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文鄕)의 언덕, "두들마을"(1)
경상북도 영양군이 그 고장을 대표하는 슬로건으로 "문향(文鄕)"을 내걸었다. 충절의 고장,충효의 고장,선비의 고장,호국의 고장 등으로 붙일만한 이름들이 즐비하지만, 문향을 선택한 이유 는 청록파 시인 조지훈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은 물론, 현대 한국문단의 거장 이문열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 문향의 언덕 위에 있는 "두들마을"을 찾았다.
두들마을 안내도
안동방면에서 영덕방향의 34번 국도를 따라 청송교도소로 유명한 진보면을 지나 월전검문소에서 좌회전을 하 면 영양방면으로 향하는 31번 국도를 만난다. 이 길을 약 1.5km 오르다 우회전해서 911번 지방도를 2km정도 따 라가면 영양군 석보면소재지에 다다른다. 석보면은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무대인 석보중학교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 두들마을이 있다.
안내도가 서 있는 곳에서 바라본 두들마을 전경
"두들"은 언덕 위에 위치해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94년 정부로부터 문화마을로 지정된 두들마을은 조선조 고종 때 나라에서 세운 의료기관인 광제원(廣濟院) 이 있었던 곳으로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선생과 그의 후손 재령 이씨(載寧 李氏)들의 집성촌이다. 광제원이란 원(院)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원리(院里)’란 행정명칭을 붙였다. 마을에는 석계고택, 석천서당 등 전통가옥 30여채가 잘 보존되어있고, 동대, 서대, 낙기대, 세심대라 새겨진 기 암괴석을 비롯, 반가(班家)의 요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쓴 정부인 안동장씨유적비, 이문열의 광산문학연구소 등이 있다.
전통한옥 체험관
두들마을은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2006년 3월 중순 어느날, 때늦게 내리는 눈길 속을 달려 영양의 문학벨트 인 이곳 두들마을과 오일도 시비(詩碑), 조지훈문학관을 찾은 때가 첫 번째 걸음 이었다. 이번에는 T.V 에서 두들마을의 요리서(料理書)인 음식디미방을 소개하는 것을 본 아내의 방문 제의에 따른 것이 다.
출발 이틀 전에 두들마을의 사무국장이란 분께 디미방의 음식체험을 전화로 문의하니 2명의 예약은 곤란하다는 답변이다. 하기야 2명의 손님을 위해 그 많은 종류의 음식을 장만한다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무리한 부탁이다. 10명은 되어야한다며 정중히 거절을 한다. 이왕 계획한 여행코스니 구경이나 하고가자며 들린 것이다.
한옥체험관의 화장실표시
갓 쓴 선비와 비녀를 꽂은 여인의 그림으로 남녀 화장실을 표시해 놓았다.
몇 대의 버스가 도착하니 마을길은 사람의 발길로 채워진다. 저 분들은 사전예약한 단체손님으로 디미방의 음식맛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마을 표지석
마을 안내도를 보고 탐방로를 따라 먼저 주곡고택을 찾아가는 도중에 있는, 패랭이꽃이며 영산홍을 예쁘게 잘 가꾼 어느 살림집의 입구다. 실제로 거주하고 계신 분들이 있는 관계로 자세히 들여다보기가 민망해서 얼른 돌 아 나왔다. 넓은 집안을 깔끔하게 관리하고 계셨는데, 사람의 손길이 머물면 머물수록 전통한옥은 멋스럽게 윤기가 나는 법 이다.
원리주곡고택(院里做谷古宅)
조선 중기 유학자인 이도(李櫂)(1636∼1712)가 석보 주남리(做南里)에 건립하였던 것을 후손들이 순조 30년 (1830)에 두들마을로 옮겨왔다고 한다.
영양군의 시도민속자료 제114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경상북도 북부지역 민가 건물의 전형인 뜰집형(□자형) 구조로 이루어졌으며, 삶의 편리를 위해 사랑방에 다양한 구성으로 꾸며진 물치장(物置欌)이라 불리는 벽장(壁 欌)과 감실방 벽감 아래의 끌어낼 수 있는 널로 된 제사상(祭祀床)이 돋보이고, 부엌에 묻어놓은 물두멍도 지금 은 남아있는 예가 드문 옛 생활문화 자료란 안내판의 설명이다.
설?문을 염두에 두고 내부를 보려 하였으나 문이 굳게 잠겨있어 들여다 볼 수 없으니 아쉬움이 크다. 관리상의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어차피 문화마을로 지정되어 개방한 마을이니 지정문화재의 빗장을 풀어놓음이 어떨지.....
두들광장에서 본 마을전경
주곡고택을 지나 한적한 오솔길을 얼마간 오르면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두들광장에 다다른다. 광장은 넓은 잔디밭으로 단체운동이며 놀이를 하기에 충분한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작가 이문열의 "광산문학연구소" 전경
광산문학연구소 정문 "광산문우(匡山文宇)"
광산(匡山)이란 명칭은 마을의 주산(主山)으로 삼고있는 ‘광려산(匡慮山)’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2001년 5월에 완공된 이 건물은 대지 900평에 건평 125평으로 지어진 목조 한옥으로 65칸 규모이며, 학사 6실, 강당 및 사랑채가 각1실, 관리사 (서재, 대청, 식당) 5실, 그리고 부대시설로 정자, 주차장 등을 갖추고 있는 멋진 건물이다. 세미나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원래 영양군청이 ‘이문열 문학기념관’으로 계획했지만 작가가 극구 고사해 연구소로 용도가 바뀌었다고 한다.
연구소의 정면
"고향에 세운 문학연구소는 주로 문학수업 3년차 이상의 순수 창작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문열 작가는 현재 경기도 이천에서 문학사숙 부악문원도 운영하고 있다. 리’ ‘금시조’ ‘황제를 위하여’ ‘영웅시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주옥 같은 소설속 인물들의 삶의 역정이 펼쳐지는 무대가 바로 이곳이기도 하다.
정문쪽
현재 연구소에 머물며 글을 쓰는 사람은 없는 듯 보였다. 이문열은 매월 셋째주에 이곳에 머물며 후학들과 문학의 토론장을 연다고 한다.
몇해 전 처음 방문했을 때는 보이지 않던 큰 놋쇠 향로가 마당에 놓여있다. 관리하시는 분께 이의 용도를 물으니 불끄는데 사용할 소화수(消火水)를 담아두는 것이라 한다.
자은헌(紫隱軒)
口자 형의 이 집 북서쪽 모서리에 2층 누각이 있다. 이름하여 자은헌(紫隱軒)이다. 자색(紫色)빛이 숨어있는 마루라는 뜻인 듯 한데, 자색(紫色)은 불가(佛家)에서는 아주 길상(吉相) 스러운 색으로 불상의 붉은 금빛이 감도는 것을 가리킴이다. 사람에게도 일생에 한 두번 아주 기쁜 일이 있을 때 얼굴에 자색빛이 비친다 하니 이곳은 크나큰 환희와 기쁨이 서려있는 곳이라는 내 나름의 해석을 해본다.
보수논객 이문열... 한 때는 그의 서적을 불매운동하거나 반환하는 상대편의 행동들이 있기도 했었다. 어느 분의 글에 실린 그의 변(辯)이다.
작가에게 '고향이 갖는 의미'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그 밖에 없었다.
“어린시절부터 숱한 이야기와 경험을 접했고 그 자산(資産)들은 내 문학의 훌륭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고향에 감사하고 그 영향도 크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보수적인 내 사고의 방향을 결정지은 곳이 또 이 고향땅이니 그 점에서 고향은 내게 손해도 준 셈이다.”
고랭협곡의 영양 땅은 과묵한 느낌을 주었다. 그 영양의 토양이 한국 문학의 거목들을 키워냈을 것이다.
정면 3칸,측면 1칸 겹처마에 팔작지붕인 "자은헌"은 안상과 계자난간을 둘러 멋스러움을 더했다.
자은헌의 서쪽 앞 공간에는 작은 연못을 두어 운치를 가미했다. 금방이라도 물에 뛰어들 것 같은 자라 한 마리를 청동으로 제작하여 연못초입에 둔 것도 이색적 이다. 아쉬운 것은 자은헌의 누마루 1층을 흙담으로 둘러 쌓아 답답함을 주는 것이다. 한옥의 담장은 경계를 나타낼 정도의 낮고 멋스러움을 풍기게 마련인데, 외부와의 경계를 짓는 담장 이외에 다시 내부에 담을 두른 구조적인 연유가 있을 듯하나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자은헌의 입구에는 "신발을 벗고 오르세요" 란 푯말이 있다. 이곳을 관리하시는 할머니께서 그 애로를 풀어놓으신다. 문학기행이네 답사네 하면서 이곳을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그런데, 한글로 적어놓은 저 글귀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 할머니와의 마찰이 종종있다고 한다.
그릇의 크고 작음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담기 전에 담을 그릇이 깨끗한 지, 더러운 지를 먼저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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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쓸쓸히 채워져 있고 따뜻이 비워진 숲 원문보기 글쓴이: 들이끼속의 烏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