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메산골 가난한 농부의 칠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형제들의 도움을 간신이 법학을 전공할 수가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판검사의 등용문인 고등고시를 위해 절간으로 들어가 심신을 수양하며 최선을 다, 하였으나 실패하고 만다. 재도전하고 싶었으나 “고등고시가 그리 쉽나. 고마 내려오거라.” 조실부모한 나를 대학까지 공부시켜준 형님의 호출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짐을 쌀 수밖에. 하산하는 날, 주지 스님과의 약주 한잔의 추억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작별의 그리움이다.
고시라는 관문이 나에게는 사치스럽고 오를 수 없는 높은 별자리였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살아오는 순간순간 그때 좀 더 버텨볼 걸 하는 후회도 많았다. 오늘의 삶이 타고 난, 운명이라면 나의 선택에 면죄부를 주고 싶지만, 노력으로 개척할 수 있는 것이 운명이라면 나는 산사의 그 길로 다시 돌아가 법조인의 꿈을 실현하고 싶다.
기업체에 취직을 하자 말자 “이제 장가 가야지.” 형님의 성화가 빗발친다. 1973년 가을, 가까운 친척이 중매를 했다. 호기심 반, 장난 반으로 맞선을 보기로 한다. 가을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 단벌 양복을 곱게 다려 입고 마산행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스치는 산야가 온통 가을 색이다. 추수를 앞둔 황금 들판이 바람에 출렁인다. 눈을 감으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여인이 면사포를 쓰고 밝은 미소로 다가온다. 꿈속 같은 상상이 나래를 친다.
생전 처음 해보는 맞선, 순진한 가슴이 심하게 방망이질을 한다. 기침을 크게 한번 하고 미지의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마당 한가운데에 우물이 있고 우물가에 무화과나무가 보인다. 한복으로 곱게 차려입은 그녀가 다소곳한 자세로 대청마루에 섰다. 엷은 미소를 머금고 나를 곁눈질한다. 뛰는 가슴을 안고 큰방으로 들어갔다. 신랑 자격 심사를 심하게 한다. 긴장이 몰려와 가슴을 조이는데 때마침 작은 방에 찻상을 차려 놓았으니 단둘이 얘기를 하라고 한다. 얼씨구나 좋아 웃음이 나왔다. 처녀 하나쯤이야 했는데 이런 낭패가 있나. 정색을 하고 덤빈다. “삶의 최고의 가치가 뭐라 예, 봉급의 절반은 무조건 저축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 예. 우등상은 몇 번이나 받았는데 예.” 수세에 몰려 애꿎은 아리랑 담배만 타들어 간다. ‘요것 봐라, 대시가 제법인데.’라고 생각했지만, 곱상이라 밉지가 않았다. 그녀는 실전 경험이 많은 프로였지만 나는 아마였다. 녹다운, 되지 않은 것은 천만, 다행이었다. 사정없이 얻어터지는 기분, 후반전을 노릴 수밖에.
얼얼한 첫선을 마치고 집을 돌아가는 기분이 야릇하다.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같이 선보러 간 형수님은 그녀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러나 취직한 지 겨우 2개월밖에 안 된 나로서는 결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맞선 한 번으로 끝나는가 싶었는데 어느 날 그녀가 나를 한 번 더 만나고 싶다는 전갈이 왔다. 그래 이제부터는 후반전이야. 기선제압을 해야지 하는 생각에 부산으로 오라고 했다.
함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조금씩 움트는 그녀의 순정이 나를 서서히 포박한다. 그녀는 나를 근면 성실하고 총명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착각은 자유이겠지만 굳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묵시적 동의는 결코, 사기 결혼의 단초가 될 수 없으니까. 조방 앞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화장실을 간다면서 핸드백을 나에게 맡긴다. 그녀의 손끝에서 내게로 쏠리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심하게 느껴진다. 차창 너머로 비치는 그녀의 미소가 내 작은 가슴에 잔잔한 파도를 일으킨다.
그녀의 부모 형제들은 조실부모하고 무일푼인 나와의 결혼을 반대했다. 무소식의 기다림은 고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큰길 모퉁이 약방 총각 청혼이 들어오던 날이었다고 한다. “엄마 나 고마 부산 그 총각한테 시집 갈란다.” 나에게 운명을 맡긴 그녀 이름은 마산댁.
부엌으로 들어가고 부엌으로 나오는 단칸방 신접살이, 비가 오면 빗물에 신발이 둥둥 떠다니는 골방, 공부를 게을리하는 나에게 그녀가 묻는다. “공부를 왜 안 해요?” “책상이 없어서.”라고 했더니 그다음 날 좁은 방에 책상이 들어와 있다. 그래도 공부를 안 했더니 또 묻는다. 왜 책상에 앉지 않느냐고, 당신이 옆에 앉아 있어서.
좁디좁은 방에 책상이 들어와 본들 새 각시를 옆에 앉혀두고 공부가 머리에 들어올 리가 없다. 얼마 후에 그녀는 방 두 칸짜리 집을 구하려 다녔다. 남편의 입신양명을 위한 그녀의 노력은 과히 헌신적이다. 가난뱅이였지만 한 곳을 바라보며 그렇게 저렇게 열심히 살아왔다. 질곡의 순간마다 그녀는 몽매한 나를 바른길로 인도해 주었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고마워요, 마산댁.
그녀는 초계정씨 가문의 둘째 딸이었다. 무일푼인 나에게 시집을 들어 삶이 고달프고 마음이 지칠 때 지나가는 말로 ‘약방 총각한테 시집갔으면 이렇지는 않을 텐데’라고 말한다. 원죄는 나였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반면에 장모님은 말벗 되어 드리고 살가웠던 나를 무척 좋아했다. 결혼 후 20년이 지난 어느 날, 장모님이 마산 댁에게 “야야, 니 약방 그 총각한테 시집 안 가기 참 잘했다. 그 사람 죽었다 카더라.” 하신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다. 이봐요 마산댁, 이거 하나는 알고 넘어갑시다. 그대가 나를 선택한 것이 나에게는 행운이었지만 당신에게는 아찔한 천운이었소, 약방 그 양반 지금 하늘나라에 산대요.
50년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내 곁에 있어 준 그대는 내 인생의 초롱불, 바람이 불어도 눈보라가 몰아쳐도 꺼지지 않는 영원한 나의 동반자, 죽도록 아껴 주리라.
첫댓글 두 양주(兩主)분이 모두 대단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