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의 세계사-21】
홍삼은 거의 대부분 육로로 수출되었기 때문에 개항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고,19세기 중반 이래의 개성 중심의 인삼 재배와 홍삼 제조 수출 시스템은 유지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경제 침탈이 본격화되면서 대한 제국의 蔘業은 극심한 변동을 겪게 된다.
1908년 대한제국은 일본의 강요로 홍삼 전매제를 실시하게 되었고, 1910년 경술국치 이후 1945년 해방 전까지 총독부 전매국과 미쓰이물산이 관리와 판매를 대행했다.
한국전쟁 이후 개성이 북한땅에 편입되면서 개성은 북한만의 인삼 산지로 명성을 유지하게 되었다.
개성 출신 월남민들이 강화 등지에서 인삼 재래를 계속했으나 개성의 명성은 약해졌고, 오히려 분단 이전 주변에 머물렀던 금산, 풍기 등의 지역에서 이후 인삼 생산이 급속히 증가했다.
일본에 자생하는 인삼은 죽절삼으로, 서민들이 약용했지만 고려인삼에 비해 약효가 떨어지는 탓에 상류층에서는 고려인삼을 선호했다.
그 때문에 일본에서는 언제나 고려인삼에 대한 수요가 높았다.
임진왜란 중에도 일본이 조선의 인삼에 눈독을 들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한반도에 들어온 일본군사들은 일본 본토에서 재배할 요령으로 고려인삼을 가져가서 잡아온 조선 포로로 하여금 재배하게 했다.
160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부하들에게 조선의 인삼 씨를 주면서 그들의 영토가 조선의 정동쪽에 위치하여 기후가 비슷하므로 이것을 잘 키우는 것이 일본을 위하는 일이라며 이식하도록 명령했다.
에도 막부 시절에 특히 고려인삼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은의 유출이 심각해지자 제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조선의 인삼을 들여와 자체적으로 고려인삼을 재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막부가 나서서 고려인삼의 재배를 정책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에 일본의 인삼재배과정은 상세한 기록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게 되었다.
막부는 1723년 조선인삼 4뿌리를 심어 재배를 시작해 1725년 처음으로 씨앗을 수확하기에 이른다.
불교 종단인 닛코 日光에서도 1719년 시험재배를 시작했으며, 1733년에 종자를 수확해 일본 각자에 보급했다고 알려진다.
일본은 바로 이 해인 1733년을 ‘인삼 수입 대체 원년’으로 삼았다.
설혜심의 저서 '인삼의 세계사'에서 인용하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