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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2월 일본 상선이 거제도 지세포 인근에 표착‧조사한 장계(狀啓)>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다음 소개하는 장계(狀啓)는 조선 말기 1881년(고종 18년) 2월경, 일본 나가사키현 대마도(쓰시마) 상현군 사스나항에서 부산항으로 향하던 일본 상선 '하치만마루(八幡丸)'가 풍랑을 만나, 경상도 거제도 지세포 인근에 표착(漂着)한 일본인들을 구조하고 조사한 내용을 담은 보고서(치보)다. 거제도에 표착한 일본인들이 구조된 후, 바다에 빠진 물건들을 건져내고 부산항으로 압송되는 과정을 담은 기록으로, 구조된 일본인들이 진해, 김해를 거쳐 최종적으로 부산 왜관(초량객사)에 무사히 인도되는 마지막 과정과 그들의 감사 인사를 담고 있다. 이 기록은 하루가 멀다하고 발생하는 표왜선(漂倭船, 표류한 일본 선박) 처리를 통해, 19세기 말 한일 관계와 조선의 지방 행정 체계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참고로 조선 후기 조선 연안에 표류해 온 일본 선박, 즉 표왜선(漂倭船)은 1627년부터 1868년까지 총 39건, 311명에 달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주로 쓰시마(대마도)에서 온 상선이나 어선이었으며, 조선은 이들을 극진히 대접하여 돌려보내는 송환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내용인즉, 1887년 1월 30일, 일본인 6명이 탄 배가 사스나항을 출발해 부산으로 오던 중 북동풍을 만나 표류했다. 2월 2일 저녁, 거제도 지세포 뒤편 험준한 산길 쪽으로 배가 파손된 채 일본인 6명이 젖은 옷차림으로 올라왔다. 지세포 만호(음태영)가 이들을 관청으로 데려와 응급 치료를 하여 목숨을 구했다. 2월 4일, 옥포의 역학(통역관) 함현관, 통사 하경수, 거제부사 대신 온 좌수 신영위 등이 도착해 합동 조사를 벌였다. 표류인은 총 6명이었다. 선주, 무라타 유스케(武田友助, 37세). 사공, 무라타 히코에몬(武田彦工門, 53세). 격군(선원) 야마다 후지사쿠(山田藤作, 17세), 사나다 히코조(眞田彦三, 38세), 상인 하시모토 다스케(橋本多助, 42세), 도요키치(豐吉, 9세)
*배에 실린 화물 및 유실 상황 : 배에는 가재도구용 목재 23개, 판자 30개, 검은 숯 204포대, 땔나무 50단, 식량(쌀 3두), 옷상자, 무쇠 솥, 닻, 돛대용 대나무 등이 실려 있었으나, 배가 파손되면서 대부분 물에 빠져 잃어버렸다고 진술했다.
이에 표왜선(漂倭船)의 행정 처리를 실시했다. 가덕첨사 홍영주는 당시 세미(세금 쌀) 독촉을 위해 창녕현으로 출타 중이었다. 가덕도 가파수장 박인환과 금해택 등이 이들을 인계하고 보호하기 위해 경계 지점에서 대기하며 부산항 등으로 송환할 준비를 갖추는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당시 조선 관리가 일본 표류민을 '문정(問情, 사정을 물음)'하고 '구료(救療, 치료하고 구제함)'하는 외교적 대응 절차를 잘 보여주는 사료다.
*표류 왜인 처리(호송과정) : 지세포 → 옥포 → 조라포(옥포) → 장목포 → 가덕도(천성보) → 웅천(진해)으로 이어지는 지방관들의 촘촘한 압송 체계가 확인된다. 각 구역의 만호들이 릴레이 방식으로 일본인을 부산까지 호송하고 있다. 조선 정부가 관례에 따라 표류인들에게 식사(죽)와 숙소를 제공하며 인도주의적 처우를 했음을 보여준다. 파손된 배에서 나온 목재와 숯 등을 조선 군사들이 직접 바다에서 건져내어 일본인들에게 돌려주려 노력한 정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요약하건대 마지막 문장의 '광서 13년'을 통해 이 사건이 정확히 1887년(고종 24년)에 일어난 일임을 알 수 있다.(첫 머리에 나온 '이달 초'는 1887년 2월을 의미함.)
<호송 경로> : 거제 지세포 → 옥포 → 조라 → 장목 → 가덕도(천성) → 웅천(안골, 제포) → 김해 → 다대포 → 부산 초량(왜관)으로 이어지는 상세한 해상 경로가 확인됨.
그리고 일본인이 감사 인사를 전한다. 선주 다케다 유스케의 발언을 통해 당시 조선 관료들이 단순히 압송만 한 것이 아니라, 식사를 챙겨주고 유실된 화물을 최대한 건져서 돌려주는 등 인도주의적 구호에 최선을 다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보고서는 최종적으로 당시 외교 업무를 담당하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 보고되어 외교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 참고로, 거제도 연안에 표왜선(漂倭船)이 발견되면 대응 체계가 있었다. ① 망군이 보고(수군진), 상부 보고 → ②수군 만호 출동, 왜선 강제 정박 후 조사(구호품 전달)→ ③고을 수령 및 통역관이 1차 조사 보고(통제영, 경상감영, 부산 왜관) → ④부산 초량 왜관 인계 후 2차 조사 보고 → ⑤ 중앙 정부 지령 → ⑥왜국으로 송환했다. [가덕도나 다대포 부산 등에서 발생한 표왜선은 곧바로 부산 왜관으로 인계함]
이러한 처리 과정에서 거제도는 ①번부터 ④번의 부산 왜관 인계까지 세밀하게 처리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보고가 늦거나 부실한 조사가 이루어지면 해당 수군만호나 고을 수령이 곤장을 맞거나 파직되기도 했다.
* 덧붙여 이번 「1887년 2월21일 일본 상선이 거제도 지세포 인근에 표착하야, 조사한 장계(狀啓)」는 발신자가 동래부사(東萊府使)이고 수신자는 승정원(承政院)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동래부계록(東萊府啓錄)』이다.
*「1887년 2월21일 일본 상선이 거제도 지세포 인근에 표착하여 조사한 장계(狀啓)」*
이달(1887년 2월) 7일 미시(오후 1~3시)에 도착한 부산첨사 김완수의 보고에 따르면, 즉시 다대포첨사 김정근의 보고를 접수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덕도의 가파수장(임시 수비대장)인 천성보 만호 박인환이 보고하기를, "가덕첨사 홍영주는 전운어사(조운 업무를 맡은 어사)의 비밀 지시에 따라 세미(세금 쌀)를 독촉하기 위해 창녕현으로 달려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이달 4일 해시(오후 9~11시)에 도착한 지세포 만호 음태영의 보고에 따르면, "초2일 유시(오후 5~7시)에 본 포구 뒤편의 험준한 산길로 일본인 6명이 젖은 옷차림으로 굴러들어 왔습니다. 이에 그들을 관청으로 데려왔으나, 풍랑에 혼비백산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기에 여러 방면으로 구호하고 치료하여 인명을 온전히 구하였습니다"라고 보고하여 이를 전해 들었습니다. 이에 그 사유를 보고합니다.
초10일 자시(오전 0시 전후)에 도착한 첨사(부산첨사)의 보고에 따르면, 다대포첨사의 보고를 받았는데, 가덕도 가파수장의 보고에 의하면 "본 진의 유진장(남아 있는 장수) 김해택이 표류인들을 호송하기 위해 경계 지점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세포 만호의 보고에 따르면, "본 포구에 표착한 일본인 6명을 조사하기 위해 옥포의 역학(통역관) 함현관, 통사 하경수, 거제부사를 대신해 온 좌수 신영위 등이 이달 4일 미시에 도착하여 함께 조사(문정)하였습니다." 선주 다케다 유스케(武田友助, 37세)의 고백(진술)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희 6명은 일본국 나가사키현 대마주 상현군 사스나항의 거주민입니다. 하치만마루(八幡丸)라는 배에 행상을 위해 가재도구용 목재 23개, 판자 30개, 검은 숯 204포대, 땔나무 50단, 식량 쌀 3두, 옷장 2개, 상자 2개, 철로 된 닻 3개, 밥솥 2개, 밧줄 종류 9장(종류별 수량), 노 4개, 치목(키) 1개, 돛대용 대나무 1개, 흰 면직물로 만든 돗자리 1개를 싣고 있었습니다.
올해 1월 30일 사시(오전 9~11시)에 본 항구(사스나항)를 출발하여 부산항으로 향했는데, '수지(水旨)'를 막 지났을 때 동북풍이 갑자기 휘몰아쳐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같은 날 술시(오후 7~9시)경 귀국(조선) 경계의 바다에 닻을 내렸습니다. 이틀 밤낮을 보내는 동안 파도가 극심하게 출렁거려 끝내 멈추지 않았고, 이달 2일 저녁에 타고 있던 배의 밧줄이 끊어지고 부서지면서 실려 있던 물건들은 모두 물에 빠져 잃어버렸습니다." (일본인 선주 무다 유스케의 진술이 이어집니다.)
"저희 6명은 각각 널빤지 조각을 타고 바람을 따라 떠돌다 급히 뛰어내렸습니다. 벼랑을 타고 길을 찾아 비틀거리며 이곳에 도착했는데, 다행히 지세포 관민들이 죽을 먹여주고 방을 빌려준 덕분에 이제야 겨우 정신을 차렸습니다. 오직 바라는 바는 속히 부산항으로 보내져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표류하며 잃어버린 물건 중 진(鎭) 아래 여러 곳에 떠내려온 목재 7개, 검은 숯 2포대, 닻줄 2장, 지줄(旨乼) 2장, 종려나무 껍질 줄 1장을 우선 확인해 주시고, 그 외 나머지 종류들은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려 건져낼 계획입니다.“ 표류인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일은 거제부에서 관례에 따라 준비해 주었으며, 이들을 보살피는 절차는 역학 및 통사와 함께 각별히 살피겠다는 보고를 접수하여 이에 그 사유를 보고합니다.
11일 미시에 도착한 같은 첨사(부산첨사)의 보고에 따르면, 다대포첨사의 보고를 받았는데 가덕도 가파수장의 보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세포 만호의 보고를 접수하니, 이달 5일 풍랑이 조금 잦아들자 만호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통사와 동행하여, 일본인들과 각각 배에 나누어 타고 본 지세진의 뒷산인 금취(金嘴, 現서이말 등대) 앞 호암(虎巖) 아래 대양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목재 10개, 땔나무 4단, 검은 숯 9포대, 배 밑판 1개, 삼나무 판자 11개, 노 3개, 가룡목(배의 가로 지지대) 3개, 상장목 2세트, 삼줄 1장을 겨우 건져내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외 다른 물건들은 모두 거센 파도 속에 빠져 찾을 길이 없으므로, 수색하여 건져내는 일은 우선 중단하였습니다." 해당 표류인들은 계속해서 보호하고 있다는 보고를 접수하여 이에 보고합니다.
20일 자시에 도착한 같은 첨사의 보고에 따르면, 다대포첨사의 보고를 받았는데 가덕도 유진장의 보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구간의 압송 담당자인 지세포 만호의 보고를 접수하니, 표류인 6명과 짐(복물)을 배 두 척에 나누어 싣고 이번 달 16일 오시(낮 12시경)에 출발하였습니다. 옥포 통역관과 함께 이들을 보호하여 이동하며, 신시(오후 3~5시)에 옥포 만호 노구봉에게 인계하였고, 유시(오후 5~7시)에 조라포 만호 문태윤에게 인계하였으며, 술시(오후 7~9시)에 장목포 영호군관 서봉이에게 인계하였습니다. 같은 시각 최종 목적지 담당자인 천성보 만호에게 인계한 후 진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어서 도착한 최종 구간 담당자의 보고에 따르면, "해당 배를 보호하여 본 보(堡)의 마거리(磨巨里, 천성진 인근) 앞바다에 도착해 밤을 지내며 지켰습니다. 17일 오시에 웅천현에서 미리 준비한 배 두 척으로 옮겨 실었으며, 신시에 출발하여 전진하다가 유시(오후 5~7시)에 가덕도 경계인 율구미(栗仇味) 앞바다에 도착하였습니다.“
안골포 만호 김수영과 제포 만호 김기영 등에게 (일본인들을) 인계하였고, 동시에 배를 끌고 선창리 앞바다에 이르러, 같은 진의 이전선장(二戰船將) 김기연에게 인계하였습니다. 술시(오후 7~9시)에는 김해 경계인 사암(四巖) 앞바다에 도착하였습니다. 이어서 도착한 김해부 아전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부사(사또)가 휴가를 얻어 자리에 없으나, 표류인들과 짐을 실은 배 두 척을 맞이하여 옮겨 싣고, 먹을 것을 제공하며 머물게 하였습니다. 19일 진시(오전 7~9시)에 출발하였으며, 본 부의 감관 조영서가 보호하여 다대포 경계인 고리도(古里島) 앞바다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다대포 이전선장 이희서에게 인계하고 돌아왔습니다"라고 보고하였습니다. 해당 배를 초량 왜관(관소)까지 보낼 차례이므로, 선장을 그대로 파견하여 보냈다는 보고를 접수하여 이에 보고합니다.
같은 날 유시(오후 5~7시)에 도착한 부산첨사의 보고에 따르면, 다대포 이전선장의 보고를 받았는데 "표류인과 짐을 실은 배 두 척을 보호하여 전진하여, 진시(오전 7~9시)에 철량(초량) 앞바다에 도착하였으며, 동시에 왜관(관소)에 인계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도착한 역학(통역관) 이준수의 보고서(수본)에 따르면, "해당 일본인들이 왜관에 도착하여 즉시 사정을 물으니, 표류인 수와 물건의 수, 배가 파손된 사정 등이 옥포 역학이 조사한 내용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때 표류인 다케다 유스케(武田友助)가 말하기를, '우리 6명은 표류하여 도착한 곳에서부터 차례로 배를 갈아타고 오면서 항상 밥을 대접받았으며, 건져낸 짐들도 모두 챙겨서 올 수 있었습니다. 외국에서 표류한 몸으로 살아 돌아갈 날이 있게 되었으니, 귀국(조선)의 은혜에 감사함이 끝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해당 표류인들의 성명, 나이, 물품 목록을 책자로 수정하여 정리하고, 이를 의정부 내무부 및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통리아문)으로 올려보냅니다. 이상의 사유를 갖추어 임금님께 보고(치계)하오니, 차례대로 잘 살펴 보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광서 13년(1887년, 고종 24년) 정해년 2월 21일.
[本月初七日未時到付釜山僉使金完洙馳通內, 卽接多大浦僉使金楨根馳通, 則卽到加德假把守將天城堡萬戶朴仁煥馳報內, 加德僉使洪永疇, 因轉運御史秘關, 稅米督刷次, 馳往昌寧縣是如爲有旀. 今月初四日亥時知世浦萬戶陰泰英馳報內, 初二日酉時, 本浦後險嶂山路, 日本人六名, 濕衣轉來。故率入公廨, 則觸風驚波, 不成人事, 多般救療, 人命得全是如馳報傳通據, 馳通爲有等以, 緣由馳通云云是白齊. 初十日子時到付同僉使馳通內, 卽接多大浦僉使馳通, 則卽到加德假把守將馳報內, 本鎭留鎭將金海澤漂人領護次, 境上出待是如爲有旀.
知世浦萬戶馳報內, 本浦漂人六名問情次, 玉浦譯學咸賢觀, 通事河敬守, 巨濟府使替來座首辛英位, 今月初四日未時馳到, 眼同問情, 則漂人船主武田友助年三十七, 沙工武田彦工門年五十三, 格軍山田藤作年十七, 眞田彦三年三十八, 商人橋本多助年四十二, 豐吉年九。武田友助所告內, 俺六名, 以日本國長崎縣對馬州上縣郡佐須奈港居人, 所持八幡丸良中, 行商次, 家材木二十三箇, 板子三十立, 黑炭二百四苞, 燒木五十迲, 糧米三斗, 衣服入盛樻二坐, 箱子二坐, 鐵碇三坐, 食鼎二坐, 熟麻碇乼四張, 龍層乼二張, 旨乼二張, 棕子皮乼一張, 櫓木四隻, 鴟木一箇, 帆竹一箇, 白木綿風席一件載持. 今年正月三十日巳時, 自本港發向釜山港, 纔過水旨, 東北風驟起, 不得向前, 同日戌時量, 下碇于貴國境海. 經過二晝夜, 波濤極蕩, 終不止定, 今月初二日夕時, 所騎船隻, 絶纜觸破, 所載什物, 沒數漂失.
俺六名各乘片板, 從風漂着, 蒼黃跳下, 緣崖尋逕, 顚倒到此, 幸賴知世浦官民之饋粥借房, 今始回甦. 惟願速送釜港, 得還本國亦爲乎等以, 漂失物件中轉着於鎭下諸處之家材木七箇, 黑炭二苞, 碇乼二張, 旨乼二張, 棕子皮乼一張, 爲先照給, 餘外各種, 待風歇拯得計料爲有旀. 漂人供饋段, 自巨濟府如例備給, 而守護之節, 與譯學及通事, 各別照察是如馳報傳通據馳通爲有等以, 緣由馳通云云是白齊.
十一日未時到付同僉使馳通內, 卽接多大浦僉使馳通, 則卽到加德假把守將馳報內, 卽接知世浦萬戶馳報, 則今月初五日風波稍歇, 萬戶率校卒, 眼同通事, 與彼人分騎各船, 到本鎭後山金嘴前虎巖下大洋. 家材木十箇, 燒木四迲, 黑炭九苞, 船本板一立, 杉板十一片, 櫓木三隻, 駕龍木三箇, 上莊木二具, 熟麻乼一張, 僅爲拯給, 而餘他各種, 一沒汹濤, 覓得末由, 搜拯一款, 姑且停止爲有旀.
同漂人等仍爲守護是如馳報傳通據馳通爲白有等以, 緣由馳通云云是白齊。二十日子時到付同僉使馳通內, 卽接多大浦僉使馳通, 則卽到加德留鎭將馳報內, 卽接初站領護差員知世浦萬戶馳報, 則漂人六名卜物竝載船兩隻, 今月十六日午時離發. 與玉浦譯學同爲領護, 申時玉浦萬戶盧九奉處交付, 酉時助羅浦萬戶文泰允處交付, 戌時長木浦領護軍官徐奉伊處交付, 同時終站差員天城堡萬戶處交付後還鎭是如爲有旀. 追到終站差員馳報內, 同船領護, 到本堡磨巨里前洋, 守護經夜, 十七日午時, 移載于熊川縣整待船兩隻, 申時離發前進, 酉時到加德境栗仇味前洋.
安骨浦萬戶金秀永, 薺浦萬戶金基英等處交付, 同時領曳到船倉里前洋, 同鎭二戰船將金琪演處交付, 戌時到金海境四巖前洋是如爲有旀。追到金海府公兄等文狀內, 府使受由不在, 漂人竝載船兩隻, 逢授移載, 供饋仍留.
十九日辰時離發, 本府監官趙英瑞領護, 到多大境古里島前洋. 同鎭二戰船將李羲瑞處交付後還歸事馳報據, 同船領付館所次, 同船將仍爲差送是如馳通爲有等以, 緣由馳通云云是白齊.
同日酉時到付同僉使馳通內, 卽接多大浦二戰船將馳報, 則漂人卜物竝載船兩隻, 領護前進, 辰時到鐵梁前洋, 同時領付館所是如爲有旀. 追到譯學李濬秀手本內, 漂右日本人到館, 卽爲問情, 則漂人名數什物數爻破船事情, 與玉浦譯學問情無異. 而同漂人武田友助言內, 俺等六名, 自漂到處, 次次替船, 常常餉饋, 所拯卜物, 推持以來, 而外國漂踪, 生還有日, 貴國恩澤, 感祝無地是如言說據手本事, 馳通爲白有等以, 同漂人等姓名年歲什物, 成冊修正, 上送于議政府內務府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爲白乎旀. 緣由馳啓爲白臥乎事是良厼, 詮次善啓向敎是事. 光緖十三年丁亥二月二十一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