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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선택받기를 선택하기
우리 자신의 응답으로 완성되는 ‘거룩한 부르심’
찬미 예수님.
신학생들과 면담을 하다보면 자기 성소에 대해 고민하는 학생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 고민의 이유야 다양할 수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것은 ‘내가 과연 사제가 될 자격이 있을까?’라는 물음입니다. 이러한 고민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 깊어지지요. 저학년일 때는 큰 고민 없이 지내다가 고학년이 되어 수단을 입게 되면서, 또 교회의 직무로 주어지는 독서직과 시종직을 받으면서 이런 고민은 점점 커져갑니다. 그리고 교회의 성직자로 다시 태어나는 부제품을 앞두고 이 고민은 절정에 달합니다. 이러한 고민이 계속되다 보면 ‘내가 사제성소가 있는 게 맞나?’라는 불안한 마음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지요.
어떠세요? 그렇게 긴 시간을 신학교에서 생활해 왔으면서도 아직까지도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모습이 한심하게 여겨지시나요? 하지만 제가 느끼기엔 응당 해야 할 고민이고 또 평생을 되뇌어야 할 물음이라고 여겨집니다. 아무리 신학교 생활을 성실하게 해왔고 또 많은 준비를 했다 하더라도, ‘아, 이 정도면 충분한 준비가 되었다. 나 정도면 부제품, 사제품을 받기에 합당해’라고 자신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신하는 마음이라면 그것이 바로 교만의 모습이겠지요. 사제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격이 있고 잘 살아서 사제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래서 늘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금 주님 앞에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공동체 생활훈화나 때론 수업 때에도 신학생들에게 성소에 대해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물어보지요. 사제성소를 본인들이 택해서 신학교에 온 것이냐고요. 이러한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학생들도 있지만, 또 어떤 학생들은 머뭇거리기도 합니다. 성소라는 말 자체가 ‘거룩한 부르심’을 뜻하기에 이러한 부르심을 자기 자신이 택했다고 말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비단 사제성소뿐만 아니라 수도성소 그리고 우리 모든 신앙인에게 해당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과 대화하도록 초대받는다”(「사목헌장」 19항)라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가르치는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교 성소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르심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성소를 ‘택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성소, 부르심은 근본적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가 인간의 지성으로 진리를 탐구하다가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런 하느님을 믿기로 결심한 데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이 스스로 하느님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당신 자신을 모세에게 또 이스라엘 백성에게 드러내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고, 그 만남에서부터 우리 신앙이 시작된 것이지요. 우리 그리스도교를 ‘계시 종교’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느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셨기 때문에, 성소에 대해서도 그 성소를 택한 것이 아니라 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신학생의 경우에도 사제성소를 택해서 신학교에 온 것이 아니라 사제직무로 부르심을 받아 신학교에 왔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몇몇 학생들은 의아한 표정을 짓기도 합니다. 그렇게 부르심에 응답해서 신학교에 온 것이 전부라면 자기 개인의 자유의지는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 때문입니다. 이 역시도 당연한 물음입니다.
자, 우리의 자유의지는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 신앙인의 삶이 전적으로 하느님의 부르심과 이끄심에 따라 사는 삶이라면,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의 의지와 자유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모든 것을 그저 하느님의 뜻대로, 온전히 수동적으로 따라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만일 그런 것이라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고 이야기하는 자유의지는 또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로 하여금 다른 것은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 절대적이거나 강압적인 방식으로 부르지 않으십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부르심이나 초대가 아니라 명령이겠지요. 이와는 다르게 하느님의 부르심은 우리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는 부르심입니다. 하느님께서 불러주시지만 그 부르심에 응답할지 안할지는 우리의 자유에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소의 여정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할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 초대에 응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만으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 초대에 응답할 때에야 비로소 완성되는 부르심입니다.
다시 신학생의 경우로 돌아가 보면,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어떤 형태로든 사제성소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아무개야, 너는 신부로 살아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바라시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우리가 행복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할까’라는 물음에 가정을 이루는 삶이나 수도자의 삶 혹은 사제의 삶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하느님의 초대이고 부르심입니다. 하지만 그런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는 우리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제성소의 경우라면, 사제직을 향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것을 선택했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맞는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앞서 말씀드린 ‘능동적인 수동성’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부르심은 하느님의 몫이지만 응답은 우리의 몫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부르심의 전체 여정에서는 수동적으로 따라가지만 그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모습에서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던 중에 이런 제목의 책을 본 적이 있습니다. ‘선택받는 것을 선택하기!’ 근본적인 선택은 하느님께서 하시지만 그 안에 우리가 선택하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좋은 표현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참 행복과 영원한 삶을 향한 초대이고 부르심입니다. 그 부르심은 틀림이 없기에 의심하거나 불안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부르심에 나 자신이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를 살필 뿐입니다. 응답에 대한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은총에 이끌린 삶 (1)
있는 그대로의 모습 존중하며 은총 베푸시는 하느님
찬미 예수님.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신앙인의 삶에서 드러나는 능동적인 수동성, 선택받기를 선택하는 삶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 삶의 근본적인 주도권은 하느님께서 쥐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맞는 생각이지요. 우리가 하루하루를 열심히, 애를 써서 살아가고 있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을 이뤄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주님께서 성읍을 지켜 주지 않으시면 그 지키는 이의 파수가 헛되리라. 일찍 일어남도 늦게 자리에 듦도 고난의 빵을 먹음도 너희에게 헛되리라.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이에게는 잘 때에 그만큼을 주신다.”(시편 127,1-2)
이처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것을 우리는 ‘은총’이라고 부릅니다. 은총 역시도 하나의 신비여서 우리 인간의 지성으로 온전히 다 파악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은총을 “하느님의 자녀 곧 양자가 되고 신성과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받는 사람이 되라는 하느님의 부름에 응답하도록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호의이며 거저 주시는 도움”(「가톨릭교회교리서」 1996항)으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느님의 호의와 도움, 은총으로 살아가고 있지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청하고, 또 주시는 은총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느님의 은총을 어떻게 체험하고 계십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호의와 도움을 베풀어 주신다고 할 때, 하느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은총을 주실까요? 우리 자신의 의도나 계획, 처지와는 상관없이 무작정 당신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주시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길을 건너려고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신호등이 붉은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뀐 것을 보고 이제 막 길을 건너려고 합니다. 그런데 신호등이 바뀐 것을 미처 보지 못한 자동차 한 대가 급하게 횡단보도로 질주해 들어오죠. 그리고 저는 그 차를 보지 못한 채 길을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로 들어섭니다. 여차하면 차에 치여 크게 다칠 만한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느님께서 저의 온 몸을 마비시켜서 제가 꼼짝달싹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있게 만드십니다. 그대로 두면 차에 치일 것은 뻔한 일이니까요.
자, 이렇게 해서 제가 교통사고를 당할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이것이 하느님의 은총일까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총으로 저를 보호해 주셨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이런 일이 정말로 일어난다면 그것은 은총이라기보다는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 인간의 삶에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개입하시는 사건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도 하느님의 이러한 초자연적 개입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도 병을 낫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빌기도 하고 또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 안팎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신중하게 기적으로 인정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예외적인 방법이 은총이라기보다는 기적이라고 한다면, 일상적인 하느님의 은총은 어떻게 우리의 삶 안에 주어지고 작용하는 것일까요? 우리 자신의 삶을 ‘은총에 이끌린 삶’이라고 고백한다면, 하느님의 은총은 어떻게 우리의 삶을 이끌어주시는 것일까요?
우리 삶에 주어지는 하느님 은총의 작용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신학의 명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은총은 본성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시킨다”(「신학대전」, 제1부, 제1문, 8, 2)라고 가르치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명제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은총은 본성을 전제하며 완성시킨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은총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초자연적인 선물을 의미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내용과 같죠. 그리고 본성은 모든 인간이 지닌 생물학적 특성뿐만 아니라 동물과 다르게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여러 특성들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인간의 지적 능력, 정서, 의지, 양심, 판단, 숙고된 행동, 영적인 감수성 등이 있지요. 물론 이런 여러 특성들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지적으로 더 뛰어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평범할 수 있죠. 정서적으로 풍부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메마른 사람도 있습니다. 의지가 강한 사람도 있고 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그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더라도 적어도 지성과 정서, 의지라는 측면은 모든 사람에게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것들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말처럼 하느님의 은총이 인간의 본성을 파괴하지 않고 전제하며, 오히려 완성시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쉽게 말씀드리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실 때 인간의 본성적인 능력들을 무시하고 당신 마음대로 주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능력이나 성격을 당신 마음대로 바꾸거나 통제하면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내일 시험을 앞두고 있는 학생의 지적 능력을 갑자기 올려준다거나, 길에 떨어져 있는 돈을 발견한 사람의 양심을 순식간에 키워주는 방식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원고 마감일이 다 돼 다급해진 상황에서 아무리 하느님께 기도를 하고 은총을 청한다고 해도, 어떤 내용을 써야할지를 제 머릿속에 일러주시고 저는 그 내용을 그대로 받아 적으면 되는 방식으로 은총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은총이 본성을 전제한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당신 은총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 주실 때 우리 각자의 인간적 본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협력을 요구하신다는 뜻입니다. 당신 마음대로, 우리의 자유로운 의사와는 상관없이 은총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잘 받을 수 있게끔 그리고 그 은총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끔 우리 각자도 자기 본성의 능력으로 협력할 것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한 분이신데 왜 우리 인간 본성의 협력을 필요로 하실까요?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 마음대로 우리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꼭두각시와 같은 존재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왜 그렇게 창조하셨을까요?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의 속성 자체가 상대방의 자유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은총의 방식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은총에 이끌린 삶 (2)
거저 주시는 은총도 알아볼 수 있도록 깨어 있어야
찬미 예수님.
지난 한 주 동안 하느님의 은총을 많이 받으셨습니까?
은총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본성적인 능력을 무시한 채 당신 마음대로 은총을 주지 않으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로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지성이나 감정, 의지나 양심 같은 본성적인 능력을 존중하면서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둘째로는 그러는 가운데 우리 각자의 협력을 요구하신다고 말씀드렸지요.
전에 말씀드렸던 믿음의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향주덕의 하나로서 결국에는 하느님 은총으로 이뤄지는 신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자신의 믿을 수 있는 능력과 전혀 상관이 없는 덕은 아닙니다. 은총의 차원에까지 이르지 않더라도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이성으로 곰곰이 따지고 살펴서 믿을 만하다고 판단될 때 우리는 믿게 되죠. 그리고 때로는 그 믿을 만함이라는 근거가 부족할 때에도, 정말 그런지 아닌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믿고 싶은 마음 때문에 믿기도 합니다. 희망도,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차원에서도 무언가를 바라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믿을 수 있는 힘은 우리 신앙에도 마찬가지로 요구됩니다. 성경에 쓰여 있는 말씀이 아무리 해도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성경 말씀이니까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해서 믿는 것이라면, 이는 건강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저 맹목적인 믿음 또는 그릇된 신념일 뿐이죠.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질문하지 않는 신앙은 그 자체로 질문을 받아야 할 신앙’(「교황청 고위 관료들에게 한 성탄 인사」 2017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신앙을 정말로 삶의 중심에 놓고 살고 있는지, 우리 믿음의 대상이 누구인지, 하느님을 어떻게 믿고 있는지를 계속해서 물어보고 성찰하지 않는 신앙이라면, 먼저 그 신앙이 제대로 된 신앙인지를 물어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믿음이라는 행위가 시작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의 기본적인 이해와 상식에 맞는 근거들이 필요합니다. 믿을 만해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성경의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떻게 하시죠? ‘나는 너희 선조들의 하느님이다’(탈출 3,15 참조) 말씀만 하시고는 아무것도 안 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무조건 믿기를 바라시나요? 그러지 않으시죠.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을 하느님으로 믿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당신 백성을 돌보십니다. 홍해 바다를 건너 그들을 구해내시고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주시고, 그 이후에도 많은 일을 그들에게 해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정말로 하느님을 주님으로 믿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근거를 마련해 주시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예수님도 마찬가지십니다. 군중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과 구원을 선포하시면서, 그저 말씀만으로 당신을 믿으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어떤지에 대해서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으시고 그밖에 다른 기적을 많이 행하시죠. 그를 통해 사람들이 보고 듣고 믿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들으면서 ‘정말 그럴까?’ 하고 믿지 못하던 사람들이 그분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체험하면서 ‘아, 정말 그렇겠구나!’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이 이처럼 인간적인 이해와 근거에 바탕을 둔 차원에만 머물지는 않는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렸지요? 인간적인 차원에서 주어지는 근거들을 체험하면서 우리의 믿음은 성장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그 근거를 뛰어넘는 신비의 차원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지성으로 잘 이해할 수 없는 삼위일체의 신비나 예수님의 신성, 부활의 신비 등을 믿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죠. 이렇게 인간적으로 믿을 수 있는 대상을 넘어서서 알 수 없는 신비의 차원까지 나아가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해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바로 우리 인간의 협력이 요구됩니다. 어떤 협력일까요?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믿음은 그 믿을 만한 근거에 대한 체험과 함께 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체험이라는 것 자체는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죠.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일을 겪었더라도 그 일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건 안에서 특별한 의미를 발견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별 상관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매우 다양합니다. 각자가 살아온 삶의 역사가 달라서 그 안에서 형성된 사고방식이나 감정적인 반응, 또 추구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대표적인 모습을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르코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자렛 고향 마을에 가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안식일이 돼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 반응이 다양하죠. 어떤 이들은 예수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면서 예수님을 좋게 말하기도 하지만(루카 4,22 참조), 또 다른 이들은 예수님더러 목수이고 마리아의 아들이며 또 그의 누이들도 자신들과 함께 나자렛에서 살고 있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마르 6,3 참조) 똑같은 상황이지만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체험하는 모습에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결말이 결국에 어떻게 되죠?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5-6)라고 복음사가는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일깨워주기 위해 일부러 기적을 행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몇몇 사람의 병을 고쳐 주시는 것 외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하실 수 없었던’ 일이 있다는 이 성경 표현이 놀랍지 않으신가요?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당신의 은총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렇게 거저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은총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은총을 잘 받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준비가 잘 돼 있으면 은총을 더 받고 준비가 덜 돼 있으면 은총을 못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우리의 준비나 자격 여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라면,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할 수 없을 테니까요.
하느님 은총은 늘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 은총으로 알아차리느냐 못 알아차리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앞서 말씀드렸던, ‘응답에 대한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하느님의 은총을 어떻게 알아차리고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가톨릭신문, 2018년 4월 22일, 민범식 신부]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은총에 이끌린 삶 (3)
보이지 않는 은총을 뒤늦게 깨닫는 것은 당연한 일
찬미 예수님.
살아가면서 우리가 종종 하는 말이 있습니다. “돌아보니 모든 것이 은총이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어떠세요?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이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분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또 어떤 분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시겠죠. 뭔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것이 정말 하느님의 은총인지는 확신하기 어렵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은총의 삶은 늘 이렇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고 고백하지만, 정작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주어지는지는 잘 모르는 것이죠. 왜 그럴까요? 답부터 말씀드리자면,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 인간의 감각적인 경험 안에서가 아니라 영적인 경험 안에서 체험되기 때문입니다.
감각적인 경험은 자연적 가치들, 곧 우리가 일상 안에서 추구하는 일반적인 내용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신체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음식이나 건강을 추구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심리 차원에서 자존감이나 성취감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어떤 일을 계획해서 이뤄가는 것 등이 이러한 감각적 경험에 속하죠.
감각적인 경험 안에서 우리는 처음부터 자신이 찾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시장에 장을 보러 갈 때도 무엇을 사야 할지를 분명하게 알고 갑니다. 입시를 준비하는 수험생도, 직장을 찾는 취업준비생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목표를 분명히 세우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일련의 과정을 밟아갑니다.
이처럼 감각적인 경험의 대상을 분명히 알 수 있는 이유는, 그 대상을 알아보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삶을 추구한다면, 몸의 건강을 드러내는 표지가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죠. 적절한 체중과 또 각종 검사를 통해 드러나는 수치를 보면서 우리는 자신이 건강한 상태인지 아닌지를 알게 됩니다. 장을 보러 갈 때에도, 우리 식구가 좋아하는 반찬이 뭔지를 분명히 알고 있고 그래서 장에서 생선이든 고기든 나물이든, 그 중에서도 더 싱싱하고 좋은 것으로 드러나는 대상을 찾아서 살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이 주도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감각적인 경험은 우리가 추구하던 것을 찾는 것, 곧 목적을 완성하는 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 경험을 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우리의 능력과 연관된 감정입니다. 찾던 것을 발견함으로써 뿌듯함을 느끼거나, 아니면 찾지 못해서 스스로의 능력에 실망하게 되는 감정입니다.
감각적인 경험이 이런 특성을 지니고 있는 반면, 영적 경험은 초자연적 가치를 향해 움직여가는 과정입니다. 초자연적 가치란 진실함이나 용서, 사랑과 같은 도덕의 가치들이나 하느님, 은총, 복음삼덕과 같은 종교적 가치를 의미합니다.
이 영적 경험 안에서 우리가 찾는 대상은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있는 그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원하지만 하느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없다는 거죠. 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은총을 선물로 받는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선물을 주고받는 것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죠. 그렇기에 영적 경험의 대상은 상징을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우리는 십자가라는 상징을 통해서 알아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 경험의 대상은 상징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 경험 안에서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저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뿐이죠. 믿음이 성장하기를 바라지만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알지는 못합니다. 우리 믿음을 점수로 표시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영적 경험 안에서 우리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에서 느끼게 되는 감정은, 앞서의 감각 경험에서처럼 우리 능력과 연관된 감정이 아니라, 경탄의 감정입니다. ‘아, 그렇구나! 바로 이거였구나!’ 막연하게 찾아 헤매던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 깨닫게 되는데서 오는 기쁨과 놀라움의 감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 뒤에 오는 것은 우리의 존재론적인 변화, 곧 회심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더 깊이 깨닫게 되는 그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의 방식이 바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더 닮은 모습으로요.
감각 경험과 영적 경험이라는, 조금은 복잡한 내용으로 말씀드렸지만 사실 이러한 부분은 우리 각자가 이미 경험하고 있는 부분들입니다. 일상 안에서 우리 자신이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찾고 성취해 나가는 부분들, 바로 감각 경험들이죠. 반면에 나는 누구인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나의 삶 안에 하느님께서 어디 계시는지 하는 부분들을 고민하는 모습이 바로 영적 경험들입니다.
다시 은총 이야기로 돌아가면, 하느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것은 이처럼 영적 경험 안에서이기 때문에 우리가 늘 뒤늦게 은총을 깨닫게 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당연한 일입니다. 은총에 대한 체험은 상징을 통해서, 또 수동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 그 사건을 되돌아보고 곰곰이 성찰할 때에야 그 안에서 활동하셨던 하느님의 은총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돌아보니 모든 것이 은총이었습니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을 그저 좋은 것으로만 포장하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을 만나게 될 때 터져 나오는 참된 고백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은총 체험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없을까요? 늘 이렇게, 다 지나고 난 후에야 깨닫게 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할까요?
주어진 은총을 깨닫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시간을 줄일 수는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전 같으면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아, 그때 그것이 하느님 은총이었구나!’ 깨달았었다면, 이제는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받은 은총을 금세 깨달을 수 있을 거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점점 더 줄어든다면 우리는 매 순간 하느님 은총을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겠죠. 바로 ‘하느님의 현존’ 안에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 우리의 삶이 은총의 삶이 되고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 삶에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할 일은 이미 주어져 있는 은총을 깨닫는 것뿐입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은총이지만, 지금 이 순간도 은총의 순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2코린 6,2)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하느님을 아는 것
하느님 어떤 분인지 알게 될 때 은총에 눈뜰 수 있어
찬미 예수님.
지난 한 주 동안 하느님의 은총을 많이 깨달으셨습니까? 하느님을 잘 만나시고 함께 잘 지내셨어요?
결국에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일상의 삶 안에서 하느님을 더 잘 알아차리고, 새로운 은총이 아니라 그분께서 이미 주고 계시는 은총을 순간마다 알아듣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이 은총으로 더 풍부해지는 것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탈렌트의 비유에서 하셨던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25,29)라는 말씀을 더 잘 알아듣게 됩니다. 이미 주어지고 있는 은총을 더 빨리 더 쉽게 알아차리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자신의 삶이 얼마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득 찬 삶인지를 점점 더 깨닫게 되겠죠. 가진 자가 더 받아 넉넉해지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은총이 이미 주어지고 있는데도 그것을 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자기 삶에 하느님의 은총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고, 그런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그나마 은총이라고 생각하던 것들에 대해서도 감각을 잃게 됩니다.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모습입니다.
자,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의 은총을 더 잘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교회의 영적 전통에서 이야기하는 ‘하느님 현존의 수련’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심리학의 관점에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신학에서는 인간 영혼의 세 능력을 지성과 기억, 의지로 이야기하고 믿음, 소망, 사랑의 향주삼덕을 이 세 능력과 연결해서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와는 조금 다르긴 합니다만, 상담심리학에서 인간의 내적인 심리자원을 이야기할 때 주로 인지, 정서, 의지(행동)의 세 차원을 이야기합니다. 무언가를 알아듣고 이해하는 인지의 영역, 감정과 관련한 정서 영역, 그리고 실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의지의 영역에서 그 사람이 얼마나 성숙해 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 세 영역 중에서 먼저 인지의 차원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잘 이어가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대해서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고요?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그 자체로’ 알기보다는 자신의 방식에 맞추어 아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실제로 심리학의 연구 결과들에 의하면, 나와 너 사이의 관계는 주체인 내가 자신 안에 만드는 상(像)에 의해 중개된다고 합니다. 누군가 한 사람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세요. 그 사람의 모습이 그려지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세요. 떠오르는 내용이 있을 겁니다. 이러한 모습이나 내용이, 실제 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안에 만들어진 그 사람에 대한 ‘상’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어떤 사람에 대한 이러한 상은 그 사람이 나에게 제공하는 정보에 기초해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그 사람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대, 예상, 선입견 등과 또 내 자신의 내면 상태 등에 기초해서 이뤄지기도 합니다. 앞선 부분을 ‘인식의 객관적 기초’라고 이야기하고 뒤의 부분을 ‘인식의 주관적 기초’라고 이야기하죠. 쉽게 말씀드리면,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 어떤 면에서는 정말 그 사람이 어떠한지를 알기도 하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자기 멋대로 그 사람에 대해서 알고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식의 전이적 기초’라는 것도 있습니다. 즉, 누군가를 알기 이전에 이미 우리 안에는 그와 비슷한 사람을 인식하는 하나의 방식이 형성돼 있다는 것이죠. 일종의 선입견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예를 들어 누군가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그와 비슷한, 과거에 알고 있던 사람이 떠오르고, 그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 대해 내가 가진 호감, 비호감 등의 감정이 지금 새로 만나는 사람에게도 비슷하게 투영됩니다. 물론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선입견이라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가면서 달라질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차원의 선입견이라면 중간에 바뀌지 않고 그대로 지속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결국, 누군가를 알고 이해하는 우리의 인지 능력은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한계는 사람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지금 나와 마주하고 있는 대상, 그 대상이 사람이든 아니면 어떤 사건이든, 그 대상이 실제로 어떠한지를 더욱더 객관적으로 알아들으려는 노력입니다. 그렇다고 100퍼센트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능한 한 애를 쓰는 거죠.
이는 하느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듣는 우리 인지의 과정에도 이와 똑같은 한계와 제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사람에 대해서보다 훨씬 더한 제약이죠. 우리는 하느님을 직접 만나지 못하니까요.
하느님 상(像)을 예로 들어볼까요? 하느님을 생각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세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우리를 향한 용서와 구원에 대해서 머리로는 잘 알고 있지만, 실제 마음속에서는 이런 하느님의 모습이 잘 와닿지 않는다고 고민하는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런 하느님보다는 우리를 벌하시고 꾸중하시는 엄한 하느님의 모습이 자꾸 떠오르는 것이죠.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관계가 굉장히 힘들고 어려웠기 때문에 그런 아버지에 대한 상이 하느님께 투영돼서 하느님과의 관계도 어렵게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겪었던 어머니와의 어려움 때문에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잘 우러나지 않는 모습도 생각할 수 있죠.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정말 어떤 분이신지를 계속해서 찾고 알아들으려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또 공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의 주관적인 틀에 비춰서 하느님을 제멋대로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더 잘 알고 싶은 마음인 것이죠.
그렇게 하느님이 참으로 어떤 분이신지를 더 알아듣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나의 생각과 기준으로 바라보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준으로 나의 삶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럴 때야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은총을 하느님께로부터 이미 받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은총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