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ES
사무엘 울만의 표현대로라면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다. 신선한 정신 그 자체다. 한결같은 청춘의 향취를 간직한 두 남자가 회상하는 ‘나의 20대’.
오진권 이야기있는외식공간 대표
저는 20대의 대부분을 군대에서 보냈어요. 그곳에서 재능을 발견하고, 인생을 계획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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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기술행정하사관 | 초등학교에 다니던 무렵, 아버지가 영화제작에 투자했다 실패하면서 집안 사정이 매우 어려워졌어요.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전국을 떠돌면서 온갖 험한 일을 다 했어요. 장꾼, 구두닦이, 여관종업원, 술집웨이터 등 안 해본 일이 없어요. 모두 스무 살이 되기 전의 일이죠.
배운 게 있나, 가진 기술이 있나… 별수가 없을 것 같아 일단 군대에 가자, 싶었죠. 무작정 후암동에 있는 병무청으로 갔는데, 처음 지원한 해병대는 너무 경쟁이 심해 떨어졌어요. 그 다음 눈에 띈 것이 육군 기술행정하사관 모집 공고였고, 일주일 만에 논산훈련소로 갈 수 있다길래 지원을 했죠.
그렇게 장기 복무 하사관으로 논산에 가니 또래 훈련병들이 ‘말뚝’이라고 어찌나 놀려대던지(웃음). 물론 저야 평생 군인으로 살 것이라고 마음먹진 않았어요. 기껏해야 일반 사병보다 2년 정도 더 군대에 머물며 여유를 벌어보자는 생각이었죠.
당시 하사관 봉급이 1만3000원이었는데, 매달 집에 1만 원을 부칠 수 있었어요. 원통 최전방에서 근무하다 전투수당을 받으려고 월남전에도 참전하고. 스물두 살에 돌아와 부산 통신기지청에서 1년을 보낸 후 안양 공병단 통신과 선임 하사로 발령이 났지요.
취사반 | 안양 공병단에 근무할 때, 어느 날 새로 부임한 지휘관이 저를 부르는 거예요. 그러더니 사병식당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제게 대뜸 취사반을 맡기더군요. 통신과 선임 하사이다 보니 좀 한가해 보이고, 또 서울내기라고 똘똘하게 여겼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그날로 사병식당을
맡았죠.
그랬더니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사병들 반응이 뜨거운 거예요. 기껏 된장국이나 어묵볶음 같은 반찬을 내놨을 뿐인데, 집밥처럼 차려주는 게 좋았던 모양이에요. 제게 별다른 재주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육군본부에서 내려준 재료대로, 매뉴얼대로 요리한 게 다였죠. 워낙 어려운 시절이었으니 전임자들은 위에서 내려온 재료를 슬쩍 빼내어 다른 곳으로 보내거나 하는 꼼수를 부린 모양인데, 저는 그런 걸 몰랐어요. 늘 정량의 재료로 정성을 다해서 만들었거든요. 10인분이든, 1000인분이든 정성을 다하면 표가 나는 법이죠.
이후 기분이 좋아진 지휘관이 간부식당도 맡아달라고 했어요. 간부식당은 특별한 매뉴얼이 없었죠. 고민 끝에 저는 안양에서 종로2가 학원까지 요리를 배우러 다녔습니다. 예비 주부들 사이에서 설렁탕이며 짬뽕밥 같은 음식의 조리법을 배워 다음 날 점심으로 내놓곤 했는데, 당시 간부들이 출근버스에서 점심 메뉴를 이야깃거리 삼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습니다.
그때 1년간 간부식당을 운영한 것을 계기로 저는 제 소질을 발견하게 된 셈이죠. 식당을 운영하는 일에 흥미를 느끼는 저 자신을요. 식당을 해서 성공하겠다는 생각을 스물네 살에 처음 했습니다.
안양의 오 상사 | 그리고 스물다섯 살에 안양 역전에 네 평짜리 분식점을 냈어요. 이름이 ‘구름다리’였죠. 퇴근 후에 운영을 했는데, 주 메뉴가 라면이었어요. 석유곤로에서 끓여낸 100원짜리 라면. 1년간 열심히 했더니 당시 돈으로 300만 원쯤을 모으게 됐고 이후 칼국수집, 경양식집, 당시 유행이던 스탠드바까지 몇 개의 가게를 연이어 오픈하게 됐어요.
스물일곱 무렵이었는데, 안양의 오 상사’라고 하면 당시 안양 일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다 서른한 살이 되는 해에 육군 상사로 전역을 했죠.
긍정과 열정 |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긍정적 마인드였다고 생각해요. 그 어려운 시절 배를 곯으면서도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30대 초반에는 사업에 실패해 택시운전을 하며 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훌륭한 식당을 만들겠다는 일념을 버린 적은 없었어요.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열정이 제 안에 있었던 것이죠. 육군 하사관으로, 택시운전기사로 살며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려 하기보다는 모험을 택하는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명심해야죠. 인생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 오진권(63) 대표는 1975년 안양의 작은 라면가게를 시작으로 각종 음식점을 운영했다. 1987년에는 신림동에 ‘놀부보쌈’의 전신인 보쌈집을 개업 ‘대박신화’의 주인공으로 우뚝 선다. 놀부보쌈은 1990년대 국내 최고의 프랜차이즈 브랜드로 명성을 떨쳤다.
이후 오 대표는 요식업계에서 ‘마이더스의 손’으로 불리며 승승장구한다. 2003년에는 놀부보쌈 대표이사에서 사임, 새로운 음식 체인을 잇따라 성공시킨다. 현재 ‘마리스꼬’, ‘사월에보리밥’ 등 9개의 음식 체인과 20개의 직영점을 운영하고 있다. 전주대 객원교수로 외식사업에 대한 강의도 한다. 특히 2006년부터는 매일 아침 사당역 부근에서 노숙자들을 위해 ‘밥퍼’ 봉사활동까지 실천하고 있다.
올해 과제는 중국 장춘에 이탤리언 퓨전 레스토랑 ‘크레이지스푼’을 정착시키는 것과 베트남 코토에 레스토랑과 조리아카데미를 오픈하는 것이다.
신상목 우동명가기리야마 대표
저의 20대는 무척 단조로웠어요. 그저 놀았고, 공부했고, 일한 것밖에는 없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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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망 레이서 | 1989년 대학에 입학한 후 약 3년간은 신나게 놀았어요. 어린 마음에 “저놈, 잘나가는 놈”이란 소리가 듣고 싶었던 것 같아요. 나이트클럽이나 스키장을 다니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일이었죠. 그때 몰았던 제 첫 차가 까만색 르망 레이서예요. 지금은 추억의 차가 됐지만 당시 젊은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죠.
그때는 뭐랄까, 남들의 기준에 제 자신을 맞췄던 것 같아요. 남들 눈에 기준을 두고 나를 맞춰가는 일은 결국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것이었어요.
중앙도서관 | 3학년 말부터 다급한 마음이 들었어요. 군대까지 다녀왔는데, 이대로 계속 놀다간 고등 룸펜이 되겠다 싶었죠. 그때부터 고시 준비에 돌입했습니다. 이 시기가 저의 내적 성장기라 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이 근심 걱정이 많다고 할 때는 해야 할 일이 뭔지 알지만 하지 않고 있을 때죠.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때는 결코 마음이 불편하지 않아요. 몸은 불편할지언정 마음만은 편안하죠. 그 시기 제가 그랬어요.
수험생활에 열중한 스물여섯 살, 그 한 해는 대학 중앙도서관에 붙박혀 지냈어요. 아침 7시에서 밤 10시 반까지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공부했죠. 살면서 그 일년만큼 마음이 편했던 적이 없어요. 공부할 양이 엄청났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어요. 제 자신을 완전히 연소했으니까요. 그러다보니 불안감이나 근심이 끼어들 틈이 없었던 것 같아요.
외무고시 | 고시에 합격한 때가 스물일곱 살, 동기들과 비교하면 그저 보통의 나이에 무난하게 합격한 셈이에요. 하지만 우여곡절이 있었죠.
1994년 1차에 합격했는데, 그해 2차는 생각지도 않았어요. 워낙 준비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한 해 더 공부해서 2차는 내년에 합격하자’라고 마음 먹었는데 그 이듬해 2차 시험에서 떨어졌어요. 되짚어보면 그때 2차 시험을 보기까지 걱정이 너무 많았던 거예요.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어요. 공부를 한 것도, 그렇다고 논 것도 아닌 상태라고 할까요. 어딘가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만 들었던 것 같아요.
4개월 정도를 그렇게 방황하다 2차 시험을 치르고 95년 3월 발표가 난 걸 보니 커트라인이 62.5점이었어요. 제 점수가 62점이었는데요. 너무 아쉬웠죠. 그런데 놀라운 건 저와 같은 62점대에 많은 이들이 몰려 있었다는 점이에요.
저만 힘든 것이 아니었어요. 모두 망설이고 방황했던 거예요. 누가 더 동기부여를 했는가, 의지를 가지고 매달렸는가의 차이일 뿐이었죠. 이후 1년간 다른 마음 먹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 결과 96년에 1, 2차 시험에 모두 합격할 수 있었죠. 여기서 저는 알았어요.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임하다 보면 그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요.
물 흐르듯 사는 삶 | 제 이십대는 ‘물 흐르듯 사는 삶’이었어요. 이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진실한 성찰이 없었죠. 고시에 합격해 외교관이 되는 것. 남들이 그것을 안정적인 삶이라고 하니 별 생각 없이 맞춰 살았어요. 정작 그 일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못했어요. 들 눈에 그럴듯해 보이는 나를 살아간 것이죠. 그건 껍데기에 불과한 것인데요.
지금도 ‘물 흐르듯 살자’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이제는 달라졌죠. 판단의 주체가 분명 제 안에 있으니까요.
☞ 신상목(44) 대표는 1996년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교부 안보정책과와 경제기구과에서 근무하다 2000년 와세다대학교 아시아태평양대학원에서 연수를 받았다. 이후 2006년부터 3년 동안 동경에서 주일 한국대사관 영사과장으로 근무했고 귀국 후에는 G20 서울 정상회의 행사기획과장,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준비기획단 의전과장으로 활약했다. 그런 그는 지난해 8월 돌연 사표를 던지고 우동가게를 오픈한다. 일본 생활 중 맛본 우동에 매료된 때문이다. 물론 맛만이 전부는 아니다. 일본의 한 우동가게에서 그는 ‘머무름의 미학’을 알게 됐다. 마치 오랜 시간 한자리에서 나를 기다려준 것 같은 오래된 가게의 따스한 낌에 반한 그는 지난해 9월 역삼동에 ‘우동명가기리야마’를 오픈하며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따뜻한 우동가게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실행해가고 있다
첫댓글 최선을 다한 결과 성공을 하신거지요 .군인정신이 많은 도움이 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많은 노력의 결과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