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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변화 시키는 힘 / 김경년 목사
지금 제가 자기고 나온 것은 여러분들이 마시는 우유팩에 나오는 미아 찾기입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님의 심정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반대로 입양된 자녀들의 부모님을 찾는 안타까운 사연도 우리는 종종 듣습니다.
이들이 왜 이렇게 애절한 사연을 가지고 찾는 것일까요? 그것은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찾는 것은 뿌리를 찾는 일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찾는 것은 생명을 찾는 일입니다.
뿌리는 생명입니다. 만약 뿌리를 뒤집어 놓으면 말라서 죽습니다. 뿌리가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잃은 슬픔을 누구보다 더 잘 압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나라를 잃은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야 했습니까? 또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까?
오늘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선열들이 목숨을 바치면서 희생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일제와 싸우다 숨진 많은 애국자들과 공산군과 싸우다 쓰러진 이름모를 용사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나라를 살리고 지키는 일에 언제나 성도들이 앞장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3.1운동 당시 우리나라에 기독교인 인구가 2십만명 밖에 안되었지만 기독교인들의 역할은 실로 엄청났습니다.
6.25사변 당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라를 위해 앞장서서 목숨을 바쳐 싸웠습니다.
애국정신과 신앙정신은 별개가 아닙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당연한 자세이며 신앙이 있다면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뉴욕에서 스티븐슨이라는 사람이 애국정신에 대하여 이렇게 연설을 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상황 속에서 애국정신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애국 정신이란 첫째, 나라를 자기보다 앞세우는 정신입니다. 둘째, 짧고 광적인 감정의 폭발이 아닌 일생을 통한 조용하고 끈질긴 헌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애국정신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볼 수 있습니다. 애국정신이란 자기보다 나라를 앞세우는 것입니다. 전쟁이 나, 나라의 어려움이 닥치면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다른 나라로 이민가는 것이 아니라, 이민 간 사람도 자기 나라를 구하기 위해 조국을 찾아오는 정신입니다. 또 애국정신이란 짧고 광적인 감정의 폭발이 아닙니다. 일생을 통하여 조용하고 그리고 끈질기게 나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갔습니다.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면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식품업자들, 저들은 쓰레기 만두를 만들어 자기도 안 먹는 것을 국민들에게 팔아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경제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위태로운 지경입니다. 우리나라의 부채가 지금 해마다 늘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미군은 갑자기 철수한다고 난리입니다.
모든 상황이 이러한대도 우리 정부와 위정자들은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교회만을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민족종교입니다. 즉 민족을 살릴 수 있는 힘이 기독교에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나라의 일에 무관심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민족이 사는 길이 우리 기독교가 사는 길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시대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께서 어느 시대에나 사람을 세우십니다. 오늘 말씀을 역사적으로 살펴봅시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왜 구원의 역사입니까? 그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역사 그 자체가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우리들은 그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구약 느헤미야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역사의 배경
우리들은 느헤미야서를 살펴보기에 앞서 역사적인 배경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째, 1차 포로 귀환은 바사왕 고레스 왕 때에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인솔하에 이루어졌습니다.
귀환 후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 이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합니다. 고레스 왕때에 성전 기초를 놓았지만 다리오 왕때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에스라 5~6장).
☛둘째, 1차 포로와 2차 포로 귀환 사이에 80년이라는 간격이 있습니다.
2차 포로 귀환은 1차 포로 귀환 후 80년만에 이루어졌습니다. 그 80년 기간동안 다리오 왕 다음에 등장한 아하수에로 왕때의 일입니다(에스더). 역사적으로 이 사건은 에스라 6장과 7장 사이에 일어납니다.
☛셋째, 1차 포로 귀환 후 80년만에 제 2차 귀환이 아하수에로 왕 다음에 등장한 바사의 왕인 아닥사스왕 때에 제사장이며 율법 학자인 에스라의 인솔로 이루어집니다(에스라 7~10장).
☛넷째, 제 3차 포로 귀환이 유다 총독 느헤미야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느헤미야서).
3차 귀환은 2차 포로 귀환 후 14년에 이루어졌으며 2차 포로 귀환 때처럼 바사의 아닥사스다 왕 때 이루어졌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14년 간격으로 본국으로 돌아와 활동했던 같은 시대의 지도자였습니다.
에스라가 신앙 지도자로 일했다면 느헤미야는 정치적인 행정 지도자로 일했습니다. 느헤미야에서는 제 3차 귀환과 성벽 재건이 중요하게 언급됩니다. 이 성벽 재건은 유다 나라가 회복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은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서 역사가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누구입니까?
본문 1절에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왕 제 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궁에 있더니”라고 합니다.
“하가랴의 아들인 느헤미야”라고 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바사의 왕 아닥사스다 왕이 20년 째 되는 해입니다. 그 해에 느헤미야는 바사의 왕이 거주하는 수산궁에서 왕의 술관원으로 일했습니다. 당시 바사왕은 계절마다 옮겨 다니면서 거주한 궁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수산궁은 바사 왕의 겨울에 거주하는 겨울 궁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느헤미야를 바사 왕의 궁전에서 일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것은 우연히 그곳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떤 계획과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를 미리 왕의 궁에서 일하게 하므로 왕과 아주 가까운 위치에 있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 중에 아직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자들을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는 섭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오늘 우리가 여기에 사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좌절하거나 낙심하면 안됩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고 함께 해 주십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승리하게 합니다.
느헤미야는 바사의 수산궁에서 본국의 좋지 못한 소식을 듣습니다.
본문 2절에 “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
느헤미야는 포로 중에서 태어난 포로 2세입니다.
그곳에서 태어나 바사 왕궁에서 일하는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의 형제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 예루살렘에서 바사로 왔습니다. 그들에게 본국의 소식을 듣습니다. 포로민의 후손인 느헤미야는 부모로부터 자기 민족에 관해서 들었고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왜 자기 민족의 조상들이 포로로 잡혀 오게 되었으며 그 하나님께서 다시 포로에서 건져 주실 것에 대한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마태복음 1장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포로 기간 중에서도 그 예수님의 족보에 해당된 구원의 줄기를 중단시키지 않고 계속 이어오도록 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민족을 포로에서 돌아오도록 하시기 위하여 지도자인 느헤미야와 같은 사람을 준비시켜 주셨다는 점입니다. 이제 때가 되매 느헤미야에게 유다 본국의 소식을 듣게 하시고 그에게 자기 민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허락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느헤미야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느헤미야를 통해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가 위대할 뿐입니다.
느헤미야의 형제를 유다 예루살렘에서 바사에 오도록 역사 하셨습니다. 예루살렘과 바사까지의 거리는 약 1천킬로미터 정도 됩니다. 당시 자동차나 비행기가 없던 그런 시대에 이 거리를 오고간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거리에 관계없이 느헤미야의 형제 중 하나니로 하여금 바사에 있는 느헤미야에게 가도록 인도해 주셨다는 점입니다.
예루살렘의 어려운 형편입니다.
본문 3절에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성은 훼손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입니다.
느헤미야가 바사의 수산궁에서 하나니로부터 들은 유다의 소식은 매우 비극적이었습니다.
▶첫째, 유다 백성들이 큰 환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능욕을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셋째,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었다는 것입니다.
▶넷째, 예루살렘 성문들이 불에 타 버렸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 아직 유다 나라가 정상적으로 회복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는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느헤미야가 금식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본문 4절에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라는 말씀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을 말하기 전에 어떤 자세와 태도로 기도를 하고 있는가를 보여준 말씀입니다.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 금식하면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은 느헤미야가 본국의 형편을 듣고 얼마나 애통했는지를 보여준 대목입니다. 우리에게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애통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느헤미야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기도 합니다.
본문 5절에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라고 합니다.
느헤미야는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자녀가 부모님에게 “아빠 1주일 전에 저와 약속을 했지 않습니까?
학교에서 1등을 하면 컴퓨터를 사주신다고 한 약속 기억하시죠. 이번에 제가 1등을 했습니다. 컴퓨터 사주세요.” 자녀가 이렇게 나올 때는 부모는 꼼짝 못합니다. 자녀의 소원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도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약속해 주신 그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면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기도할 때 무조건 도와 달라고 요구하기 전에 하나님의 약속을 내가 얼마나 지켰는지, 지키고 나서 그 약속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나라와 민족의 죄를 자기 잘못으로 회개합니다.
본문 6~7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이 기도는 민족의 죄를 자신의 죄로 고백하는 중보자의 자세입니다. 책임 있는 자의 행동입니다.
☛첫째,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한다는 고백입니다(6).
☛둘째“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였다”고 고백합니다(7).
이런 행동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행동입니다. 이런 것을 기뻐하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결 론
우리는 나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민족의 죄를 나의 죄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어려움은 바로 나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책임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모든 힘의 원천은 어디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돈에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돈이 많으면 힘이 많은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돈은 힘의 원천이 아닙니다. 돈이 있으면 편리하겠지만 힘의 원천을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이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권력이 있으면 힘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이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정보가 힘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안다는 것은 모르는 것 보다 더 유익하겠지만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것이 얼마나 힘이 됩니까?
참된 힘의 원천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운행자이십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그분의 손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힘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길은 무엇일까요?
오직 기도 외에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기도의 힘이 곧 하나님의 힘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길입니다.
제가 결혼 시계를 세탁기에 모르고 넣고 돌려서 망가졌습니다. 그래서 집사람이 결혼 기념으로 새 시계를 사주었습니다. 늘 시계를 보면 집사람이 생각납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시계라도 약이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금시계를 가지고 있어서 약이 닳으면 시계가 멈추게 됩니다. 시계의 힘은 겉 모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보이지 않지만 속에 들어있는 조그마한 약에 있습니다.
우리의 힘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힘은 우리의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기도의 힘에 있습니다.
기도하는 교회는 힘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성도는 힘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국가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이 나라와 민족이 변화하고 다시 살 길은 기도하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여름 가뭄에 양수기로 땅속에 물을 끌어올리는 것은 도움은 되겠지만 물을 가뭄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물을 내리게 하면 물 부족을 근본적으로 해결 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3년6개월 동안 가뭄으로 물 한 방울 내리지 않던 이스라엘에 기도로 말미암아 하늘 문을 열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병원에서 치료할 수 없다는 진단 결과를 받았어도 하나님께 기도하면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치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기도의 힘을 잊지 맙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