 출애굽 사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먼저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언약 백성으로 선택한 다음, 언약 백성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는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리고 범죄 할 경우 속죄할 수 있도록 율법을 주셨다. 이 율법에 대한 순종과 속죄와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언약 백성 안에 머무는 자는 종국적인 구원을 얻게 된다. 따라서 유대인들에 있어서 선택과 종국적인 구원은 인간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존한다. 센더스는 하나님의 선행적인 선택과 율법을 통한 언약 백성의 의무를 강조하는 유대교의 종교 시스템을 가리켜,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26)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유대교를 율법주의적 종교로 보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으며, 이와 같은 잘못된 전제 하에 이루어진 바울과 그의 서신의 기존 해석은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센더스에 따르면 로마서의 중심주제는, 종교 개혁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죄인인 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이 어떻게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에 참여할 수 있는가라는 사회적이고 공동체적 문제였다.27)
센더스는 로마서에 나타나 있는 바울의 율법과 유대교에 대한 비판은 실제적으로 역사적 비판이 아니라고 보았다. 바울 당대 유대인들이, 혹은 바울의 선교 현장에서 바울에게 도전해 왔던 유대주의자들이, 율법을 그리스도 대신 의와 구원의 수단으로,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바울이 율법과 유대교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의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역사적 판단이나 체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신학적인 산물이다. 즉 바울 당대의 유대교가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수단으로 삼는 율법주의적 종교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울 자신이 다메섹 사건을 통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유대교의 문제를 의식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바울은 유대교의 문제를 먼저 의식하고 그런 다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해결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메섹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구원이 나타났다는 해결을 먼저 발견하고 유대교를 보았기 때문에 유대교의 문제를 의식하였다. 센더스는 “바울의 유대교에 대한 부정적인 비판은 유대교 자체가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유대교가 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28) 그러므로 센더스에 따르면, 바울의 유대교와 율법에 대한 비판은 사실상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인간의 비참한 모습과 비참한 인간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는 신학적인 자기표현에 불과하다.29)
1982년 제임스 던은 “새 관점의 바울 연구”라는 논문을 통해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교를 “율법주의적 종교”가 아닌 “언약적 율법주의”로 보는 센더스의 주장에 적극적인 동의를 하였다. 그는 센더스와 함께 1세기의 유대교가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전제 아래 그동안 잘못 이해한 유대교와 바울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운동을 “새 관점의 바울 연구”(the New Perspective on Paul)로 명명(命名)하며,30) 이 운동의 가장 열렬한 주창자가 되었다.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널리 소개된 그의 [로마서 주석]31)과 [바울신학]32)은 새 관점에 따른 바울 연구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던에 따르면, 로마서에 나타나 있는 유대교와 율법의 비판은 실제로 유대교가 행위 구원을 추구하는 “율법주의”나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와 구원의 수단으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바울 당대 유대 민족의 정체성(Identity)의 표지 역할을 하고 있는 율법, 할례, 유대 음식법 등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등성을 방해하고, 마치 구원은 유대인들에만 있다는 우월적이고 배타적인 사상을 가져오기 때문이었다.33) 던에 따르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자주 등장하는 “율법에 대한 행위”는 구원을 얻기 위한 유대인들의 선행이 아니고, 이방인들에게 지킬 것을 요구한 유대교의 정체성의 표현들이며, 언약 백성으로서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합당한 반응이다. 즉 율법의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인들로부터 구별되게 하는 경계선의 표지들(the boundary markers)인 할례, 음식법, 절기 등을 뜻한다.
던에 따르면, 로마서 2:17-23절에 나타난 유대인들의 하나님 혹은 율법에 대한 “자랑”도 전통적으로 주장되어온 자기 신뢰나 자기-의에 대한 자랑이 아니라, 이방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언약적 특권에 대한 자랑을 가리킨다. 바울은 여기서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잘못된 종교적, 민족적 특권 의식을 비판하고 있다. 던은 로마서 9:30-10:4도 같은 전망에서 해석한다. 즉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열심, 자기-의는 율법주의적 자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언약적 백성으로서의 배타적인 민족적-종교적 특권과 신분을 유지하려는 열심을 가리킨다. 이처럼 던의 입장에서는 바울이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에서 “사람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할 때, 바울은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나 율법 자체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사회적 기능, 자신들을 이방인들로부터 분리시키는 유대인들의 민족적, 사회적 특권의식, 정체성의 표지들을 비판하고 있다.
라이트 역시 1세기의 유대교가 율법주의가 아닌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센더스의 주장에 전폭적인 동의를 한다. 그리고 바울이 로마서에서 반대한 ‘율법의 행위’나 ‘자기의 의’가 행위구원을 위한 공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민족적정체성과 언약적 삶을 지칭한다는 던의 입장에도 찬성을 한다. 이리하여 라이트는 이신칭의의 교리가 근본적으로 유대인들의 민족적 자랑을 비판하기 위한 논쟁교리라는 스탕달의 입장에 동조한다. 라이트는 센더스나 던처럼 16세기의 루터가 자기 당대의 상황을 1세기로 가져가서 1세기의 바울과 유대교를 왜곡시켰다고 본다. 따라서 루터와 그를 따르는 종교개혁적 전통에 의해 잘못 이해된 바울과 유대교는 마땅히 본래의 자리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라이트에 따르면, 바울 당대의 유대교는 결코 행위에 따른 의와 구원을 주장하는 율법주의적 종교가 아니었다. 바울과 그가 한 때 몸담았던 바리새파 유대인들은 다 같이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은혜를 믿었다. 그리고 다 같이 그들은 행위에 따른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을 믿었다.
바울과 바리새파 유대인들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바울은 은혜 구원을, 유대인들은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데 있지 않다. 양자의 차이점은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과 은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자신들의 정체성의 기준으로 삼느냐에 있다. 바울과 바리새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언약 백성이 된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하였지만, 무엇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기준이냐 하는 문제에 관한 의견을 달리했다. 유대인들에게는 토오라(율법)의 소유와 그것을 지키는 것이 자신들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그것을 유지하는 수단이었다. 반면에 바울에게는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그 유지는 예수에 대한 믿음, 곧 예수가 주이시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음을 믿는 것이다. 바울이 당대의 유대인들과 율법을 비판한 근본 이유는, 전통적으로 주장되어 온 것처럼, 그들이 율법을 의와 구원을 가져오는 언약 백성에 들어가는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 아니라, 언약의 성취자인 예수 그리스도 대신 할례와 율법을 그들의 정체성과 그 유지의 수단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었다.
라이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언약 백성으로 선택하여 부르시고, 율법을 주신 것은 이방인의 빛으로 삼아 복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율법에 불순종함으로써 이방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자가 되기보다, 오히려 그들 자신들이 문제가 되었다(롬 2:17-29). 자신들의 죄 때문에 이방인의 빛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 아래, 곧 하나님의 언약적 저주인 바벨론의 포로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범죄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 자체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저주 문제를 인식하기는커녕, 율법의 소유, 안식일, 할례, 음식법 등 민족적, 인종적 정체성의 표현에 불과한 것들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 자체가 무효화될 수 없다.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은 지켜져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 백성의 대변자로 보내셨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순종으로 바꾸시고, 자신의 의를 들어내셨다. 곧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물론 전 피조 세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심으로써 자신의 언약적 신실성을 나타내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죄와 저주와 추방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숙원이었던 진정한 귀환과 해방이 이루어졌고,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 백성이 할 수 없었던 이방인의 빛이 되었으며, 그를 통하여 언약적 축복이 이방인에게 전달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모세의 율법과 율법의 행위와 할례 등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종적, 민족적 정체성과 경계선의 표징들이 언약 백성의 기준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자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새로운 기준으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이트에 따르면, 사도 바울이 모세의 율법, 할례, 율법의 행위 등을 비판한 것은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행위 구원을 가져오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스도 이후 더 이상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기준이 될 수 없는 그것들을 여전히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기준으로 내세워 그리스도 안에서 마련된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 됨을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4)
지금까지 우리는 로마서 접근에 대한 중요한 두 흐름, 곧 전통적인 수직적 접근과 새 관점의 수평적 접근을 살펴보았다. 전자는 로마서를 통하여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 곧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죄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가라는 개인의 구원론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고, 후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가라는 공동체적이고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전자는 모세의 율법, 율법의 행위는 물론, 이를 추구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바울의 부정적 평가와 비판을 가능한 한 더 많이 부각시킨다. 반면에 후자는 모세의 율법과 할례, 율법의 행위는 물론 유대인들에 대한 바울의 긍정적인 접근을 가능한 한 더 많이 부가시킨다. 전자의 입장 중에는 바울 당대의 유대교가 율법의 행위를 통하여 의와 구원에 도달하려고 하는 율법 주의적 종교로 보려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후자의 입장은 바울 당대의 유대교가 기독교처럼 똑같이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을 강조하는 은혜의 종교로 보려는 사람이 많다. 후자의 입장 중에는 심지어 바울이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유대인들을 옹호하기 위해서 로마서를 썼다고 보는 자들도 있다. 즉 바울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유대인의 우선권과 유대인의 민족적 구원과 이방인 크리스천들이 영적으로 유대인에 빚을 지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로마서를 썼다는 것이다.35) 하지만 지나치게 유대적 시각에서 로마서를 보려는 경향과 반동으로 지나치게 이방인 중심의 시각에서 로마서를 보려는 움직임도 있다.36)
우리는 이제 로마서를 어떻게 접근하고 읽고, 들어야 하는가? 종교 개혁자들처럼 수직적이고 개인 중심적인 관점에서 로마서를 접근하여야 하는가? 아니면 새 관점의 주장처럼 언약적 율법주의와 수평적이고 공동체이며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여야 하는가?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로마서는 구약의 십계명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돌비나 양피지에 써서 우리에게 주신 초역사적인 교리책이 아니다. 로마서의 내용이 아무리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갖고 있더라도, 로마서는 분명히 바울이 로마의 크리스천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편지이기 때문에 로마서는 저자와 독자의 역사적 정황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로마서는 분명히 로마서가 갖고 있는 역사적 문맥에서 접근되어야한다. 그런 점에서 로마서를 1세기 로마의 크리스천 공동체는 물론 초기 기독교전체의 가장 중요한 이슈였던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점에서 보아야 함을 강조한 새 관점의 주장은 상당한 타당성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로마서를 유대인과 이방인의 수평적인 관점에서만 보아야 하는가? 바울은 과연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문제를 해결하게 위해서 로마서를 썼는가? 로마서와 관련하여 우리가 아무리 유대인과 이방인의 수평적인 문제를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항상 잊지 않아야 할 사실은 로마서가 근본적으로 다루고 있는 문제는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인 인간,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죄인인 인간이란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로마서를 통해서 전달되는 핵심적인 메시지는 시대와 공간과 문화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신 구원/의를 필요로 하는 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복음의 선포라는 사실이다. 사실상 로마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간과 이 세상의 근본 문제인 죄와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근본적인 해결책인 그의 구원과 주권 회복을 선포하고 있다.37) 이점과 관련하여 주석가 무(Moo)의 지적은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
“로마서 전체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주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개별적으로 자신과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하기 위해(1-4장), 그에게 영광스러운 영생을 제공하기 위해(5-8장), 그리고 그의 삶을 이 땅에서 새롭게 변하시키기 위해(12-16장)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사역하셨는가에 있다.”38)
따라서 우리는 로마서를 접근할 때마다 하나님과 인간과 세상의 수직적 관점은 물론 인간과 이 세상의 수평적인 관점도 함께 고려하여야 한다. 로마서가 갖고 있는 양면성은 전통적인 수직적-개인 구원론 시각이든 새 관점의 수평적-공동체적인 시각이든 한 면만으로 로마서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오히려 로마서를 바르게 듣기 위해서는 양면을 상호보완적으로 활용하여야 할 것을 가르쳐준다. 따라서 전통적인 시각은 새 관점의 시각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새 관점은 전통적인 시각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만일 우리가 새 관점의 주장처럼 로마서가 단순히 1세기의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등성 문제만을 중점적으로 말한다고 본다면 로마서가 사회윤리나 사회학의 교본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인간의 근본 문제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복음의 의미는 무색해질 수 있다. 반면에 로마서를 지나치게 교리 중심으로만 접근한다면 로마서가 시대성과 역사성이 결여된 추상적인 메시지만을 말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39) 십자가는 수직과 수평의 양면을 가지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의 양면을 가지고 있다. 양자는 결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양면을 함께 보아야만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올바르게 설명될 수 있다. 로마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수직과 수평, 개인과 공동체의 양면을 함께 보고, 상호 보완할 때 로마서는 우리의 귀에 바르게 들여질 수 있다.
4. 사도 바울은 왜 로마서를 썼는가?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썼다는 사실에 관하여서는 지난 2000년간의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로마서의 바울 저작권(著作權)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로마서가 어떻게 쓰여 졌으며, 사도 바울이 왜 로마서를 썼으며, 핵심적인 메시지가 무엇이며, 로마서의 주된 독자가 이방인 크리스천들인지, 유대인 크리스천들인지, 아니면 서로 혼합된 자들인지에 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직접 개척하지도 않고 한 번도 방문한 적도 없는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무엇 때문에 로마서를 썼으며, 그가 로마서를 쓰게 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가?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역사적 배경과 목적을 생각할 때 우리는 저자인 바울 자신의 상황과 독자인 로마교회의 상황이라는 두 가지 점을 고려하여야 한다. 로마서가 저자인 바울 자신의 우선적인 필요성에 의해 쓰여 지게 되었는지, 아니면 로마교회의 우선적인 필요성 때문에 쓰여 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로마서는 바울이 직접 개척하지 않은 교회에 보낸 편지이므로, 갈라디아서나 고린도전후서나 빌립보서와 달리 교회 안에서 제기된 특수한 문제에 관한 직접적인 답변 형식의 편지로 간주되기는 어렵다. 로마서는 바울의 다른 서신들이 보여주고 있는 특수한 상황성이 대체적으로 결여되었고, 오히려 교회적 상황보다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문안과 언급들이 편지의 서두(1:1-15)와 결언(15:14-16:23)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종교 개혁자 루터가 로마서를 가리켜, “가장 순수한 복음”으로, 그의 후계자 맬랑톤이 로마서를 가리켜 “기독교의 요강(要綱)” (a compendium of the Christian Religion)으로,40) 니그렌(A. Nygren)이 로마서를 역사적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하고 객관적인 교리의 체계를 보여주고 있다41)고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로마서를 바울의 조직적인 교리집이나 신학 논문이라고 보기보다, 오히려 순수한 편지이며, 바울 자신이나 로마 교회의 역사적 상황과 필요성에 의해 쓰여 진 것으로 보려고 한다.42) 하지만 로마서가 우선적으로 바울 사도 자신의 필요성에 의해 쓰여 졌느냐, 아니면 로마 교회의 필요성과 관련하여 쓰여 졌느냐에 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43)
로마서가 저자인 바울 자신의 우선적인 필요성에 의해 쓰여 지게 되었는지, 아니면 독자인 로마교회의 우선적인 필요성에 의해 쓰여 지게 되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자체가 양면을 다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는 달리 로마서가 바울이 직접 개척하거나 방문한 적이 없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쓰여 졌다는 점, 서언에서 바울이 여러 번 로마교회를 방문하여 그들 가운데서 열매를 맺기를 원하고 있다는 언급,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도 복음의 빚을 졌으므로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는 언급(1:13-15), 로마서의 결언 부분에 나타나 있는 그가 로마교회 교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려한다는 언급(15:16), 그리고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어 로마교회를 방문하여 그곳에서 약간의 선교 후원을 얻어 스페인으로 가려한다는 언급(15:22-24), 그러나 지금 먼저 이방인 선교 교회의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하려는 것과, 예루살렘 방문이 순조롭고 안전하도록 로마 교회가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는 언급(15:22-32) 등은 로마서가 저자인 바울 자신의 필요성 때문에 기록 되었다는 강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로마서가 바울의 여러 서신 중 유대인의 율법 문제와 이스라엘 민족 문제를 가장 길게 서술하고 있는 부분들(2:1-3:9; 4:1-25; 7:7-24; 9-11장), 서언에서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을 만나기를 심히 원하고 있는 것은 신령한 은사를 나눠 주어 견고하게 하려한다는 언급(1:11-12), 이스라엘 문제를 길게 취급하고 있는 로마서 9-11장 가운데 로마의 이방인 크리스천들이 유대인들을 향해 스스로 교만하지 않아야 한다는 경고성의 당부를 길게 첨부한 것(11:13-24), 후반부 (14:1-15:13)에서 로마교회 안에 음식과 절기 문제와 관련하여 이것을 철저히 지키려는 약한 자(아마도 유대인 크리스천들과 이들을 동조하는 일부 이방인 크리스천들)와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강한 자(다수의 이방인 크리스천들)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점,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받은 것처럼 서로를 받아야 할 것을 당부하는 권면 등은 로마서가 로마교회의 현안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기록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라는 양자택일의 접근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관점과 강조점의 차이는 말할 수 있으나 한쪽을 택하고 한쪽을 부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실 고대사회에서나 현대사회에서도 100퍼센트 독자나 저자만을 위해서 쓰여 지는 편지는 거의 없다. 편지란 주로 이미 서로 알고 있거나 서로 관련되어 있는 당사자들 사이에 주고받는 것이다.44) 부모가 자신의 필요성에 의해 자기 자녀에게 편지를 보냈다하더라도 부모의 필요성은 자녀와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스승이 제자에게 보낸 편지도, 그 반대로 제자가 스승에게 보낸 편지도, 부부나 연인 사이에 주고받는 편지도, 혹은 목회자가 자기 교인에게 보낸 편지도 이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로마서가 우선적으로 바울 자신의 필요성에 의해 기록되었더라도 그것이 로마교회와 전혀 무관할 수는 없고, 로마교회의 필요성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바울 자신과 무관할 수 없다. 비록 로마교회가 바울에 의해 설립되지 않았고, 바울이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교회이긴 하지만, 로마교회가 바울과 전혀 무관한 교회는 아니다. 만일 로마교회가 바울과 전혀 무관하였다면, 그리고 로마교회나 바울이 서로 전혀 알지 못하거나 들어보지 못한 관계였다면 바울이 편지를 쓰지 않았거나 편지를 보냈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 달성을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16장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이미 로마교회 안에는 바울과 교분을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로마서 자체도 바울이 로마교회의 사정을 잘 알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로마서도 저자와 독자 사이가 결코 무관하다고 볼 수 없고, 저자와 독자의 필요성이 완전히 서로 별개의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예를 들면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로마에 있는 크리스천들이 자신의 스페인 선교에 후원자가 되어 줄 것과 자신의 예루살렘 방문이 안전하고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도록 기도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바울 자신의 필요성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만일 로마교회 안에 약한 자와 강한 자 그룹 사이에 심각한 갈등의 문제가 있다면 먼저 이 문제 해결 없이는 바울자신의 필요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처럼 로마교회의 필요성이든, 바울 자신의 필요성이든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만일 로마서가 우선적으로 로마교회가 당면한 문제들과 관련하여 써졌다면, 바울이 로마서를 써서 보낼 그 당시 로마교회는 어떤 문제에 직면하여 있었는가?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로마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바울이 로마서를 써서 보낼 당시 로마교회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로마교회가 언제, 누구에 의해 시작되었는가? 로마교회가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여기에 대한 역사적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로마교회의 현존을 알려주는 가장 초기의 역사적 자료는 바울이 쓴 로마서 자체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교회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의 글 가운데 언급되어 있는 베드로가 글라디우스 황제 즉위 2년인 AD 42년에 로마에 도착하였다는 내용에 근거하여(Historia Ecclesiastica 2.14),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설립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것은 역사적 근거가 없는 잘못된 주장이다.
사도행전 저자 누가는 AD 49년 년경에 개최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예루살렘 교회 회의 현장에 베드로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고(행 15:6-11), 바울도 동일한 예루살렘 회의를 전하고 있고(갈라디아 2:1-10), 그와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교제의 악수를 했다는 사실과(갈 2:9), 예루살렘 회의 이후에 베드로가 바울과 바나바가 목회하고 있던 안디옥 교회를 방문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갈 2:11-15). 만일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설립하였다면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를 언급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며, 사도행전 저자 누가도 이를 빠뜨릴 이유가 없다. 그래서 저명한 카톨릭 신학자인 피츠마이어(J. Fitzmyer)도 로마서 주석에서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설립하였다는 것은 역사적 근거가 없는 후대의 잘못된 설화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45)
로마교회의 기원을 밝힐 수 있는 정확한 역사적 자료는 없지만 로마교회가 AD 30년대에 로마에 있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에 의해 세워졌을 가능성이 크다. AD 1세기 이전에 이미 로마에 여러 개의 유대인 회당이 설립되어 있었다는 점과, 당시의 로마 지하 무덤 비석에 수많은 유대인들의 이름이 적혀있는 점 등을 감안해 볼 때, 1세기 무렵 로마에는 적어도 4,5천명 이상(많게는 2-3만명까지)의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46) 이들의 일부는 이미 마카비 시절(BC 160년경)에 팔레스틴에서 로마로 이주해갔던 사람들의 후예였을 것이고(1 Macc 8:17-22), 일부는 BC 63년에 로마의 폼페이(Pompey) 장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하였을 때 포로로 붙잡아갔던 수많은 유대인들의 후예였을 것이다(Josephus, Ant. 14.4.5.79; JW. 1.7.7.157; Pss. Sol. 2:6; 17:13-14). 그리고 일부는 로마제국의 수도이며, 정치, 경제, 교육의 중심지인 로마에 상업이나 정치나 혹은 교육을 목적으로 로마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Josephus, JW 2.6.1.80; 2.7.3.111).
유대 역사가 조세푸스(Josephus)는 팔레스틴 본토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헤롯왕의 뒤를 이어 유대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아켈레오(Archelaus)의 폭정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에 항의하기 위해 로마에 파송한 50명의 대표자들을 파송하였는데,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로마에 사는 8천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모였다고 말하고 있다(Josephus, Ant. 17.11.1.300). 그리고 시저와 아우구스 황제 때부터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언어, 문화, 종교의 전통을 유지할 수 있는 자유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Josephus, Ant. 14.10.8.214-15). 이와 같은 조세푸스의 글은 1세기 무렵 로마에 상당한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잘 조직되어 있었으며, 로마에 살면서도 예루살렘이 있는 본토의 유대인들과 교류 관계를 갖고 유대 종교와 문화와 관습을 보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47) 아마도 로마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도, 다른 지역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처럼, 유대인들의 종교와 관습을 고수하였으며, 예루살렘 성전 세금을 보냈으며, 예루살렘 순례 여행에도 동참하였을 것이다(Philo, Leg. ad Gai. 23.156).48)사도행전 저자 누가는 오순절의 절기 행사에 참여한 각 지역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열거하며(행 2:5-11),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이 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만일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듣고 회심한 3천명의 유대인들 가운데 로마로부터 온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면, 이들이 로마로 돌아가서도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로마교회를 세우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면, 로마교회의 기원은 예루살렘 교회의 시작과 거의 같은 AD 30년대로 소급해 갈 수 있다. 설령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통해 회심한 3천명의 크리스천들 중 로마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더라도,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과 로마를 자주 왕래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매우 이른 시기에 이들을 통해 기독교 신앙이 로마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바울은 로마서 긴 문안 인사(16장)에서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들 가운데 뛰어난 자들이요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하면서 로마교회 안에는 바울보다 먼저 기독교 복음을 받아 복음전파에 헌신한 사도급의 유대인 크리스천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49) 바울의 회심이 적어도 AD 34년 이전에 일어났다면,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부부는 예루살렘의 오순절 성령 사건에 동참한 120명의 성도들이거나(행 1:15-2:4), 바울이 전하고 있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500여 형제(고전 15:7)가운데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안드로니고와 유니아가 로마에 가서 로마의 유대인 공동체를 중심으로 기독교 복음을 전하고 로마교회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50)
1세기의 로마 역사가 슈에토니우스(Suetonius)의 “황제들의 생애”(Lives of the Caesars)에 따르면, 황제 클라디우스(Claudius)가 AD 49년경에 “크레스투스(Chrestus)의 추종자들 때문에 야기된 계속적인 소란 때문에 유대인들을 로마로부터 추방하였다”(Claud. 25:4)고 기록하고 있다. 만일 슈에토니우스가 기록하고 있는 “Chrestus"를, 여러 학자들의 주장처럼, “그리스도”를 뜻한다면,51) 적어도 AD 49년경에 이미 로마의 유대인 공동체 안에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과 믿지 않는 유대인들 사이에 적지 않은 갈등을 초래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결과 클라디우스 황제가 당시 로마에 확산되고 있었던 반 유대교운동(Anti-semitism)의 영향과 맞물려 로마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로마로부터 추방시켰으며, 이들 중에는 유대인 크리스천들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52) 바울이 고린도에서 클라디우스 황제에 의해 로마로부터 추방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 함께 거했다는 사도행전 18:2절도 이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런데 사도행전 저자는 바울이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바울의 선교 사역에 동참하였으며, 에베소에서 아볼로를 데려다가 복음을 전했다고 보도하고 있기 때문에(행 18:24-28),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나기전 로마교회의 유력한 멤버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53) 이것이 사실이라면 로마교회를 형성했던 초창기의 사람들은 주로 유대인들이었고 일부는 유대교에 참여하고 있었던 이방인들이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54) 그러나 이 유대인 신자들이 로마로부터 추방된 이후에도 로마교회는 남아 있는 이방인 크리스천들을 중심으로 존속, 발전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흐름과 함께 더 많은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와 로마의 유대인 공동체와는 독립된 이방인 중심의 교회를 형성하게 된 것 같다(롬 1:13; 11:13; 2:17; 3:9절 참조).55)
AD 54년에 황제 클라디우스가 사망하고 황제 네로(Nero)가 즉위했다. 네로는 즉위하면서 전임자의 유대인 로마추방 명령을 취소하였다. 따라서 바울이 로마서를 쓸 무렵에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경우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롬 16:3-4), 로마를 떠났던 많은 유대인 들이 로마로 귀환한 것 같다.56) 이것이 사실이라면, 로마교회를 세웠던 유대인 신자들의 귀환으로 말미암아 귀환한 유대인 신자들과 이미 다수를 차지하고 교회의 실제적인 운영을 책임지고 있던 이방인 신자들 사이에(1:13; 11:13참조), 특별히 반 유대교 영향을 받은 이방인 신자들 사이에, 적지 않은 긴장을 초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57)
이 긴장은 율법, 할례, 유대인의 정체성과 생활 방식, 이스라엘 민족의 장래 등의 문제와 관련해서, 유대인 신자들 사이와 이방인 신자들 사이에 이르기까지 긴장과 대립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58) 실제로 바울은 이방인 신자들과 유대인들과의 관계를 참 감람나무와 돌 감람나무에 비유하면서(11장), 이방인 신자들이 당시 로마 사회에 풍미하고 있던 반 유대교적 관점 아래, 스스로 자긍하지 않도록 권면하고 있다(11:17-24). 14장에서는 아마도 유대인들의 음식 문제와 관련하여 이방인 신자들이 유대인 신자들의 생활 태도를 비판하지 말고, 서로 관용으로 용납할 것을 권면하고 있으며(특히 14:1-4,10,13, 15,20; 15:7),59) 그 밖에도 여러 곳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과 관련된 언급을 하고 있다(1:16; 2:9-11; 3:22,29; 9:23; 10:12).60)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많은 학자들이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주된 목적은 로마교회가 안고 있던 소수의 유대인 신자들과 다수의 이방인 신자들과의 올바른 관계를 확립하기 위해서였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61)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로마서를 쓸 무렵 바울이 그 자신의 생애와 사역에 있어서 결정적인 전환점에 놓여 있었다는 점은, 로마서가 바울 자신의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해주고 있다.62) 바울은 로마서 웅대한 세계 선교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11:25-28). 그리고 이제 지중해 동부 지역 선교를 끝내고(15:19-23) 서부 지역인 스페인 선교 계획과 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15:24,28). 이 뿐만 아니라, 서두에서부터 자신의 사도됨과 자신이 전파하는 복음에 대한 강하게 천명하고 있다(1:1-17). 이러한 바울 자신의 진술은 로마서가, 바울이 뜻하고 있는 스페인 지역 선교와 관련하여 로마교회에 먼저 사도된 자신과 그 동안 전파해왔던 복음을 알리면서, 미래의 자기 선교에 그들의 도움을 기대하기 위해 쓰여 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63)
만일 소아시아나 로마 지역과는 달리 스페인 지역에는 바울의 선교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접촉점이 되었던 유대교 회당이 거의 없었다면,64) 바울의 스페인 선교에 있어서 재정적, 문화적 (특히 언어면)인 면에 있어서 로마교회의 지원은 필요불가결한 요소였을 것이다.65)
그리고 상당한 유대인 신자들이 로마교회에 소속되어 있었고 그들이 예루살렘이나 소아시아지역의 유대인들과 빈번한 접촉이 있었다고 본다면, 바울이 로마서를 쓰기 전에 로마교회가 바울이 전파한 율법과 관계없는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는 물론, 이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에 대한 유대주의자들의 심각한 반대운동도 이미 듣고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은 스페인 선교와 관련하여 로마교회를 방문하기 전에 자신이 그 동안 전파한 복음을 그들에게 보다 자세히 해명하여야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1:10-15). 특별히 바울의 이방 교회들이 준비한 부조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 문제가 단순한 물질적인 지원 이상의 의미, 곧 헌금을 통한 이방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와의 연합의 의미를 지녀, 로마교회의 방문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면,66)어려운 상황이 예측되는 예루살렘 방문과 관련하여(참조 행 21:1-16), 그들에게 이와 같은 해명의 편지를 보내어야할 필요성이 더욱 증대하였을 것이다.
바울이 예루살렘 방문과 관련하여 로마 교회의 후원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는 점은 다음과 같은 바울의 부탁에서 엿볼 수 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 하게하고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15:30-32).” 절벨(J. Jervell)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67) 바울은 로마 교회에 대한 자신의 해명을 담고 있는 로마서를 로마 교인은 물론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을 때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자신의 해명을 위한 자료로 삼으려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68)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 어떤 특수한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로마서를 썼다고 보기보다, 오히려 바울 자신과 로마교회의 역사적 정황과 관련하여 신학적, 선교적, 목회적 등 다방면의 필요성 때문에 썼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69)
5. 로마서의 중심 주제는 무엇인가?
바울이 로마서를 통하여 제시하고자 하는 중심 주제가 무엇인가? 로마서의 중심 주제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조건과 잘 부합하여야 할 것이다. 첫째,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제시하고 있는 여러 가지 내용을 전체적으로 통일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로마서의 어떤 특정한 부분에 한정된 주제가 아니라 로마서 서신 전체를 통해서 일관성 있고 지속적으로 제시된 주제이어야 한다. 셋째, 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과 잘 부합하여야한다. 이런 조건에 부응하고 있는 중심 주제가 무엇이며, 그것이 로마서의 전체적인 구조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바울이 서문(1:1-17)과 결언(15:14-16:27) 부분에서 로마서를 거듭 “복음”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서문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하심을 받았으며”(1:2)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전하기를 원한다”(1:15)며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1:16).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다“(1:16). “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1:17)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결언 부분에서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하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15:19-20),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16:25),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운 하나님“(15:26)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바울은 로마서를 서언 부분과 그리고 로마서를 마감하는 결언 부분에서도 반복적으로 ”복음“이란 말을 로마서를 대변하는 표제로 삼고 있다. 이것은 사실상 바울이 로마서를 복음을 설명하고 전하기 위해 썼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70) 그렇다면 바울이 로마서를 통하여 제시하는 ”복음“이 무엇인가? ”복음“이 로마서의 표제라면, 복음의 내용인 로마서의 중심 주제가 무엇인가?
바울은 로마서의 주제 구절로 불리어지는 1:16-17절에서 “복음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부터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에 이 복음을 믿는 자에게는 복음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인종과 신분에 관계없이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3:21절 이하에서 이 복음을 설명하여 이것은 율법과 관계없이 나타난 하나님의 의임을 선언한 다음, 3:22절 이하에서는 이 하나님의 의를 인종과 신분을 초월하여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받게 되는 이신칭의의 의임을 천명한다. 종교개혁자들을 위시하여 많은 주석가들이 하나님의 의, 곧 이신칭의의 복음을 로마서의 중심주제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복음의 중심 내용인 “의”, 곧 ‘이신칭의’(以信稱義)가 로마서 전체의 내용을 통합시키는 중심주제로 볼 수 있는 근거가 있는가? 바울이 로마서에서 율법과 그토록 강하게 대조시키고 있는 ‘은혜’나 그렇게 자주 나오는 ‘믿음’, 혹은 ‘구원’이나, 혹은 ‘그리스도에게로의 참여’등을 로마서의 중심주제로 볼 수 없는가?
데이터와 그 분석
우리가 ‘이신칭의’(以信稱義)를 로마서의 가장 중요한 중심주제로 볼 수 있는 점은 우선 이신칭의와 관련하여 로마서에 여러 번 나타나고 있는 어휘들, 이를테면, ‘의’(義) 어휘군인 ‘의롭게 하다’(dikaiovw), ‘의’(dikaiosuvnh), ‘의로운’(divkaio"), ‘의롭다함’(dikaivwma), ‘의롭다하심’(dikaivwsi")과, ‘믿음’ 어휘군인 ‘믿음’(pivsti"), ‘믿는다’(pisteuvw)와 그리고 이신칭의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율법 어휘군인 ‘율법’(novmo"), ‘율법의 행위’(e[rgwn novmou) 등이 아래의 도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여러 바울 서신 중에서 유독하게 로마서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①의(義) 어휘군
의롭게하다(dikaiovw) 의(dikaiosuvnh) 의로운(divkaio") 의롭게함(dikaivwma) 의롭다하심(dikaivwsi")
고전 2 1 0 0 0
고후 8 7 0 0 0
갈 0 4 1 0 0
엡 0 3 1 0 0
빌 0 4 2 0 0
골 0 4 2 0 0
살전 0 0 0 0 0
살후 0 0 2 0 0
딤전 1 1 1 0 0
딤후 0 3 1 0 0
딛 1 1 1 0 0
빌몬 0 0 0 0 076)
②믿음과 율법 어휘군
믿음(pivsti") 믿다(pisteuvw) 율법(novmo") 율법의 행위(e[rgwn novmou)
고전 7 9 9 0
고후 7 2 0 0
갈 22 4 32 681)
엡 8 2 1 0
빌 5 1 3 0
골 5 0 0 0
살전 8 5 0 0
살후 5 4 0 0
딤전 19 3 2 0
딤후 8 1 0 0
딛 6 2 0 0
빌몬 2 0 0 0
위의 도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로마서에는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는 도무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이신칭의’와 관련된 어휘들인 ‘의’, ‘믿음’, ‘율법’ 용어들이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은 로마서의 주제가 이러한 어휘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신칭의’와 관련된 이들 어휘들이 로마서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로마서의 중심 주제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우리가 이들 어휘들의 용법과 이들 어휘들이 나타나고 있는 문맥을 조사해 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다.
①동사 ‘의롭게 하다’(dikaiovw)의 경우 항상 하나님이 동사의 행동을 이루어 가시는 주체로 소개되고 있다. 그 이유는 동사가 능동태로 사용될 경우에는 항상 하나님이 동사의 직접적인 주어로 나타나고 있으며(3:26,30; 4:5; 8:30,33), 수동태로 사용될 경우에는 항상 하나님의 행동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신적 수동태 형식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2:13; 3:4,20,24,28; 4:2; 5:1,9; 6:7; 8:30).82) 명사 ‘의’(dikaiosuvnh)의 용법에서도 ‘의’의 신적 특성이 강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34번의 명사 용법 중에서 5번의 경우에 이 의‘가 ’하나님의 의‘로(1:17; 3:5, 21,22; 10:3), 2번의 경우에 하나님을 가리키는 인칭대명사와 함께 ’그의 의‘(3:25,26)로 표기되어 있고, 5번의 경우에는 이 ’의‘가 하나님의 행동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신적 수동태 동사와 함께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로마서에서 ’의‘는, 그것을 우리가 하나님의 법적인 선언으로 보든,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선물로 간주하든, 혹은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로 이해하든, 혹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의 행위로 받아들이든, 혹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구원행위로 보든 우선적으로 그것은 인간의 사역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사역임을 강조하고 있다.83)
②동사 ‘의롭게 하다’(dikaiovw)나 명사 ‘의’(dikaiosuvnh)가 많은 경우에 인간의 어떤 응답이나 행동을 반영하고 있는 동사 ‘믿다’(pisteuvw)나, 명사 ‘믿음’(pivsti")과 함께 사용되고 있다. 즉 ‘믿음’ 혹은 ‘믿는다’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의롭게 하거나 혹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의를 주시는 통로로, 혹은 인간이 하나님의 의를 받는 수단으로 제시되고 있다. 예를 들면 동사 ‘의롭게 하다’는 5번의 경우 명사 ‘믿음’과 함께(3:26,28,30; 4:5; 5:1), 1번의 경우 동사 ‘믿는다’와 함께 사용되고 있고(3:26), 명사 ‘의’는 10번의 경우 명사 ‘믿음’과 함께(1:17; 3:22,25,26; 4:5,9,11,13; 9:30; 10:6), 7번의 경우 동사 ‘믿는다’와 함께 사용되고 있다(1:16-17; 3:22; 4:3,5,11; 10:4,10). 로마서에서 ‘의’가 명사든 동사든 자주 동사 ‘믿는다’나 혹은 명사 ‘믿음’과 함께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적어도 로마서에서 강조되고 있는 ‘의’는 믿음과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84) 말하자면 하나님의 사역인 의는 우리의 믿음을 매개체로 하여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는 것이다.
③특히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3:20-31절에서 의와 믿음은 서로 제휴관계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의와 율법은 이와 대조적으로 서로 반위관계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3:20절은 “율법의 행위로는 그 누구도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없다”, 3:21절은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 그리고 3:28절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다”고 하면서, 율법은 결단코 의를 위한, 혹은 의에 도달하는 수단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이와 반면에, 3:22절은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의이다”, 3:26절은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3:28절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 3:30절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다”고 하면서 믿음이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수단임을 강조한다. “의”가 믿음과는 긍정적인 관계로, “율법”/“율법의 행위”와는 부정적인 관계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은 율법, 혹은 율법의 행위는 결코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바울의 어느 서신에서보다도 로마서에서 ‘이신칭의’와 관련된 ‘의’, ‘믿음’, ‘율법’등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이신칭의’가 사실상 로마서의 중심 주제임을 강하게 시사해준다. 그리고 로마서에서 ‘의’ 어휘들이 많은 경우에 하나님과 함께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의’가 신적 기원이나 혹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역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의’ 어휘들이 같은 문맥에서 인간의 행위를 요구하는 율법과는 부정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역에 대한 신뢰와 수용을 요구하는 믿음과는 긍정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점은 신적인 의가 인간을 위해 마련되었으며, 그리고 이 의가 그리스도를 믿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며, 인간 안에서 믿음을 통해 작용하는 의임을 강조해준다.85)이처럼 로마서에서 의가 한편으로 신적인 강조를, 또 다른 한편으로 믿음을 함께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이신칭의’를 로마서의 중심 주제로 볼 수 있는 성경적 근거가 된다.86)
‘이신칭의’의 의미
그렇다면 로마서에서 ‘이신칭의’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로마서에서 ‘이신칭의’가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먼저 ‘의’ 혹은 ‘의로운’, ‘의롭게 하다’가 로마서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87) 로마서에서 ‘의’가 종종 속격인 ‘하나님의’나 하나님을 지칭하는 인칭소유대명사 ‘그의’와 함께 사용되고 있다는 점, ‘의’가 하나님의 행동하심을 간접적으로 강조하는 신적인 수동태와 함께 사용되고 있는 점, ‘의롭게 하다’의 동사가 신적인 수동태나 하나님을 직접 주어로 가진 능동태 동사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로마서에서 ‘의’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되었거나, 하나님에게 소속되어 있거나, 혹은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었거나, 혹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자면, 로마서에서 의는 우선적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 유지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인 의나,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킬 것을 요구하는 율법/율법의 행위를 인간이 준행함으로써 인간이 하나님 앞에 가지는 율법적 의를 가리키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88) 오히려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과 더불어 맺은 언약관계를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성실하게 유지함으로써,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고, 보존하시고, 그리고 그의 모든 피조세계를 회복하시는 하나님 중심의 구원론적이고, 종말론적이며, 언약적인 의를 가리킨다는 것이다.89) 로마서 1:16-17절에서 하나님의 의를 구원의 능력과 연결시키고 있는 점이라든지, 로마서 3:23절에서 먼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모든 사람의 죄인 됨을 지적한 다음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 이점을 분명히 한다.90)
이처럼 로마서에서 이신칭의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임을 보여준다. 바울이 이신칭의의 내용이 들어있는 복음을 그의 서문과 결언에서 거듭 거듭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부르고 있는 사실도 이 점을 뒷받침 해 주고 있다. 이신칭의가 전폭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은 우리가 로마서를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의롭게 될 것인가 하는 인간 개인의 구원론적인, 혹은 실존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기보다도 오히려 하나님께서 전 인류와 그의 피조물을 구원시키고 회복시키기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하는 하나님중심의 관점, 곧 하나님의 언약적이거나, 구원역사적이거나, 종말론적 관점에서 접근하여야 할 것을 일깨워준다. 그런데 문제는 ‘이신칭의’를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자에게 은혜로 주시거나 예수를 믿는 신자에게 돌리는 하나님의 법적인 선언이나 혹은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은혜로운 구원의 선물로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자신의 의롭게 하는 구원행위 그 자체와 관련하여 이해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어떤 주석가들은 종교개혁자들을 따라 ‘의’를 인간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믿는 예수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는 법정적인 의나 혹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신 의를 예수 믿는 자에게 주는 선물로서의 의로 보고자한다.91) 이들은 로마서에서 ‘의’가 자주 ‘믿음’의 어휘들과 함께 사용되고 있음을 주목한다. 반면에 다른 어떤 주석가들은 이 ‘의’를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신실한 구원행위 혹은 언약의 성취인 창조적 행위로 보고자 한다.92) 이들은 로마서에서 이 ‘의’가 자주 하나님과 속격관계로 나타나고 있는 점과, 이 ‘의’가 하나님의 행동을 강조하는 신적수동태와 함께 사용되고 있는 점에 주목한다.93) 우리가 볼 때 전자는 후자의 주장에 약점이 되고 있으며, 후자는 전자의 주장에 약점이 된다.94)
로마서에서 의가 전자와 후자의 문맥에 꼭 같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로마서에서 의는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 이해되어서는 안됨을 보여준다. 로마서에서 의는, 마치 성경에서 성령이 하나님/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인 동시에 하나님/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신적 활동과 임재의 근원인 것처럼,95)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의를 인간에게 전가(轉嫁)하거나 혹은 선물로 제공하는 의인 동시에, 또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인간과 그의 피조세계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행위, 혹은 종말론적인 주권회복으로서의 의이기도 하다.96)
①로마서에서 의가 이와 같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로마서의 주제 구절로 간주되고 있는 1:16-17절에서 확인된다. 바울은 1:16절에서 복음을 가리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17절에서 왜 복음이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느냐 하는 문제가 관련하여,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주제 구절에서 제시하고 있는 “복음=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하나님의 의=나타나고 있음(현재시제)”의 도식은 하나님의 의를 단순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이나 혹은 법적인 선언으로만 볼 수 없게 한다. 오히려 ‘의’를 복음을 통하여, 복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계속하여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자신의 역동적인 신실하신 구원사역으로 보게 한다.97) 그러나 동시에 주제 구절에서 바울이 4번이나 ‘믿음’ 어휘를 사용하여 이 ‘의’를 사람들 편에서의 응답인 믿음과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는 점은 복음이 그 자체 하나님의 능력이며,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고 있다 할지라도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실제로 그들에게 주어질 수 없고, 하나님의 의가 그들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는 믿음을 통하여, 믿음이 있는 곳에 역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②의의 이러한 양면성은 바울 복음의 심장으로 불리어지는 3:21-31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98) 3:21절에서 바울은 율법과 관계없이, 그러나 율법과 선지자들, 곧 구약성경으로부터 증거를 받고 있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다고 선언한다.99) 즉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먼저 주신 율법을 통한 의가 실패하자 그 대신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를 차선책으로 주셨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처음부터 율법과 관계없는 의를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시고, 이 언약적 의를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계속하여 확인하셨다. 마침내 이 언약적 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3:24-26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속죄적, 화목적 죽음을 통해서 이루신 하나님의 의를 말하면서 항상 하나님을 동사의 주어로 삼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언약 아래에 있었던 이스라엘백성들과 지금 예수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과 속죄와 화목제물로 세우셨다.100) 그리고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값없이 의롭게 하신다고 말한다.101) 하나님의 의를 우선적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자신의 사역으로 보아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3:21-26절에서 거듭 거듭 이 ‘의’를 믿음과 연결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3:22, 25, 26), 3:27-31절에서도 4번이나 믿음이란 어휘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신실하신 의가 우리의 믿음과 분리되어, 혹은 믿음과 관계없이 작용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③의의 양면성은 4장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믿음과 의에 대한 서술에서 보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바울은 4장에서 의가 인간의 행위(혹은 율법의 행위)에 의존하지 않고 믿음에 의존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아브라함을 의롭게 하셨는가를 설명한다. 바울은 세 번이나 “아브라함이 하나님(혹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 여겨셨다”(4:3, 9, 22)라고 말한다. 우리가 여기서 의와 관련된 동사 ‘여긴다’(ejlogivsqh)가 하나님의 행동을 강조하는 신적 수동태로 사용되고 있는 점을 보아 의의 원천이 아브라함의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행동에 있음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거듭 거듭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의 행위 하심과 그 행위 하심의 결과가 아브라함에게 미치는 근거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의를 믿음과 결코 분리시키거나, 믿음을 이 의와 분리시켜 말 할 수 없다. 오히려 이 의는 믿음을 산출하고, 그 믿음을 수단으로 하여, 믿음 안에서, 믿음과 더불어 작용하는 역동적인 의로 볼 수 있다.102) 바울이 4장에서 두 번(4:11, 13)이나 이 의를 “믿음의 의”(dikaiosuvnh" pivstew" )라고 부르고 있는 점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믿음이 의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의가 인간의 믿음을 산출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바울이 의를 성령과 연결시키고 있는 사실이(고전 6:11) 이 점을 확인시켜 준다.
④이와 같은 의의 양면성의 문제는 바울이 이스라엘백성의 구원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9-11장에서 다시 나타난다.103) 바울은 10:3절에서 이방인들이 받은 의를 두 번이나 이스라엘백성들이 율법을 통하여 추구하려는 “자기의 의”와 대조하여 “하나님의 의”라고 부름으로써 의가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동시에 전자를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th;n dikaiosuvnhn th;n ejk tou" novmou)로(10:5; 참고 9:31), 후자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hJ de; ejk pivstew" dikaiosuvnh)로(9:30; 10:6)라고 부름으로써 하나님의 의는 믿음과 떠나서 주어지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이처럼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인 동시에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인간의 책임적인 응답인 믿음을 매개체로 하여 우리 안에 역사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하나님의 사역+인간의 사역(믿음)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울이 아무리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인간의 책임적인 응답인 믿음을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이신칭의를, 혹은 바울의 구원론을 신인협력설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울이 거듭해서 의가 율법, 혹은 율법의 행위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신칭의에 있어서 인간의 공헌이나 자리를 배제하고 있다. 이신칭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다. 사실상 믿음이 하나님의 약속이나 복음의 선포와 동떨어져 일어날 수 없다고 하는 점은 믿음도 인간자력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임을 일깨워준다. 믿음을 공로나 행위로 간주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신칭의’의 근거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우리가 로마서에서 “의”를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신 행위의 관점에서 보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법적인 선언이나 은혜의 선물로서 보든 이 ‘의’를 실제로 가능하게 하는 근거, 혹은 의의 방편이 되는 믿음의 기반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적, 종말론적인 의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의 역사 안에서 마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적/화목적 죽음이다.
①바울은 로마서 1:1절에서 자신이 사도로서 전파하여야 하는 복음이 “하나님의 복음”임을 천명한 다음, 바로 이어 2절에서 이 복음은 성경의 약속에 따라 육신으로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9절에서 이 복음을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이라고 부른다. 그런 다음 주제 구절인 1:16-17절에서 이 아들의 복음이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임과 이 아들의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②이와 같은 로마서 1장의 내용은 로마서 3:21-26절과, 4:25절, 5:6-21절, 10:4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첫째, 로마서 3:21-26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적/화목적 죽음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언약적 의의 나타내심임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이 의로우시고,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적 의가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의 나타나심이라고 하는 점이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신실하신 행위는 물론 인간의 행위가 전적으로 배제되는 믿음을 통하여 주어지는 법정적인 선언, 혹은 은혜의 선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5:17절 참조).104) 둘째, 4:25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의의 근거가 됨을 다시 확인한다. 셋째, 5:6-21절에서 바울은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 같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얻게 되었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5:9절 참조)이 하나님의 의의 근거가 됨을 강조한다. 넷째, 10:4절의 “그리스도는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의 의의 완성임을 밝힌다.105)
義의 수단으로서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이미 앞에서 지적한대로 바울은 로마서에서 여러 번에 걸쳐서 의 어휘들을 믿음 어휘군과는 긍정적인 관계로, 반면에 율법 어휘들과는 부정적인 관계로 설정한다. 아마도 이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실례는 로마서의 사실상의 주제문단으로 볼 수 있는 3:20-28절의 본문일 것이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마련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는 수단은 ‘율법의 행위’(ejx e[rgwn novmou)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dia; pivstew" Ihsou" Cristou")임을 거듭 강조한다.106) 의에 도달하는 수단과 관련하여 서로 대칭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율법의 행위’(ἐξ ἔργων νὀμου)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διἀ πίστεως Ἰησού Χριστού)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
전통적으로 학자들은 행위와 율법,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속격관계를 다 같이 목적 속격관계로 이해하여, ‘율법의 행위’를 율법의 요구에 대한 인간의 행위로107),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믿음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적지 않은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목적 속격관계보다 주격속격관계로 본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믿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믿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성으로 해석하고자 한다.108) 그러나 다음 몇 가지 사항들은 전통적인 입장을 고수하여할 근거가 된다. 첫째, ‘율법의 행위’가 율법에 대한 인간의 행위를 가리킨다고 한다면, 같은 병행으로 나타나고 있는 ‘그리스도의 믿음’도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믿음을 가리킨다고 보아야한다. 둘째, 바울은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우리의 구원/의의 근거로 말하고 있으나, 하나님의 신실성(롬 3:3)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성을 우리의 구원의 근거나 혹은 수단으로 제시하지 않는다.109) 셋째, 로마서에서 여러 번 의가 인간의 믿음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 ‘믿는다’와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1:16-17; 3:22; 4:3,5,11; 10:4,10).110) 반면에 그리스도가 믿는다는 언급은 없다.
혹자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믿음을 강조할 경우,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율법의 행위와 다를 바가 무엇이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의를 그 속에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과,111) 복음은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성령의 역사를 동반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참고, 갈 3:3-5; 고후 4:13) 우리가 아무리 믿음을 강조한다하더라도 믿음은 결국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112) 넷째, 바울 당대 고대 헬라어에서 믿음과 함께 속격관계의 단어가 사용될 때 주격속격보다 주로 목적 속격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의 독자들은 목적속격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113)
의의 표현으로서 순종
의를 법정적인 선언, 전가(轉嫁)된 의, 혹은 선물로서 볼 때는 이 의가 신자의 행위와는 관계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여 질 수 있지만, 의를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신 행위로 볼 경우 이 ‘의’는 처음부터 신자의 삶의 변화를 전제하고 있는 역동적인 의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유대주의자들 때문에 이 ‘의’를 한편으로 율법이나 행위와 부정적으로 대조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이 ‘의’를 믿음과 긍정적으로 병행시키고 있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이 ‘의’가 결코 신자의 삶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①바울은 로마서에서 여러 번 ‘순종’(uJpakoh)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1:5절에서 바울은 이 순종이 믿음과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믿음의 순종’(uJpakoh;n pivstew")이라고 말함으로써,114) 이 순종이 믿음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의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암시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의가 신자의 삶/순종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은 이미 주제 구절인 1:16-17절에서 의를 구원의 능력으로 말하고 있는 점과,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하박국 2:4절의 인용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의가 신자의 삶의 순종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점은 6장에서 보다 명쾌하게 설명되어지고 있다. 6장에서 바울은 신자를 한 때 죄의 종 되었던 상태에서 해방되어 이제는 의에게 종된 자로 규정하면서 죄와 의를 다 같이 인간을 지배하는 주권적인 힘으로 표현한다. 즉 인간은 죄의 지배를 받든지 아니면 의의 지배를 받든지 둘 중 어느 하나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게 된 것은 인간을 지배하는 주권자가 바뀌어졌다는 것을 뜻한다(6:6-11). 따라서 신자는 자신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며(6:13),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러야한다(6:19)고 말한다. 심지어 그는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른다”(6:16)고 말하면서 하나님/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있는 순종이 의를 유지하게 하는 길임을 암시한다.
②성령의 사역 문제를 다루는 8장 10절에서 바울은 의의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가 신자 안에 계시는 것은 성령이 신자에게 계시는 것을 가리키며, 성령이 신자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의를 통하여 성령께서 신자를 생명에 이르게 한다고 말한다.115) 이처럼 바울이 의를 성령의 사역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바울에게 있어서 의는 성령을 통하여 신자 안에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종말론적인 의임을 보여준다.116)
③바울은 로마서 12장 이하에서 여러 가지 권면적인 교훈을 통하여 6장-8장에서 말한 신자가 죄의 종이 되지 않고 의에게 종이 되는 것, 곧 죄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성령의 지배를 받은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임을 보여준다. 로마서 12장 이하의 교훈이 단순한 윤리적인 권면이 아니라, 바로 로마서 전체의 중심 주제인 이신칭의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볼 때,117) 우리는 로마서의 결론 부분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여러분들을 받은 것처럼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받으라”(15:7)는 교훈의 깊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118) 여기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받았다는 말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의와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이 서로 받으라는 권면은 이 ‘의’를 삶을 통해 구현하라는 교훈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신칭의와 로마서의 구조
로마서의 중심주제인 ‘이신칭의’와 로마서 전체 구조와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이미 우리는 의의 대한 설명에서 ‘이신칭의’의 주제가 로마서 전체내용을 통합시키고 있음을 제시하였다. 바울은 인사와 서문의 마지막 부분을 시작하는 1:15절에서 먼저 자신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한다는 의지를 밝힌다. 그리고 이어 1:16-17절의 주제 구절에서 복음의 내용, 곧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으로서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말한다. 그런 다음 바울은 1:18-3:20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다 같이 죄인으로서 복음 안에 제시되고 있는 하나님의 의를 필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3:21-3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구체화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행하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선물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음을 천명한다. 4장에서는 바울은 아브라함을 실례로 들어 3:21-31절에서 말한 ‘이신칭의’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5-8장에서 바울은 아담/죄/율법과 그리스도/의/성령과의 구원 역사적 대조를 통하여 의의 구원 역사적 역동성을 설명한다.119) 동시에 이곳에서 ‘이신칭의’는 신자의 신분의 영역에서는 물론 신자의 삶의 영역에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9-11장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궁극적 구원문제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자신의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밝힌다. 로마서의 후반부인 12-15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마땅히 신자의 순종적 삶을 통하여 구현되어져야 함을 밝힌다. 그리고 결언 부분을 마감하는 16:25-27절에서 하나님의 의를 그 내용으로 가지고 있는 자신의 복음이 바로 주제 구절에서, 그리고 3:21절에서 말한 바대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계시임을 밝힌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신칭의’는 로마서 서언과 본론과 그리고 결언에 이르기까지 로마서의 전체구조를 통일시키는 중심 주제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신칭의’의 복음을 중심으로 로마서의 간략한 문학적 구조를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자 한다.
‘이신칭의’의 복음으로서 로마서의 구조
서언: 1:1-17(A)
서문인사(1:1-7)
감사문단(1:8-15)
주제문단(1:16-17)
본론: 1:18-15:13(B)
이신칭의 복음의 필요성(1:18-3:20)
이신칭의 복음의 내용(3:21-11:36)
이신칭의 복음의 실천(12:1-15:13)
결언: 15:14-16:27(A')
최근에 신약학자들 사이에 ‘이신칭의’를 바울이 다메섹 사건에서 받은 신적 복음의 중심으로 보지 않고, 바울의 이방선교의 신학적, 변증적, 목회적 산물로 보는 자들이 적지 않게 있다.120) 그러나 일찍이 메이천(Machen)이 지적한대로 바울의 이방선교가 ‘이신칭의’를 가져온 것이 이 아니라 그의 ‘이신칭의’의 복음이 이방선교를 가져왔다.121) 복음 없이 바울의 선교를 생각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의 복음의 중심내용인 ‘이신칭의’의 메시지 없이 그의 선교를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는 바울의 제 1차 선교여행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이미 ‘이신칭의’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행 13:39,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예수 그리스도]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은 이점을 뒷받침해준다.
사실상 바울에게 있어서 ‘이신칭의’는 그의 유대인과 이방인을 다 포함하는 우주적이고 종말론적인 복음의 중심적인 메시지 일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그의 신학의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이 어떤 분이시며, 그들의 사역은 무엇인지가 ‘이신칭의’의 복음을 통해서 가장 잘 드러나고 있다.122)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과 전 피조물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진 존재이며,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지가 ‘이신칭의’의 복음을 통해서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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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heCovenant 원문보기 글쓴이: 김수영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