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꿈같은 하루였다. 일찍 일어나서 준비해 남편과 나는 산사로 향했다. 함께 다니던 절이었는데 어머님께 말씀도 못 드렸다. 그냥 시장에 다녀온다며 슬며시 나섰지만 오늘이 초파일인 것을 아마도 당신은 아실 거다. 20년 전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시아버지도 절에 모셨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기독교 신자인 막내동서를 따라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한지붕 아래 두 개의 종교가 평행선을 유지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남편과 내가 한발 양보해 지금까지 지내고 있다.
산사로 가는 초입부터 우거진 녹음 터널이 우리를 반겼다. 막혀있던 숨통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남편과 나는 약속한 대로 법당에 절을 올리지 않았다. 그냥 좋은 날 바람도 쏘일 겸 초파일 하루만 절에 나오기로 했다. 마음속으로 합장하면서 우리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빌었다. 기와 시주가 있어서 딸 아이를 생각하며 합격을 기원하는 글도 남겼다. 단돈 만 원이었지만 내게는 간절한 염원이다. 갖은 나물을 넣은 비빔밥으로 아침을 때우고 다음 절로 향했다.
시내에 있는 작은 절이었지만 많은 사람이 북적였다. 평소에 안면이 있던 지인들도 만났다. 선거가 끝나고서는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시의원도 만났다. 둘러보고 나오는데 가시냐며 떡과 바나나를 주었다. 역시 좋은 날이라서인지 인심이 후덕했다. 초파일에 세 군데 절을 밟으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친김에 예전부터 다니던 곳으로 향했다. 가까운 곳에 있던 절이었는데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순천으로 이전했다. 소리꾼 지창수가 와서 공연한다는 걸 현수막에서 본 터였다. 그곳은 해마다 사월 초파일이 되면 각설이와 소리꾼 그리고 국악팀과 무용단원을 초청했다. 이번에는 남원 춘향제에 주무대를 차려놓은 지창수씨가 혼자만 잠깐나와 무대를 꾸민다고 했다.
잘 차려진 점심을 먹고 나니 공연이 시작되었다. 작은 체구지만 품어져 나오는 카리스마가 대단했다. 시작과 동시에 "정말 잘한다. 대단해." 여기저기서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레와 같은 박수도 터져 나왔다. 그는 부처님 오신 날 공덕을 쌓으려고 선한 마음으로 절을 찾는다고 말했다. 불자의 마음을 훔치기에 족했다. 나도 남편 옆에서 과일과 떡을 먹으면서 박수도 치고 노래도 따라 부르며 신이 났다. 특히 상여 매는 소리는 어릴 적 꽃상여 타고 가신 할머니가 생각나서 뭉클했다. 진정한 소리꾼이라는 소문에 걸맞게 산사가 들썩였다.
이번에는 내 18번 '여자의 일생'을 구슬프게 부른다. 원곡자 가수 못지않게 잘 불렀다.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따라 불렀다.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곁눈질로 잘한다며 장단을 맞췄다. 이렇게 잘 부르는데 왜 평소에는 그러지 못할까. 자신 있는 마음과 반대로 내 목소리는 기어들어 가기 일쑤다.
일주일 전 조카 결혼식이 있었다. 경기도 안성까지 먼 거리라서 대형버스를 대절했다. 3형제 중에 조카로는 첫 혼사라 모두들 기쁜 마음으로 참석했다. 올라갈 때는 조용하고, 차분하게 갔지만 예식이 끝나고 내려올 때는 반대였다. 오전에 식이 끝나버려서 일찍 출발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혼주도 동승했다. 신부 엄마인 동서가 마이크를 잡고 흥을 돋우었다. 제일 먼저 남편이 노래를 불렀다. 제법 잘 부른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하객들이 환호성과 함께 박수쳤다. 한 사람씩 돌아가는데 딱히 잘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나도 한 곡은 불러야 했기에 다른 사람의 차례일 때 따라 부르며 목을 풀었다.
그런데 벌써 남편은 세 곡째 부르고 있다. 제법이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예전에 비해 실력이 높아진 데는 이유가 있다. 드럼을 배우다 보니 박자감이 생겨선지 하는 노래마다 수준급이다. 초급반이 배우는 '이재성의 촛불잔치'에서 이제는 중급 '김흥국의 호랑나비'를 드럼으로 연습 중이다. ‘돈을 쓰니 역시 다르구나’ 생각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목을 풀어 놓아 잘 부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마이크를 잡으니 소심해진다. 쭉쭉 뻗어내야 하는 소리가 자꾸만 기어들어 간다. 그래도 자신있는 부분에는 큰소리로 높여 불렀다. 마이크 음량 조절이 잘못되었나 싶어 살펴보았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 내 마음대로 소리가 나오지 않으니 한숨만 나왔다. 내 뒤를 이어 시누이 남편과 막내 시동생이 멋지게 부른다. 한 살이라도 젊으니까 낫구나 싶어 힘차게 박수쳤다. 다음에는 연습을 단단히 해서 못 다 부른 노래를 멋지게 부르리라 다짐했다.
공연이 끝날 무렵 탁자 중앙에 앉은 나를 소리꾼이 불렀다. “중앙에 있는 어머니, 노래 한 곡 부르시오.” 다른 사람이겠거니 생각하고 딴청을 피우다 나라는 걸 알고는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알고 보니 노래를 열심히 따라 불러서 시킨 거란다. 함께 나가자며 남편한테 도움을 청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슬며시 따라나서는 남편과 함께 '사랑의 이름표'를 멋지게 불러 큰 박수를 받았다. 박자에 자신이 있는 남편 덕분에 지난번에 못 다 부른 노래를 멋지게 완성시켰다.
첫댓글 와, 춘향제 무대에서 소리꾼에게 선택되어 노래 한 곡을 불렀다니 실력이 좋은가 봅니다.
ㅎ
춘향제에 주 무대를 설치 해놓은 소리꾼 지창수씨가 제가 들른 절에 잠깐 와서 공연했어요. 그래도 영광이지요. 어떨떨결에 남편이 부르는 박자에 덩달아 악 좀 써 보았답니다.
선생님!
18번 바꾸세요.
그 노래 너무 청승맞아요.
밝고 신나는 노래를 부르면 그리 살아진답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듣고 싶습니다.
네.
그래서 될 수 있음 부르지 않습니다.
그날 소리꾼이 너무 간드리지게 불러 순간 뭉클했어요. 늘 힘을 주셔서감사드리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저도 고맙습니다.
선생님 글 단숨에 읽었네요. 묘한 마력이 있어요.
남편과 함께 완창하시고 멋지시네요. 사랑의 이름표 다음에 들려주세요.
ㅎ
기회가 될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남편없이는 자신이 없습니다.
와, 많은 사람이 모였을 텐데 거기서 소리꾼의 눈에 들었다니, 대단한 실력인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그냥 제가 그 소리꾼이 노래를 부를때 열심히 따라 불렀더니 콕 찍혔어요. 그런데 남편이 다 부른거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