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3월11일
복자 요한 파브리아노
Beato Giovanni Righi da Fabriano
Bl. JOHN RIGHI of Fabriano
(Joannes de Fabriano; Johannes Baptista Righi)
1469 at Fabriano, Ancona, Italy
- 1539 of natural causes
Beatified:1903 (cultus approved)
그는 아주 겸손한 프란치스코회 사제이지만,
그의 엄격한 생활은 사막의 교부들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는 흔히 한주간 동안 꼬박 음식없이 지냈고, 공현주일부터 부활주일까지 단식재를 지켰다.
그러나 주일과 목요일만 제외하였다.
밤 기도가 끝난 후에도 그는 밤새도록 성당에 남아 혼자 기도하였다.
그는 키가 작고 또 얼굴이 파리하였어도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San Damiano Crucifix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간추린 역사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는 1209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1182~1226)에 의해 창설되었다.
성인은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자유분방하고 야심많은 청년기를 보내던 중
일련의 계시와 나환자와의 만남을 통해 기도와 보속의 회개 생활을 시작하였다.
성인의 모범에 감명을 받은 젊은이들이 그를 따르기 시작했고,
날이 갈수록 형제들의 수는 많아져 결국 공동생활의 필요성에 의하여 1209년(혹은 1210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간단한 회칙을 구두로 인준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1223년 회칙을 재작성하여 교황 호노리오 3세로부터 대칙서로 인준 받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 날에도 프란치스칸 생활의 기초가 되고 있는 작은 형제들의 회칙이다.
성인은 ’제2의 그리스도’라고 할만큼 철저히 복음적 삶에 투신하였으며,
무엇보다도 가난과 겸손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려고 하였다.
그러기에 당시의 엄격하였던 여러 수도회들과는 달리
회의 명칭을 "작은 형제회"(Ordo Fratrum Minorum)라고 하였다.
그리고 1211년에는 관상 수녀회로서 프란치스꼬 제2회인 "클라라회"를,
1221년에는 평신도들을 위해 제3회인 "재속 프란치스코회"를 세워
많은 형제 자매들이 대가족을 이루게 되였다.
또한 성인은 철저히 겸손의 길을 걸었으며.
1224년 라베르나 산에서 깊은 관상과 기도 끝에 오상(五傷)까지 받으신 성인의 신심은
많은 이들을 복음적 생활에로 이끌어 왔다.
지금까지 약 800여 년에 달하는 프란치스코회의 역사를 통해서 본회는 수많은 성인 성녀들을 모시게 되었다.
한편 한국 진출은 1937년 9월, 캐나다 관구 소속의 두 형제가 입국하여
대전시 목동(현재의 수련소)에 자리잡고부터 시작되었다.
그후 일제 치하의 고초와 6.25 동란으로 인하여 폐쇄되었다가 1955년에 다시 돌아와
파괴된 수도원을 재건하고 본격적인 한국에서의 프란치스칸 생활을 전개하였다.
1969년에는 <한국 준관구>로 승격되고. 1987년 12윌 10일, 한국 진출 50주년을 기념하여
층본부로부터 "한국 순교 성인 관구"로 인가받아 오늘날의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작음과 형제애의 영성
프란치스꼬회의 공식명칭은 "작은 형제회"(Ordo Fratrum Minorum)이다.
이 명칭은 바로 프란치스칸 영성을 요약해 주고 있다.
작음(minoritas)과 형제애(fraternitas)를 바탕으로해서 복음적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다.
이 작음의 정신은 그 안에 가난과 겸손이라는 덕목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작은형제들은 가난하시고 겸손하신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의 삶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실제로 가난한 자가 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하나가 되며
그들로부터 복음화되고 복음화시키는 것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인식한다.
또한 가난한 자들처럼 일과 노동을 통해 땀흘려 일하고 소박하고 단순한 생활을 영위하며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처럼 하느님께 신뢰하며 복음적 불안정의 삶을 살아간다.
이렇게 일과 노동은 생계유지의 제일차적인 수단이며 나머지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존하며
그분이 보내주시는 은인들의 애긍을 통해서 살아가게 된다.
형제애의 정신은 사랑과 순종을 전제로 한다.
프란치스꼬는 수도회 개념보다는 형제회 개념을 더 중시하였다.
우리 모두는 맏형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한 형제들이라는 것이다.
이 형제애는 "어머니가 자식을 기르고 돌보는 이상으로 형제들 상호간에 기르고 돌보는 정신"이다.
이러한 형제애는 가난 안에서도 기쁨이 넘치는 공동체를 가능케 한다.
형제 상호간의 사랑과 애정어린 순종은 기쁨의 영성을 프란치스칸 영성의 특징적인 요소로 부각시켜 준다.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 체험되는 형제애는 신분계급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이에게로 확장된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크리스챤이든 이교도이든 원수이든 강도이든 성한 사람이든 병자들이든
모든 이가 한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로서 받아들이도록 해 준다.
더 나아가 프란치스꼬가 그랬듯이 이 형제애는 자연과 우주 만물에 대한 사랑으로 더욱더 확장된다.
바로 우주적인 형제애, 만인의 형제가 되는 것이 프란치스칸 형제애의 본질이다
(작은형제회홈에서 www.ofm.or.kr)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
*성 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상흔 축일:9월17일
성 고르고니오(Gorgonius)
성 피르무스(Firmus)
축일 3월 11일
성 고르고니우스(또는 고르고니오)와
성 피르무스(Firmus)는 소아시아
비티니아(Bithynia) 지방의 니케아(Nicaea)나
시리아(Syria) 지방의 안티오키아(Antiochia)에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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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 크리스푸스(Benedictus Crispus,)
축일 3월 11일
베네딕투스 크리스푸스
(Benedictus Crispus, 또는 베네딕토)의 생애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가 밀라노의 대주교가
된 후 로마(Rome)에서 대소송에 휘말렸다는
것뿐인데, 우겔리라는 사람은 그를 묘사하기를
‘주교권의 열렬한 옹호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주교직을 박탈당했다.
베네딕투스는 로마 순교록에 명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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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Peter the Spaniard)
축일 3월 11일
성 베드로(Petrus)는 로마(Rome)에 온 군인 출신의
에스파냐 순교자로 베롤리(Veroli) 부근
바부코(Babuco)에서 은수자가 되었다.
그는 육체적 고행의 수단으로 맨살 위에
쇠미늘 갑옷을 입고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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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빈디치아노(Vindician)
축일 3월 11일
바폼 교외 뷜러쿠르에서 태어난
성 빈디키아누스(또는 빈디치아노)는 669년경에
캉브레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착좌하자마자
즉시 교구내의 각 본당을 순례하며 많은
개종자를 얻었고, 성 막셀린다의 유해를
이장하고 또 맹인을 눈뜨게 했으며 살인자의
개종을 인도함으로써 큰 파문을 일으켰으나,
교구로 돌아와 보니 큰 비극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오툉(Autun)의 주교 성 레제르가 궁중의
총리인 야만적인 에브로인으로부터 참수되어
사르시 숲 속에 버려진 사건이었다.
빈디키아누스는 교회의 대표자로 선출되어
국왕에게 파견되었다. 그는 갖은 위험과 모욕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왕과 담판을 벌여서
그의 과오를 인정케 하였다. 그 후에는
별다른 큰 사건 없이 교구를 지도하다가 만년에는
몽-생-엘로이 수도원으로 은퇴하여 80세경에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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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소프로니오(Sophronius)
축일 3월 11일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출신인 성 소프로니우스
(또는 소프로니오)는 은수자로 살면서 고향 땅을
비롯하여 소아시아, 이집트 등지를 순례하였다.
580년 그는 결국 이집트에서 은수자로 살았는데,
성 사바(Sabas) 수도원에서 요한 모스쿠스
(Joannes Moschus)라는 수도자와 함께 지냈다.
이집트의 여러 수도원을 둘러본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인 성 요한 자선가 밑에 있던 중 634년에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시노드(Synod)를 소집하여 그리스도 단성설을
단죄하고, 정통파의 지도자로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는 몇 사람의 전기를 비롯하여 교리,
강론을 썼으며 몇 편의 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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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아우레아(Aurea)
축일 3월 11일
에스파냐가 무어인들의 지배를 받을 때
수도 생활을 염원하는 신자들은 한적한 산에
그들의 수도원을 손수 짓고 고독한 싸움을
하는 것이 일종의 관습이 되었다.
칼라호라 교구의 상 에브로 지방에는 라 코골라
원장의 지도하에 이런 생활을 하는 여성들의
거주지가 있었는데, 그 아래에 가르시아 눈누스
혹은 눈니우스와 그의 아내 성녀 아무니아
(Amunia)가 딸 아우레아와 함께 생활하였다.
그들은 성서를 늘 공부하고 성녀 아가타(Agatha),
에우랄리아(Eulalia) 그리고 체칠리아(Cecilia)의
전기를 묵상하다가 수도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성녀 아우레아는 그들이 늘 공경해 오던 위의
세 성녀의 환시를 보았는데, 그녀에게 영광의
월계관을 분명히 약속하였다고 한다. 그 때부터
아우레아의 보속 생활과 기적들은 도처에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치명적인 병을
앓다가 어머니의 품안에서 운명하였는데,
많은 수도자들이 운집하여 그녀의 임종을 지켜보며
그녀의 성덕을 찬양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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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피데스(Fides)
성녀 알베르타(Alberta)
축일 3월 11일
성녀 피데스(Fides)에 대한 공경은 중세기에
확산되어 특히 잉글랜드(England)와 프랑스에서
맹위를 떨쳤다. 그녀는 아마도 프랑스 남서부
아키텐(Aquitaine)의 아쟁에서 순교한 듯 보이나
순교사회는 신빙성이 결여된다고 한다.
성 바오로(Paulus) 대성당의 지하 성당이
이 성녀의 본당이었다는 말도 전해온다.
순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이루어졌고, 벌겋게 달군 놋쇠 위에서
고문을 받다가 거룩하게 순교하였다.
성녀 알베르타 역시 성녀 피데스와 함께 처형되었는데,
이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첫 번째 순교자 중의 일원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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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에우티미오(Euthymius)
축일 3월 11일
성 에우티미우스(또는 에우티미오)는 리디아(Lydia)
지방 사르디스의 주교가 되기 위해 수도원을 떠났다.
그는 성상파괴론자들을 용맹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니케포루스 황제에 의해 추방되었다.
성 에우티미우스는 성상파괴론자가 되면 그의
주교좌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제의를 몇 차례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마침내 매를 맞아 죽을 때까지
29년간 유배지에서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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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에울로지오(Eulogius)
축일 3월 11일
에스파냐의 코르도바가 무어인들의 통치를 받을 때
그곳의 이름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난
성 에울로기우스(또는 에울로지오)는 스페란도
원장으로부터 교육을 받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학덕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특히 성서에 대한
지식이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그는 나바라(Navarra)와
팜플로나(Pamplona)의 많은 수도원을 위하여
규칙서를 저술하였다.
850년 무어인들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할 때
그도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두 그리스도인 여성인 플로라(Flora)와
마리아(Maria)를 위하여 “순교에 대한 권고”를 썼다.
그 두 여성은 처음에 노예로 팔려가도록 결정되었으나
에울로기우스의 권고에 힘입어 며칠 후에 순교하였다.
그런데 에울로기우스 자신과 다른 몇몇 죄수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석방되었다. 그 후에도 박해가
계속되었는데 그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는데
지칠 줄 몰랐다. 그는 톨레도(Toledo)의 대주교로
선출되었으나 착좌하지는 못했다.
그는 이런 와중에서도 이슬람교에서 개종한
레오크리티아(Leocritia)란 여성을 도왔는데,
그 당시의 법으로는 이런 개종자는 즉시 사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그녀를 피신시켜야만 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그녀가 발각되었고 또 그녀를
도와 준 이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이때 에울로기우스도 사형을 받았다.
그는 그 당시의 그리스도교 박해를 기록한 “순교록”을
저술하였고, “호교론”을 남겨 그리스도교 신앙의
합법성과 정통성을 크게 역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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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엔고(Aengus)
축일 3월 11일
성 엔구스(또는 엔고)는 흔히 ‘하느님의 신하’라는
뜻으로 ‘쿨디’(the Culdee)라고 부른다.
이 이름은 켈트어(Celtic language)이다.
그는 얼스터(Ulster)의 왕손으로 어릴 때에
렉스의 클로네그(Clonenagh) 수도원으로 들어가
교육을 받았는데, 학덕과 성덕이 탁월하여 촉망받는
인재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세상을 멀리하기 위하여
그는 수도원에서 7마일쯤 떨어진 디사르테노스
은둔소로 숨었다.
그는 하루에 3백 번씩 무릎을 꿇었고 매일 시편
모두를 외웠다. 그의 명성이 너무나 높아져서
방문객이 계속 밀려오자 그는 또다시 아무도 모르는
은둔소로 숨어야만 하였다. 한번은 쿨바나리 성당에서
천사들의 환시를 보았는데 감미로운 곡조로 시편을
노래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늘 시편을 노래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성 멜루아인(Maelruain)을
계승하여 원장이 되었다. 그는
‘아일랜드의 맑은 태양’이란 칭호를 얻었다.
오엔구스(Oengus)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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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세례자 리기(John Baptist Righi)
축일 3월 11일
이탈리아 안코나(Ancona)의 파브리아노에서 태어난
요한 세례자 리기(Joannes Baptista Righi)는
아주 겸손한 프란치스코회 사제였지만 그의 엄격한
생활은 사막의 교부들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는 흔히 한 주간 동안을 꼬박 음식 없이 지냈고,
주님 공현 대축일부터 부활 대축일까지 단식재를
지켰다. 그러나 주일과 목요일만은 제외하였다.
밤 기도가 끝난 후에도 그는 밤새도록 성당에 남아
혼자 기도하였다. 그는 키가 작고 또 얼굴이
여위었어도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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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헤라클리우스(Heraclius)
성 조시무스(또는 조시모(Zosimus)
축일 3월 11일
성 헤라클리우스(Heraclius)와
성 조시무스(또는 조시모)는 발레리아누스와
갈리에누스 황제 때 카르타고(Carthago)에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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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칸디두스(또는칸디도(Candidus)
성 피페리온(Piperion)
축일 3월 11일
성 칸디두스(또는 칸디도), 성 피페리온(Piperion)을
비롯한 22명의 특별한 아프리카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이 상실되었다. 그들은 아마도 발레리아누스나
갈리에누스 황제 때 카르타고(Carthago) 또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서 순교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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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콘스탄티노(Constantine)
축일 3월 11일
불확실한 전설이지만 그 전설에 따르면
영국 잉글랜드(England) 콘월(Cornwall)의 왕이
프랑스 브르타뉴(Bretagne) 왕의 딸에게
성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또는 콘스탄티노)를
결혼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곧 사망하자 그는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아일랜드 라한(Rahan)의
성 모쿠다(Mochuda) 수도원에서 은수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수도원에서 매우 하찮은 일을 맡아
하다가 신학을 공부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그는 성 콜룸바(Columba)의 휘하에서
스코틀랜드로 선교 여행을 떠났으며 갤러웨이
(Galloway)에서 오랫동안 설교하여 많은 업적을
쌓았다. 그 후 콘스탄티누스는 고반(Govan)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가 연로하여 킨티르
(Kintyre)로 돌아오는 길에 해적들의 습격을 받았는데,
무자비한 해적들에 의해 오른팔이 잘린 후 얼마 뒤
운명하였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첫 순교자로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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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콘스탄티노(Constantine)
축일 3월 11일
성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또는 콘스탄티노)에
대해 알려진 유일한 내용은 로마 순교록 목록에 있는
카르타고의 증거자 성 콘스탄티누스라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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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크리스토포로 마카솔리(Christopher Macassoli)
축일 3월 11일
크리스토포루스 마카솔리(Christophorus Macassoli,
또는 크리스토포로, 크리스토폴)는 어린 나이로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가난을 진실로
사랑하고 마음의 순수성을 잘 보전하였으며,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대한 큰 신뢰심을 지닌
사람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그는 자신의 설교와
표양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그는 밀라노(Milano) 서쪽 비제바노에서 수많은
회원들을 모집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연일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의 권고를 듣고 또 하느님께
기도해 주기를 바랐다. 그는 1485년에 운명하였고,
교황 레오 13세(Leo XIII)는 그의 공경을
허락하였다. 지금도 그의 무덤에서 기도하면
그 기도가 꼭 성취된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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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트로피무스(Trophimus)
성 탈루스(또는 탈로(Thalus)
축일 3월 11일
성 트로피무스(Trophimus)와 성 탈루스(또는 탈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시리아(Syria) 지방의
라오디케아(Laodicea)에서 십자가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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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피르미노(Firminus)
축일 3월 11일
성 피르미누스(또는 피르미노)는 이탈리아
안코나(Ancona) 변경 페르모 부근에 있는
산 사비노 피체노(San Sabino Piceno)의
성 베네딕투스 수도원의 원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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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데레사 마르가리타 레디, 동정(1770년 순교)
축일 : 3월 11일
아레쪼 사람들은 흔히 그녀를
안나 마리아 레디라고 불렀다. 10세 되던 해에
플로렌스로 가서 성 아뽈로니아 공동체의
수녀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후, 계속하여 그곳에
몇년을 살았다. 그녀는 학업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온지 몇 개월 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책에 나오는 그녀의 초자연적인 권고에 이끌리어
가르멜 회원이 되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1765년,
그녀는 플로렌스에 있는 성녀 데레사의 수녀원에
들어갔다. 그녀는 특히 예수 성심 신심에 뛰어났고,
숨은생활이 오히려 남을 위하여 희생하기가 좋은
기회임을 잘 이해했던 뛰어난 성녀였다.
그녀는 주로 공동체 내에서 아픈 동료들을
돌보았는데, 수녀이기보다는 간호원에 더 적합한
사람처럼 보였다고 한다, 23세의 일기로 선종한
그녀는 유해는 현재까지 부패되지 않고 있으며,
플로렌스 주민들의 높은 공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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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로시나(Risina)
축일: 3월 11일
독일 웽린겐(wenglingen) 성당의 주보성녀이다.
교회역사적으로 성녀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으며, 성녀를 동정녀로 추앙하기도 하고,
동정 순교자 혹은 은수자로 추앙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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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라크(John Larke)
축일 : 3월 11일
요한 라크는 토마스 모어경의 전속 사제였다는
말도 있으나, 사실 그는 모어경이 자주 다니던
첼시 성당의 주임사제였고, 순교 직전까지는
성녀 에텔부르가 본당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하여 거짓 맹세를
한적이 없을 정도로 곧은 사람이었다.
그는 1544년에 체포되었는데, 이때 제르민 가디너
신부와 요한 아일랜드란 청년도 함께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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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아가페(안티오키아)
축일: 3월 11일
성녀는 동정녀이며, 순교자이다.
성녀는 비티니아에서 태어나 비티니아에서
데치오(Decio) 로마 황제 시대의 박해가 있을
무렵에 순교를 하였다. 성녀는 253년경에
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