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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천년에 진입했다고 모두가 들떠있던 2000년 벽두, 그 같은 분위기에 맞추기라도 하려는 듯 세계 바둑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 터졌다. 여성 기사가 남성을 누르고 우승하는 사상 초유의 변괴(?)가 발생한 것이다. 주인공은 루이나이웨이(芮乃偉). 당년 37세의 중국 출신 여성 기사였다. 그녀가 꺾은 상대는 조훈현. 여성 기사가 혼성기전서 우승한 것도, 외국인이 한국 타이틀을 차지한 것도 모두 처음 겪는 일이었다. 한국 바둑의 혼이 서려있는 국수전의 43번째 무대가 하필 역사의 현장이 됐다.
여성이 남성을 이기는 게 왜 뉴스가 되나.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이 남성을 압도하는 요즘 시각에서 보자면 이해할 수 없는 호들갑 같은데, 바둑의 세계에선 이것만큼 충격적인 뉴스도 없었다. 여성의 남성에 대한 상대적 열위(劣位)가 한 번도 의심받지 않고 정설로 통해온 거의 유일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우뇌(右腦) 좌뇌(左腦)론을 비롯해 많은 원인 분석이 등장했지만 검증된 것은 하나도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어떤 여성 기사도 남성을 딛고 정상에 서보지 못한 채 수십, 수백 년을 내려왔다는 사실이었다.
요즘 유행어로 ‘넘사벽’인 셈인데 루이나이웨이가 이걸 깼다. 세계 바둑사상 최강의 여성 기사가 별 볼 일 없는 남성 기사 한 명을 한 차례 이긴 걸 가지고 여성 열위론이 무너졌다고 강변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무대와 타이밍과 캐스팅을 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대는 국내 타이틀 중 국내 최고(最古), 최고(最高)인 국수전이었고, 타이밍은 최정상 1인자를 다투는 결승전이었으며, 루이와 맞싸운 상대역은 당대의 천재 조훈현이었다. 아무리 단발성이라곤 해도 요건을 빠짐없이 갖춘 완벽한 드라마였다.
조훈현의 당시 위상을 살펴보자. 그는 국수위를 5연패(連覇) 중이던 제자 이창호로부터 전기(前期) 때 타이틀을 따내 1차 방어에 나선 참이었다. 조훈현과 국수와의 인연은 특히 남달라서 그때까지 통산 10기 연패(連覇) 포함 무려 15회나 우승하고 있었다. 여기에 패왕전과 국제 타이틀인 춘란배가 그의 소유였다. 5관왕 이창호, 2관왕인 서봉수와 유창혁 등 이른바 ‘4인방’이 정상을 놓고 각축하던 시절이니 아직 조훈현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이었다. 여류국수 타이틀 하나를 달랑 꿰차고 도전해 온 루이가 조훈현으로부터 국수를 탈취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루이는 도전자 결정전서 당대 톱스타 이창호를 떨구고 결승 무대로 도약했지만 바둑가에선 종종 발생하는 1회성 이변(異變)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도전 1국서 조훈현이 쉽게 흑 불계로 승리하자 그대로 조훈현의 2연속 우승으로 마무리되는 듯 했다. 하지만 루이가 2국을 이겼다. 흑번인 그녀는 황소 같은 힘으로 밀어붙인 끝에 완승했다. 최종 3국을 며칠 앞둔 시점에서 필자는 조훈현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국수전 도전기 이야기가 나왔고 루이에 대해 물었을 때 그가 정색을 하며 이렇게 답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이고, 힘이 엄청 좋던데요? 전투력이 장난이 아니에요.”
99년 한국에 정착한 루이에게 국내 매스컴은 ‘마녀’란 별명을 지어주었다. 여성답지 않은 파괴력과 승부기질을 마성(魔性)에 빗댄 별명이었다. 그녀는 얼마 후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마녀는 싫어요. 다른 별명으로 바꿔 주세요.” 한국 기자들은 그녀에게 ‘철녀(鐵女)’란 새 별명을 선사했다. 마녀처럼 철녀도 그녀의 무지막지한 싸움본능에서 따온 것이다. 바둑판 앞에만 앉으면 그는 소소한 집 바둑 대신 무시무시한 난투극을 즐겼다. 하지만 싸움이라면 조훈현을 따를 사람이 있을까. 도일 수업을 거쳐 한국무대를 완전 정복하고 초창기 세계 대회를 휩쓸던 시절 조훈현의 별명은 ‘전신(戰神)’ 이었다.
운명의 3국. 돌을 다시 가려 루이가 2국에 이어 또 흑이 나왔다. 두 대국자는 23수까지 2국과 똑같은 포석을 반복했다. 쌍방 모두 자신감이 넘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초반부터 끊고 끊겨 누가 쫓고 누가 쫓기는지 모를 살벌한 싸움이 전판으로 번져갔다. 루이의 공격은 이날도 과감하고 거침없었다. 그 기세에 눌렸는지 조훈현의 패착이 등장했다. 패에 의해 대마가 가까스로 사지를 벗어났으나 좌변이 모두 흑에게 넘어가선 대세가 기울었다. 조훈현의 유명한 흔들기가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했으나 루이는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그리곤 끝내 승리를 지켜냈다.
그녀는 거의 모든 바둑에서 그런 식으로 싸운다. 싸워도 지독하게 싸운다. 이와 관련해 루이 9단은 “수읽기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 물러서서 집을 짓기 보다는 싸우는 쪽으로 발상이 이뤄진다”고 말한다. 언행이 겸손하고 조심스럽기로 유명한 그녀로선 좀체 듣기 어려운 자기 자랑이지만, “섬세한 집 승부로는 이창호 같은 기사나 젊은 청년들을 도저히 이길 수 없어서 싸우게 된다”는 설명은 이해가 된다. 국수전 결승서 죽기 살기로 휘둘러 따낸 세계 최초의 ‘여성 금메달’이 이 같은 전략의 정당성을 말해주고 있다. 그녀는 나이 50을 넘긴 요즘도 끊고 가두고 숨통을 조이는 폭력적 진행을 절대적으로 선호한다.
마지막 3국이 진행되는 동안 루이의 남편 장주주(江鑄久)는 검토실에서 필자와 함께 모니터를 지켜봤다. 하지만 그는 대국 추이에 대해 일희일비하지는 않았다. 그의 처신은 언제나 진중했다. 그저 흑 백의 돌이 하나씩 놓일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끄덕이는 정도의 가벼운 반응만 보였다. 오히려 착점이 늦어질 때면 필자 앞에 묘수풀이 문제를 놓아 보이며 풀어보라고 권했다. 그는 언제나 고급 묘수집을 품에 넣고 다니면서 틈 날 때마다 탐독하곤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장주주는 중국을 떠나기 전부터 루이나이웨이보다 더 윗길로 인정받은 고수(高手)였다. 중국과 일본의 국가대항전인 일-중 슈퍼대항전 후반부 때 중국 팀의 핵심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랬던 그는 한국에 닻을 내린 뒤엔 결심한 듯 부인 루이나이웨이의 충실한 조력자 역할을 떠맡았다. 동업자이자 매니저, 대변인, 스파링 파트너에 보디가드 역할까지 도맡아 뛰어다녔다. 남편이란 ‘본직’은 부업(?) 또는 사이드 잡 정도로 보일 정도였다. 루이나이웨이는 2011년 11월 말 귀국하기까지 12년 8개월 간 한국에 머무는 동안 29회나 우승했는데, 그 이면엔 장주주의 이 같은 헌신적 ‘외조‘가 절대적이었다.
루이나이웨이의 29회 우승 가운데 27회는 여류기전, 나머지 2개는 혼성 기전이었다. 혼성기전은 국수전(2000년)과 맥심배(2004년)다. 맥심배 결승에선 유창혁을 2대1로 보냈다. 그러고 보면 루이의 혼성기전 제패는 한 번이 아닌 두 번이다. 맥심배가 국수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권위가 떨어져 묻혀버렸을 뿐이다. 조훈현 이창호 유창혁 등 2000년 전후 한국 바둑 대표기사 3명을 모두 괴롭힌 이력이 새삼스럽게 돋보인다(이창호와의 통산 전적 5승 5패). 이 정도의 무용담을 자랑할 수 있는 기사가 국내외를 통틀어 과연 몇 명이나 존재했었던가.
남녀가 함께 출전하는 메이저급 세계 기전서 여성이 가장 많이 올라간 기록은 4강인데 이것 역시 루이나이웨이가 보유하고 있다. 92년 제2회 잉창치배 때 그녀는 1회전서 일본 고마쓰(小松英樹)를, 2회전서 우승 후보이던 이창호를 눕혔고 3회전서 양재호를 따돌렸다. 준결승서 이 대회 준우승자 오다케(大竹英雄)에게 막혀 결승 진출엔 실패했다. 하지만 그 이후 다른 어떤 여성 기사도 루이가 당시 작성한 세계 4강 기록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루이나이웨이와 조훈현은 출신 문파별로 따지면 동문 관계다. 루이는 말년의 우칭위안(吳淸源)을 사사했다. 우칭위안과 조훈현, 하시모토(橋本宇太郞) 등 3인의 천재는 일본의 전설적인 조련사 세고에(瀨越憲作) 문하를 거친 제자들이다. 우칭위안은 조훈현에게 사형(師兄)이고, 루이에게 조훈현은 사숙(師叔)이 되는 셈이다. 루이나이웨이가 혼성기전을 제패한 최초의 여성 기사로 탄생하는 과정의 디딤돌이 왜 하필 ‘동문 아저씨’였을까. 불현듯 운명이란 생각도 든다.
루이나이웨이의 국수 등정이 당시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 말해주는 일화는 꽤 많다. 당시 청와대 안주인이자 김대중 대통령의 영부인이던 이희호 여사가 루이에게 우승을 치하하는 축전을 보냈다.
“여성으로서, 그리고 특히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이루어낸 쾌거에 대해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루이 9단과 부군께서 자아 성취와 세계바둑 발전을 위해 큰 힘을 쓰신다는 소식은 잘 알고 있습니다. 루이 9단의 가정과 한국기원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2000년 2월 22일 대통령 부인 이희호.”
루이는 국수전서 우승한 이틀 뒤 남편 장주주와 함께 미국 여행길에 올랐다. 싱가포르 항공 기내 TV에서 자신의 우승 뉴스를 보게 됐다. 옆자리 승객이 이들을 알아보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축하를 해주었다.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 중화 문화권 전체에 큰 화제가 됐다는 뜻이다. 성(性)을 뛰어넘은 사건은 언제나 다른 어떤 토픽보다도 높은 뉴스가치를 가진다.
중국 본토 내에서의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한국기원을 통한 인터넷 생중계는 중국 팬들의 접속 폭주로 한때 마비됐을 정도였다. 중국 관영 CCTV는 저녁 뉴스 때 이 뉴스를 대대적으로 취급했고, 천주더(陳祖德) 중국기원 주석은 두 차례나 루이에게 전화를 걸어 위업을 치하했다. 미국 아마바둑협회와 잉창치바둑기념회도 인터넷으로 한국의 국수전을 생중계했으니 난리가 따로 없었다.
“루이 9단이 조-이 사제를 물리치고 한국에서 선풍을 불러왔다(체육주간).”
“루이 9단이 국수전서 우승함으로써 바둑의 역사를 고쳐 썼다(요심만보).”
루이가 이룩한 ‘여성 혁명’은 2014년 3월 벌어진 중국 건교배 신인왕전서 무려 14년 만에 재현됐다. 현역 세계 여류최강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97년생 위즈잉(於之瑩)이 남성 유망주 리친청(李欽城)과의 3번기 결승을 2대1로 장식하고 우승한 것이다. 이 사건은 14년 전 루이나이웨이 사건 때 못지않게 중국에서 엄청난 화제를 불러 모았다.
마초(macho) 취향이나 남성우월주의에 사로잡힌 보수 성향의 사람들에게 역대 최고 천재 중 한 명인 조훈현이 여성기사에게 져 타이틀을 빼앗겼다는 소식은 굉장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국수전이 끝나고 며칠 후 가위가 담긴 발송자 불명의 소포가 조훈현에게 배달됐다는 미확인 소문이 한동안 한국기원 일대에 떠돌았다. 가위란 거세(去勢)를 상징한다. 2000년 초 제43기 국수 양위(讓位) 사건은 국내와 국외, 남성과 여성, 시대 상황 등 모든 것을 초월한 화제와 충격의 제조공장이었다.
루이의 거사(擧事) 꼭 1년 뒤인 44기 국수전서 조훈현은 도전권을 쟁취, 루이나이웨이를 찾아가 문을 노크한다. 1년 만에 성사된 리턴매치는 도전자 조훈현의 3대0 완봉승으로 끝나고 우승컵이 원래 주인인 조훈현에게 되돌아갔다. 전년도의 센세이션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조금은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여성 혁명’의 조기 진압으로 1년 전의 흥분과 설렘이 너무 빨리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바둑에 관한 한 여성은 남성을 당하지 못한다는 가설은 다시 빠르게 힘을 회복했다.
하지만 루이 9단이 2000년 이뤄낸 우승은 그 자체만으로도 기념비적 쾌거로 세계 바둑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단발로 끝났지만 미래 언제라도 유사 사건이 재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43기 국수전 도전기의 극적 사태가 없었다면 바둑계의 ‘여성 열위’론은 영구불변의 진리로 반박의 기회마저 못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인류 최초로 종합 메이저 기전을 정복한 여전사(女戰士) 루이나이웨이의 후예는 언제쯤 출현할 것인가.
흑51로 좌변 백대마를 공격한 장면. 백은 어떻게 행마해야 할까.
백52로는 A 정도로 진출하는 게 편한 진행이었다. 흑53~59는 루이나이웨이의 공격적이고 능동적인 기풍을 말해주는 강인한 행마. 그런 뒤 61로 갈라쳐 오자 백은 B로 늦춰 받을 수밖에 없었고 중앙전투에서 제약을 받았다.
백62가 불가피할 때 흑63을 허용하면서 좌하귀에서 뻗어나온 백 대마가 바빠졌다. 흑79가 회심의 강타. 83까지 강타 일변도가 통해선 백의 고전이다. 마구잡이처럼 보이지만 2개의 백곤마가 모두 무사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흑99까지 좌하에서 뻗어 나온 백대마를 위협해왔다. 백의 타개가 주목되는 장면.
백100이 패착이었다. 106의 비상 팻감으로 대마 본진은 살아갔으나 그 와중에 좌중앙 백 6점이 흑의 수중에 떨어지면서 형세도 흑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흑107-백△)
1 <1도> 놓쳐버린 끼움수실전 백100으로는 백1로 끼우는 수가 정착이었다. 흑이 2 이하로 끝까지 잡으러 가면 13까지 수상전의 양상이 된다. 2 <2도> 백15가 급소계속해서 흑14 때 백15로 끼우는 수상전의 급소가 있다. 23으로 먹여치고 25에 이르면 흑이 먼저 사로잡히는 그림. (흑20…백15) |
(백172-백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