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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 교회의 천사에게
말씀: 계2:1-7. 2024년 1월 21일 일요일 오전 11시, - 오후 2시
여러분은 손 편지를 써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요즘은 전화, 문자, 팩스, 이메일 등으로 간단히 해결해 버리지만 손으로 직접 쓴 편지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신약 성경은 거의 모두가 편지(epistle)로 써진 책입니다. 바울이 쓴 성경을 우리는 ‘바울 서신서’라고 합니다. 바울이 쓴 편지란 뜻입니다. 로마서부터 빌레몬 히브리서까지는 모두 바울이 쓴 편지들입니다.
요한복음과 요한 일이삼서는 요한이 쓴 편지이고 베드로전후서는 베드로가 보낸 편지입니다. 야고보서는 야고보가 널리 흩어진 열두 지파에게 보낸 편지입니다(약1:1). 요한 계시록은 주님께서 요한에게 준 계시를 기록하여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계1:4)란 말로 요한 계시록이란 책의 형태와 성격을 보여 줍니다.
요한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책에 기록해야 했고 그것들을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냈습니다. 사도 요한이 쓴 편지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책으로 전달되어 읽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요한은 자신이 기록하는 편지 머리말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가 아니라 “에베소 교회의 천사에게”라고 시작합니다(2:1). 요한은 자신이 아는 어떤 사람들에게 편지를 쓴 적은 있지만 천사에게 편지를 쓴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크리스천들이 성경을 정의할 때 널리 쓰는 말 중에 하나가 성경은 하나님의 편지, 하나님의 연서(戀書-love letter)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쓴 편지는 펜과 잉크로 쓴 이 책이 전부가 아닙니다. [너희는 우리의 마음에 쓰여 있는 우리의 서신으로 모든 사람이 알고 있고 읽고 있는 서신이니라. 너희는 우리의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의 서신으로 분명히 들어났는데 그것은 잉크로 쓴 것이 아니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육신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고후3:2-3). 크리스천은 ‘그리스도의 서신’입니다. 이는 잉크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마음 판에 쓴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하나님이 기록하신 본성의 법이 있습니다(롬2:15). 그러나 이것으로 복음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록된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것들은 눈이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도다, 함과 같으니라.](고전2:9).
복음의 신비, 믿음의 신비, 구원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들인데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마음속에 들어가지도 못한 것들인지라 반드시 복음의 말씀, 믿음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말씀을 우리 속에 기록해 두심으로써 우리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서신, 생명의 서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 날들 이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곧 내가 내 법들을 그들의 생각 속에 두고 그들의 마음속에 그것들을 기록하여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한 백성이 되리라. [주]가 말하노라.](히8:10). 그들의 생각 속에 두고 마음속에 기록하신다!
[그 날들 이후에 내가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주]가 말하노라. 내가 내 법들을 그들의 마음속에 두고 그들의 생각 속에 그것들을 기록하리라, 하신 뒤에](히10:16). 그들의 마음속에 두시고 생각 속에 기록하신다! 크리스천들과 달리 유대인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는 주님께서 기록하신 말씀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주님께서 돌 판에 기록해 주신 말씀은 있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마음 판에 기록해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듣고 공부하지만 불신자들은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편지인 신자들을 주목하고 우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읽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그들이 읽을 수 있도록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계시록 2-3장은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들입니다. 여기 나오는 일곱 교회는 초대 교회도, 현 세대의 신약 교회도 아니고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을 당시에 있던 지역 교회들입니다. 요한은 주의 날에 성령 안에서 일곱 교회와 일곱 교회의 천사를 보았고 각 교회의 천사들에게 주님께서 기록하라고 한 것들을 써서 교회들에 보냈습니다.
주의할 것은 각 교회에 보낼 편지는 “**** 교회 천사에게”로 시작하지만 그 편지를 받아서 읽는 것은 교회의 천사가 아니라 그 교회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쓴 편지를 지역교회로 보냈지 결코 천사에게 보내지 않았습니다(계1:4, 11). 천사에게 글을 쓸 수는 있지만 그것을 보낼 방법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펜을 들고 종이 위에다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께”라며 장문의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편지를 하늘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기록하라”고 명령하시고 그것들을 일곱 교회로 보내도록 하셨고, 보내야 할 교회들의 이름을 지명해 주셨습니다(계1:11).
계시록 2-3장의 내용은 초대교회로부터 1900년 동안의 시대적인 흐름에 반영할 수 있으나 교리적으로는 큰 환란 때의 환란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내용들이 대부분입니다. 환란 가운데에는 “성도”라는 말은 있으나 계시록 4장부터 21장까지는 “교회”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 2,3,장의 일곱 교회가 큰 환란 교회라는 주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무시되거나 배척 받는데 이는 계시록의 내용들을 현 세대의 우리들에게 적용하고 싶은 욕망 때문입니다.
신약 교회는 큰 환란 전에 분명히 하늘로 들림 받습니다. 큰 환란 성도들 중에는 계시록 4-19장의 환란을 통과하며 죽거나 들림 받습니다. 큰 환란 때에 해당되는 교리적 구절들을 현 세대의 크리스천들에게 적용하려는 시도는 많은 교회들이 범하는 오류입니다. 이는 교회의 환난 통과에 맞추려는 자기들의 교리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마10:22, 24:13에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현 세대의 크리스천들에게 해당된다는 무지한 가정을 하는 이들은 구원의 요건이 죽을 때까지 견디는 것이 되고 맙니다. 자연스럽게 은혜를 통한 믿음의 구원이 아니라 행위 구원이 되고 맙니다. 더더구나 마24:13에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은 혼의 구원이 아니라 육체의 구원을 말합니다(마24:22). 주님께서 전 세대에 걸쳐 모든 사람들에게 준 성경 말씀을 항상 현재의 우리(나)에게 주신 말씀이란 생각과 판단은 무지와 오류일 뿐입니다. 설교나 성경 공부 시간에 크리스천들이 구약의 율법을 현 세대의 나에게 적용하려는 것이나 큰 환란 때의 구절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려는 것은 모두 다 오류의 영에 이끌린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알게 합니다(딤후2:15).
대개 일곱 교회를 교회 시대 2,000년에 적용할 때 다음 연대를 측정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온전히 목적된”(A.D.30-90년)이란 의미로 사도시대입니다. 서머나에 있는 교회는“몰약”(A.D.90-325년)이라는 의미로 로마 제국이 교회를 박해하는 쓰디 쓴 시대를 말합니다.
버가모에 있는 교회는“숱한 결혼”(A.D.325-500년)이라는 의미로 로마 제국이 교회를 받아들여 통합 종교로 하나 되는 시대를 말합니다. 이는 종교의 간음에 해당합니다.
두아디라에 있는 교회는“고통의 향기”(A.D.500-1000)라는 의미로 로마 제국이 교회를 통제하는 시기로써 로마 카톨릭 교회가 득세하여 진리의 말씀을 지키려는 신약교회가 핍박받는 중세 암흑시대를 말합니다. 사데 교회는“붉은 자들”(A.D.1000-1500년)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로마 교회로부터 교회가 벗어나는 시기로 종교 개혁 시기입니다.
필라델피아 교회는“형제의 사랑” (A.D.1500-1900년)이란 뜻이 있는 근대 선교운동의 물결이 일어난 시대입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는“시민의 권리”(1900- 현재?)란 의미로 기업화된 현대의 교회로 그 특징은 주님을 향한 사랑은 미지근함입니다. 결과물은 “죽은 개신 교회”입니다.
절묘하게도 일곱 교회의 특징은 교회사의 교회들의 특징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교회나 신학교에서는 계시록 2,3장을 신약 교회들의 교회사에 적용합니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보면 신약교회에 적용하지 못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주의 날 성령 안에서 사도 요한은 일곱 개의 등잔대와 그 가운데 계신 주님께서 오른 손에 일곱별을 들고 계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요한이 등잔대와 별을 본 것은 이 시대가 밤이기 때문입니다. 의의 해가 떠오를 때까지 이 시대는 밤입니다.
자, 에베소 교회의 천사에게 써서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겠습니다.
2:1절은 편지의 서두, 인사말에 해당합니다.
2-3절은 에베소 교회에 대한 주님의 칭찬입니다.
4절은 에베소 교회에 관한 주님의 책망입니다.
5절은 주님의 경고입니다.
6절은 주님의 칭찬입니다.
7절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첫 사랑을 버린(떠난)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을 경고했습니다. [내가 이것을 아노니 곧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너희 가운데로 들어와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왜곡된 것들을 말하는 사람들이 일어나리라.](행20:29-30). 이런 중에도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파의 행위를 미워했는데 이는 주님께서도 미워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한 ‘사나운 이리들’입니다.
1절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천사에게 쓰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있는 자 곧 일곱 금 등잔대의 한가운데를 거니는 자가 이것들을 말하노라.](계2:1). 여러분은 편지를 쓸 때 “To..., Dear....”란 식으로 쓸 것입니다. 사랑하는 000에게....... 제가 어렸을 때 군인간 아들이 부모님에게 편지 쓸 때, 아버님전상서, 또는 어머님전상서, 또는 부모님 전상서, 라고 서두를 씁니다.
우리는 관공서나 은행 등에서 오는 편지(공문)를 받기도 합니다. 매주 우체통에는 어디선가 오는 청구서(편지)로 가득합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에베소 교회의 천사에게” 쓰라(write)고 하십니다. 써야 할 내용은 2절부터 7절까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편지 서두에 “...에게 편지하노니”로 시작할 때 그 대상이 천사였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바울서신들의 예를 잠간 살펴봅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로마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롬1:7),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히 구별되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우리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편지하노니”(고전1:2), “모든 성도들에게 편지하노니”(고후1:1), “갈라디아 교회들에 편지하노니”(갈1:2),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엡1:1), “모든 성도들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들과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빌1:1)와 같은 형식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지금 교회의 성도가 아니라 교회의 천사에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여기서 ‘천사’는 실제 천사가 아니라 교회의‘사역자’란 의미라고 주장하면서 지역 교회의 감독(장로, 목사)에게 보낸 편지라고 말합니다. 이는 주님이 기록하신 것과는 전혀 다른 성경 변개입니다.
천사가 사역자라면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는 그 목회자에게 준 개인 편지가 되고 교회가 아닌 교회 목회자들의 잘한 점과 잘못된 점을 칭찬하고 책망하고 경고하는 내용이 되고 주님은 교회가 아니라 교회의 사역자들을 책망하고 경고하고 꾸짖는 내용이 됩니다.
본문의 내용은 교회에 관한 것이지 교회의 감독(장로, 목자) 개인에 관한 말씀은 전혀 없습니다. 일곱 별로 보인 교회의 천사는 교회의 사역자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일곱 등불로 보인 교회로 현현(나타남, 드러남)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천사는 정확히 교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교회의 천사를 사역자로 정의하면 내용 자체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의 천사에게 “네가”(천사-단수)라고 하셨다가 곧 바로 “너희들”(성도들-복수)이라고 말씀하십니다(계2:10). 주님은 버가모 교회의 천사에게 쓴 글에 “네가(단수)...네가(단수)...너희(성도들) 가운데서”(계2:13)라고 하십니다. 한 명의 천사가 갑자기 복수의 천사들이 될 수 없습니다. 내용은 천사들이 아닌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천사는 주님을 돕는 자였습니다(눅4). 다니엘에게 날아온 천사는 주의 말씀을 전하는 자였고 돌아갈 때는 전사였습니다(단12).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두 천사는 증인이었습니다. 천사들은 하늘에서 전쟁을 수행하기도 하고 이 땅에서 성도들을 돕고 섬기는 사역자들이기도 합니다.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이르시기를, 그분께서는 자신의 천사들을 영들로 삼으시고 자신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시되](히1:7).
천사를 교회의 감독이나 장로, 목사로 본다는 것은 듣기 좋은 소리일 뿐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천사들을 영들로 삼았다는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그들은 다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위해 섬기라고 보내어진 섬기는 영들이 아니냐?](히1:14). 이 말씀에 따르면 지금 이 땅에는 천사들이 내려와 있고 크리스천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천사들을 볼 수 없습니다. 섬기는 영들로 와 있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천사의 정체성(identity)은 영(spirit)입니다.
자, 그럼 영이란 무엇인지 봅시다. 영은 살과 뼈가 없습니다(눅24:39). 그러나 영은 형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주의 영은 주의 형체, 형상으로 나타나 보입니다. 어린 아이의 영은 어린 아이의 형체, 형상으로 나타나 보입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바라보느니라.](마18:10). 이 말씀은 천사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깨워주는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천사는 그 존재의 실체, 모습을 나타내 보이는 영입니다. 이 땅에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천사들은 저 하늘에 있습니다. 이 땅에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의 천사들은 주님의 오른 손에 있습니다. 이 땅에 민족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통치자들(천사들)은 저 하늘에 있습니다.
[그분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제자들이 보고 불안해하여 이르기를, 그것은 영이다, 하며 두려워서 소리 질렀으나](마14:26).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본 제자들은 "영이다"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유령이다, 귀신이라고 했을지 모릅니다. (개역, 유령이라 하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유령, 귀신의 의미는 죽은 어떤 사람의 혼백, 혼령입니다. 사도들은 바다 위를 걸어오고 있는 예수님을 보면서 실제 예수님이 아닌 ‘그분의 영’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영이란 실체, 존재의 ‘현현(나타남)’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서워하고 놀라며 자기들이 영을 본 줄로 생각하매](눅24:37).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 한 가운데 나타났을 때, 부활을 모르는 그들이 보인 반응입니다. “영을 본 줄로 생각하매.” 예수님은 분명히 죽으셨고 묻히셨는데 지금 자기들 가운데 나타나 보이시고 말씀하시니 그들은 ‘영’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영은 뭔가의 현현(나타남)을 뜻하고 그런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이 영이 아니라 부활한 몸(실체)을 보이시고 증언하셨습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고 바로 나인 줄 알라. 나를 만지고 또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하시니라.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들에게 자기 손과 발을 보이셨으므로](눅24:39-40).
영은 주님의 현현이지만 지금 그들 가운데 계신 분은 영이 아니라 부활의 몸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눈으로 보면서 믿지 못하고 의심하며 영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생선과 꿀을 드시면서 영이 아님을 보여 주셨고 입증해 주셨습니다.
또한 감옥에 갇혔던 베드로가 나타났을 때 그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들이 그녀에게 이르되, 네가 미쳤다, 하였으나 그녀가 확고히 단언하여 참으로 그러하다고 하니 그때에 그들이 이르되, 그것은 그의 천사라, 하더라.](행12:15). 출옥한 베드로를 보았다는 증언을 들은 기도하던 성도들은 그가 지금 감옥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증언자에게 “네가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다 확고히 단언하자 “그것은 그의 천사라”고 했습니다(행12:15). 베드로의 천사는 베드로는 아니지만 베드로의 모습을 하고 있고, 베드로와 동일합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천사라는 의미는 “베드로의 현현(나타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 우리는 천사는 영이요 그 기능이 ‘나타남’(현현)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일곱 교회의 천사는 일곱 교회를 나타내 보여 주는 현현(나타남)입니다. 일곱 교회와 일곱 교회의 천사는 주님과 주의 천사, 아이들과 아이들의 천사들과 같은 관계입니다. 요한은 성령 안에서 일곱 교회의 천사를 통해 일곱 교회를 보았고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들에게 글을 썼습니다. 영 안에서는 우리의 시간 개념과는 많이 다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므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보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다시 1절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천사에게 쓰라.”(1).
에베소 교회는 바울, 아볼로, 디모데, 두기고 등이 사역하던 초대 교회 중 가장 유명한 교회 가운데 하나입니다. 에베소란 이름은 “온전히 목적된”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의 천사에게” 글을 쓰게 하셨는데 실제로 이 편지를 받아 보는 수신자들은 천사가 아니라 “에베소 교회”입니다. 편지는 교회에 보냈기 때문입니다(1:4,11).
주목하십시오. 주님은 각 교회의 천사 한 명에게 쓴 편지를 그 교회로 보내 성도들이 읽고 듣고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교회의 천사가 교회에서 일하는 한 개인의 사역자가 아니라 교회 자체를 나타내 보여 주는 존재임을 알려 줍니다. 에베소 교회는 에베소 교회의 천사에게 보낸 편지를 받을 때 자신들이 그 수신자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있는 자 곧 일곱 금 등잔대의 한가운데를 거니는 자가 이것들을 말하노라.”(2:1)고 하셨습니다. 2-7절까지의 내용은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을 요한은 단지 받아써서 보낸 것입니다.
2절입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며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할 수 없음을 아노니 스스로 사도라고 말하나 사도가 아닌 자들을 네가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쟁이들임을 알아내었고](계2:2). 내가(I)-주님, 네가(thou, thee). 주님은 천사를 대상으로 말씀하시는데 내용은 교회의 천사나 목회자가 아니라 교회 자체입니다. 교회의 천사는 교회의 현현(나타남)이므로 에베소 교회가 ‘너’에 해당합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의 행위(일)와 수고(노동)와 인내를 아셨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유흥을 즐기는 놀이터가 아니며, 방문객들이 들어와 구경하는 극장이 아며 찻잔을 놓고 잡담하는 카페가 아닙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섬김의 행위(work), 사랑의 수고(labour), 소망의 인내(patience)가 있어야 하는 곳입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함을 아셨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양의 탈을 쓴 이리들, 거짓 대언자, 거짓 사도, 거짓 교사들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은밀히 기어들어오는 이단들을 척결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 에베소 교회에 있던 악한 자들이 무엇인지 사도행전 19장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떠돌아다니는 유대인 술사들(행19:13), 악한 영들(행19:15), 마술사들(행19:19), 우상을 제작하는 세공업자들(행19:24)들이었습니다.
에베소에는 당시 거대한 다이아나 신전이 있었고 이교도 제사장들, 마술사들이 넘치는 도시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그런 이교도의 전통과 풍습을 단호히 배척하고 그런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선한 것을 굳게 붙들라.](살전5:21). 우리는 아무 것이나 받아들이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수많은 거짓 대언자, 거짓 사도들, 거짓 교사들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시험해 보라는 주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는지 그것들을 시험하라. 이는 많은 거짓 대언자들이 나와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이라.](요일4:1). 방언, 예언, 기적을 행하는 등의 표적이 다 성령의 역사라고 믿는 것만큼 잘 속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영들을 다 믿지 말고 표적이나 기적이나 체험이나 입신을 모두 믿지 마십시오. “시험하라.”는 주의 말씀대로 시험해 보십시오. 우리는 무엇으로 그런 것들을 시험합니까? 우리에게는 판단의 절대 기준이 있습니다. 영들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들이 율법과 증언에게 구할지니 만일 그들이 이 말씀에 따라 말하지 아니한다면 그 까닭은 그들 안에 빛이 없기 때문이니라.](사8:20). 주의 말씀이 시험지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자칭 사도라고 말하는 자들을 시험해서 그들이 거짓말하는 자들임을 알아내었습니다. 사도들이라고 하는 자들이 정말 사도인지 아닌지는 ‘사도의 표적’을 가지고 시험할 수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들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고 새 언어들로 말하며 뱀들을 집어 올리고 어떤 치명적인 것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들에게 안수하면 그 사람들이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7-18).
주님은 사도들에게 5가지 표적들이 따를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도들에게는 복음을 전할 때 이런 표적들이 따랐습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인내와 표적들과 이적들과 강력한 행위들로 사도의 표적들을 행하였노라.](고후12:12).
사도의 표적들이란 사도로서의 자격을 입증하는 표적들입니다. 이런 표적들이 없다면 아무리 자신을 주의 부르심을 받은 사도라 주장해도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이런 표적들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고전1:22, 14:22). 하지만 유대인들 역시 이런 표적을 보지 못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표적들을 보지 못하니 대언자도 더 이상 없으며 이 일이 얼마나 오래 갈지 아는 자도 우리 가운데 없나이다.](시74:9).
주님은 거짓 대언자를 구분하는 법을 알려 주셨고(신18:21,22) 거짓 사도들을 구분하는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베소 교회가 그와 같은 악한 자, 거짓 사도들을 용납하지 않는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3절입니다. [또 참고 인내하며 내 이름을 위해 수고하고 낙심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계2:3).
에베소 교회는 참고 인내하며 주의 이름을 위해 수고하고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참고 인내한다는 것은 ‘고난’에 대한 크리스천의 자세입니다.
“내 이름을 위해 수고하고”(3). 사도들의 수고를 보십시오.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사람들이니라.](행15:26:여기의 그들은=바나바, 바울, 유다, 실라). [그때에 바울이 응답하되, 너희가 무슨 뜻으로 슬피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예루살렘에서 결박되는 것뿐만 아니라 죽는 것도 각오하고 있노라, 하니](행21:13). 사도 바울은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죽는 것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런 점에서 참으로 본이 되는 교회입니다. 그들은 주의 이름을 위해 일하면서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낙심한 적이 없습니까? 아무 열매도 없고 지치고 누가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영적인 기쁨이나 충족감이 느껴지지도 않고 징계인지 심판인지 모를 고난이 닥칠 때 사람은 누구나 낙심하기 쉽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또 참고 인내하며 내 이름을 위해 수고하고 낙심하지 아니하였느니라.](3)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참고 인내하고 수고했지만 낙심하지 않았다는 것은 위대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합니다.
1. 오래 기도를 했지만 응답이 없다고 낙심하지 말라.
[사람들이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그분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여](눅18:1). 아무리 오랫동안 기도해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잘못 구하는 것도 아니고 정욕에 따라 구하는 것도 아닌데 도무지 응답이 없는 기도에 성도들은 낙심하고 맙니다. 이는 주님께서 “기다리라. 나의 때를 기다리라.”고 하시는 것들입니다.
2. 맡은 바 사역으로 인해 낙심하지 말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받아 이 사역을 맡았기에 낙심하지 아니하며](고후4:1). 자신이 받은 사역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원하는 열매나 결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여러분의 큰 성공이나 놀라운 결과가 아니라 “신실함”입니다.
3. 현재 받고 있는 고난으로 인해 낙심하지 말라.
우리가 받는 고난은 헛고생, 개고생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을 이룹니다(고후4:17). 속사람을 새롭게 해 줍니다. [이런 까닭으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썩어 없어져도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고후4:16).
4. 사역자들이 받는 환난들로 인해 낙심하지 말라.
[그러므로 너희를 위한 나의 환난들로 인해 너희가 낙심하지 않기를 내가 바라노라. 그것은 너희의 영광이니라.](엡3:13). 사도들을 비롯한 많은 복음 전도자들이 환난들을 받았습니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 성도들은 낙심하기 쉬습니다. 교회를 박해할 때 가장 먼저 사역자들부터 잡아들입니다. 그런 때에 부끄러워하거나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사역자들이 다 체포되어 죽는다고 해서 와해되거나 씨가 마르지 않습니다.
5. 주의 징계와 책망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우리는 죄를 지을 때 징계를 받고 때로 책망을 받습니다. 징계와 책망은 하나님의 저주나 심판이 아닙니다. [또 자식들에게 하듯 너희에게 말씀하시는 권면을 너희가 잊었도다. 이르시되, 내 아들아, 너는 [주]의 징계를 멸시하지 말고 그분께 책망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12:5). 징계를 통해 바로잡히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행하는 가운데 지치지 말지니 우리가 기진하지 아니하면 정해진 때에 거두리라.](갈6:9). 믿음의 경주,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다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처음에 한 동안 잘 행하다가 지치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둡니다. 그 때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그러나 형제들아, 너희는 잘 행하는 가운데 지치지 말라.](살후3:13). 지치지 않으려면 ‘새 힘’이 필요합니다.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인내하며 수고하며 낙심하지 않았기에 주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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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를 책망할 것이 조금 있나니 이는 네가 네 처음 사랑을 버렸기(떠났기-left) 때문이라.](계2:4). 성경은 교리와 책망과 바로 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입니다(딤후3:16). 주님은 에베소 교회가 인내하고 수고하는 교회, 주의 이름을 위해 일하는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책망할 것은 분명히 책망하십니다.
첫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나 첫 사랑을 잊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첫 사랑이 식어 버린 것도 아닙니다. 에베소 교회는 첫 사랑을 버렸고 떠났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책망하신 이유입니다. 주님은 결코 첫 사랑을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내가 너를 기억하되 네가 씨 뿌리지 않은 땅 곧 광야에서 나를 따랐을 때 보여준 네 젊은 시절의 친절과 네 정혼한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라.](렘2:2). 하나님은 첫 사랑을 기억하십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겔16:8-12). 그러나 이스라엘은 주님을 떠났고 버렸으며 다른 신들을 따라 가며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에베소 교회 역시 무슨 일인지 첫 사랑을 떠났습니다. 세상에 이런 모순과 역설이 없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버림을 받고, 누가 누구를 떠났는지 보십시오. 신데렐라에게 버림받은 왕자가 상상이 됩니까? 주님의 사랑을 버리고 떠난 교회! 이것이 현실입니다.
하나님보다 맘몬(재물)을 더 사랑합니다(마6:24).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쾌락들을 더 사랑하고(딤후3:4),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합니다(딤후3:2). 하나님의 칭찬보다 사람들의 칭찬을 더 사랑하고(요12:43),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합니다. 이것이 지금 성경이 증언하고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입니다.
5절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기억하고 회개하며 처음 행위를 하라. 그리하지 아니하고 네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속히 네게 가서 네 등잔대를 그것의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5).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게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기억하고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랑’보다 ‘일, 수고, 행위’가 앞선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악을 분별하고 거짓을 시험하며 용납하지 않았고 주님을 위해 일했고 기꺼이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사랑을 버리고(떠나) 일을 하는 그들에게 다시 ‘처음 사랑’을 가지도록 말씀하십니다.
성도들 중에서 너무나 열심히 주를 섬기고 교회 일을 하면서 정작 주의 말씀에 대한 흥분과 경이로움이 없고 기도를 하면서 주님과의 은밀한 친교가 없다면 큰 문제입니다. 예배가 너무나 짧게 느껴지고 성경 공부가 기다려지는 그런 체험이 옛날 옛적의 추억이요, 기억 저 편에 있다면 이 시간 회개하십시오. 이제는 성경을 펴서 누군가와 논쟁을 펼치고 싸울 수도 있고 좀 더 공부를 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주님과의 만남이란 흥분과 설렘이 없다면 여러분은 지금 처음 사랑을 떠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눈앞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우리가 끊임없이 기억하기 때문이라.](살전1:3). 이 구절을 계시록 2:2절과 비교합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며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할 수 없음을 아노니 스스로 사도라고 말하나 사도가 아닌 자들을 네가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쟁이들임을 알아내었고](계2:2). 이 두 구절에서 세 가지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행위-네 행위, 사랑의 수고-수고, 소망의 인내-인내. 외적인 행위, 수고, 인내는 같은데 내적인 ‘믿음, 사랑, 소망’이 없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믿음, 사랑, 소망이 없이 부지런히 일했고 주님은 이것을 책망하시며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다시 5절입니다. [......네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속히 네게 가서 네 등잔대를 그것의 자리에서 옮기리라.](5). 등잔대(교회)를 옮겨 버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교회는 회개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등잔대는 옮겨져 버렸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있던 자리는 현재 무슬림(회교도)들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6절입니다. [그러나 네게 이것이 있으니 그것은 곧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것이라. 나도 그것을 미워하노라.](계2:6).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교회였는데 주님 역시 그것을 미워하십니다. “내가 그것을 미워하노라.”(I hate it). 주님은 모든 성도들이 서로 형제요, 지체임을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에는 구약의 유대교와 당시 이교도들의 성직자 계급 체계가 침투했습니다.
니골라당(Nicolaitanes)이란 제사장 체계, 성직자 체계, 종교 체계를 말합니다. 신약 교회가 구약의 율법을 따라 대제사장, 레위지파의 제사장 체계를 따르는 것을 성경적이라고 여긴다면 이는 거짓 교리입니다. 오늘날 개신 교회들이 목사를 성직자로, 성도들을 평신도로 나누어 평신도들이 성직자인 목사의 영역에 접근하거나 도전하는 것을 크나큰 죄를 범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곧 리골라당의 행위입니다. 오늘날도 예배당을 성전이라 하며 설교하는 강단을 지성소로 여기며 목사나 부목사 등 설교하는 사람을 성직자로 여기고 평신도나 어린이는 설교단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곧 리골라당의 교리들입니다.
구약의 율법 체계는 신약의 교회에 적용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이방인들의 통치자들이 그들에게 지배권을 행사하고 큰 자들이 그들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만 너희끼리는 그리하지 말지니 오히려 누구든지 너희 가운데서 크게 되려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누구든지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려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할지니라.](마20:25-27).
제자들은 서로 간에 지배권, 권위를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끼리는 그리하지 말지니...”란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사도, 목자, 복음 전도자, 교사, 집사로 세우는 것은 성도들을 섬기고, 먹이고, 세워 주라는 것이지 그들을 지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감독한다는 말은 본을 보여 주어 따르게 하고 보호해 준다는 말씀이지 권위를 행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불리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한 분 곧 그리스도이며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어떤 자도 너희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한 분 곧 하늘에 계신 분이시니라.] (마23:8-9). 이 땅에는 ‘랍비’라 부르는 종교(유대교)가 있고 ‘아버지’라 부르게 하는 종교(로마 캐톨릭 : 신부)가 있습니다. 이 둘은 우리 주님께서 금하신 종교입니다.
“니골라”란 “니코”(niko)와 “라오스”(laos)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로 니코(niko)는 정복자, 지배자란 뜻입니다. 라오스(laos)는 백성들, 서민이란 뜻입니다. 여기서 오늘날 lay man(평민)이 나왔습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이미 성직자 계급이 침투해 들어왔지만 에베소 교회는 그것을 미워했고 주님 역시 그것을 미워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두가 형제요, 서로가 지체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영적 제사장이요, 그리스도의 군사들이며, 청지기들입니다. [너희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 집으로 건축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도다.](벧전2:5).
직분을 맡은 자만 제사장이 아닙니다. 모두가 제사장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선정된 세대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소유 백성이니 이것은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에 대한 찬양을 너희가 전하게 하려 함이라.](벧전2:9). 성경은 “너희는...”이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교회에 계급, 계층, 구분을 짓고자 하는 자들이 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것을 미워하십니다.
7절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 한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을 주어 먹게 하리라.](계2:7).
주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는데 본문에서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성령은 주이시며(고후3:17),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은 에베소 교회의 천사에게 써서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인데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특정한 한 교회가 아닌 우리 모두가 들어야 할 책임을 분명히 말씀해 주십니다.
“이기는 자에게는....”(7). 계시록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믿는 자”가 아니라 “이기는 자”라고 합니다. 믿는 자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 ‘의롭게 된, 하나님의 자녀 된 자, 거룩한 자, 부름 받은 자, 상속자...’ 등 수 없이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이기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기신 분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나 기운을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하시니라.”(요16:33하).
하나님께서 성도들 안에 계신 자들은 세상을 이긴 자들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고 또 그들을 이겼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분께서 세상에 있는 그보다 크시기 때문이라.] (요일4:4)
크리스천들은 이기는 자입니다. [이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것은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5:4-5).
이 구절을 크리스천들에게 적용해서 믿기는 하지만 “이기지 못하는 자, 승리하지 못하는 자, 성화되지 못한 자”는 큰 환란을 통과해야 한다, 혹은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식의 교리는 심각한 오류입니다. 크리스천은 누구나 이미 승리자입니다(고전15:57, 고후2:14). 그러나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듯이 지역 교회 안의 모든 교인들이 다 믿는 자가 아니며 모두가 구원 받았거나 이기는 자가 아닙니다.
지역교회 안에는 영적인 사람, 육신적인 사람, 갓난아이, 불신자들이 함께 섞여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이 구절들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이기는 자는 크리스천들이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육신을 이기는 등의 영적 전투와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귀를 대적해서 싸워야 하며,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대항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성령의 검을 잡고 싸워야 합니다. “이기는 자”를 크리스천으로 적용한다면 해석이나 적용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큰 환란 때 환난 성도들에게 “이기는 자”란 정의는 전혀 다릅니다. [또 내가 보니 불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는데 짐승과 그의 형상과 그의 표와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승리한 자들이 [하나님]의 하프들을 가지고 유리 바다 위에 서서](계15:2). 환란시대는 은혜시대와 전혀 다릅니다.
은혜시대와 같이 복음을 믿고 세상을 이기는 자가 아니라 “짐승과 그의 형상과 그의 표와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승리한 자들”을 말합니다. 큰 환란 때 끝까지 견디는 자,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이기는 자’입니다. 큰 환란이 끝날 때까지 “하나님의 명령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을 지켜야 합니다(계12:17, 14:12). 죽기까지 신실해야 합니다.
이 때 환난 성도들은 기본적으로 주리고 헐벗고 도망가고 고문당하고 목이 잘립니다. 짐승의 이름, 수, 형상 따위에게 경배하지 않고 표를 받지 않아야합니다. 큰 환란에서는 이런 자들을 이기는 자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이기는 자에게 놀라운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기는 자는 생명나무 실과를 먹습니다(계2:7).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에게 해를 입지 않습니다(계2:11). ★이기는 자는 감추어진 만나를 주어먹게 하며 새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흰 돌을 주십니다(계2:17). ★이기는 자는 민족들을 다스릴 권능을 주십니다(계2:26).★이기는 자에게는 흰 옷을 주시고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않고 시인하십니다(계3:5).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둥이 됩니다(계3:12). ★이기는 자는 주님과 함께 왕좌에 앉는 것을 허락 받습니다(계3:21). ★이기는 자는 모든 것을 상속 받습니다(계21:7). 이와 같이 큰 환란 때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은 구원 받은 신약 성도들은 믿음을 통해 이미 모든 것을 은혜로 얻은 것들입니다. 예를 들자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는 생명나무 실과(2:7)를 따로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은혜시대에 구원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들은 둘째 사망(2:11)과 관계없이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요5:24). 이와 같이 은혜시대에 세상을 이기고 믿음으로 구원 받은 성도들은 환난에서 이기고 얻는 모든 것들을 보장 받은 것들이기 때문에 계2-3장의 이기는 자를 교회에 적용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환난 전에 들림 받기 때문에 환난 때의 이기는 자들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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