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은 2017. 8. 24.
조간 경향신문 '청춘직설'에는 '프로질문러가 되려면' 이라는 제목이 떴다.
'최서윤 아마추어 창작자' 가 쓴 글을 읽었는데도 나로서는 가우뚱.
도대체 무슨 내용을 썼는지 짐작이 안 되었다.
특히, 단어 하나가 눈에 거슬렀다.
그런데 '질문러'라는 단어가 있었나 싶다.
질문 + 사람의 합성어인가? 질문 + er인가?
영어에는 ~하는 사람을 나타내려면 단어 끝(접미사)에 'er'를 붙인다.
혹시 한자어 '질문'에 영어의 'er'를 합성해서 만든 새로운 조어인가 싶다.
'프로질문러'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질문을 많이 하는 사람을 뜻하는가 싶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도 잘 모르겠다.
이와 반대되는 말이 있는가 싶어서 '프로답변러'를 검색했더니만 이 단어가 떴다.
'프로질문러', '프로답변러'가 정말로 괴상하다.
황당하다.
100년 전의 문자는 온통 한자와 한자어로 범벅이더만 100년 뒤인 2010년대에는 한자어에 영어까지 겹들어서 조어하는 세상으로 변질된 느낌이다.
1949년 1월생인 나로서는 신세대들이 쓰는 언어에는 고개를 마구 내젖고 싶다.
1950~60년대 이후에 태어난 사람, 즉 중장년층이 쓰는 말과 글도 국적 불명한 것인가?
오늘 어떤 시를 보았다.
'시냇물 처럼'이 자꾸만 눈에 거슬린다.
시에서는 음률을 살린다고 해서 낭독할 빠르게, 느리게, 또는 글자 간격을 떼어서 소리낸다.
하지만 글로 쓸 때에는 올바르게 써야 할 게다
시를 읊으려고 '시냇물 처럼'이라고 글 썼나? 글자가 청각으로 들리게끔?
몇 차례나 거듭되었다. 의도적이었을까? 아니면 띄어쓰기를 제대로 몰랐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또하나의 예다. '빗 방울'이다.
'비 + 방울'의 합성어이다. 합성어라면 '비방울'이어야 한다.
국어연구원의 맟춤법에서는 '빗방울'로 쓰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학문적인 지식이 없기에.
비방울, 빗방울에 대해서 나는 학문적 소양은 없다. 하지만 '빗 방울'에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빗'이라는 단어는 머리카락을 다듬는데 쓰는 생활도구가 떠오르기에.
또다른 예다.
'인생은 무엇때 문에'라는 문구를 보았다. '인생은 무엇때문에'라고 붙여서 써야 한다.
'디지털 화 되가는 세상에서'라는 문구도 있다.
디지털 化 되가는' 뜻일까? 제대로 쓴다면 '디지털화 되어 가는' 문구가 아니었을까"
띄어쓰기가 어색한 글로 여겨진다.
신세대는 영어와 한자를 마구 섞여서 요상한 단어를 만들고, 중장년은 국어 쓰기가 무척이나 서툴고, 100년 전의 사람들은 완전히 한자로만 글 쓴다. 1949년 생인 나는 중간에 낀 중노인 세대라서 신세대의 요상한 조어, 100년 전의 한자 투성이의 글자를 이해하지도, 읽지도 못한다.
100년 전의 구세대가 쓰는 말과 글은 한자 단어의 끝에 붙는 토씨(조사)로만 쓰였고,
2010년대의 신세대가 쓰는 말과 글은 영어 단어의 끝에 붙는 토씨로 변질된 것 같다.
중간세대(나는 중간세대보다는 구세대쪽에 더 기운 중노인)은 한자어, 영어(외래어, 신조어)에 어리둥절하다.
100년 전의 100% 한자를 한글로 적으면 지금도 해석가능할까?
나는 얼마 전에 100년 전에 한글로만 쓴 공문 글을 보았다. 나는 한글로 썼기에 읽을 수 있으나 그게 무슨 뜻인지는 짐작조차도 할 수 없었다. 하나의 예다. 1919년 독립 선언문은 한문과 한글이 섞은 문장(이따금 우리 한글도 들어 있음)이다. 이 문장으로 오로지 한글로만 쓴다면 그거 읽어도 이해가 됄까? 한글로 쓰면 요즘 유치원생도 읽는다. 그런데 읽었다고 해서 유치원생들이 그 뜻을 알까? 단어를 모르는데?
오늘 신문에서 조금 펐다.
경희대학교 미래환경연구원에 설립에 관한 광고문이다.
'... 경희대 국제캠퍼스 R&D 밸리, 서울 캠퍼스 바이오헬스 클러스터, 충남 금산 에코파크에 '인간과 지구의 조화로운 미래'를 열어갈 지구적 학연산 협력의 장을 마련합니다' ...'
이런 문장은 농사꾼인 나로서는 이해불능이다. 누가 번역해 주었으면 싶다.
2.
왜 우리나라에는 노벨문학자가 아직껏 나오지 않았을까?
우리나라는 정치지리학 측면에서 보면, 강대국의 틈새에 끼었다.
한자문화 종주국인 중국의 지배를 많이 받은 탓으로 구시대의 책은 온통 한자이다. 생각조차도 생활조차도 중국 것에 찌들었다.
중국 지배를 벗어났고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생활도 벗어났고, 미군정 시대도 벗어났다.
아직껏 미국의 영향을 상당히 받아들인 탓일까? 국제화 시대의 물결일까?
도대체 우리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정체성에 자꾸만 의문이 간다.
문학적인 측면으로 보면 과연 우리 문학이 제대로 된 것이 있었던가?
21세기를 사는 지금은 어떠한가?
자기 말과 글을 제대로 쓰고 있는가?
글쎄다.
3.
아침에 아내는 '무화과 열매는 지금 어찌 되었을까요?' 하고 나한테 물었다.
글쎄다. 숱하게 열린 무화과는 너무 익어서, 쳐져서, 땅바닥에 철부덕 떨어졌을 게다.
주인 없는 텃밭이라서, 새들과 작은 벌레들이나 잔치하려나?
혹시 오가는 동네사람들의 손을 많이 탓을 것 같고...
시골에서 서울 올라온 지가 벌써 29일째. 한 달 째이다.
농사꾼이 농사를 포기하고는 엉뚱하게 잡글 쓴다. 나도 잘 모르는 문학에 관해서...
시골사람, 촌사람의 눈에 비친 글들이 무척이나 그렇다.
오후 한 시를 지난 서울 하늘에는 검추레한 구름이 낮게, 잔뜩 끼었다.
금세라도 비를 퍼부을 것 같다고 글 쓰는데 후두둑 소리를 내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서해안 보령지방, 보령댐에는 물이 겨우 30% 찼단다.
8월의 오락가락한 폭우에도 남녘지방에는 비가 그다지 내리지 않았으며, 내렸다면 소나기성 폭우였다는 증거이겠지. 황토인 고향 텃밭에는 빗물이 잘 빠지지 않아서 땅이 무척이나 질퍽거리겠다. 뿌리 약한 식물들은 자연스럽게 문들어져 사라졌을 게다. 뿌리가 깊이 박히고 왕성한 억새, 대나무는 더 많이 번졌을 게다.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오래 비워 둔 시골집이.
자갈 깐 바깥마당에는 풀밭이 되어서 잡초로 뒤덮혔을 터.
2017. 8. 24. 목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