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시아스 / 이남옥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재 모임을 했다. 하동, 김해, 익산에 사는 사람들로 일곱 명 중에 정원을 가꾸는 사람이 셋이나 있어 각 지역에 있는 정원을 찾아 구경한다. 이번에는 하동에 있는 <몰랑뜰>에서 만났다. 그들을 보러 집을 나설 때마다 새로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무척 설렌다. 순례길에서 겪었던 일들과 그곳에서 보았던 풍경, 식물 이야기 등으로 지나간 추억을 되새김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시이거나 밀밭 길, 아니면 포도밭이나 산길에서 느꼈던 생각이나 감정까지도 다시 살아난다. 점점 잊혀가는 기억도 떠오른다.
역시나 새벽에 숙소를 나섰다. 다음 가는 곳인 나헤라의 정보를 아는 게 없어서 잠잘 곳을 예약하지 못해 무거운 배낭을 그대로 메고 출발했다. 동키 서비스로 짐을 부쳐버리면 좋으련만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고 29km를 걸어야 하는 여정이라 마음이 무거웠다. 남보다 일찍 서둘러도 느린 걸음으로는 해가 떨어져서야 도착할 것 같아 걱정되었다. 전날 묵었던 로그로뇨의 골목을 빠져나가 호수를 지나니 장엄하게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장관이다. 다행히 춥지도 덥지도 않은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딱 좋은 날씨였다. 어제는 그늘도 없고 자갈로 뒤덮인 삭막한 포도밭 구간을 걷느라 힘들었다. 그때 명상센터를 운영한다는 내 또래 복희씨가 말했었다. '좋은 기분을 유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부엔 까미노!'
가는 길에는 로즈마리가 지천에 피어 있었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향이 폐 깊숙이 스며든다. 허브를 좋아해서 순례길을 걷기로 마음먹은 자체만으로도 잘했다고 생각하니 힘이 절로 났다. 이대로라면 어떤 숙소에 가서 자더라도 괜찮겠다 싶었다. 도중에 부킹닷컴에 올라와 있는 아무 곳에나 빈 침대를 예약했다. 한순간에 결정하고 좋든 싫든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인생이려니 싶었다. 오래된 마을인 나바레떼를 그냥 지나치려니 아쉬웠다. 집집마다 뭔가 이야기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느낌이었다. 무늬가 예쁜 보도블록을 터벅터벅 걷다 보니 또다시 포도밭이 나타났고. 몇 개의 구릉을 지나니 두 갈래 길이 나온다. 뭔가 글씨가 새겨져 있는 오래된 십자가 아래서 잠시 고민하며 서 있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쭉 뻗은 길로 가버린다. 우리는 조금 더 돌아가는 벤투사 마을로 향했다. 그것은 잘한 일이었다. 바에서 지친 몸을 쉬며 늦은 점심을 먹는데 주인의 미소가 얼마나 멋지던지 한순간에 피곤이 녹는 것 같았다. 입꼬리를 조금만 올려도 기분을 좋게 해주는 그런 것은 배워야 하리라. 나도 그러기로 마음먹었다.
드디어 나헤라에 도착했다. 엄청 큰 마을이었다. 조금이라도 걸음 수를 줄이려고 마을 입구에 있는 숙소로 정한 <엘 페레그리노>로 들어갔다.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어서 배낭을 내려놓고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알베르게 주인은 무척 활달해 보였지만 다혈질이었다. 예약했노라고 말하는데 갑자기 장부를 덮고 손사래를 치며 'No!'라고 외쳐 깜짝 놀랐다. 더러 인종 차별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우리도 그 꼴을 당하나 싶어 화가 났다. 나쁜 사람 같으니라며 뒤돌아서려는데 젊은 사람이 와서 침대를 배정해 주었다. 알고 보니 식사 중이므로 기다려달라는 거였었다. 그래도 그렇지 내쫓기는 줄 알았던 우리는 너무나 황당했다. 그런 속내를 읽었는지 그 아저씨는 우리를 볼 때마다 미소 지으며 친절하게 굴었다. 덕분에 포도주 한 병과 음식 재료를 공짜로 받았다. 마음에 담아둘 게 뭐 있나? 우리도 환하게 웃으며 “그라시아스!”라고 답해 주었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 곳에서는 미소와 감사 인사만큼 좋은 게 있으랴.
구멍이 뽕뽕 뚫린 붉은 암석 바위가 멀리서도 보이는 나헤라의 풍경은 신비하다. 오래된 역사와 문화로 볼거리도 많다. 하지만 그림의 떡이다. 눈으로 보는 게 전부라 궁금한 게 많았다. 10세기와 11세기를 거치면서 나바라 왕국의 본거지 역할을 했고 그 이후에는 이슬람교도가 팜플로나를 무너뜨렸던 거점이 되기도 했다니 오래된 골목은 그런 알 수 없는 신비를 가득 품고 있는 듯했다. 나헤리야 강을 사이에 두고 8개의 아치가 있는 산후안데오르떼가 다리를 지나 순례길을 이어간다. 아름다운 기사들의 회랑과 신비한 왕가의 영묘를 볼 수 있다는 산따마리아라레알 수도원도 들르지 못했다.
좋다고 연장할 수도 싫다고 줄일 수도 없는 시간을 통과하며 하루를 그렇게 보낸다. 무사히 지나간 날을 감사하며.
첫댓글 그 사람들과 재모임을 이어가면서 있었던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군요.
그래도 순례길 이야기 또 재밌게 읽었습니다.
언제쯤 가 보나, 또 꿈을 꾸면서 말이지요. 하하!
순례길, 걸어 보고 싶다는 생각한 적 없었는데 요즘 선생님 글 읽으면서 저도 가 보고 싶어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우와. 순례길에서 만나신 분들과 지속적으로 만남을 이어가시는군요. 동키 서비스는 진짜 나귀가 짐을 싣고 가는지 궁금합니다.
다시 순례길 이야기 읽으니 재밌네요.
언제쯤이나 갈 수 있을까요? 그 길을 걷고 싶어요.
글에 깊이가 있어요. 철학자 같아요. 자연과 배경 묘사를 어쩜 이렇게 멋지게 표현하시는지 여러번 읽어봅니다.
아직도 쓸거리가 남아 있나 봅니다. 남의 글을 읽으며 같이 순례자가 됩니다.
저는 댓글도 못 달아 드리는데
읽어 주시고 댓글로 힘 주시는 도반님들,
고맙습니다.
순례길, 지금은 언감생신 꿈도 꿀수 없지만 언젠가는 꼭 따나보고 싶습니다.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산티아고는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힘을 선물해 주는 것 같네요.
선생님. 잘 읽었습니다.
표현이 단아한 느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