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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6장 6-10절. 성령이 아시아 전도를 막음
6절.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hey passed through the Phrygian and Galatian region, having been forbidden by the Holy Spirit to speak the word in Asia;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Διῆλθον δὲ τὴν Φρυγίαν καὶ Γαλατικὴν χώραν,
they passed through then the Phrygian and the Galatian region,
직역하면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역을 통과해 갔다’는 뜻입니다.
‘다녀가’(Διῆλθον)는 부정과거로서(they passed through) 과거에 통과해 간 틀림없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κωλυθέντες ὑπὸ τοῦ Ἁγίου Πνεύματος λαλῆσαι τὸν λόγον ἐν τῇ Ἀσίᾳ·
having been forbidden by the Holy Spirit to speak the word in the Asia
직역하면 아시아에서 말씀을 말하는 것이 성령에 의해서 금지되어서‘라는 뜻인데, 한글성경은 수동태를 능동태로 바꾸어서 번역한 것입니다.
‘전하지’(λαλῆσ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speak) 단호하게 말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1. 성령님께서 아시아 전도를 못 하게 막으셨습니다.
여기서 아시아란 요즘의 아시아가 아니고, 로마 시대에 아시아 지방(Province) 즉 요즘의 터키 지방을 가리킵니다.
성령님께서 아시아 전도를 막으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네, 바울 일행이 아시아에서 전도를 해도 도무지 열매가 없고, 성령님께서 역사해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도도 그렇고, 목회도 성령님께서 역사해주시지 않으면, 설교도 할 수 없고, 심방도 안 되고, 기도조차도 안 됩니다.
그럴 때는 성령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2. 만일 바울의 복음 전도를 사람이 막았다면, 바울은 죽더라도 전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막으시면,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주의 일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 전도를 하는데, 전도가 아주 잘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사마리아 전도를 그만두고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빌립이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했을 때, 에디오피아 장관을 전도할 수 있었습니다.
3. 바울 당시에 아시아 전도가 되지 않았으나, 요즘에 터키 지역 전도의 문이 열리고 있습니다.
4.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을 지나갔습니다.
여기 갈라디아는 1차 선교여행 때 교회를 설립했던 갈라디아와 다릅니다.
즉 1차 선교여행 때 갈라디아는 소위 남갈라디아 지방이고, 6절의 갈라디아는 소위 북갈라디아 지방입니다.
아무튼 바울 일행은 계속 북쪽으로 선교 여행을 갔습니다.
7절.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after they came to Mysia, they were trying to go into Bithynia, and the Spirit of Jesus did not permit them;
무시아 앞에 이르러
ἐλθόντες δὲ κατὰ τὴν Μυσίαν
having come then down to the Mysia
직역하면 ‘무시아까지 밑으로 내려가’란 뜻입니다.
‘이르러’(ἐλθό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come) 확실히 이른 과거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ἐπείραζον εἰς τὴν Βιθυνίαν πορευθῆναι,
they were attempting into the Bithynia to go
직역하면 ‘비두니아로 가는 것을 그들이 계속 시도했다’는 뜻입니다.
‘가고자’(πορευθῆν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go) 과거에 확실히 가고자 한 것을 가리킵니다.
‘애쓰되’(ἐπείραζον)는 미완료과거로서(they were attempting) 계속해서 시도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가리키고, 원형(πειράζω)은 ‘시험하다, 시도하다, 노력하다’(make proof of, attempt, try)는 뜻입니다.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καὶ οὐκ εἴασεν αὐτοὺς τὸ Πνεῦμα Ἰησοῦ·
and not did allow them the Spirit of Jesus
직역하면 ‘예수의 영이 그들에게 허락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허락하지 않았다’에서 동사(εἴασεν)는 부정과거로서(did allow) 단연코 허락하지 않은 과거의 사실을 가리키고, 원형(ἐάω)은 ‘그대로 두다, 허락하다’(let alone, allow, permit)는 뜻입니다.
1.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를 지나서 더욱 북쪽인 무시아 앞까지 갔습니다.
이 무시아의 더욱 북쪽으로는 커다란 흑해 바다가 있기 때문에 동쪽으로 가든지 서쪽으로 가든지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이 무시아에서 동쪽 방향으로 비두니아가 있습니다.
이 동쪽의 비두니아로 계속 가면, 인도와 중국과 한국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무시아에서 서쪽으로 가면, 에게 해협을 건너서 그리스와 이탈리아와 독일과 프랑스와 스페인 등 유럽으로 가게 됩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의 영이 동쪽 비두니아 전도를 막으셨습니다.
원래 바울 일행은 에게 해협 바다를 건너서 서양으로 가는 것보다 육지로 동양으로 가기를 애썼습니다.
그러나 동쪽 아시아 전도를 예수님의 영이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3.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 하시니라.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앞 절에서 성령님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여기 7절에서는 성령님을 ‘예수의 영’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 표현은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사상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즉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 문제 때문에 니케야 회의라는 세계 교회 회의가 3백 년 동안이나 논란과 싸움을 했고, 세계 교회가 둘로 나누어지기까지 했습니다.
바로 서방교회와 동방교회가 나누어진 것입니다.
서방교회란 로마교회(천주교와 개신교)이고, 동방교회란 소위 희랍정교회(Greek Orthodox Church)를 가리킵니다.
이 로마교회는 후에 천주교와 개신교로 나누어졌고, 동방교회란 과거에 러시아에서 번성했던 교회를 가리킵니다.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가면 아이들이 대머리 교회라는 이 희랍정교회가 있습니다.
이 희랍정교회는 성직자가 까만 성복을 입고 다닙니다.
그런데 로마교회는 희랍정교회를 잘못된 성령론 때문에 이단으로 정죄했습니다.
즉 로마교회는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영이심을 인정한 것이고, 희랍정교회는 성령님께서 예수님과는 다른 하나님의 영이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소위 ‘필리오케’ 논쟁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님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뿐만 아니라 아들이신 예수님에게서도 나오시는 영이시라는 교리입니다.
좀 어렵더라도 다시 설명하자면, 성령님은 예수님과 일체가 되신 영이시지, 예수님과는 별도의 영이 아니시라는 뜻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건전한 성령 운동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을 믿고 섬기게 하는 성령운동입니다.
그러나 불건전한 성령 운동은 과거에 무당처럼 예수 복음 전도와는 무관하게, 인간의 운명을 점치고, 무당처럼 병 고치고, 이상한 기적이나 행하려고 하는 불건전한 성령 운동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성령님을 예수의 영이라고 한 것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불건전한 성령 운동가들이나 심지어 이방종교가들도 불건전한 영적 운동을 하면서 하나님의 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불건전한 영적 운동가들이 예수님의 영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건전한 성령 운동과 불건전한 성령운동을 이것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성령님께서 오시면, 예수님을 증거하실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요 15:26)
그리고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라, 성도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요 16:13)
8절.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passing by Mysia, they came down to Troas.
무시아를 지나
παρελθόντες δὲ τὴν Μυσίαν,
having passed by then the Mysia,
‘지나’(παρελθό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passed by) 과거에 확실히 지나간 사실을 가리킵니다.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κατέβησαν εἰς Τρῳάδα.
they came down to Troas
직역하면 ‘그들이 드로아로 내려갔다’는 뜻입니다.
‘내려갔는데’(κατέβησαν)는 부정과거로서(they came down) 과거에 확실히 내려간 사실을 가리킵니다.
1. 바울 일행이 동쪽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으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드로아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드로아는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큰 기대를 가지고 전도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드로아는 조그마한 항구 도시로서 큰 교회를 설립할 만한 곳이 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때 바울을 통해서 드로아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행 20:5-12)
그래서 바울은 드로아에서 밤에 깊은 기도를 했습니다.
9절.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 vision appeared to Paul in the night: a man of Macedonia was standing and appealing to him, and saying, "Come over to Macedonia and help us."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καὶ ὅραμα διὰ νυκτὸς τῷ Παύλῳ ὤφθη,
and vision during night to Paul was appeared
‘보이니’(ὤφθη)는 부정과거 수동태로서(was appeared) 과거에 확실히 보인 사실을 가리킵니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ἀνὴρ Μακεδών τις ἦν ἑστὼς καὶ παρακαλῶν αὐτὸν καὶ λέγων
man of Macedonia certain was being having stood and beseeching him and saying,
직역하면 ‘어떤 마게도냐 사람이 서 있으면서 그에게 청하여 말하기를’이란 뜻입니다.
‘서서’(ἦν ἑστὼς)는 두 동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의 것은 미완료과거로서(was being) 과거에 계속 있는 상태를 가리키고, 뒤의 동사는 완료분사로서(having stood) 과거부터 서 있는 모습을 가리켜서, 이 두 동사를 합하면 ‘과거부터 계속 서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청하여’(παρακαλῶν)는 현재분사로서(beseeching) 계속 부르면서 간청하는 모습을 가리키는데, 원형(παρακαλέω)은 ‘부르다, 초대하다, 간청하다, 권고하다, 격려하다’( call to or for, invite, beseech, beg, exhort, admonish, comfort, encourage, console)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하기를’(λέγων)은 현재분사로서(saying) 계속 말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Διαβὰς εἰς Μακεδονίαν, βοήθησον ἡμῖν.
Having passed over into Macedonia, help us
‘건너와서’(Διαβὰ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passed over) 확실히 건너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도우라’(βοήθησον)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서(help) 단호하고 확실하게 도우라는 뜻입니다.
1. 이 밤이란 시간적인 밤일 뿐만 아니라, 바울의 일생에서 깊은 밤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믿고 사도들과 교제하고 싶었으나, 예루살렘에 갔어도 사도들이 만나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향인 길리기아 다소에 가서 13년을 썩고 있었는데, 그 때 바나바가 찾아와서 안디옥 교회에서 함께 부교역자로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성령님이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해주셨는데, 마가 요한 문제로 바나바와 심히 싸우고 헤어졌으니, 이것은 성령님의 말씀을 어긴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분명히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동역하도록 파송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싸워서 헤어지니, 성령님이 바울을 선교사로 쓰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1차 선교지를 떠나 지금까지 몇 달 동안 북쪽으로 선교 여행을 했으나 한 번도 선교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전하지 못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썼지만,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선교 여행이 실패하고, 가는 곳마다 길이 열리지 않자, 인생의 밤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정말 이 때 바울은 깜깜한 인생의 밤이요,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절망적인 밤을 맞이하였습니다.
아마 이때 성질 급한 바울은 바다에 빠져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회개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바나바와 싸우고 성령님의 뜻을 거스리고 바나바를 버리고 단독으로 선교여 행 온 것을 많이 후회했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휴대폰이 있었다면, 바나바에게 전화해서 용서를 빌고 다시 함께 선교 여행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울이 밤에 기도하고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바울을 용서하시고, 갈 길을 환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2.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바울에게 ‘이리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의 어두운 밤을 만났던 바울이 회개하고 기도할 때, 장래에 대한 환상과 비전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장래에 대한 꿈과 환상과 희망이 있어야, 살아갈 의욕과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는 일마다 안 되고, 길이 다 막히면, 살아갈 용기와 희망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동쪽의 육로로 가야 여러 가지 면에서 선교가 잘 될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동쪽 선교를 막고 인간적으로는 어려운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서 선교하는 것을 택하여 가게 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볼 때, 동쪽 비두니아는 육로로 연결되어 있고, 과거에 구약시대부터 메소포타미아 지역이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선교하기가 좋다고 생각되어집니다.
그리고 그리스 지역은 지리적으로도 바다를 건너야 하는 어려움이 있고, 아테네와 같이 문화적으로도 구약시대와 상관이 없는 곳이라서 선교하기가 어렵다고 생각되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헬라반도에서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그리고 고린도 교회를 바라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멀리 로마교회를 바라보신 것이고, 로마를 통해서 전구라파가 기독교 국가가 되는 것을 바라보신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에 바울로서는 상상도 못 한 것입니다.
10절.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When he had seen the vision, immediately we sought to go into Macedonia, concluding that God had called us to preach the gospel to them.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ὡς δὲ τὸ ὅραμα εἶδεν,
when now the vision he saw
직역하면 ‘그 환상을 그가 보았을 때’란 뜻입니다.
‘보았을 때’에서 동사(εἶδεν)는 부정과거로서(he saw) 과거에 본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εὐθέως ἐζητήσαμεν ἐξελθεῖν εἰς Μακεδονίαν,
immediately we sought to go forth into Macedonia,
‘떠나기를’(ἐξελθεῖν)은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go forth) 확실히 떠나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힘쓰니’(ἐζητήσαμεν)는 부정과거로서(we sought) 과거에 확실히 힘쓴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συμβιβάζοντες ὅτι προσκέκληται ἡμᾶς ὁ Θεὸς εὐαγγελίσασθαι αὐτούς.
concluding that had called us the God to preach the gospel to them.
직역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으로 인정하면서’란 뜻입니다.
‘복음을 전하라고’(εὐαγγελίσασθ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preach the gospel) 단호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부르신 줄로’(προσκέκληται)는 완료형으로서(had called) 이미 과거에 부르신 것을 가리킵니다.
‘인정함이러라’(συμβιβάζοντες)는 현재분사로서(concluding) 현재 인정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키며, 원형(συμβιβάζω)은 ‘함께’(σύν)라는 접두어와 ‘승선하다’(ἐμβιβάζω)란 동사의 합성어로서, ‘함께 생각하다, 결론에 이르다’(put together in reasoning, conclude, come to the conclusion)는 뜻입니다.
1. 바울이 환상을 보았을 때
사도행전 10장에는 베드로가 환상을 보았고, 사도행전 16장에서는 바울이 환상을 보았습니다.
어떤 때 환상을 보았습니까?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 집에 안 가고 싶어 했을 때, 하나님이 환상을 보여주시고 가게 하셨습니다.
바울도 동쪽으로 선교여행을 하고 싶었고, 바다 건너 서쪽으로는 가고 싶어 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이 환상을 보여주시고, 가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환상은 우둔한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때, 하도 답답하니까 하나님이 환상을 보여주셔서라도 인간의 의지를 꺾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상 본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인도와 성경 말씀으로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2.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여기에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언뜻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우리>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여기 ‘우리’라는 말은 바로 사도행전을 기록한 저자가 드로아에서 바울 일행과 합세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드로아에서 바울 일행과 선교 여행에 합세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누가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 잘 아시는 대로 누가는 의사입니다. (골4:14)
그리고 누가는 고향이 빌립보이고, 드로아에서 의사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누가는 디도의 형입니다. 고후 8:18 주석 참조)
그런데 바울이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해서 선교 사역을 못 하고 있었지만, 환상을 본 직후에 드로아에서 바울은 대단히 중요한 의사 누가를 만난 것입니다.
누가는 고향이 빌립보이기 때문에, 드로아 항구에서 빌립보에 가는 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즉 드로아에서 사모드라게 섬으로, 사모드라게 섬에서 네압볼리 항구에서 육지에 내려서, 네압볼리 항구에서 빌립보로 가는 길을 누가가 바울 일행에게 안내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가의 도움으로 곧바로 빌립보로 직행할 수 있었습니다.
3. 누가와 디도는 바울에게 있어서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분쟁에 빠졌을 때, 디모데는 에베소에서 바울의 지시로 고린도전서를 가지고 고린도 교회에 갔습니다(고전 16:10).
그러나 디모데는 고린도 교회의 분쟁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울면서 에베소의 바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에베소에서 고린도로 배 타고 직접 소위 ‘중간 방문’을 합니다.
그러나 바울도 디모데처럼 고린도교회의 반 바울파 사람들에게 수모를 당하고 에베소로 돌아오고 맙니다. (고후 13:1. 세 번째 가면).
그 후에 바울은 눈물로 혹독한 편지를 고린도 교회에 써서 디도 편으로 보냅니다. ( 고후 2:1-4).
그런데 이 디도는 성격이 원만하고 인간관계가 노련해서, 고린도 교회의 분쟁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디도를 고린도에 파송해놓고, 드로아에서 디도를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디도가 드로아에 오지 않자 바울은 디도도 고린도 교회 분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이제 고린도 교회는 포기해야 할 상황에 놓인 줄 알고, 마음이 편치 않아서 드로아 전도의 문이 활짝 열렸으나, 드로아 전도를 그만두고 마게도냐 빌립보로 갔습니다. (고후 2:12-13)
그런데 다행히 바울은 이 빌립보에서 디도를 만나서 고린도교회의 분쟁 문제가 잘 타결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일부 게바파는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빌립보에서 써서 디도와 그 형제인 누가를 통해서 고린도교회에 보냅니다(고후 8:18).
이처럼 바울이 디도와 누가를 고린도 교회에 보낸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은 먼저 그동안 분쟁 문제로 시달렸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자 했습니다(고후 1장).
둘째로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을 고린도 교회가 약속한 대로 해줄 것을 당부하기 위해서 디도와 누가를 파송했습니다. (고후 7-9장)
뿐만 아니라 바울은 셋째로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반대하고 있는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과 추종자들(아마 일부 게바파)을 이번에 가면 반드시 처벌하겠다고 경고하기 위해서 이 고린도후서를 썼습니다. (고후 13장)
이처럼 누가는 빌립보 전도시에 빌립보에 있다가(행 16:16절 ‘우리’), 바울이 떠난 후에도 빌립보에 남아서 자기 형제 디도를 전도했습니다.
즉 바울이 빌립보를 떠나서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 전도를 할 때, 누가는 빌립보에 남아서 디도를 전도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고린도에서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행 18장 22절), 3차 선교 여행을 하면서 에베소에서 3년간 전도할 때도 누가는 빌립보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디도는 뒤늦게 믿었지만, 인간관계가 훌륭해서 바울이 에베소 전도를 하고 있을 때, 앞에서 말한 대로 고린도 교회의 분쟁 문제를 원만하게 잘 해결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빌립보에서 바울을 만나 고린도후서를 가지고, 자기 형제 누가와 함께 고린도 교회로 갔습니다.
그 후에 바울이 에베소에서 빌립보로 와서 고린도후서를 써 보낸 후, 다시 고린도에 갔다가 다시 빌립보로 돌아올 때까지 누가는 바울과 함께 동행했을 것입니다.
그 후에 바울은 많은 구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각 지역의 대표자들과 동행을 했습니다.
그 각 지역 대표자들의 이름이 사도행전 20장 4절에 나옵니다.
4. ‘우리’라는 말은 사도행전 16장 16절에 빌립보 전도시에 나오고, 17장 1절에는 그들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다가 20장 5-6절에서는 ‘그들’과 ‘우리’가 교차해서 나옵니다.
(참고로 16:11절에는 이틀이라고 했는데, 20:6에는 닷새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계절풍 때문에 정확한 말씀임)
이것은 누가가 고향인 빌립보에 머물다가 바울이 2차와 3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다시 빌립보에 왔을 때, 누가가 다시 바울과 합세한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누가는 바울의 주치의로서 바울이 로마 감옥에 2차로 투옥되었을 때도 같이 있었습니다. (딤후 4:11)
그리고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목적은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을 변호사인 데오빌로 각하에게 기독교와 바울의 행적을 알리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5. 바울 일행은 환상을 본 후에 곧 바로 마게도냐로 떠났습니다.
얼마나 그 동안 성령님께서 막으심으로 선교 여행에 실패를 거듭했으면, 하나님이 환상을 보여주시자 곧바로 마게도냐로 떠났다고 했습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배 타고 바다 건너가는 것이 싫었겠지만, 하나님이 환상을 보여주시니까 희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즉시 행동한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사람을 살리는 것은 희망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희망이 있으면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견디고 살아납니다.
그러나 희망이 없으면 좋은 환경 속에서도 죽습니다.
이 때 바울을 살린 것은 하나님이 주신 환상이요 희망이었던 것입니다.
6. 바울은 환상을 본 후에 마게도냐로 가기를 힘썼습니다.
하나님이 환상과 희망을 주셨어도 인간이 노력하고 힘써야 합니다.
환상을 보았다고 해서 가만 앉아서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7.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환상을 보고 해석을 잘해야 합니다.
환상 속에서는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 일행은 이것을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 전하라고 부르신다는 것’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마게도냐 사람을 돕는 것이 돈을 주는 것이나 병을 고쳐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인 줄로 인정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복음 전도는 참으로 사람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물질 구제와 치료도 중요하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바울 일행처럼 인생길이 막혔을 때, 기도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환상과 희망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모든 막힌 담이 헐리고 새로운 성공의 길이 활짝 열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