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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욱 목사
《 하나님이 쓰시는 종의 특징 》
오늘은 이사야서 여섯 번째 강해입니다.
「하나님이 쓰는 종의 특징」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인간구원에 관한 계획이 있으셨는데 선지자들을 보내서 깨우침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도 못된 사람들이라서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면 듣지 않습니다. 거절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인간 속에 있는 가능성으로 구원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마치 마귀의 궤계, 마귀의 방해가 성공한 것 같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드디어 이사야서 42장에서 하나님의 숨겨진 카드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
나님의 보내시는 여호와의 종의 등장입니다.
여호와의 종! 바로 신약에서 말하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등장을 통해서 마귀의 모든 궤계가 완전히 박살나버린다는 것입니다.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 서론적인 부분인 1절부터 4절까지는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종의 특징이 무엇인지, 우리가 예수님의 모습을 거울삼아서 예수님을 닮아가려면 어떤 인격, 어떤 모습으로 서 있어야 될지를 점검하는 귀중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종의 네 가지 특징을 살펴봅시다. 한 절씩입니다.
1. 하나님만 철저히 의지하는 종
첫 번째는 하나님은 하나님만 철저히 의지하는 종을 쓰신다는 것입니다.
1절 보십시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다시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는 종의 특징은 내가 붙드는 나의 종, 생명되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마치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 가지 비유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포도나무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한 조건은 포도나무에 철저히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으려면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 하나님 손에 붙들린바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사야는 우리가 외적으로 볼 때 행복한 사역자가 아니었습니다. 이사야는 가는 곳마다 외면받는 사역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가는 곳마다 하나님 말씀에 굴복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사명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사야의 사명은 실패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이사야 같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패가 사명인 사람이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되게 증거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는데 자꾸만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게 사명입니다.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사야 같은 사람도 있는데요. 그것도 귀중한 종입니다. 선지자 가운데 최고의 선지자 한 사람을 들라고 하면 저는 이사야를 들고 싶습니다. 제일 영광스러운 종입니다. 그런데 그의 사명이 실패의 사명이었습니다. 아무도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습니다. 우리 같으면 외적인 열매가 없으면 낙심하고 쓰러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사야는 당시 사람들이 아닌 후대의 백성이 들으라고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생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사야서 1장 2절을 한번 보세요. 이렇게 열매없고 실패가 사명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스케일이 얼마나 큰지 한번 보십시오.
이사야서 1장2절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듣는 사람이 없으니까 누구를 향해서 외칩니까?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하늘과 땅을 향해서 외치잖아요. 우주를 향해서 외치잖아요. 이것이 선지자의 호연지기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이런 호연지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너무 작아요. 우리는 너무 많이 눌려있고 환경에 찌들어 있습니다. 이사야를 보십시오. 생명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최악의 상황에 놓인다 할지라도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들으라 하면서 나아갑니다. 얼마나 대단한 스케일입니까? 이런 식으로 자신 있게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과 연결된 사람의 특징입니다.
2차대전 당시 많은 사람이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특별히 런던은 전쟁터였습니다. 전쟁 끝나고 나면 고아들도 많이 생기고 빈민가도 많이 생기게 됩니다. 2차대전 끝나고 난 다음에 런던의 빈민촌을 중심으로 우리 교회에 오셨던 임명희 목사님 같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필립스 목사님인데 필립스 목사님이 사람들을 만나보니까 다 무기력하고 노숙자 비슷하고 절망 가운데 빠져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완전 최악의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려고 하다 보니까 -영국 사람들이 주로 정통으로 여기는 성경은 킹제임스 버전이지요. 제임스 왕 때에 번역된 것, 킹제임스 버전을 보통 웬만한 사람은 들고 다니면서 읽는다고 하는데 킹제임스 버전은 고어로 쓰여 있기 때문에 쉽지 않습니다. 잘난 척 하려고 들고 다니지만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많이 없습니다- 이 빈민촌 사람들은 영국 사람인데도 킹제임스 버전을 이해를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립스 목사님은 킹제임스 버전 가지고는 복음증거가 안 되겠다 해서 성경을 아주 쉽게 번역을 했습니다. 우리도 설교하는 중에 쉬운 번역이라고 표현하면서 종종 인용하는 것 있지요. 그것이 바로 이 필립스 역입니다. 필립스목사님이 보통사람도 들을 수 있는 아주 쉬운 용어로 번역했습니다. 내용은 굉장히 평이한데 그 평이한 내용 가운데 소개되는 하나님은 위대한 하나님이에요. 결국 그 복음을 듣고 당시 영국 사람들에게 알려질 정도의 굉장한 거목이 많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빈민가에서도 생명의 하나님을 만나니까 거목들이 나오잖아요.
여러분들 가운데도 낙심한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청년실업이라고 되는 일 하나도 없고 결혼도 못하고 직장도 안 되고 만날 감기 걸리고 그러지 않습니까? (성도들 웃음)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아무리 평이한 용어라 할지라도 생명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었더니 거기에서 거물이 나왔습니다.
옆 사람과 인사 나눕시다. “하나님을 만나면 거목된답니다.”
성도들 : “하나님을 만나면 거목된답니다.”
그때 필립스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당신의 하나님은 너무 작은 하나님이 아니냐. Your God is too small!. 우리가 왜 이렇게 작은 하나님을 만나느냐.’ 생명과 연결되어 크신 하나님 만나니까 큰 인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붙들린바 된 종입니다. 우리는 환경 따질 것 하나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만 만나면 능력있는 존재로 변화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쓰임받는 종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떠나면 우리가 참 비참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쓰임받기 위해서는 내가 얼마나 똑똑한가 내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 능력 있느냐 이런 것 아무 소용없습니다. 우리는 그릇인데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바 되면 마른 막대기도 하나님의 전능하신 지팡이가 됩니다. 하나님 손에 붙들렸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중요합니다.
사울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바 되었을 때는 이스라엘의 구원자였는데 하나님의 손을 떠나니까 미치광이, 살인마, 바보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손에 머물러 있을 때만 능력있게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 특별히 열왕기상․하를 보면 이스라엘의 많은 왕들이 나옵니다. 그 왕들 가운데 똑똑하다는 왕들은 다 악한 왕입니다. 외교에 능하고 군사에 능하고 사람들하고 관계 잘 맺는 이런 사람들은 다 악한 왕입니다. 왜요?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외골수 같아 보이고 잔재주도 없고 속된말로 꼴통 같아 보이고 문제가 생기면 회의도 안하고 대책도 없는, 편지 한 장 들고 가서 엎드리고 기도하고 오직 주밖에 없사오니 엉엉 울고 그러는 사람은 다 선한 왕이에요. 하나님 앞에 쓰임받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쓰임받는 종이 되려고 하면 문제 생겼을 때 그 문제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서 엉엉 울면서 구해야지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못해요? 잔머리 굴려야 구원받는다면 우리가 얼마나 피로하겠어요. 그러나 잔머리 굴리지 않으면 구원받는다…… 얼마나 편합니까? 여러 가지 다 맞추라고 하면 힘들겠지만 하나만 하라고 하는데 뭐 힘들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받는 종의 특징은 이것입니다. 오직 하나만 붙드는 것입니다.
인생 살다보면 시험이 많지요?
시험이 좋은 사람도 있습니까?
말로는 나는 시험이 와도 환영한다고 하는데 그거 제 정신 아닙니다. 시험 당하는 것은 힘든 것입니다. 비난을 당해도 문제가 없다는 사람이 있는데 저도 비난을 당해 봤지만 비난이 왜 문제가 없습니까? 욕설 한번 들어보세요. 얼마나 가슴아픈 일인데요. 그런 고백은 다 끝나고 난 다음에 하는 고백입니다. 다 끝나고 난 다음에 ‘아프기는 했지만 그것이 유익하더라.’ 왜 유익했지요? 시험 당하고 나면 하나님 이외에 의존했던 많은 것들이 다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험이 유익한 것입니다. 사람이 간단해집니다. 복잡한 것이 사라져버리고 단순해집니다. 열댓 개로 나누어져 있던 것이 하나로 압축됩니다. 명함에 직위 10개 써있던 사람이 시험을 겪으면 한 줄 나옵니다. ‘하나님의 종’ 딱 한 줄. 시험은 그런 것입니다. 간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기소개 할 것이 많은 사람이 있지요. 시험 한번 당하면 한 마디 나옵니다. ‘죄인 중의 괴수’ 이 한 마디 나옵니다. (성도들 웃음)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시험에는 바로 그런 유익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를 시험을 통과하게 해서 단순하게 만듭니다. 이유는 하나님께 붙들린바 된 종이 되라는 그것밖에 없습니다. 시편 37편 5절을 보니까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저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이것보다 중요한 말씀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들 다 여호와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 붙들린바 되어서…… 저를 의지하면 하나님이 이루신대요. 이것이 여호와께 쓰임받는 종의 특징입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귀중한 종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자신은 낮추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겸손한 종
두 번째는 겸손한 자세입니다.
2절 보십시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하나님의 종은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과시하는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인데 큰소리 칠 것이 있습니까? 목소리 높이고 북치고 장구치고 자기자랑하고 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 드러내는 것을 되게 잘 합니다. 우리는 어떻지요? 자기가 교만하고 그러다 보면 자기 스스로가 비참합니다. 자랑하고 교만하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생각하면 자기가 스스로 민망해요. ‘내가 왜 이런 인생을 살았나……’ 저도 그럴 때가 많아요. 밤에 집에 가면 잠도 안 오고 밥맛도 없고 ‘설교와 내 인생이 이렇게 다른가……’ 이런 생각합니다. 무지 잘난 척하잖아요. 그래서 또 민망하고…… 주변에 잘난 척하고 교만한 사람을 보면 우리도 영적으로 피곤하지요. 목회자들이 -목회자 뿐만 아니라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꼭 손윗사람만 존경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교가서 보면 눈에 보이지 않게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발견하면 ‘위대한 영혼을 만났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런 느낌이 막 들어요. 숨어서 헌신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은 가리면 가릴수록, 은밀하면 은밀할수록 더 능력있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유럽에 가본 일이 없기 때문에 잘 모르는데 영국 런던에 웨스트민스터사원이라고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묻힌 영국의 국립묘지 같은 데가 있지요. 거기에 가면 실낙원(失樂園-Paradise Lost)을 쓴 존 밀턴(Milton, John , 1608.12.9-1674.11.8)의 무덤과 흉상이 있답니다. 그런 데에 가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가봤던 사람이 그거 보면 웃긴다고 합니다. 거기 가 보면 흉상 밑에 설명이 있는데 존 밀턴을 설명하는 것은 한 줄이랍니다. 「실낙원의 작가 존 밀턴」이라고 한 줄, 그런데 그 밑에 보면 흉상을 세운 사람 윌리엄 밴손이라는 사람에 관해서는 33개의 단어로 잔뜩 써 놓았답니다. 윌리엄 밴손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성도들 웃음) 별 것도 아닌 흉상 만든 사람은 33단어, 진짜 알고 싶은 밀턴은 한 줄, 그것도 다 아는 것 실낙원의 작가 존 밀턴…… 우리가 그러고 있지요. 하나님이 누구입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분」 딱 한 줄, 그래 놓고 쓰임받는 우리는 33장…… 웃어요. 남들이 웃어. 지나가던 소가 웃어요. 웃기는 자장면이라고…… (성도들 웃음) 우리가 그러고 있다고요. 우리는 내가 죽고 우리가 증거하는 분인 하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높이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일할 때는 돌쇠 같이 열심히 일하고 영광 받을 때는 사라지는…… 우리는 우리가 한 일에 비해서 저평가를 받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로운 일이고 하나님께 칭찬 듣는 일이지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바울의 위대한 고백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사신다니까요. 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높이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 그것이 성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예수를 증거하면 영광과 기쁨이 임합니다. 왜 선교 갔다 와서 기쁜지 아십니까? 예수만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만을 높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런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제가 며칠 전에 사역자들과 같이 차타고 오면서 그런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참 영광스럽더라구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실해집시다.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헌신합시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은 성도들 사랑하는 것이지요- 누가 보든 보지 않든 간에 정말 성도들 사랑하면서 헌신하는 모습 가지고 살아갑시다.’ 그러니까 영광이 임하더라고요. 여러분, 그것이 인생입니다. 안 볼 때에 충성하는 그것이 영광이요 종의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성도의 세 가지 덕목이 나옵니다. 구제, 기도, 금식, 참된 구제가 무엇이냐, 참된 기도가 무엇이냐, 참된 금식이 무엇이냐를 보여주고 있는데 참된(Real)이라는 단어가 들어갈 만한 요소는 은밀함이에요. 샘플로 하나만 본다면 마태복음 6장3절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참된 구제가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은밀함이에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하게 하라.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왼손이 하는 것을 온몸이 다 알게 하잖아요. 다른 사람의 몸도 다 알게 만들잖아요.
(성도들 크게 웃음) 그러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히 은밀히 그러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갚으신다고요. 참된 구제의 내용이 뭐예요? 은밀함입니다. 참된 기도의 내용이 뭐예요? 역시 은밀함입니다. 참된 금식이 뭐예요? 얼굴에 기름칠하면서 남들 눈에 뜨이지 않게 하는 은밀한 금식입니다. 자기 자신을 낮추는 모습, 겸손하게 낮추는 모습,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서는 기본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종은 기본이 살아 있습니다. 종이잖아요. 종에게 자기 이름이 어디 있습니까? 종은 이름이 없는 것입니다. 주인의 이름만 있을 뿐입니다. 주인의 영광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받는 종이라면서요? 우리도 그런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기본이 바로서야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이렇게 쓰임받는 거룩한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5~6년 전에 이사야서 6장 설교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사야서 6장에 천사가 나오지요. 천사의 날개가 몇 개입니까? 2개? 2개에요? 3개요? 아니 틀려도 짝수로 틀려야지 어떻게 홀수로 틀립니까? (성도들 웃음) 날개가 3개면 균형은 어떻게 잡아요? 2개는 양쪽에 있고 하나는 가운데에서 뺑뺑 돌아요? 6개지요? 그런데 거기의 스랍의 모습이 참 재미있는데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발을 가렸습니다. 두 날개로 얼굴을 가렸다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기영광을 가렸다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자기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모습을 뜻합니다. 그리고 발을 가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발은 주로 허물입니다. 허물과 죄를 가리는 데에 두 날개를 썼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날개 가지고는 날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와 잠재력을 날개라고 생각합시다. 내가 가진 힘을 다 쓸 필요도 없습니다. 3분의 1은 내 영광을 가리는 데에 사용하고 3분의 1은 허물을 가리는 데 사용하고 나머지 3분의 1을 가지고 일해도 충분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역자의 표준적인 모습입니다.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겸손함에는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3분의 1 정도의 힘을 써가지고 내 자신을 쳐서 복종치 않으면 겸손해질 수 없어요. 자기 얼굴을 가려야 합니다. 그리고 허물을 가려야 합니다. 그리고 3분의 1만 갖고 해도 충분하다니까요.
하나님께 쓰임받는 종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겸손함입니다.
자기부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임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당장 할 수 있지요. 오늘부터 내 자신을 죽이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삽시다. 그러기 위해서 뭐 새로운 능력이 필요합니까? 당장하면 되는 것이지요.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잘난 척하지 말고 은밀히 합시다. 그것이 뭐 힘듭니까? 당장 할 수 있잖아요. 그것이 하나님께 쓰임받는 귀중한 종의 모습입니다.
우리 삼일교회의 모든 종들,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쓰임받는 귀중한 종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쓰임받는 종의 모습입니다.
3. 하나님의 가슴을 가진 종
세 번째 하나님께 쓰임받는 종은 하나님의 가슴을 가진 사람입니다.
3절을 보시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하나님의 종에게는 동정심이 있어야 하는데 아비의 마음, 어미의 마음이 있어야 하고 아비의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연약한 자를 일으켜 세우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상한 갈대를 보면 꺾고 싶은 심정이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꺾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죄인과 병자의 친구가 되셨잖아요. 우리도 상한 갈대처럼 연약한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그들에게 우리가 가까이 가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고 인기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사람들은 가까이 가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종이에요. 우리는 누구나 원하고 좋아하는 자리에만 가는 것이 아니라 소외된 자리,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거기에 가야 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품어주는 것 그것이 종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하면서 양떼를 사랑하지 않고 사역하는 것은 정말 불쌍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역자들끼리 종종 그런 얘기를 합니다. 주님께 충성하자고! 주님께 충성한다고 하는데 충성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어려움 당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람들을 돌보아주는 것이 진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척하는 것만큼 힘든 사이가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것은 예수님 이름으로 밥 빌어먹는 것입니다. 밥 먹자고 하는 것입니까?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충성이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에 특수교육과 나와서 특수사역을 하는 자매가 있습니다. 남자 분들은 별로 없는 것 같고 여자 분들은 꽤 되요. 16~17기(대략 1975년~1976년생) 되는 자매들인데 그분들하고 얘기를 나누어보니까 참 가슴에 와 닿는 얘기를 합니다. 중증장애인사역을 하는데 거기에서 무엇을 배우냐고 했더니 이런 얘기를 합니다. ‘목사님, 제일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아무리 부족하고 반응이 느리고 학습효과가 부진하다 할지라도 절대로 실망하지 않고 교육하는 그 자세입니다. 중증장애인은 부족하지요. 반응이 느리지요. 학습효과도 없고 가르쳐도 남는 것이 없어요.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교육할 수 있는 자세. 그것이 특수교육의 기본자세래요. 그 말을 듣고 보니까 우리 사역자들, 특히 목사 후보생들이 특수교육과에 가서 이것부터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실망하지 않는 것……
여러분, 교육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실망하지 않는 것이에요. 선생님이 실망하면 학생들이 다 학교 떠나버립니다. 지도자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실망하지 않는 거예요. 아무리 부족하고 아무리 반응이 느리고 아무리 학습효과가 없다 할지라도 끝까지 실망하지 않는 것, 이것이 아비의 마음이고 이것이 어미의 마음입니다. 우리 아버지들이 이러지요. ‘야! 공부 그렇게 대충 하려면 때려쳐 임마!’ 말로는 그러지만 진심이 아니란 것 아시지요? 가짜라는 것을 아니까 버티고 있는 거지요.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끝까지 실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지도자가 되실 분들이 있지요.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 양떼를 향해서 실망하는 것입니다. 실망은 절대 안 됩니다. 절대로 실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끝까지 버리지 않아야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꺼져가는 등불이 있습니다. 후 불고 싶지요.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 심정이 필요합니다. 다 끝났다는 말 못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다 끝난 것을 품어서 다시 살려야 합니다. 다 포기해도 나는 저 사람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그 마음, 그것이 아비의 마음, 어미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죽었던 것을 살리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참 어리석다는 얘기를 들어야 합니다. 가능성도 없는 것을 왜 품고 있느냐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런 소리 들으면 어떻습니까? 우리도 가능성 없는 사람들 아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품어 주어 가지고 인간 만들었잖아요. 가능성 가지고 구원받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끝까지 품으니까 살아난 것 아닙니까? 우리도 끝까지 품어야지요.
그런 의미에서 아비의 마음, 어미의 마음은 허비하는 사랑이고 낭비하는 사랑입니다. 효율로 따질 수 없어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을 보고 가룟유다는 허비하였다고 표현하잖아요. 원래 살리는 것은 허비하는 것처럼 보여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처럼 보이고 쏟아 붓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우리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마음이 없다고 하면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지요. 베드로를 보세요. 베드로는 꺼져가는 등불이었지요. 무슨 꺼져가는 등불입니까. 다 꺼진 등불이었지요. 예수님 부인하고 배반하고 계집종 앞에서 불이나 쬐고 앉아 있었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버리지 않잖아요.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셔가지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인정해 주고 인정해 주고 불붙이고 기름부어 주어서 결국 사도행전에 가서는 능력있게 사용받고 나중에는 순교자로 끝나잖아요. 그것이 아비의 마음입니다. 우리도 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월트디즈니 사라고 있지요. 월트디즈니 사가 미국사회에서는 좋은 기업으로 이름이 났는가 봐요. 이 회사에서 경쟁회사의 사원들을 자기 회사에 초빙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시설을 다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본 기자들이 생각할 때에 이상하잖아요. 경쟁회사한테 보여주면 아이디어 훔쳐가고 별로 좋을 것 없으니까 안 보여주잖아요. 그런데 보려면 보라고 다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자가 물었답니다. ‘왜 이렇게 아이디어와 노하우를 다 공개해버립니까? 그러면 손해 아닙니까?’ 그랬더니 월트디즈니 사의 직원들이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아이디어나 이런 연구시설은 모방할 수 있지만 아이들을 사랑하는 열정은 모방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최고라는 것입니다. 베끼려면 얼마든지 베끼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열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능력입니다.
우리가 아이들 키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우리 집 아이들을 많이 사랑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성도들 무응답) 저는 사랑하는 것 같은데 여러분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까? (성도들 웃음) 그런데 제가 좌절감이 느껴지는 것이 뭐냐 하면 제가 아무리 잘 해 주어도 애들은 엄마를 좋아해요. 아무리 경쟁해도 상대가 안 돼요. 그래서 엄마가 하는 그대로 카피해보았습니다. 엄마가 이렇게 해주면 나도 이렇게 해주고 엄마가 저렇게 해주면 나도 저렇게 해주고 엄마가 김말이해주면 나도 김말이해주고 엄마가 옷 입혀 주면 나도 옷 입혀 주고…… (성도들 웃음) 아이디어와 연구내용은 카피할 수 있어요. 그러나 카피할 수 없는 것은 엄마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안 되더라고요. 여기 있는 자매들, 행복한 줄 아세요. 여러분들은 아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습니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않고 신으로도 안 돼요. (성도들 크게 웃음) 그 절망감과 좌절감…… 자매들은 엄마의 자신감 엄마의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엄마의 쏟아붇는 사랑, 그거면 아이들 다 휘어잡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이 땅을 살아가면서 뭘 그렇게 염려합니까?
아이디어 다 베끼라고 해요. 다 모방해가라고 해요. 우리가 이길 수 있는 힘은 하나거든요. ‘나는 저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면 자신만만해야지요. 저는 목회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교인들에게 아부하고 이럴 필요 하나도 없습니다. 딱 한 가지만 있으면 됩니다. ‘나는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양떼를 위해서 죽을 수 있습니다.’ 더 물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사랑 있는 것이 곳에 사람이 옵니다.
연극이나 소설이나 모든 주제를 보십시오. 춘향이가 높은 지위에 있고 잘 먹고 잘사는 변 사또한테 가요, 아니면 허름한 이 도령한테 가요? 어디로 가요? (성도들 무응답) 이 가증한 자들! 어디로 가요? 왜 대답을 안 해! 변 사또예요? 돈 있으면 다야? (성도들 크게 웃음) 이런…… 1부 때부터 하고 얘기가 달라지잖아요. 왜 1부 때하고 반응이 다르지요? (성도들 웃음) 사랑 있는 곳에 가는 것 아니에요? 사랑이 있으면 자신만만하지요. 내안에 뜨거운 사랑이 있는데 무엇을 걱정합니까? 돈이 있고없고가 문제예요? 지위가 높고낮고가 문제예요? 깨끗한 옷 입고안입고가 문제예요? 그렇게 사랑이 변질되었어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터져나오는 사랑이 있는데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왜 세상의 흐름에 대해서 안절부절합니까? 내 안에 사랑이 있고 열정이 있는데요. 월트디즈니 사에 있는 직원들도 이런 자부심이 있는데요. ‘베끼려면 배껴라 우리에게는 누구보다 어린 아이를 사랑하는 열정이 있다.’ 여러분, 세상이 우리를 좌지우지할 수 없습니다. 내 속에서 터져 나오는 열정만 있으면 겁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아비의 마음이 있으면 다 끌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어미의 마음이 있으면 다 끌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 남들 졸졸 쫓아다니고 그러지 말고 어떤 사람을 향해서 진짜 터져 나오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어 봐요. 사랑의 자력이 모든 것을 다 흡수해 버립니다. 더 사랑하면 더 끌려옵니다. 그것이 사랑이라고요.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 가지고 일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4. 낙심하지 않는 종
마지막 네 번째, 하나님께 쓰임받는 종의 특징, 낙심하지 않습니다.
4절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일전에도 말씀드렸지요. 섬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개념에 있어서는 저 멀리 있는 것을 뜻합니다.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그 교훈을 앙망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마귀가 씌는 것이 낙심입니다. 마귀의 공격무기 1호, 낙심입니다. 항상 낙심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어떤 일이든 초창기 때에 힘든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개척교회도 힘들고 공부도 초창기에 힘들고 낙심합니다. 뭘 좀 하면 쓰러지고 하면 쓰러지고 하면 쓰러지니까요. 오래도록 공부 못하는 자의 특징이 있습니다. 초반을 못 넘겨서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10개를 외우면 9개를 잊어버리니까 힘들지요. (성도들 웃음) 10개를 외우면 11개를 잊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는 것까지 헷갈리는 사람들…… (성도들 웃음) 낙심이 되지요. 그런데 단계를 넘어서서 이제 내가 1000개를 외워 놓았다고 합시다. 그다음부터는 10개를 공부해서 9개를 잊어버려도 낙심 안 합니다. 이미 1000개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반이 어려운 것입니다. 초반에는 알고 있는 것에 비해서 잃어버리는 비율이 너무 많아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계속하면 됩니다. 낙심될 때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은 엎드리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지속할 수 능력, 오래 참는 능력을 주십니다.
인도의 선교사였던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1761∼1843년)라고 있지요 윌리엄 캐리가 인도에 가 가지고 인도의 부족언어들을 배워서 문법책하고 사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10년 넘게 걸려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언어 배우고 말 배우고 문법책 만들고 사전 만들려니까 그렇게 오래 걸렸겠지요. 그리고 어느 날 심방을 갔다가 돌아왔는데 집이 불이 다 타버렸다고 합니다. 다 타버렸습니다. 속된 말로 10년 공부 나무아미타불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떻겠습니까? 절망해버리겠지요. 10년 동안 한 것 다 끝났네…… 그런데 윌리엄 캐리는 달랐습니다. 무릎 꿇고 기도하고 다시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그의 인생, 얼마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에 했던 일들이 그의 평생 한 일의 95% 였다고 합니다. 더 큰 일을 했습니다. 타 버린 것은 5%밖에 안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절망하지 아니하고 다시 시작하니까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와 권능을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흘 전이지요. 지지난주 주일설교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컴퓨터로 준비를 다 해 놓았는데 인터넷 들어갔다가 나오니까 날아가버렸습니다. 백업파일도 없어요. 와…… 완전히 낙심이 되었습니다. 12시가 다 되었는데…… 그래서 기도하고 잤습니다. (성도들 웃음) 아침에 일찍 깨어서 다시 준비하니까 1시간 내에 복구가 되더라고요. 전혀 다른 내용이 되어버렸지만…… 지지난주 설교 괜찮았지요? (성도들 크게 웃음) 오히려 더 은혜로웠다는 사람도 있고 그래요. 저도 설교자료 다 날아갔을 때에 낙심해서 죽고 싶더라고요. 돌멩이 있으면 머리박고 싶고…… 설교준비하면서 혼신의 힘을 다 쏟아부었는데 그것이 다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낙심되잖아요. 이렇게 한 편의 설교도 아까운데 10년 넘게 했던 것이 타 버렸으니 얼마나 큰 낙심이겠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느냐 하면 소망을 주십니다. 저는 로마서 15장13절의 말씀을 참 좋아하는데 로마서 15장13절에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라고 합니다.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소망의 하나님을 구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기쁨과 평강을 준대요. 소망 가지면 기쁨이 생기고 평강이 생깁니다. 그러면 그 기쁨과 평강이 또 더 큰 소망을 준대요. 그래서 더 큰 소망을 가지니까 또 기쁨과 평강이 생기면 또 더 큰 소망이 생기고 기쁨과 평강이 생기고 더 큰 소망 더 큰 소망…… 이런 선순환(善循環)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종의 특징은 ‘낙심없음 소망있음’이에요. 낙심하면 반대이지요. 기쁨 대신이 절망, 평강 대신이 두려움과 불안, 좌절, 이런 것들이 충만해가지고 나중에 절망이 넘쳐흘러서 또 절망에 절망에 절망…… 나중에 자살하고 지옥가고 그렇게 되어버리잖아요. 이런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바꾸어버려야 합니다.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소망의 전염자가 되어야 합니다. 절망스러운 사람 옆에 있는 있으면 같이 절망스러워집니다. 진짜 그렇다니까요. 그런 사람들 옆에 가지 말고 자기가 이겨버려야 합니다. 더 큰 소망으로 압도해버리든지 정 그럴 능력이 안 되면 잠시 교제를 끊어버리든지요. 같이 있으면 같이 죽거든요. 벼락 맞을 때에 옆에 있으면 피해 입습니다. 그 사람은 죽고 나는 2도화상 입습니다. 옆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받는 종입니다. 소망 가져야 됩니다.이런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절망 가운데 빠져 있고 지금 상황에서 내가 믿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도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이 한 가지만으로도 우리는 소망 품을 수 있습니다. 넘어지지 않는 소망을 가지고 항상 승리하는 믿음의 종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다 같이 간구하도록 합시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종, 하나님만 철저히 의지하는 종, 겸손한 종, 아비의 심정을 가지고 낙심하지 않으며 소망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종이 되도록 다같이 간구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