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먹고 다니냐?” 예전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 역 송강호가 용의자에게 던지는 대사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끼니는 챙겨라’로 말한다. 잘 먹고 건강해야 좋아하는 모든 걸 오랫동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추위가 매섭다. 추운 날씨를 이기려면 속을 따스하게 하는 게 우선이기에 근처 냄비국수를 시켜서 먹는 거였다. 뜨끈뜨끈한 김이 피어올랐다. 아낙들이 무릎을 맞대고 먹는 모습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인다. 수저를 놓으면서 한 아주머니가 “등 따시고 배부르니 어떤 부자도 부럽지 않다.”라고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얼마나 소박한 표현인가! 다른 두 아주머니도 동의하듯 빙긋 마주 웃었다.
등 따시고 배부를 때는 별것 아니다. 서민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배부르고 몸이 따스할 때이다.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겨울철에는 누비바지를 입어도 온몸이 얼음장이 되기 마련이다. 이때 따끈한 한 그릇의 가락국수는 속을 꽤 데워준다. 그때 입가에 맴도는 미소는 보는 사람의 마음조차 덥혀준다. 냄비국수의 행복을 생각하면 더 먼 기억이 떠오른다. 1970년대 초 군 휴가 중, 겨울철 대전역에서 잠깐 정차할 때를 맞춰 급하게 국수를 먹고 난 뒤 성냥개비로 이빨을 쑤시며, 재빨리 열차에 올라타곤 했다. 사람들이 국수를 일상적으로 먹게 된 건 6·25전쟁 이후, 지금으로부터 약 70여 년 정도에 불과하다. 쌀 생산이 부족했던 시기에 국수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저렴한 식사로 시작해 일상식으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원조농산물이었던 밀가루가 국수로 변형하였고, 우리 가족은 평생을 살면서 밀가루를 반죽한 수제비를 그때 다 먹었다.
국수는 유독 지방색이 강하다. 각 지방의 환경에 따라 면 종류와 육수 재료가 다양하게 발달했다. 대구‧경북은 우리나라에서 국수 소비가 가장 많고 발달한 지역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경상도는 국내 마른국수 생산량의 80%를 차지할 만큼 국수 공장이 많이 생겨났다. 부산에 ‘구포국수’가 유명하듯 포항에선 1967년에 처음 ‘모리국수’ 음식점이 등장했다. “뱃사람들이 고기 잡고 남은 거 국수에 넣어 달라 하기에 아귀, 우럭 넣고 고추장 풀어서 내놨는데 맛있다 하더라.”고 주인장은 회상하며, 그게 장사의 시작이었다고 말한다. 마치 어머니가 만든 ‘복어 수제비’와 흡사한 요리법이지만 다만, 생선과 면의 종류와 양념이 다를 뿐이다.
부산에는 밀면 가계만 해도 500곳이 넘는다. 밀면의 유래는 6‧25전쟁 당시 북에서 온 피난민들이 냉면을 그리워하다 창업했다는 설과 함흥 출신 모녀가 부산 진구 부암동에 냉면집을 열면서 밀면이 탄생했다는 설, 또 진주 밀국수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아무튼, 밀면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미군의 밀가루 원조였다. 전쟁 이전에는 귀한 음식 재료가 남아돌게 되었고, 그 밀가루를 활용해 추가로 고구마 전분이나 감자 전분 등을 섞어 쓰는 게 밀면과 기존 냉면의 차이였다. 또한, 냉면은 면의 똬리가 단단하게 틀어져 있어야 면의 물기가 잘 빠졌단 이야기가 된다. 그래야만 냉면의 맛이 흐려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릇에 담긴 냉면의 품새만 보고도 그 맛을 짐작할 수 있다. 쪽 찐 머리처럼 곱게 똬리를 튼 면발은 냉면의 맛을 짐작하곤 한다. 여기에 고깃국물의 두꺼운 맛과 동치미 국물의 희미한 단맛과 신맛이 숨겨져 있다.
백제 시대에 군사 식량을 보관하던 부여 군창지軍倉址가 있었다. 즉 군의 창고 터에서 밀이, 쌀, 보리와 함께 가장 많이 발견된 것으로 볼 때 삼국시대에 이미 밀을 활용한 음식을 만들어 먹었던 것을 사학자들은 추정한다. 그러나 고려 때는 나라 안에 밀이 적어 중국 산둥지역으로부터 사들었으며 면의 가격이 대단히 비싸 큰 잔치가 아니면 쓰지 않는다고도 했다. 고려 시대에는 밀가루와 면이 매일 먹는 주식이 아니라 사신 접대 같은 큰 행사에 쓰인 음식이었다.
어쨌든 등 따시고 배는 불러야 했다. 배가 부르면, 마음이 열리고 여유를 갖는다. 무엇보다 일상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흐뭇함이 지속한다. 그러나 배고픈 사람은 한 가지 걱정만 한다. 하지만 배고픔이 해결되어 배가 부르면 여러 가지 걱정하게 되는 게 세상의 이치였다. 식물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려면, 환경이 적당히 부족하여야 한다. 예쁜 꽃을 피우려면 물과 영양제를 충분히 주면 이파리만 무성할 뿐 끝내 어떤 꽃도 피우지 못한다. 그건 그 식물이 열매를 맺어 꽃을 피울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이다. 배가 부르면 욕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따라서 추워지는 계절, 연말연시, 절제하고 나누는 미덕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