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문화 도시 달랏 1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달랏 기차역으로 향했다. 저 과자 봉지 빵빵 한 것 쫌 봐요. 석 박사님 사모님이 말 한대로 이곳 달랏 역은 고원에 지리한 종착지다. 과연 이 기차는 어디서 기어 올라온 것일까. 예르생이 묘사한 기차역. <아프리카 나리, 야생 치커리, 수국 등의 꽃들이 마치 프랑스 디나르에서처럼 흐드러지게 무리지어 피어 있고 톱니 궤도 열차가 이제껏 아무도 발을 들여 놓지 않았던 고원을 기어올라 콩고의 푸엥트누아르 역처럼 도빌 역을 그대로 배껴 지은 역에 멈춰 선다.> 과연 그런 기차역이 존재하는 것일까.
역에 다가서자 노란 채색의 뾰족한 형상이 우리를 반긴다. 이 뾰족한 첨탑은 랑비앙산 3봉우리를 말한다는데 이 봉우리 형상 상징만 제외한다면 예르생이 젊은 시절 다니던 노르망디의 트루 빌 - 도빌 역(Normandy's Trouville-Deauville Station)과 꼭 닮아 있다. 중앙 지붕 아래 보이는 시계는 12시 30분이 이제 막 지났다.
Da Lat-Thap Cham(탑참) 철도의 건설은 앞서 말 한대로 예르생의 친구인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총독인 폴 두메르 (Paul Doumer)'에 의해 제안된 십 년 후인 1908 년에 시작되어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아시아 아프리카로 진출하여 그들의 식민지를 하기에 여념이 없던 그 시절, 제국들은 혹독한 기후를 견뎌내기 힘들었고 그래서 고원이나 공기 깨끗한 찾아 피서지나 힐링의 개념 도시가 필요했다. 한 때 우리가 주말농장에 열광하였듯 제국들도 명당자리를 찾아 나선 것이다. 인도를 점령한 영국은 델리 부근의 심라, 뭄바이 인근의 푸네를 골랐고 프랑스는 달랏과 캄보디아의 보꼬 힐스테이션을 골랐다. 우리가 잘 아는 관광지, 홍콩 섬의 명물인 힐 사이드 에스컬레이터와 해발 396m의 빅토리아 피크, 영국 식민지 시절, 휴양지로 발달된 빅토리아 피크는 해발 396m 타이핑산(太平山)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피크 트램을 이용해서 지금도 산을 오르는 관광명소는 당시에는 중국 사람들은 아예 오르지도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피크 트램, 톱니 괘도 열차, 톱니바퀴 산악 기차는 어디를 오르든 마음이 들뜬다. 기차가 여행의 별미라 한다면 산악 열차는 그 중의 백미라 할 것이다. 하늘로 오르는 것만 같다. 스위스 필라투스의 톱니바퀴 기차(Pilatus), 알프나흐슈타트에서 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빨간색의 귀여운 이 열차는 경사가 최대 48도에 이르는 세계 제일의 급경사의 톱니바퀴 기차다. 와싱톤 마운틴, 스위스 인터라켄 융프라우 (Jungfrau). 알고 보면 하늘로 오르려는 시도는 곳곳에서 포착 된다. 나도 두 군데는 가보았는데 그 설렘은 여전히 꿈을 낚고 있다. 왜 이는 그리움이라 하면 묘미가 적을까.
달랏도 이와 마찬가지다. 예르생이 기대한대로 톱니바퀴가 존재하였던 달랏 열차. 'Ngoan Muc Pass'가 중앙 고지대로 상승한 'Sông Pha' 서부의 산악 지형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건설은 천천히 진행되었으며 여러 랙 레일 섹션과 터널이 필요했다. 철도는 84km (52 마일) 길이로 3 개의 랙 레일 섹션과 5 개의 터널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1,400m를 상승하게 되었고 철도 건설이 시작된 지 24년 후인 1932년에 마침내 달랏에 도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랑비앙을 상징하는 각 지붕 밑에는 다양한 색의 유리창이 마치 달랏의 꽃을 그대로 옮겨 놓는 듯이 내부를 환하게 비추고 있다.
워낙 고풍스러워 실제로 기차가 다니나 싶었는데 출발시각을 표시해 놓은 매표구가 눈에 띄었다. 진열한 기차의 차량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거슬러 달랏에 온 것처럼 느껴진다. 'Da Lat-Trai Mat'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4대의 차량에는 "Dalat Plateau Rail Road"표지판이 붙어 있으며 그 반대편 선로에는 역사를 그대로 안고 있는 기차도 보인다. 강렬한 빨간 채색의 바퀴가 금세라도 증기를 뿜으며 달릴 것만 같은데 지난 세월은 나도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우리도 그 기억이 있듯이 베트남 전쟁 전반에 걸쳐, 베트남 전역의 철도가 그러했듯 'Da Lat-Thap Cham' 라인 역시 수많은 폭격 및 파괴 활동의 대상이었기에 끊임없이 파괴되고 끊긴 'Da Lat-Thap Cham' 선로는 1975년 4월 사이공과 함께 해체되었다고 한다. 그 후 1990년대에 들어 'Da Lat 기차역'과 인근 마을인 'Trại Mát 사이의 7km 구간이 복원되어 지금은 관광 명소로 활발히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달랏과는 8km 정도 떨어진 곳인 짜이맛(Trai Mat)에는 유명한 린프억사원 (영복사 靈福寺)이 있다. 우리로서는 주어진 짧은 시간이 그저 아쉽기만 하다. 베트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 달랏은 그 특별한 디자인으로 2001 년 베트남 정부에서 '역사적 기념물'로 지정받았다.
다음 행선지로 가는 길, 박 박사님이 왜 그것 기억나 하는데 알 듯 말 듯 생각이 안 나는 그곳, 돌아와 자료를 찾았다.
<가끔은/묻고 싶은/지그재그 인생길. 이곳에 와서 보면/그 이치를 알게 된다. 영동선/기찻길에도/지그재그 있다는 걸. 가끔은/묻고 싶은/가도 가도 숨찬 인생. 이곳에 와서 보면/그 이치를 알게 된다. 때로는/바람도 숨찬/언덕길이 있다는 걸. (김민정 시인- 영동선의 긴 봄날 中)>
통리(通里)는 사방에 산이 높고 그 가운데로 골이 길게 형성되어 흡사 소여물 통처럼 생긴 곳이라 하여 통리(通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60여호의 산중마을에 석탄수송기지인 통리역이 생기면서 팔도사람들이 몰려들어 숙박업소만 100여개에 달하는 번창기를 맞았다가 1962년 황지선 철도가 개통되자 폭격 맞은 폐허지역처럼 되었다가 한보탄광과 경동탄광이 들어서면서 다시 번창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통리가 불꽃처럼 타오르던 50여년 전에 통리와 심포리까지 약1.1km의 급경사지대에 사연 많은 구간이 있었으니, 바로 강삭으로 화차만 끌어올리고 내리며 승객들은 걸어서 오르내려야만 했던 강삭철도(일본말-마끼)이다.
승객들은 심포리에서 가파른 비탈길을 1km이상 올라가야 통리에서 대기하고 있는 열차에 올라 자리를 잡고(당시는 열차에 좌석제가 없었음) 앉아서 갈수 있기에 하늘이 노래지도록 짐을 지고, 이고, 끌며 오르내렸다. 그러다보니 다양한 직업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 짐꾼(지게꾼)들만 200여명에 달했다. 여자 짐꾼들도 30~40명은 되었다는데 주로 어린아이나 승객의 보따리 등을 업고, 이고 날랐으며, 지게꾼은 고기상자, 화물 등을 지게에 지고 날랐으며, 뾰족구두 신은 처녀가 지게에 걸터 앉아 올라오는 풍경이 자연스러웠고, 대개 500환정도의 값을 받았다.
지게꾼에게 나중에 정부에서 세금을 내게 하고 허가제 형식으로 완장을 착용하게 하였다. 빠른 승객들은 늦게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열차 좌석을 잡아주고 수고비를 받는 지금 생각하면 웃지 못 할 풍경도 있었으며, 겨울이면 한 몫을 보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새끼줄 장수들이었다. 강삭철로를 따라 걸어 올라오는 눈다져진 빙판길 오르막을 신발에 새끼줄을 비끄러 매지 않고는 미끄러워 오르내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심포에 한사람, 통리에 한사람이 한조가 되어 한쪽에서 돈(100환)을 받고 새끼줄을 대여해 주면 한쪽에서는 회수하는 데, 새끼줄 장수도 많아 서로 자기네 새끼줄에 물감으로 표시를 하여 가려내곤 하였다. 눈이 오지 않으면 새끼줄장수들은 밤에 몰래 물을 뿌려 일부러 비탈길을 얼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 옛 통리의 강삭철도! 지금은 사라져 버리고 새로운 터널이 지난 시간의 과정들을 고스란히 품은 체 준공을 앞두고 있다. (글/안호진)
문명은 어느 풍경을 담고 이는 곧 생활이 되고 문화적으로 자리하게도 된다. 그러다 사라진 문명이지만 사람들은 엣 문화를 기억하는 것이다. 문명은 가도 문화는 우리들 가슴속에 여전히 남는다. 때로는 그리움으로 추억으로 때로는 전설로. 문명을 현실의 창이라 한다면 문화는 그들을 보는 마음의 창이다. 한마디로 문화(文化)는 한 사회의 주요한 행동 양식이나 상징체계를 말한다. 달리 보아 문명이 앞면이라 한다면 문화는 신문 뒷면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문명과 문화의 개념을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거나 혼동하여 쓴다. 문명은 물질적 발달을 강조하는 데 비해 문화는 물질이나 정신을 모두 총칭하는 데 더 큰 강조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고전을 품은 도시, 예술의 도시라 한다면 정서적으로 문화에 비중을 두어 한 말이다. 영원한 봄의 도시 달랏.
다음 행선지는 달랏 릉화(Rung Hoa) 생명공학주식회사의 꽃과 농산품 매장. 이른 바 꽃모종을 위한 "은행". 이 회사는 동남 아시아 최초로 체외 기술을 이용하여 묘목을 생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2003 년 10 월에 설립 된 이후 1,7ha의 토지를 대상으로 바이오 기술을 적용하여 2,000m2 규모의 실험실을 보유하고 있다. 1200 만 (식물 / 년)의 용량이니 생각외의 큰 규모다. 우리나라에 이런 규모가 있을까 궁금해진다. 이 회사는 gerbera, Statice, 백합, 데이지 등등 및 해외 시장에서 선호되는 꽃의 품종을 생산하는 데 주력한다는데 전시장은 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2006 년에 회사는 뉴질랜드, 네덜란드, 벨기에 및 중국에 각각 100 만 모종을 벨기에에 수출을 시작한 이래 괄목한 성장세가 지속되고 있다. 현재 모종 재배 면적을 5ha로 확대하고 Lam Dong 지방의 Dac Duong 지역에 20ha의 농장을 지어 백합을 키우고 있다. 그들은 꽃 모종을 생산하기 위해 시험 관내 기술을 적용한 동남아시아 최초의 자회사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통일벼를 생산하기 위해 필리핀 연구소에 의존하던 그 시절이 불현듯 떠오른다. 당시 필리핀은 우리보다 잘 살았고 그래서 우리에게 장충체육관도 지어주었고 그 무렵 베트남도 마찬가지였다. 문명은, 경제는 늘 양지일 수만은 없는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무더기로 선물을 샀다. 오디 쨈 14병, 코코아 그리고 말린 과일 봉지 15개. 직장 동료들이 달랏을 간 것을 다 아는데 모른 체 하기는 그렇다 싶어서다. 아니 그들은 달랏을 안 와봤기에 조금은 과시하려는 속셈도 들어있다. 그런데 가격이 꽤 저렴하다. 우리 돈 4만 5천원 .
대개 사람들은 그 나라 수준을 1인당 GDP기준으로 따지는 경향이 있다. 작고 가난하지만 행복지수 1위로 나오는 부탄이라는 나라, 그들이나 우리는 1960년대 1인당 GDP가 500달러도 안 되는 극빈 국이었다. 그들은 우리와 달리 여전히 개발과 원조가 필요한 후진국 지위에 머물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행복하고 우리는 그렇지가 않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성장과 개발에 대한 국민의 시선은 숭배와 가까웠다. 하지만 이제 많은 사람이 ‘잘사는 것’에 대해 의문을 표시한다. 더 이상 개발도상이 어려운 시대에 , 개발할 것이 남지 않은 시대에서 아직도 더 잘 수 있다고 외치는 성장주의는 공허하기까지 하다. 부국강병이면 과연 우리가 행복해질까. 나는 의문을 갖는다.
우리 원로 경제학자 박진도가 밝히는 부탄의 행복지수 비밀, 그들은 GDP보다는 GNH(국민총행복)를 중시하고, GNH의 증진을 위해 네 가지 기본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첫째, 지속 가능하고 공평한 사회·경제 발전. 둘째, 생태계의 보전과 회복. 셋째, 부탄의 전통과 정체성을 실현하는 문화의 보전과 증진. 넷째, 앞의 세 가지를 달성할 수 있는 좋은 거버넌스를 경제학자는 말하고 있다. 경제발전도 중요하지만 문화 창달도 동등 레벨 수준으로 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돈은 만 달러만 충분하다는 것이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불안하고 허무한 것은 마음이 어둡거나 뒤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돈이 없어 궁핍하지만 그래도 즐겁고 견딜만한 것은 마음이 화평하기 때문이다. 바로 마음의 창틀, 문화가 가슴 속에 숨쉬기 때문이다. 작게 보아서도 인간은 자기 마다의 문화를 갖고 산다.
국민소득 2만 불이 넘는 소득, 기실 이는 믿을 것도 못된다. 내가 그 산 증거를 보여주겠다. 그들은 우리 돈 월 1백5십 만원 이면 중산층이라 한다. 그들 버스비가 250원이니 우리가 5배 정도 비싸고, 음식 값도 거의 비슷한 차이다. 쉽게 말해 먹고 쓰고 자는데 대략 5배 정도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그들의 중산 층 돈 1백5십 만원은 우리나라 7백 5십 만원 돈 버는 가치와 맞먹는다. 월 7백 5십 벌기 버겁지 않은가. 버는 데는 한계가 있다. 비록 차를 끈다든지 하는 현대식 생활은 우리가 윤택하다 할 것이지만 그들이 보다 더 행복하고 즐길 수 있는 꺼리가 많은 가능성 있는 세상이다. 베트남은 2천불, 우리는 2만 불로 선 그어 문명적 발상으로서만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다음 행선지가 이를 또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의 X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