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 3,9-15; 2코린 4,13─5,1; 마르 3,20-35
+ 찬미 예수님
지난 한 주간 안녕하셨어요? 지난 주일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지냈고, 6월 한 달을 예수 성심 성월로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예수님 마음 안에 깊이 잠기는 6월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저는 2003년에 캐나다로 공부하러 갔는데요, 당시 교구장이시던 고 경갑룡 요셉 주교님께서 이듬해에 저를 4박 5일간 방문하셨습니다. 오시기 전에 전화를 드렸더니, “그래 김신부, 나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나?”하고 물으시더라고요. 제가 머물고 있던 예비신학생 기숙사 원장 신부님이, 당신 방을 주교님께 내드리라고 하고는 휴가를 떠나셨고, 저는 차를 렌트해 놓았기 때문에, 준비가 다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교님께서 도착하시고, 다음 날 아침 경당에서 함께 미사를 봉헌한 후, 주교님께서 방으로 가려 하시기에, “주교님, 식당은 이쪽입니다.”하고 말씀드렸더니, “아침 준비됐나?”하고 물으시더라고요? 지금 같이 미사 드렸는데 누가 아침 준비를 해요? 그래서 “아니요?”하고 말씀드렸더니, “그러니까 말이야. 아침 준비되면 올게.”하고는 방으로 가셨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제가 주교님 아침 식사 준비를 해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교구청에서 살 때, 토스트 두 개와 계란 후라이 하나를 드시는 걸 보아왔기에, 먼저 계란 후라이를 하기 시작하는데, 어디선가 빵 타는 냄새가 났습니다.
어학 공부하러 와 있던 서울 교구 선배 신부님께, “형, 이 빵 뭐예요?”하고 물었더니 “엉~ 그거 니 거랑 주교님 거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게 물어보지도 않고, 식빵 네 개를 토스트기에 넣고 태웠습니다. 일단 탄 빵은 제 접시에 담고, 빵 두 개를 새로 데워 주교님 접시에 버터와 함께 올려 놓았습니다. 2층으로 뛰어 올라가 방문을 두드리며 “주교님, 아침 준비되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주교님은 식당에 오시더니 제 접시에 놓여있던 식빵 네 개를 물끄러미 쳐다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거 아침부터 많이 먹는구만.”
저는 “아, 이 형이 빵을 태워서요.”라고 하기가 뭐해서, 어떻게 말씀드려야 하나 고민하다가 “아… 예…” 하고는 말았습니다.
그랬더니 주교님이 저를 쳐다보시면서, “재미없나?”라고 하셨습니다. ‘아, 농담하신 건가? 재미있다고 해야 되나?’하고 생각하다가 “예?”하고 여쭈었더니, “잼 말이야, 잼!”하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쨈”이라고 하셨으면 제가 알아들었을텐데, 캐나다 오셨다고 영어로 “jam”이라고 말씀하셔서 제가 못 알아들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jam을 볼 때마다 20년 전 그날 일이 떠오릅니다. 온양성당에서 성당 리모델링 공사 후 남은 빚을 갚기 위해 수제 딸기jam을 해마다 판매하고 있는데요, 저희 본당에도 팔아달라고 보내왔습니다. 미사 후 1층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속상해 하는 것 중 하나가, 오해 받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침에 토스트 네 개 먹는 사람으로 오해받는 것은 그나마 괜찮은 편에 속합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 아버지의 간절한 사랑을 전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친척들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붙잡으러 오고,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이 사람은 베엘제불이 들렸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결국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자고 결의할 사람들입니다. 사면초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억울하신 것은 둘째 문제고, 성령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시면서 죄를 용서하시고 병자를 치유하시는 활동 자체가, 하느님 나라의 선포가 마귀 짓으로 오해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셔야 할까요?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많은 질문의 대상이 되는 말씀 중 하나인데요,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용서받지 못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를 “마지막 회개를 하지 않는 것”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에 저항하는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또한 중세 시대에는 여섯 가지 죄로 풀이했는데요, 절망, 주제넘음, 회개하지 않음, 완고함, 하느님의 진리를 거부함, 다른 사람의 영적 선익을 질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마귀 짓이라고 치부하는 것 자체’가 성령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성부 하느님을 ‘요구조건이 많은, 무섭고 까다로운 할아버지’로 오해해왔습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이 오해를 바로잡으시며 ‘하느님은 너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버지요 어머니’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수님에 대해 먹보, 술꾼, 미친 사람이라고 오해하기 시작합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확증해 주시며 예수님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십니다. 그런데 성령마저 모독하면 더 이상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요.
여기서 핵심은, ‘하느님의 자비에서 제외되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무엇인가’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학자들처럼 눈 감고 의지적으로 회개를 거부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베푸시는 용서에 이르는 길을 스스로 차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절대 용서 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고 ‘선언’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 마음을 열고 회개하라고 ‘경고’하고 계십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오늘의 복음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설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에는 한계가 없다. 그러나 뉘우침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이기를 일부러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 죄의 용서와 성령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물리치는 것이다.”(1864항)
제가 성경 공부 시간에 하느님을 ‘늙은 백인 남자’로 바라보는 것이 문제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신학자들이 늙은 백인 남자들이었기에 그런 하느님상이 자리해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발 더 나아가 하느님을 ‘나 때문에 화난 늙은 백인 남자’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이는 막연한 죄의식에서 비롯합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은 후, 하느님을 경외하는 올바른 두려움이 아니라, 무서워서 피하는 왜곡된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하느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시자, “두려워 숨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동반자에 대한 고발로 이어집니다. “그 나무 열매를 따 먹었느냐?”고 물으시는 하느님께,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주기에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내 탓이 아니라 그 사람 탓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제게 보내주신 하느님, 바로 당신 탓입니다.
창세기의 말씀을 듣다 보면, 아담과 하와가 원망스러워질 때도 있습니다. ‘왜 선악과를 따 먹고 원죄를 지어 우리를 고생시키나’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일 이 이야기가 과거의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나의 이야기라면 어떨까요? 나에게 주신 수많은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고, 나에게 없는 단 한 가지, 바로 그것을 욕망하고, 그것 때문에 더 소중한 것을 희생하고,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에게, 그리고 하느님께 탓을 돌리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인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내탓이오’라고 고백할 것인지, ‘당신 탓이오’라고 말할 것인지 늘 선택의 상황 앞에 놓여있습니다. ‘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저의 큰 탓이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미사 중 참회 예절의 의미입니다. ‘당신이 두려워서 숨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나의 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경 주교님이 다녀가신 이듬해, 선배 신부님이 캐나다에 와서 함께 나이아가라 폭포를 갔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에 걸쳐 있는데, 고속도로로 가다가 몇 개의 출구 중 하나로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렌트한 차의 스피커 성능이 너무 좋아서, 운전하던 제가 ‘룸미러가 떨리는 게 보이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어떤 표지판을 지나갔는데, 언뜻 보니 ‘미국 가기 전 마지막 출구’(Last Exit before U.S.A.)라고 써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선배에게 “표지판 보셨느냐?”고 물었더니, “모르겠는데?”하는 사이에 국경이 나왔습니다.
미국 검문소에서 저희에게 여권을 요구했지만, 둘 다 여권이 없었습니다. 종이에 도장을 쾅하고 찍어주더니 돌아가라고 하기에 받아서 읽어 보니 ‘미국 입국 심사’ 서류에 ‘거부’ 도장이 찍혀 있었습니다. 차를 유턴하자 이번엔 캐나다 검문소가 나왔습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통행세를 낸 후 돌아왔습니다.
이 일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무한합니다. 그러나 무한하신 하느님의 자비에 ‘마지막’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수명이 유한하고, 우리의 의지와 능력이 유한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완고함이라는 고속도로에서, 막연한 죄의식과 두려움이라는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하느님 자비라는 출구로 향해야 합니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130,7)
오늘 제2독서의 말씀에 귀 기울여 봅시다.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1999년 1월, 경갑룡 요셉 주교님께 부제품을 받을 때입니다.
(마이크 들고 계신 분은 당신 신학교 총장이시던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님)
제대 꽃꽂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