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1월18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청주] 주님은 명의시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히브 4, 1 - 5, 11
† 복음 : 마르 2, 1 - 12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는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을 통하여,
가톨릭 신자들에게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할 것을 권장하였다. 이러한 뜻에 따라 교회는 해마다 1월 18일부터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인 25일까지를 ‘일치 주간’으로 정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간구하는 공동 기도를 바치고 있다.
★ 히브리서의 저자에 따르면, 구약에서 하느님의 안식처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먼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최종적으로 가야 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며, 두 번째로는
세상 창조를 완성하신 이렛날이다. 이제 신약의 백성은 충실한
믿음으로 하느님 나라라는 새로운 안식처에서 진정한 창조의
완성인 새 하늘과 새 땅을 희망해야 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치신다. 그런데 이는 중풍 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그를 예수님께 힘들여 데려온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베푸신 것이다. 또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심으로써 그의 마음까지도 깨끗하게 치유해 주신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그를 데려온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사제가 로마 시내에서 어느 한 거지를 만났습니다. 알고 보니
그 거지는 자신과 같은 날 사제가 된 신학교 동료였는데, 그가
성소를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사제가 다음 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알현하게 되었을 때, 친구 거지의 상황을 전했습니다.
교황은 그 거지와 함께 저녁 식사에 초대하였습니다. 저녁 식사
끝에 교황은 거지와 둘만 있게 해 달라고 하였고, 둘만 남게 되자
교황은 그에게 자신의 고해성사를 청하였습니다. 거지는 환속한
자신은 더 이상 사제가 아니라고 말하자, 교황이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로마의 주교입니다. 이제 잃어버린 당신의 사제 권한을
수여합니다.”
그는 교황에게 고해성사를 주었고, 이어 그 거지 사제 역시
교황에게 고해성사를 청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것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에게 그가 구걸했던 거리에서 걸인들을
돌보는 일을 맡겼습니다.
이 사제가 죄를 용서받기까지 스스로 한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직 동료 사제와 교황의 도움만이 있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주위의 선한 마음을 소중하게 여기시어
그가 회개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갔던 네 사람의 정성스러운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그가 온전하게 되살아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 자신이 잘나서 용서받고
의인처럼 살 수 있었던 것만은 아닙니다. 누군가 우리를 위해
부단한 기도와 노력을 했던 것입니다.
-매일 미사 -
◈ [청주] 주님은 명의시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1월18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 마르코 2,1-12
주님은 명의시다.
몸에 향수를 뿌리고 얼굴에 화장을 하여도 몸도 얼굴도 변하지
않습니다. 새 옷을 갈아입고 치장을 해도 그 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겉모양이 달리 보일 뿐입니다. 마음은 그대로 두고
요란을 떨면 떨수록 본래의 모습은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을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를 당신 앞에
내려놓은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마르2,5)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외적인 중풍병을 고치려고 왔는데 주님께서는 그 원인을 치유시켜
주심으로 사람의 근본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평범한 의사는 상처를
다스리고 명의는 뿌리를 다스린다고 했는데 바로 우리의 주님이
명의이십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뿌리에 생명을 더하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겉은 멀쩡한데 속이 뒤틀린 사람이 있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탓을 남에게 돌리며
투덜대기 좋아하는 사람, 정말 치유를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처지를 다 꿰뚫고 계시니 그분 앞에
서슴없이 나의 모든 것을 열어드려야 하겠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를 하지 않는 영혼은 중풍병에 걸렸거나
손발이 부자유스럽게 된 사람과 같아서, 손과 발에게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듣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만약에 이런 영혼들이 그
커다란 비참을 깨닫지 못하고, 따라서 스스로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롯의 아내가 고개를 돌리다가 소금 기둥이 된 것처럼
자기한테서 머리를 돌린 탓으로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리고 말 것”
(영혼의 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중풍환자,
즉 영적인 감각을 상실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접하고도 아무런 깨달음을 갖지 못하고
은총에 감사할 줄 모른다면 장애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읽지 않고 보관만 하고 있거나 또 설령 읽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고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상태가
중풍환자나 다름없습니다. 기도 안에서 치유받기를 희망합니다.
이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생각합니다.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려온
사람들의 마음이 아름답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자 지붕을 벗겨내는 열성으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마르2,4).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위해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할 수 있는 마음을 담고 있는가? 또한 나를 위해 그렇게 해
줄 이웃이 있는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이웃사촌이라 하지만 요즘
세상은 서로를 너무 모르고 지내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웃을 향한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길 청하면 주님이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실
것입니다. 겉모양도 중요하지만 속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사람들이 중풍환자를 예수님께 데려간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넘어야 할 두 가지 장벽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군중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이 가니까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뚜렷한 목적과
소신을 가지고 가야합니다. 나의 인생은 남이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요, 군중에 떠밀려가듯이 가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인생의 선장입니다.
두 번째의 장벽은 지붕이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를 들것에 매달아 내려 보냈습니다. 막히면
뚫고 걷어내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위대합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기적을
낳습니다. 그 믿음이 내 믿음이든 다른 사람의 믿음이든 믿음을
갖고 하는 일에는 그에 상응하는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들 것에 누워있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고,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혹 누워있다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제게 눈이 있어 보는 것이 아니라
빛이 있어 보는 것임을 깨닫게 하소서.
제게 코가 있어 숨쉬는 것이 아니라
산소가 있어 숨쉬는 것임을 깨닫게 하소서.
제게 귀가 있어 듣는 것이 아니라
공기가 있어 들리는 것임을 깨닫게 하소서.
제게 입이 있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가르쳐 주셨음을 깨닫게 하소서.
지구가 중심이 아니고 태양이 중심이듯
나 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새롭게 하소서. 아멘” -유광수-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어렵다고 포기하는 삶이 아니라
전에 어떤 청년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던 중에 이런 말을 합니다.
“신부님, 직장 다니기 너무 힘들어요. 저 그냥 때려치우고 신부나
될까요?”
웬만하면 “그래 잘 생각했다. 신부님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데…….”라고 이야기하겠지만, 애인도 있고 또한 신앙적으로
많이 부족한 이 친구가 신학교에 들어가서 신부가 된다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울 것 같아서 차마 말을 못했지요. 대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신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기도도 많이
해야지, 사람들 만나서 상담도 해야지, 매일 강론도 써야해.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독신을 지키면서 일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야.”
그러자 이 청년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신부님은 자식, 마누라 걱정은 하지 않잖아요.”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직자, 수도자로 살아간다는
것, 또한 세상 안에서 일하면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는 것 모두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남들보다 자신이 더 어렵고
힘들게 산다고 생각합니다. 즉, 남의 일은 쉬워 보이고 자기 일은
힘들게만 보이는 것이지요. 남의 고통보다 자신의 사소한 괴로움이
더 큰 법입니다.
바로 이렇게 비교하는 가운데에서 우리들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말했던 ‘행복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는 말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중풍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여기서 이 중풍 병자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만약 자신이 꼼짝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모든 것을
포기했다면 어떠했을까요? 또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사람
만나는 것을 피해서 친구를 모두 내쫓았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오늘 복음에 등장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지는 않았겠지만 예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또한 적극적으로 자신이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병의 치유와
함께 죄를 용서받는 커다란 축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고통과 시련의 순간이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힘들다고 또
어렵다고 포기하는 삶이 아니라, 그 시간을 통해 주님께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은혜로운 삶이 될 수 있음을 굳게 믿어야 할
것입니다.
행복은 갖고 있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미 갖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춰 소중히 여기는 데에서 발견됩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레프 톨스토이).
너무 추워서 엄청고생했던 1990년 소백산 등산.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내가 행복한 이유를 찾자.
예전에 스크랩 해 놓은 신문을 정리하다가 재미있는 기사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기사 원문을 그대로 옮겨 봅니다.
중학 시절 일어난 말다툼에 대한 사과를 받아주지 않은 데 상처를
입었던 20대 여성이 6년 만에 그 친구를 찾아가 흉기를 휘둘렀다.
서울 서부경찰서는 24일 중학교 동창 이모씨(20·여·대학2년)를
흉기로 찔러 전치4주의 상처를 입힌 최모씨(20·여·무직)를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했다.
최씨는 중학교 2학년 때인 1997년 단짝 이씨와 말다툼 끝에 헤어졌다.
며칠 뒤 최씨는 먼저 화해를 청했으나 이씨가 냉대했으며, 이후 최씨는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이씨를 만나지 않았다. 그 사이 이씨는 대학에
진학한 반면 최씨는 두 차례 대학입시에서 고배를 마셨고 우울증도
생겨 최근까지 치료를 받기도 했다.
지난 21일 이씨를 만나 지난 일을 사과한 최씨는 “보여줄 게 있다”
며 이씨를 집 근처 야산으로 데려가 “눈을 감으라”고 한 뒤 미리
준비한 흉기로 이씨의 목과 등, 팔 등을 찔렀다.
최씨는 경찰 조사에서 “중학교 때 이씨가 같은 반 다른 친구와 더
가깝게 지내자 배신감을 느껴 심하게 싸웠다”면서 “대학입시 실패와
우울증 모두가 친구 때문에 생긴 것 같았다”고 말했다.
(2003.07.23. 경향신문)
6년 동안 계속해서 품었던 복수하겠다는 마음이 이루었던 결과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문제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서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극단적인 행동이 나오기도 했지만, 사실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나는 옳고 남의 문제 때문에 내가 이러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생각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불행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지요.
남에게 자신의 문제를 떠넘기지 마십시오. 대신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잘 살펴보십시오. 내가 행복할 수 없는 이유보다, 행복할 수
있는 이유가 분명히 더 많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교회의 보물이자 중심
2013년 다해 1월18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마르 2,1-12
교회의 보물이자 중심
같은 반 학생들로부터의 ‘집단 따돌림’과 집요한 가혹 행위,
그리고 즉시 다가온 심리적 충격, 굴욕감, 좌절감, 깊은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나머지 이루어진 ‘극단적 선택!’
그리고 남은 가족들의 피맺힌 절규, 계속되는 상실감, 분노와
죄책감, 집단 우울증, 신경정신과 치료, 사직서 제출...
조금 어눌하고 착하다는 이유로 시작된 한 친구의 불행,
그리고 가족 전체의 깊은 슬픔 앞에 할 저는 할 말을
잊었습니다. 그 착한 아이, 그 법 없이도 살 가족 전체를
생지옥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가해학생들이 미워 저는 밤잠을
설쳤습니다.
과연 언제부터 우리 사회가 이런 비극 앞에 서야 했던가요?
경제제일주의, 일등지상주의, 외모지상주의가 불러온 당연한
결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조금 느리면 어떻습니까? 조금 능력이 떨어지면 어떻습니까?
조금 천천히 가면 또 어떻습니까? 부족하면 부족한데로,
약하면 약한 데로, 참아주면서, 기다려주면서 함께 걸어가면
될텐데... 너무나 갈 길이 급한 나머지 기다려주지를 못합니다.
조금 늦으면 소외시킵니다. 조금 부족해보이면 왕따 시켜버립니다.
참으로 비인간적인 세상 한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요즘 우리 사회는 이주 노동자들과 다문화 가정의
급증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뿐만 아니라
노령화가 가속화되면서 소외받는 노인들, 사각지대에 놓인
노인들 인구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약자 층에 대한
관심과 배려, 돌봄과 사랑이 더욱 필요한 시대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교회의 약한 지체들,
어린이들, 노약자들, 장애우들, 이방인들,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들은 우리 교회의 보물이자 중심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철저하게도 성서적입니다. 마르코 복음
2장에는 한 중증 중풍병자와 그 가족들이 등장합니다.
중풍으로 쓰러진지 어언 수십 년,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밥 한술 뜰 수 있는 처지가
너무나 비참해 차라리 죽는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끝이려니, 이렇게 식물처럼 살다가 생을 마감하려니 했었는데,
어느 날 치유자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습니다.
가족들은 한 마음으로 중풍병자의 치유를 위해 노력합니다.
밤새 환자를 눕힐 들것을 만들었습니다. 환자를 들것에 태운
가족들은 먼 길을 거의 달려오다시피 했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에 도착했는데, 깜짝 놀람과 동시에
큰 실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집 주변은 치유받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정상적인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는 2박3일을 기다려도 차례가 올까 말까였습니다.
중풍병자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던 가족들이었습니다.
임시대책회의를 열었을 것입니다. 절대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
그렇다고 새치기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그때 누군가가
묘안을 한 가지 냈습니다. 지붕 쪽을 공략하기로.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들 가정의 가장 약한 지체였던 중풍병자를
가장 중심에 두었습니다. 어찌 보면 가정의 가장 약점이자
수치꺼리인 중풍병자를 가장 귀중히 여겼습니다. 그를 위해 가족
모두가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런 중풍병자 가족들의 정성, 가족애, 따뜻한 마음을 예수님께서
높이 평가하십니다. 기상천외한 그들의 방법이 예의가 아니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으시고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오늘 우리 가족 공동체 안에, 우리 직장 공동체 안에,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 가장 중심에 둬야할 대상, 가장 배려 받아야
할 대상, 가장 사랑이 필요한 대상이 어디 있는지 유심히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약하면 약할수록, 문제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큰
사랑으로, 더 큰 자비심으로 그를 공동체의 중심에 두고,
그를 꼭 안아주고, 결국 그를 구원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원] 용서도 연습이 필요하다
일 년 전쯤이다. PET(Parent Effectiveness Training)라는 부모
역할 훈련을 했다. 당시 남편과 관계가 무척이나 좋지 않을 때였다.
아이들한테도 화를 자주 내고 나 자신이 무척 못났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그런데 훈련이 끝날 때쯤에는 남편은 물론 아이들과도
관계가 개선되었다.
나는 부모로서 꽤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살았다. 그래서 굳이
부모 교육을 받아야 하나 생각했다. 하지만 교육을 받으면서 나만
아니라 부모님과 님편도 상처가 있음을 깨달았고, 이건 교육의
개념보다도 치유와 훈련의 과정임을 알게 됐다.
용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하시는 일임을 이론상으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이론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기도하고 미사 참례한다고 해서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부모 역할도 훈련이 필요하듯이 용서도 주님께만 바라기보다는 내
편에서 작은 것부터 용서하는 연습이 필요함을 느낀다.
- 장유진(수원교구 신장동 천주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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