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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 성취/웃음
제 목 : 말씀대로 이루시는 여호와
성 경 : 창 21:1~7
찬 송 : 545장
저 자 : 이삼규 목사
출 처 : 20240908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창 2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창 21:2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창 21:3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창 21:4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창 21:5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창 21: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창 21:7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이상준목사의 저서 √“그래도 너는 아름다운 청년이다”(두란노)라는 책에 이런 간증이 있습니다.
나는 원래 바보 소년이었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제대로 읽은 책이 하나도 없었다. 큰형과 작은형은 IQ가 뛰어난 천재들이었지만 나는 세 자릿수에 겨우 턱걸이했다. 그러던 내가 중 3 올라가던 겨울 수련회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수련회에서 전도사님이 성경을 선물로 주시면서 “반년 만에 읽어라”하시는데, 조건부로 성경을 주셨나 보다 싶었다. 그래서 그날부터 매일 성경을 한두 시간씩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씀이 내 안에 쌓이기 시작했고, 난생처음으로 책 한 권을 완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혜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때 성경이 재미있었던 것은 열등한 내게 성경은 축복의 보고였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니 하나님이 실로 엄청난 약속을 남발하셨음을 알았다. 나는 그중에 야고보서 1장 5절 말씀을 붙들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나는 제일 못하는 수학의 정석 겉장에 말씀을 적었다. 그리고 문제를 풀 수 없을 때마다 이 약속의 말씀을 하나님께 상기시키며 당당하게 지혜를 요구했고, 그때마다 기적같이 문제들을 이해시켜 주셨다. 나는 그렇게 고등학교 3년을 보냈고 대학 문턱에도 가기 어렵던 내가 4년제 대학에 입학했다. 그것도 책 읽는 영문과에 들어갔다. 게다가 4년 장학생에 미국 교환학생까지 다녀왔고, 지금까지 15권의 책을 번역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여러분!
절망과 고통의 순간에 내가 붙들고 기도하는 약속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창세기 21장부터 22장까지는 이삭의 출생부터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사건까지 다양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100세 되던 해부터 대략 25년 후까지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아브라함의 유일한 독자인 이삭의 출생은 25년이란 긴 세월동안 고대하던 언약의 성취입니다. 또한 이삭의 탄생으로 시작된 이스라엘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탄생과 연결되며 아브라함의 언약을 계승한 것입니다. 이삭의 탄생 기사인 오늘 본문은 두 가지 영적 교훈을 줍니다.
첫째, 여호와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은 그분의 돌보심과 행하심으로 그분의 때에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 언약의 성취를 경험한 자는 더욱더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불신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실 때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삭을 낳고 하나님으로 인해 참 웃음을 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앞에서 이삭에게 할례를 행함으로 언약에 더욱더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언약의 상속자인 이삭의 출생은 모든 점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 이뤄진 사건으로, 그분의 백성과 새 언약을 세우시고 성취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동일한 영적 의미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행하심(1~2절)
√창 2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창 21:2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1절은 이삭 출생이라는 사건을 여호와의 ‘돌보심’(파카드)으로 시작합니다. ‘돌보심’(파카드)의 기본 뜻은 ‘방문하다’이지만 방문의 목적에 따라 ‘보살피다’ 혹은 ‘복수하다’라는 양극단의 뜻으로 갈라집니다.
출 34: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무엇보다 이 용어가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출 4:31; 렘 29:10). 1절에 사용된 ‘돌보셨다’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이삭의 출생을 구원 사건과 결부시켜 해석하는 근거가 됩니다. 물론 본문의 경우에는 1년 전에 약속하신 것(18:10)이 성취되도록 보살피고 역사하셨다는 뜻입니다.
1절에서 눈에 띠는 것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는 문구입니다. 이것은 가깝게는 사라에게 주어진 약속(18:10~15), 그리고 멀리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17:16~21)과 연결되어, 창세기 21장을 ‘약속과 성취’라는 도식으로 해석하도록 이끕니다.
거기에다가 1절에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는 말씀이 거듭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반복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수차례에 걸쳐 언약의 후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12:2; 15:4~5; 17:16~21; 18:14). 오늘 본문은 그 약속이 하나님에 의해 성취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여호와’라는 고유 명사로 시작합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 사용하신 이름입니다.
창 15: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더불어 1절의 ‘돌보시다’와 ‘행하시다’는 언약을 주도적으로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잘 보여 줍니다. 특히 ‘돌보다’는 말씀은 구약에 285회 등장하며, 하나님의 인격적인 성품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사라를 방문하셔서 돌보셨고(18:24), 1년 뒤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습니다(2절). 사라를 통한 언약의 후손 이삭의 탄생은 하나님 백성의 삶과 죽음이 그분의 주권적인 손에 온전히 달려 있음을 보여 줍니다.
2절의 ‘시기가 되어’는 하나님의 언약 성취에 중요한 의미를 더하는 표현입니다. 그 시기는 ‘언약을 성취할 때’를 의미하는데, 아브라함이 100세이고 사라는 경수가 끊어진 상황을 뛰어 넘어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가 역사할 때를 가리킵니다. 즉 본문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진리를 강조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때에’ 여러분의 삶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무엇이든 어떤 상황이든 한 치의 오차 없이 그대로 성취됩니다. 하나님은 영원불변하시고 신실하실 뿐 아니라 유한한 인간과 달리 무한하시고 전능하셔서 이루지 못할 일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히 11: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과 자연의 순리를 뛰어넘으시는 하나님이 나이 들어 경수가 끊어진 사라로 하여금 출산하게 하심으로 그분의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구약에서 약속하신 것 가운데 신약에서 성취되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또 신약에서 주님이 약속하신 것들도 이미 성취되었거나 성취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복을 누리며, 성령의 능력으로 거룩한 자녀로 변화되어 가고 있음이 그것을 증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임재가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성도는 그 아름다운 때를 소망하며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삭의 출생(3~5절)
√(그림-이삭의 출생)
√창 21:3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창 21:4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창 21:5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태어난 아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삭’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창 17: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이삭’이라는 이름에는 사연이 많습니다. 이 단어의 기본 뜻은 ‘이츠하크’ 즉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이삭이 출생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은 웃음으로 반응했습니다.
√창 17: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이후에 하나님이 직접 그들을 방문하셔서 1년 뒤에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라도 웃음으로 반응했습니다.
√창 18: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하나님의 말씀이 상식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웃어넘겼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실소는 이삭의 탄생으로 참된 기쁨의 웃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이 태어나자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그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었고 출생 8일 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그는 아들의 출생으로 인해 하나님께 더욱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을 기다리는 동안 항상 순종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지만 거기에 기근이 들자 급하게 애굽으로 내려가고 말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향 아버지 집을 떠났으나 그 여정에서 불순종을 선택한 것입니다. 애굽에서 그는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결과, 그곳 왕에게 아내를 빼앗길 위기를 겪고서야 애굽을 떠났습니다. 또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이 태어나지 않자 자신의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여기기도 했고, 여종 하갈과의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낳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온전히 순종하지 못했던 아브라함이 긴 세월 동안 믿음의 여정을 거치면서 자신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마침내 아들이 태어나는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면서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신 것으로 언약 백성으로서 지녀야 할 외적 표징입니다.
창 17:11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이 성취된 것을 기뻐하며 이삭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보통 아기들은 태어난 지 ‘제 8일’에 할례를 행합니다. ‘제 8일’의 영적 의미는 산모의 부정한 기간인 7일이 지난 첫째 날이며, 한 주간이 지난 후 옛것을 벗어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날입니다. 현대 의학에서는 피를 응고시키고 비타민K와 프로트롬반이 가장 활성화되는 생후 8일 이후를 피가 가장 잘 응고되는 시기로 봅니다. 물론 아브라함 시대에는 이와 같은 의학 지식이 없었지만, 이미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가장 적절한 시기에 할례를 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성도들은 육체의 할례를 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죄악을 잘라내는 영적인 할례를 마음에 행함으로 세상과 죄악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룩한 성도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겸손히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마음에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자신의 부패한 옛 사람을 죽이고 새롭게 거듭남으로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전의 더럽고 죄악 가득한 삶을 베어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새로운 삶, 거룩한 사람을 사는 것이 바로 마음의 할례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을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내주하시는 자만이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됩니다.
√사라의 웃음(6~7절)
√(그림-사라의 웃음)
√창 21: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창 21:7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여기에 나오는 사라의 발언은 이삭이라는 이름과 관련하여 이름과 관련하여 그녀의 대담하고도 신앙적인 반응을 보여 줍니다. 사라는 태어난 아이에게 이삭이라는 이름을 붙이고는 이름의 뜻인 ‘웃음’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녀는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과거에 웃음으로 반응했던 부끄러움을 극복하고 선언하는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웃음이 자신에게서 그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퍼져 나가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라는 이어서 자신과 아브라함이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아기를 낳았다고 말합니다. 이 발언은 1절에 나왔던 하나님의 돌보심과 행하심을 염두에 두고서 한 말로 보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 성취를 경험할 때 주변 사람들과 함께 영광을 돌리는 은혜가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이삭의 출생을 소개하는 본문의 분위기는 웃음과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일반적으로 아기가 태어나는 일도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는데,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그래서 하나님의 돌보심이 아니고서는 가능하지 않은 아기의 출생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일은 모두가 함께 기뻐하고 축하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삶에 진정한 웃음을 주시기를 원하셨지만 처음부터 아브라함과 사라는 건강한 웃음을 웃던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먼저 그들은 웃음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백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던 아들은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고향을 떠나갈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한 약속이 있었는데 "큰 민족을 이루고 지극히 창되게 하리라." 는 이 약속을 그들이 받고 떠나갔지만 아들이 태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래 기다리면서 그들의 마음속에 웃음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아이가 없는 집의 대부분 특징이 바로 웃음이 적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열매도 없고 열심히 일을 하는데도 결실이 없을 때 우리 속에는 웃음이 생기지 않고 웃음을 잃어버리고 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냥 우리의 삶을 우울하게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고 반드시 우리를 웃게 하고야 마는 그런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이제 웃음이 없던 이 아브라함이 드디어 웃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그는 기쁨에 겨워 감격에 겨워 웃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삭을 그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었는데 이삭은 웃음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자기 아들을 '이삭'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 당신이 우리의 웃음입니다. 주님이 바로 우리에게 웃음을 주셨습니다. 내 슬픔과 괴로움과 부끄러움을 웃음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 이런 귀한 고백으로 그 아들을 '이삭'이라 부르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UCLA 한 의학박사가 우리 인체를 연구하는 중에 인간의 뇌 속에 웃음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가 왼쪽 대뇌 신경조직에 표면적이 약 4cm되는 웃음보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웃음엔진이 움직이면서 사람으로 하여금 웃게 하는데 이 뺨에 있는 근육을 움직이면서 아주 크게 웃도록 하는 사실을 발견하고 발표했던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고장 난 인간의 웃음보를 수술해 주십니다. 도무지 웃지 못하고 도무지 즐거워 할 줄 모르는 인간의 고통 속에 있는 모든 모습을 보시고 찾아오셔서 그 모든 웃음보들을 치료하시고 기쁨으로 웃을 수 있는 능력을 주님은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웃음 가득한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난 다음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기쁨이 있었고 질서가 있었고 조화가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속에는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이 웃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기쁨은 사라지고 전쟁과 미움이 가득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인격적으로 돌보시며 언약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아브라함이 75세 때 자손의 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그가 100세 되었을 때 이삭을 주시며 언약을 성취하셨습니다. 비록 약속이 더디 이뤄지는 것처럼 보여도 계속해서 인내하며 기도할 때, 마침내 우리는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도는 죄악으로 가득한 삶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마음의 할례입니다. 거룩하며 성령 충만한 성도는 매 순간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평안 속에서 천국의 웃음을 누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봅시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아 가는 기쁨으로 충만한 인생이기 되기를 소원합니다. 새 언약을 생각할 때마다 웃음과 감사로 반응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웃음은 또 다른 사람을 웃게 합니다. 진정한 기쁨을 가진 성도는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속에는 극히 괴로움을 주는 사람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세상 속에 들어가서 기쁨을 주고 웃음을 줄 수 있는 웃음의 전달자들로 살아가기를 주님께서 원하고 계십니다. 수많은 고통의 사람들에게 들어가서 기쁨과 웃음을 선포하는 복된 웃음의 사신으로 살아가시기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