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부(8:1-14)
성숙한 사랑
육신적인 해방을 위한 신음(8:1-4)
이 아가서의 마지막 부분은 신부가 육신적인 굴레와 신음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갈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8:1-4) 이 사랑하는 여인의 경우와 같이, 신자가 그리스도와 더 관계를 맺게 될 때 ‘바깥사람’ 즉 육신적인 성격이 속사람을 세한 시킴을 더 깨닫게 된다. 겉사람은 날로 후패한다. 육신의 썩을 몸은,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입기 위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보존되지만, 그것은 죽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능력이 때때로 육신의 연약함을 통해서 나타날 때가 있지만 육신의 몸은 영적인 가시처럼 신자를 괴롭힌다
신자가 영적인 사랑이 두터워지고 영적으로 성숙해짐에 따라서, 완전한 성숙은 생활에 현존하는 육신의 제한 때문에 아직 제재를 받을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게 된다. 비록 신자가 그의 속사람에 부활의 첫열매를 맺었다 하더라도, 그는 모든 피조물이 공통적으로 부르짖는 신음소리에서 면제 된 것이 아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22-23)
신자가 육신의 힘 안에서 생활하는 동안에는, 몸의 구속에 대한 필요성을 의식하지 못한다.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더욱 깊어 질 때에만 신자들은 속사람과 겉사람의 차이점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몸이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커다란 약점 밖에 될 수 없다. 그리고 영적으로 성숙한 상태에서는 몸의 구속에 대한 필요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양상을 띠게 된다.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더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 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8:1)
이스라엘의 옛날 풍습으로는 남자와 여자가 공석상에서 입을 맞추고, 심지어 남편과 아내가 공중 앞에서 입을 맞추는 것까지도 저속한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에 예외가 있었다면 그것은 피를 나눈 사이 즉, 형제와 자매 사이에 입을 맞추는 것은 허용되었다. 따라서 여인은 주님의 사랑스러움과 그녀가 주님에 대해서 느끼는 사랑의 정도를 자기 마음대로 세상에 표현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여기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나의 오빠라면 하나님 안에서 맺어진 완전한 관계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이여, 그렇게 된다면 내가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을 공적으로 표현하더라도 사람들로부터 불경건하다고 비난을 받고 예의에 벗어난 행동을 한다고 비웃음을 당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 육신의 상태가 지속되는 한 저는 당신 앞에 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없음을 더욱 더 느낍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조소대문에 저의 사랑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당신이 나에게 입을 맞추어 주기를 원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사랑 안에서 자랑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먼저 당신에게 입 맞추기를 원합니다. 나는 계속해서 나의 사랑을 표현하고 싶고 또 나의 사랑으로 당신의 마음을 채우고 싶습니다. 나의 사랑을 충분히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내가 땅에 매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이 몸 안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나의 형제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 같은 완전한 사랑의 표현은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해야 할 만큼 당신을 섬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미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 즙으로 네게 마시웠겠고”(8:8)
그래서 그녀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한 해방의 날이 오면, 나의 사랑하는 이여, 나는 그대를 위에 있는 예루살렘 즉, 우리 모두의 어머니(갈4:26) 에게로 인도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는 이 위대한 은혜를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대에 나는 육신에 매인 것이 없이 주님을 섬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이 육신의 몸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이 필요합니다. 그때에는 이 영광스럽게 되지 못한 육신까지도 나의 찬양에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내가 맺은 영적인 열매는 모두 당신의 기쁨의 포도주 잔을 채워드리기 위해서 향기로운 포도주로 짜여질 것입니다. 당신에 의해서 맺어진 열매는 일점일획의 육신적인 영광도 없을 것이며, 나 개인의 만족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쓰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씨로 가득차 있는 석류 즙은 당신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향기롭고 달콤한 포도즙이 될 것입니다. 내가 모든 육신의 굴레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때 나의 모든 것을 바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은 영원토록 그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드려질 것입니다.
“너는 왼 손으로 내 머리에 배게하고 오른 손으로 나를 안았었으리라”(8:3)
이 구절을 통해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상적인 제한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그 날, 저는 완전히 그대의 품에 안기어 그대의 왼손은 나의 머리를 받치고, 나는 그대의 얼굴만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대의 오른 손은 나를 사랑의 포옹으로 껴안아 내가 그대의 품안에 가슴과 가슴을 맛대고 드러누워서 그대의 얼굴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여 나는 이러한 날이 올 것을 바라면서 오늘을 삽니다. 오! 그 날이여 어서 오기를! 아 그 날이 속히 오기를!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지니라”(8:4)
이제 처녀 신부는 그녀의 신랑께서 돌아올 날을 고대하면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같이 있게 될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녀의 감정은 황홀경에 빠져 있다. 이와 같은 마음의 상태는 주님과의 관계에서 완전한 성숙에 이른 그녀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이는 축복된 기대이며 기나긴 기다림 속에 이루어진 영적 수고의 열매이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이와 같은 축복과 기대를 방해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녀는 현재의 영적 상태에 육신의 탈을 쓴 사람이 와서 자기가 누리고 있는 소망에 물의를 일으키지 않기를 고대한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존전에 이를 때까지 그녀는 이 복된 소망을 누리고 싶은 것이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준비(8:5-14)
마지막으로 우리는 8:5-14절 사이에서 공중 들림 직전에 처해 있는 그녀의 자세를 살펴볼 수 있다.
“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8:5)
아가서에서 여인이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것이 두 번 언급되어 있다. 처음 것은 3:6절에서 그녀와 주님과의 연합이 시작될 때이고, 곧 이어서 주님을 위해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그녀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전적으로 주님의 생명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 그녀의 욕망이 묘사되어 있다. 드디어 그녀는 주님께서 내려 주신 은혜의 축복 안에 거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녀는 계속해서 상당한 진전을 보인다. 앞으로 전진함에 따라 그녀는 거친 들로 표현되어 있는 초창기의 영적생활을 포기하기 시작한다. 이 사막과 같은 생활을 영위하는 동안에 그녀의 생활 가운데는 넘어지고 잠시 주저하는 때도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주저함이나 실수가 필연적인 것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이 용서할만한 것이었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영적인 방황의 생활은 주님과 맺은 깊은 사랑의 관계 때문에 영원히 포기되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주님께서 움직이는 범주 내에서 언제나 주님과 함께 전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성령께서 무엇 때문에 다시 한 번 거친 들에서 올라왔는가를 의문시하지 않을 수 없다. 한번 일별해 볼 때 그녀가 아직 영적으로 거친 들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이 ‘거친 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볼 가치가 있다. 우리는 우리 개인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거친 들 가운데 하나가 영적인 빈곤과 방황으로 얼룩진 생활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또 하나의 거친 들은 우리가 많은 시험과 시련을 겪게 되는 세계이다. 하나는 영적인 세계에서 경험하는 거친 들이고, 또 하나는 육신적인 세계에서 경험하게 되는 거친 들이다.
우리가 내적으로 영적인 방황에서 해방되었을 때에, 우리는 우리 주변의 세상에서 오는 외적인 압력과 세력으로부터도 비슷한 해방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 그의 내재하심을 통해서 우리를 완전히 지배하게 될 때, 우리는 내적인 광야에서 뿐만 아니라 외적인 광야에서도 자유와 해방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영적인 거친 들로부터 구원해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주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이 우리를 세상의 방황으로부터 또 세상의 구속(얽어맴) 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은 우리를 불러 준비하도록 재촉하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제3자를 통해서 질문을 던지는 방법을 쓰신다.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이가 누구인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여인이 거친 들에서 올라와서 사랑하는 주님에게 점점 더 의지하게 되는 과정을 묘사해주고 있다. 한걸음씩 전진함에 따라 그녀의 보는 눈과 초점이 점점 더 명확해진다. 주님이 묵는 질문은 ‘그 여자가 누구냐?’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하는 주님 자신으로부터 아주 명확한 해답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던져진 질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하다. 그것은 주님의 재림의 약속과 영향은 일정한 기간 동안 계속된다는 것이다. 주님과 한걸음씩 한걸음씩 동행하는 동안에 이 여인으로 하여금 세상을 버리도록 자극을 주는 것은 이 ‘주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자가 세상을 뒤로 하고 하늘나라의 소망으로 인해서 세상을 버릴 때부터 신자의 생활에 주님의 재림이 계시적으로 역사한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우리의 얼굴은 천국을 향하고 우리의 뒤는 세상을 향하고 있다. 이 여인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고, 세상의 모든 유혹으로부터 돌아서서 주님과 더욱 더 친밀한 연합에 이른다. 이것은 바로 ‘에녹’이 들림을 받아 승천하게 된 경위이기도 하다. 우리는 주님께서 갑자기 재림하시고 우리가 변화되어 들림을 받는다 해도 그것이 우리의 영적인 상태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영적으로 온전한 상태에 있을 때에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과 가까이 동행하는 생활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현재는 준비를 위한 시간이며 최선의 준비는 이 여인의 경우처럼, 세상을 등지고 사랑하는 주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그녀 스스로는 아무 힘이 없으며, 주님의 도움과 지원이 없이는 같이 동행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라’는 말은 그녀가 하나의 감당해야 할 짐(부담)으로서 그녀가 사랑하는 주님의 튼튼한 어깨에서 편안한 안식의 원조를 받을 수 있다ㅓ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마치 옛날 야곱이 환도뼈(타고난 힘)가 골절되어 의지할 수 없게 되었던 것처럼, 이제 그녀는 ‘사랑하는 자’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또 이 사막과 같은 세상에서 자신이 갈 길을 찾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제 그녀는 사랑하는 주님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후의 구속에 대비해서 신자를 바른 길로 인도하고 준비시키는 것은 주님 자신이며, 이; 대 사건에 대해 예비하는 가운데 믿음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도 필수적인 조건이라 하겠다. 우리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의식을 주 예수님께 계속해서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사랑하는 이에게 의지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 질문은 사랑하는 주님께서 그녀를 보는 관점을 정확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이 여자는 은혜에 의하여 찾기운 바 되고, 은혜에 의하여 구원받은 하나의 불쌍한 죄인에 불과한 것이다. 이 은혜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 즉 우리 모두의 어머니’로서 (갈4:26)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계획과 그의 영원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사업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모든 역사를 포함하는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기록된 대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이다. 은혜가 죄인을 찾아낼 때, 이러한 죄인은 구세주의 날개 아래 놓이게 되며, 주님께서는 생명을 드리기까지 신고하시며 사랑을 확정하신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사랑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곳의 사과나무는 2:3절과 같은 경우로 충만한 사랑을 베푸시는 그리스도를 비유하고 있다. 이 여인의 눈이 처음으로 띄였을 때, 그 눈은 먼저 주님을 보았으며 그분은 ‘전체가 아름다운 분’이었다. 그리고 새로 뜨인 눈으로 처음 목도한 것은 주님의 사랑의 그늘 안에는 안정과 평화가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자기 자신의 참된 자아를 깨닫고 영적인 성숙에 이른 것은 그녀가 주님을 ‘여러 나무 가운데 사과나무’로 발견했을 때였다. 주님께서 그녀에게 과거를 상기시켜 줌으로써 그녀가 은혜 가운데서 어떻게 구원받은 것을 되새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가! 그녀는 온통 모든 것을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할 뿐이다.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8:6)
주님께서 그녀의 원천을 상기시켜준 후로 그녀는 겸손의 감정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기의 무가치함과 자기 노력의 무의미함, 믿을 수 없는 욕망, 그리고 자기 스스로 가치관을 정해 놓고 찾는 것이 얼마나 보람 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다. 이제 그녀의 모든 희망은 주 예수님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다. 만일 그녀가 끝까지 소망을 버리지 않고 믿음에 선다면 그것은 그녀 자신의 억지나 힘에 의한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주님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형제자매들을 영적으로 도와주고 덕을 끼치는 것도 주님의 한결같은 은혜와 능력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 진리를 깨닫게 된 그녀는 이제 ‘너는 나로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마음은 사랑이 깃드는 장소이며 팔은 힘이 머무는 곳이다. 따라서 그녀는 주님에게 주님의 마음 안에서 영원히 쉴 수 있는 안식처를 달라고, 그리고 그녀로 하여금 주님의 견고한 안전을 느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간구를 하고 있다. ‘옛날 제사장들이 어깨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을 써 붙이고 다녔듯이 저는 주님께서 나를 안으셔서 주님의 팔로 나를 지켜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나는 나의 무력함과 헛된 일에 빠지기 쉬운 나 자신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무력함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오 주님이여 주님의 얼굴을 뵙기 전에 스스로 나 자신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주님의 이름에 누를 끼치는 것이며 나자신의 손실을 가져올 뿐입니다. 저의 모든 희망은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능력에 있습니다. 과거에도 저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얼마나 진실된 것이었습니까? 이제 저는 주님만 바라봅니다. 한 때는 주님의 손을 단단히 붙든 적도 있었습니다. 제 자신이 힘이 강한 것 같았지만 주님께 붙어 있기에는 얼마나 약한 힘이었던지요! 나자신의 힘은 완전히 무력하다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더 이상 제 자신의 힘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능력은 영원히 나를 붙드실 것입니다. 이제 저는 감히 주님에 대한 저의 사랑을 언급할 용기도 없습니다. 오직 저는 주님의 사랑만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고 했는데, 누가 죽음의 세력을 뿌리칠 수 있겠는가? 부모의 탄식이나 아내의 눈물이나, 친구의 마음 아파하는 것 …이 어떤 것도 죽음의 힘을 능가할 수 없다. 죽음은 그 희생자들을 지켜보고 있으며 그들을 꼼짝 달싹 할 수 없는 지경에 붙들어 놓고 있다
‘만일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나는 영원히 안전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를 사랑해 주시니, 주님의 거룩한 질투가 계속 저의 뒤를 따를 것입니다. ’투기(질투)는 무덤같이 잔혹하다‘고 했지 않습니까!’ 만일 주님께서 저를 징계하시면, 그것은 저의 사랑을 온전히 지키려는 목적으로 주시는 채찍으로 알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저의 마음이 주님으로부터 이간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저를 잡으면 잡을수록, 저에 대한 주님의 보호도 강해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저의 어떤 부분도 놓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눈은 주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 물들거나 또는 다른 사랑에 빠지는 것을 묵과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20:5-6) 주님의 사랑하시는 사도들도 신령하고 거룩한 질투로 우리에게 훈계하시지 않았습니까? 바울은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11:2) 만일 주님께서 질투하는 하나님이실진대 저의 무엇이 주님의 시기하심을 막으리이까? 주님께서는 모든 적을 무찌르시고 우리의 사랑에 장애물을 제거하시며 주님이 제게 무엇보다도 더욱 중요하며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없게 하소서. 그러면 저는 주님을 직접 뵈올 때까지 정결한 처녀로 주님의 보호를 받겠습니다.
‘주님, 주의 질투(투기)는 무덤같이 잔혹하다’는 것을 압니다. 무엇이 무덤보다 더 잔혹하겠습니까? 음부(무덤)가 가장 사랑스럽고 소중하며 내가 가장 아끼는 사람을 삼키워 버릴 때, 음부는 타협할 줄 모르나이다. 울어도, 슬퍼해도, 애걸 해봐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음부는 친구도, 동정도, 연민도, 감정도 무시해버리나이다. 이와 같이 주님의 시기하심도 음부와 같이 잔혹한 줄 아나이다. 제가 주님의 것으로 오직 주님의 소유로 나 자신을 순결한 처녀로 드릴 때, 그리고 주님께서 주님의 질투를 자아낼만한 사랑을 발견하실 때, 주님께서는 나의 사랑을 보호하시며, 사랑하는 친구의 설득도, 애원도, 눈물도 개의치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주님의 투기하시는 보호에 의해서 안전히 간수될 것입니다.
‘사랑은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 같으리라 나의 주 여호와여 주님은 소멸하시는 불이니이다’(히12:29) 맞습니다. 저에 대한 주님의 사랑, 저를 향하신 주님의 투기하심은 불꽃같이 강렬하여 무가치하게 타버릴 만한 것들을 모두 살라버리고, 시간과 세상에 속한 것, 잠시 잠간 후면 없어질 세상적인 것을 모조리 삼켜 버리나이다.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8:7)
‘주여, 주님의 사랑은 강렬한 불꽃같아서 수많은 시련과 시험의 물결이 넘쳐와도 끌 수 없나이다. 핍박하는 원수로부터 오는 홍수라도 끌 수 없나이다. 시험도 환난도 핍박도 나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나이다. 주님의 사랑은 돈을 주고 살 수도 없고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도 없나이다.
사람의 말이나 천사의 방언도 주님의 사랑을 떠나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나이다. 예언의 은사나, 신비에 대한 깨달음이나, 모든 지식이나 믿음을 소유했다고 해도 주님의 고귀한 사랑과는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나의 모든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내어 주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할지라도 주님의 사랑에 대한 대용으로 생각할 때는 하나의 조롱거리에 불과하나이다. 이런 것들은 가정의 가구와 비교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주님의 위대한 사랑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 저는 봉사의 열심이나 봉사하는 일에 시간을 더소비하거나 헌신을 더욱 굳게 함으로써 주님의 사랑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나를 먼저 사랑해 주신 주님께 하나의 산 제물로 저 자신을 드실 수밖에 없으며, 다만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으로 족한 존재로서 저 자신을 바치나이다.’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8:8)
우리는 이 처녀가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랑 안에 거하는 자임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이와 같은 사랑을 누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의 임재하심을 깨닫고 주님의 얼굴을 뵙기 전에는, 그녀의 최대 관심은 다른 성도들의 미숙함에 쏠려 있었다. 이제 그녀는 주님의 존전에서 생명은 부여받았으나 아직 믿음과 사랑에 있어서 성숙하지 못한 ‘작은 누이’를 언급하게 된 것이다. 주님과 완전한 연합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이제 이 문제에 대해서 직접 주님께 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청혼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
이 성숙하지 못한 ‘누이’는 이 여인에게서 참된 사랑의 생활의 본보기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영원한 사랑의 주님께서 성령의 능력과 역사에 따라서 성숙한 여인과 같은 완숙한 교제와 연합의 경지로 인도해 줄 것을 희망했다. 그녀의 희망에 비추어, 무슨 일을 해 줄 수 있는가? 그녀 생명의 깊이나 영적인 성장에 비추어 볼 때, 그녀는 하나의 어린 누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의 유방이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의 영적인 규모나 애정의 깊이에 성장이 결여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자들에게는 좀 더 성장한 성도들의 사랑어린 관심이 필요하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영적이 사랑이 주님에게 만족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신자의 생애 가운데는 언젠가 이러한 사람이 특별히 요청될 때가 있다. 이때 순응하느냐 불순종하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주님께 향하는 모든 신자들이 믿음과 사랑에서 완전한 성장을 원한다고 하는 법칙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이와 같이 어린 신자를 어떻게 도와 줄 수 있느냐는 문제가 생기에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이들의 미숙한 상태로 마음의 부담을 느낀 이 여인은 사랑하는 주님과 그 문제를 놓고 영교를 나눈다. 그녀 자신이 주님의 뜻에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녀는 ‘우리’라고 하는 친숙한 표현을 쓸 수 있다. 그녀의 관심이 주님의 마음과 너무나 영합된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주님께 원했던 것은 바로 주님께서 친히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우리’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완전히 사랑하는 이와 조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기도는 더 이상 간구가 아니고 이 어린 누이에 대한 주님의 뜻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여인이 아직 미숙한 성도에 대해서 갖는 욕망은 조금도 개인적인 이익을 목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어떤 겸양의 태도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랑하는 주님과 그녀의 공통된 욕망을 표현한 것이다. 사랑하는 주님의 대답이 이를 잘 입증해 주고 있다.
“그가 성벽일진대 우리는 은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일진대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8:9)
만일 그녀 안에 참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 있고 따라서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모든 것으로부터 차이나게 하는 것이 있다면 ‘은망대’를 세울만한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녀의 생활 위에 구속으로 말미암은 고상하고 고귀한 것이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그녀가 참으로 임재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향한 분리된 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녀의 생애는 구속의 열매로 이룩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문일진대’ 다시 말해서 그녀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와 같은 간증을 보임으로써 다른 이들이 참으로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그녀에게 “백향목 판자로 두른 것‘과 같은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심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다시 말해서 고전11:1에서 보는 바와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 되라’고 할 때 ‘너희’의 본보기를 따라서 ‘나’도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어린 누이에게 가장 좋은 것만을 희망했던 것이다.
“나의 성벽이요 나의 유방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8:10)
그녀는 여기서 자기 자신을 주님을 위해서 구별된 사람으로 간주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모든 더럽고 저속하고 세상적인 것으로부터 그녀를 불러내셨다. 그녀가 자기의 유방에 대해서 언급한 것은 자기의 믿음과 사랑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됨에 따라서 완전히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간증해 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들을 세우셨으며 그녀 안에 강한 믿음과 성숙한 사랑을 심어주셨다. 그녀가 지니게 된 미덕은 더 이상 미숙한 상태로 아니고 망대와 같이 높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그녀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은혜와 화평을 입은 자로 발견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녀는 이제 참된 평안의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성도다 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이러한 생활의 기반이 된다는 것과 또한 참된 평안은 성숙한 믿음과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굉장히 단순한 비유를 통해서 주어진 그녀의 간증이며, 우리는 그녀의 간증 속에서 어떠한 자기 자랑이나 자기만족의 그림자도 발견할 수 없다. 그녀는 자기가 튼튼한 망대가 되었다는 것을 자랑할 수도 있었고 또 그의 유방이 어떻게 성숙했는가를 자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자랑의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이제 간단한 표현을 빌어서 자기가 사랑하는 주님의 면전에서 사랑과 은혜를 입은 자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을 간증하고 있을 뿐이다.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두고 그들로 각기 그 실과를 인하여서 은 일천을 바치게 하였구나”(8:11)
우리는 여기서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성령께서 모든 신자들로 깨닫게 하시기를 원하는 진리의 일면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주님께서 수고의 정도에 따라서 보상하신다는 사실이다. 솔로몬은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내어 주었다. 이 솔로몬의 포도원은 주님께서 하시는 전체적인 일을 대표하는 것이다. 그 일은 절대로 우리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포도원을 가꾸는 사람으로서 또는 청지기로서 들에서 잘 감당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께서 남기는 이자를 주시해야 한다.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것은 주님 자신의 소유물이 되기 때문이다.
‘바알하몬’은 ‘무리를 거느리신 주님’이란 뜻이다. 솔로몬은 이와 같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모형을 따라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역시 많은 무리를 거느리신 주님이시다. 그는 많은 종을 거느리고 있는 주님이시다. 솔로몬이 포도원을 경영할 때에 포도원의 열매는 농부들에게 주어졌다. 다시 말해서 농부들이 수고한대로 소득을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경작해서 주님께서 친히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일하는 농부들에게 열매를 상급으로 주실 것이다. 주님을 위해서 되어진 일은 결코 헛된 일이 없다. 심지어 냉수한 잔을 주는 것도 보상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농부들 각자로부터 ‘은 일천’이 요구되었다. 농부들은 이 은 일천을 왕에게 가져오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주님을 위해서 이익이 늘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25장과 눅19장의 비유와는 약간 다르다. 이들 비유에서는 종들에게 맡겨진 ‘달란트’와 ‘므나’의 숫자에 관련해서 주인이 종들로부터 이자를 요구했다. 이곳의 은일천은 마땅히 주님께 드려야 할 부분을 나타내는 것으로 신자가 충만한 믿음과 사랑으로 일했을 때에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분량인 것이다. 우리가 마지막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우리는 주님께서 나누어 주시는 극히 적은 분향도 결국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비롯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솔로몬 너는 일천을 얻겠고 실과 지키는 자도 이백을 얻으려니와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8:12)
그녀는 이제 많은 무리 가운데서 자기가 한 사람만을 가려내었다. 그녀는 솔로몬의 많은 포도원 지기 가운데 끼어있는 평범한 포도원지기가 아니었다. 솔로몬은 그녀에게 그녀 자신의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 쓸 수 있는 포도원을 주셨던 것이다. 이 포도원이 이제 그녀의 앞에 놓여있고 이 포도원은 그녀에게 속한 것이다. 그녀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포도원을 경작할 수 있었다(창13:9). 보통 포도원지기는 은 일천에 의해서 대표되어 있는 이자를 솔로몬에게 되돌려 줄 의무가 있었다. 순수한 애정으로 인해서 이 여인도 꼭 같은 요구조건에 응했다. 사랑은 법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적게 줄 수는 없다. 그녀는 자기에게 맡겨진 책임의 몫을 사랑으로 인해서 바쳤던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두 가지 형태의 봉사를 찾아 볼 수 있다. 하나는 율법의 요구 때문에 봉사하는 수고이고, 또 하나는 사랑의 표현으로 나타나는 봉사이다. 하나는 두려움에서 비롯하는 봉사이고, 또 한 봉사는 감사에서 비롯하는 봉사이다. 이 봉사는 의무감에서 비롯하는 봉사이며, 저 봉사는 주님을 섬기는 기쁨에서 울어나는 봉사이다.
이제 그녀는 훨씬 더 높은 차원의 신앙생활을 하여 사랑하는 주님과 훨씬 더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봉사는 주님을 섬기는 많은 사람들의 봉사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많은 사람이 의무감 때문에 주님을 봉사하고 있다. 이 사랑하는 여인은 사랑으로 인해서 주님을 섬겼다. 그러므로 그녀의 봉사는 의무감에서 비롯하는 봉사를 훨씬 능가했다.
이러한 봉사로부터 혜택을 입은 것은 솔로몬만이 아니었다. 열매를 지켜보던 농부들도 함께 은혜를 나누게 되었다. 다시 말해 어떤 방법으로든지 열매를 거두는 일을 도와주었던 일꾼들은 모두 그녀로부터 은혜를 입었다. 그녀는 이 농부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할 칭찬을 빼앗지 않았다. 그들도 역시 수고했기 때문에 그들이 수고한 만큼 그들에게 돌아갈 정당한 몫을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다른 동역자들에게 돌아갈 영광을 갈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역자들은 이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자기 종들에게 보상하기 위해 다시 오실 때에는, 그녀도 열매를 지켜보던 사람들 중에 포함되어 함께 은200을 받게 될 것이다. 포도원지기들을 위한 몫은(11절에 의하면) 열매뿐이지, 은은 아니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상을 상업적으로 취급하지 않고 일한 양과 율법보다 사랑을 표현한 여인상을 보게 된다. 그녀는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맡긴 그 이상의 많은 열매를 바쳤다. 주님께서는 여기다 자기 자신의 은전을 보태셨다.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영광을 내려주셨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보듯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에게 던져질 질문은 우리에게 맡겨진 달란트와 므나를 어떻게 이용했느냐는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랑이 초점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의 의무와 책임을 수행하는 문제와는 다르다. 일과 보상의 문제는 여기서 언급되지 않았어야 할 것이다. 일과 상급의 문제는 다른 주체로서 이 책의 주제는 아니다. 성령께서는 의무의 관점에서가 아니고 사랑의 관점에서 신자들이 주님을 섬길 것을 종용하고 있다. 이것은 아가서의 성격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너 동산에 거한 여자야 동부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나로 듣게 하려므나”(8:13)
윗 구절에서 ‘동산’은 복수로 나타나 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녀의 동산에만 거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6:2). 주님께서는 많은 동산에 거하신다. 주 예수께서는 모든 주님의 백성들의 마음속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영적인 사랑은 성숙한 성도들 마음에만 거하시지 않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모든 사람들 속에 거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주님께 말할 때에, ‘동무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고 강조한 것이다.
이 태도는 듣는 모습을 암시해 주고 있다. 세상에는 듣는 태도에 있어서 그녀와 비슷한 태도를 취한 이들이 있다. 그들도 역시 주님의 징계와 훈련을 경험했으며, 이들은 경험을 통해서 많이 말하는 것이 무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들은 듣는 것이 보다 유익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주님의 가르침에 익숙해진 이들은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는 태도를 몸에 익히게 되었다. 이들과 그녀는 모두 주님과의 관계와 경험을 정하는 데 말을 많이 하지 않게 되었다. 이들은 이제 말하기 위해서 말하고 세상적이고 땅에 속한 관심 때문에 사소한 일에 수다를 떠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이제는 전과 다르다. 이들은 듣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자신의 성장이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좌우 되듯이 그들이 하는 일의 상태도 주님의 개인적인 지시를 따라 좌우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들은 주님의 음성이 없이 움직여서도 안되고 또 움직일 수도 없는 것이다.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는 주님의 뜻에 대한 계시가 있을 수 없고 나의 갈길을 비춰줄 빛도 없고 주님의 길을 알 수도 없는 것이다. 신자의 모든 생활은 주님으로부터 무엇을 듣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 ‘그러므로 주님이여’ 우리는 주 앞에 귀를 열고, 주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나이다. 저의 귀를 열어 주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참으로 듣겠나이다. 주님의 말씀이 분명히 그리고 힘 있게 들릴지라도 내가 듣지 못한다면 그것에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 주님이여, 저로 주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다만 주의 음성을 들음으로써 저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전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상에서 이 사랑하는 여인이 그의 교훈을 잘 배웠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영적 생활의 노정을 다음과 같이 깊이 있는 기도로 끝내고 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8:14)
여기서 그녀가 발하고 있는 기도는 2:17절에 나오는 간구와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간구는 완전히 다른 사건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두 가지 종류의 ‘거친 들’이 언급되어 있음을 보아왔다. 따라서 우리는 2:17절과 8:14절에서 보는 것과 같이 두 가지 종류의 다른 종류의 재림을 보게 된다. 2:17절에 나오는 주님의 재림을 갈구하는 기도는 교제로 돌아가자는 주제를 다룬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녀는 교제를 상실했었다. 그 당시에는 반응의 결여 때문에 어두움이 그녀의 영혼을 둘러쌓았던 것이다. 그대에 그녀는 자기 생활을 둘러싸고 있는 어두움이 사라져서 교제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르짖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주님께 벧엘산 또는 분리의 산으로 와달라고 간구했던 것이다.
8:14절에 나오는 절박한 부르짖음은 앞으로 있을 주님의 두 번째 나타나심 즉 주님의 재림을 주제로 하고 있다. 여기서 강조되어있는 것은 교제의 회복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이다. 그녀는 주님의 왕국이 실현될 그 날을 바라보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되는 것은 벧엘의 산들이 아니고 향기로운 산들이다. 이것은 향기와 아름다움으로 가득찬 천년 왕국의 세계를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그녀의 경험은 그리스도에 깊은 사랑으로 점점 더 빠져들어 가는, 다시 말해서 큰 바다 위에 떨어져 자신의 자취를 잃어버린 물방울과도 같은 것이었다. 세상에 남은 것은 그의 육신적인 몸 밖에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마음에 사랑은 다른 세계에 가 있다. 그래서 그녀가 긴박한 어조로, ‘오 사랑의 주님이시여! 어서 오시옵소서, 향기로운 산들에서 빨리 달리는 노루와 어린 사슴처럼 영광스러운 주님의 왕국으로 어서 내려오시옵소서 비록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이 완전하고 충만하다고 하지만 오직 주님께서 다시 오심으로써만 채워질 수 있는 여백이 나의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믿음을 눈으로 보게 될 것이며, 기도는 영원히 찬양으로 변할 것입니다. 사랑은 극치에 이를 것이며 모든 어두운 구름으로부터 본연의 자태를 드러낼 것입니다. 그때에 저는 죄 없는 상태에서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아! 이날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날일까! 주여 오소서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
그 영광스러운 날이 이를 때까지, 나의 동산에서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아름다운 열매를 – 언제까지나 – 맺게 하여 주시 옵소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