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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1절부터 9절까지는 여호와께서 노아의 후손들이 자기들의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려 하여 성과 대를 쌓기 시작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어지게 하시는 섭리 내용입니다.
바벨 탑은 타락한 노아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심판을 모면하려는 것과 힘센 자가 왕이 되어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하려는 교만과 타락된 종교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이때 뿐만이 아닙니다. 지금의 세계를 돌아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세상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고 여기서 힘센 자가 왕이 되어 하늘의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하나 됨’은 인간의 몸으로 조직이나 행정이 하나가 되는 것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지체가 바라보면서 서로 사랑하는 신령적 몸의 하나가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럼에도 교회와 성도는 교권에 의해 복종하는 형태로 하나가 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아무런 의미도 모른채 하나가 되자고 합니다. 이는 죄로 말미암아 분별력을 상실한 인간들에게 먹힐지는 모르나 한순간입니다. 지금도 세상의 모든 조직의 목표는 바로 인본적이며 인위적인 바벨탑 건설입니다.
1절에서 4절은 언어가 하나인 노아의 후손들이 시날 평지에 벽돌을 만들어 성과 대를 쌓아 자기들의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려고 시도하는 내용입니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다’(1절)는 것은 바벨 탑을 쌓기 전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노아의 후손들로 형성된 당시 사회가 하나의 언어로 소통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동 중 만난 지역은 시날 평지였습니다(2절). 시날 지역은 티그리스와 유브라데스강 사이로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생한 지역을 일컫습니다.
이들은 벽돌로 돌을 대신하고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는(3절) 발달된 문명으로 탑을 건설하였는데 이 탑의 목표는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함이었습니다(4절).
그들이 자기들의 이름을 내려는 것이나 흩어짐을 면하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입니다. 여호와께서 노아 후손의 후손으로 생육하고 번창하게 하여 주시는 것은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 언약을 이루어 주셔서, 언약대로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스스로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손들은 여호와의 뜻을 어겨 흩어지는 것을 면하려 하고 여호와의 언약을 잊어버리고 여호와의 이름 대신 자기들의 이름을 내려고 합니다. 이 바벨탑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바벨론 세력에 대한 하나의 모형이며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성과 대를 쌓는 노아의 후손들을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온 지면에 흩으시는 내용이 5절부터 9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바벨 탑은 힘센 자를 왕으로 세우고 그 왕을 중심으로 힘을 합쳐서 드러내어 하나님을 대신하고 대적하려는 행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들의 계획과 행위를 심판하시고 그들을 흩어버리십니다.
흩어지게 하시는 방법은 당시 하나였던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7절) 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결과를 8절과 9절에서 소개합니다.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이 흩어버리심은 노아의 아들들에게 언약하신대로 족속별로 분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위 그림). 인간의 악함과 교만으로 인해 만들어진 바벨 탑 사건을,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성취하시는 것으로 사용하십니다.
요셉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이같은 것에 대하여 솔로몬은 잠언에서 이렇게 찬양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또한 흩어버리심은,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사건과 대조되고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어가 하나가 되어서 바벨 탑을 세우는 자들에게 각각의 방언으로 흩어버리십니다.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때에 또 다른 모습의 방언 역사 사건이 나타납니다.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자들이 하늘의 방언에 의해 모두 동일한 언어로 듣게 된 것입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자신들의 언어로 듣고서 모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본문의 6절에서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라고 하시는데 이 말의 뜻은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의 한계를 나타낸 말이 아니라, 그들의 경영을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어느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의미의 내용입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자, 우리가 내려가서’(7절)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자고 하신 말씀이 잘 말하여 줍니다.
여호와께서는 노아의 후손들이 쌓고 있는 성과 대를 쌓지 못하게 하시려고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그들로 흩어지게 하십니다. 그래서 홍수 이후 노아의 후손들이 온 지면에 흩어져 살게 된 것입니다. 일반 역사에 나타나는 인류 문화사를 살펴보면, 그 발생지 가운데 가장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이 유프라테스강 유역입니다.
이 지역이 노아의 후손들이 처음 살던 부근입니다. 그리고 발생하는 문명의 발생지들,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과 인도의 인더스강 유역과 중국의 황하 유역이 인류 문화의 4대 발생지로 모두 노아 후손들이 만든 지역들입니다.
노아의 세 아들 가운데 셈의 후손들은 대부분 아시아 대륙에 퍼져 살게 되었고, 함의 아들인 가나안은 지중해 남쪽 해안과 아프리카 동쪽 지역과 서남 아시아 남쪽과 아라비아 남쪽 등지에서 살았고, 야벳은 유럽 대륙 남쪽 곧 지중해 북쪽 해안과 흑해 부근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인구의 많은 이동에 의하여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와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인구 숫자의 차이는 있지만 여러 종족들이 섞여 살게 됩니다.
셈의 후손은 비교적 황색 피부를 가지고 있고, 함의 후손은 흑색 피부를 가지고 있으며, 야벳의 후손은 백색 피부를 가지고 있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노아의 후손이 번창하여 온 땅에 퍼져 살게 된 것은, 여호와께서 홍수 후에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9:1)고 하신 언약의 말씀을 이루어 주시는 섭리인 것입니다.
타락한 현대 인간들은 모든 인류가 단결하여 하나의 지구촌을 만들고자 하는 꿈과 이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온 세계는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들어 하나의 지구촌 시대를 열면 세계 평화가 정착되고 인간의 최대 행복이 달성된다는 망상과 함께 무지한 인간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의 종말이 가까워 올 때면 여러 나라와 군왕들이 연합한 하나의 큰 짐승 권세가 등장하고 그 짐승 권세를 탄 음녀 권세가 나오는데 그 세력이 바로 바벨론입니다.
그 바벨론 세력이 지구상에 있는 온 인류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권력을 가진 지배 세력으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되지만, 그 바벨론이 망할 것을 사도 요한이 예언하고 있습니다(계17:~18:). 노아의 후손들이 언어가 하나되어 흩어짐을 면하려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바벨 탑을 쌓았듯이 마지막 때에도 온 인류가 다 단합하여 큰 세력으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러니까 바벨 탑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바벨론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모형이며 상징입니다.
죄가 하는 일은 고대 사회나 현대 사회나 그리고 가나안이나 애굽이나 같습니다. 소돔 땅이나 가나안 땅에서의 타락 행위가 그 시대 그 땅에서뿐만 아니라 지금의 사회에서도 그대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죄는 죄일 뿐입니다. 죄의 종류가 다르다고 해서 죄의 차이가 있거나 죄의 경중(經重)에 따라 다른 결과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죄의 평가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타락한 사람이 만든 사회나 법이 하는 것도 아닙니다. 죄의 심판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하시며 죄는 모두 동일한 죄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는 같은 무게요 같은 심판의 대상입니다. 성경을 모르면 인간은 자기 생각대로 죄를 판단하고 평가를 합니다. 흔히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몸이 아프다든가, 하는 일들이 실패하거나 방해를 받는다든가 하면 대부분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여깁니다. 또한 많은 성도들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십계명을 가지고서 죄의 기준을 삼고 턱걸이로 생각합니다. 십계명에 나타난 계명들만 스스로 보기에 잘 지켰거나 회개(고백)하면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호흡하는 자체가 죄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삶 자체가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죄는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해결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를 해결하시기에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으로 오신 것입니다. 내가 아는 죄만이 죄의 목록이라면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 자신의 능력으로도 얼마든지 죄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인간은 눈을 뜨면서부터 죄를 짓는 기계입니다. 그리스도 없이는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그리스도로 무장되고 덮여져야 평안하게 살아집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지 범죄했으므로 죄인이 아닙니다. 여기서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피 값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 세상에서 육체적 죄를 짓고 있을 때 그리고 사업을 하다가 무너지고 있는 때. 또한 주의 자녀들이 시험을 치다가 어려움을 당하는 때든지, 내가 지치거나 아파할 때에 전능자 하나님께서는 어디 계셨으며 무엇하고 계셨는지요?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신다고 하셨으며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함께 하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된 것인가요? 만약 성경이 없었다면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을 오해하거나 의심될 것 같습니다. 성경을 그냥 넘기지 마시고 하나님이 뜻에 내 모든 것으로 집중하며 듣고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
그리고 10절부터 노아의 아들 셈의 번창한 계보와 거주지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12장부터 선민들에 대한 역사를 드러내시고자 하는 뜻이십니다. 이 족보는 언약 자손의 계보로서 아브라함을 이어가며 그리고 장차 언약대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잇는 것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계보에서 중요한 것 두 가지 중 첫 번째는, ‘죽었다’는 표현 없이 ‘낳았다’는 말씀만 있다는 것입니다(10~26절).
마태복음 1장에도 동일한 ‘낳았다’는 표현만 사용하십니다. 물론 마태복음 1장에서의 예수님 족보는 구약의 셈의 족보에 대한 성취요 완성이기도 합니다. 이는 신령한 백성들을 향해 육체적 죽음에 대한 무의미함과 영생의 천로만이 놓여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죽음이란 단어가 영생의 천로를 향하는 자들에게는 무의미하고 죽음이란 것이 없다는 것을 기록하여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계보는 바벨론 땅에서 돌아온 에스라에 의해서도 잘 정리되고 있습니다. 성경의 역사가 세계사에서 유대사로 바뀌며 전환되는 장소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미리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흘러갈 것이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31절)
두 번째는, 인간의 수명과 인명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 초기에는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려고 인간의 수명을 길게 하시고 어느 정도 인간이 번창하면서 수명을 짧게 하신 사실을 셈의 계보 내용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류 초기에는 인간의 수명이 천년 가까이 살다가 노아 이후로 점점 줄어들었고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는 이백오 세에 죽습니다. 여기에 여러 학자들은 노아의 홍수 사건으로 인해 궁창의 물층 하나가 없으지면서 온 현상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이 계보에는 셈의 후손들이 오랜 기간 동안 자녀를 낳았다는 사실만 밝혀 주고 있을 뿐, 낳은 자녀들의 이름들은 다 기록하고 있지 아니합니다. 그 이유는 이 계보 내용의 의미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계보 내용의 의미는 단순히 계보를 알리거나 사람의 이름을 역사적으로 밝히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세우신 언약을 그대로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므로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시는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시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들로 땅에 충만하게 하시는 섭리를 통하여 세우신 언약을 이루어 주시므로, 언약을 이루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나타내시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계보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여호와의 언약의 유업을 이어가는 선택된 자들인 것입니다.
26절부터 32절까지는 셈의 계통에서 출생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후예에 대한 내용합니다.
이는 아브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시기 위한 준비입니다. 데라의 가족과 아브람을 향하신 섭리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하시는데, 그 첫 번째는 그의 가족들의 이동과 계획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동의 결국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아브람 가족 상황입니다.
첫 번째는 그의 가족들의 이동과 계획인데, 31절에서 데라의 가족은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와서 현재 ‘하란’이라는 지역에 머물고 있고, 이동의 최종 목적지는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는 계획을 가졌다는 것입니다(31절).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이들 가족은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 장사를 하였으며 당시 가나안 땅은 창세기 15장 19~21절에 나타난 것처럼 여러 부족들이 모여 살고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동 계획의 결국입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그의 며느리와 손자 롯을 데리고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내려가고자 했으나 가족의 어른인 아버지 데라는 하란에서 죽었으며 결국에는 아브람 가족과 조카 롯만 남게 되었습니다(32절).
세 번째는 하란에서의 아브람 가족 상황은, 이들에게 자식이 없었고 그와 사래 두 사람이라고 밝혀 말씀하십니다(30절).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본문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말씀하시려는 뜻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언약자손 아브람만을 가나안 땅으로 이동시키셔서 그를 통한 계획을 뜻대로 행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 조카 롯도 데리고 함께 내려가지만 그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지게 하심으로 가나안 땅은 온전히 아브람과 그의 후손들만의 땅이다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구체적으로 12장 이후부터 하나씩 밝혀집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류의 시조 아담에게 실체적인 나라에 대한 세 가지 언약을 세우시고 그로 인해 그들을 보호 인도하신 사실을 노아와 그의 후손까지의 역사를 통해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이어진 12장부터는 선민의 열조에게 모형적으로 나라에 대한 세 가지 언약을 세우시고 그 언약을 성취해 가시는 섭리를 계속해 가시는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