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도 약국에도 없는 처방 / 한정숙
어릴 적에 나는 자주 체했다. 여자를 귀히 여기기 않았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두 딸에게 깐깐하셨다. 여자는 밖에 나가면 안 된다며 외출은 허락을 맡도록 하셨고 친구들도 데려오지 못하게 해서 사립 밖에서 부르다가 분위기를 봐 가며 나를 데려가거나 그냥 돌아갔다. 마뜩잖은 행동을 보면 명령조의 말투로 꼬치꼬치 따져 물으시곤 했는데 ‘꼭 순사가 죄인 다루듯이 한다’며 아버지가 안 계실 때 엄마는 혼잣말로 흉을 보셨다. 아버지는 경찰을 하시다가 그만 두고 공부만 하셨다. 밥상 머리에서는 복이 달아날까 봐 음식이 입에 들어가는 소리가 나서도 말을 해서도 안 됐다. 그러니 소화가 잘 될 리도 없었다.
속이 답답하고 오한이 들면 엄마는 동네 당골 할머니를 불렀다. 그분은 마당 가운데 나를 앉히고 바가지에 물을 담아 칼로 두드리며 주문을 외었다. 천지신명을 부르며 몸을 개운하게 해 주라고 기도 했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노라면 당골은 바가지와 칼을 멀리 던지며 물림을 마쳤다. 그 할머니가 다녀가시면 답답한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는데 지금 생각하며 바가지에 칼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아픔을 잊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절에서 긴 시간 공부하셨던 아버지는 평소에 불경을 자주 외우셨다. 혹여 식구들이 아플라치면 그 옆에 앉아 눈을 감고 몸을 좌우로 흔들며 나지막한 소리로 외어 주셨다, 평소에는 무서워서 피하기도 하였는데 아플 때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나도 모르게 잠이 들곤 했다. 아버지의 처방은 대학생이 되어 서울살이 하는 오빠를 빼고는 여동생과 어린 남동생이 다 자랄 때까지 계속되었다. 우리 집의 상비약이 된 것이다. 본인도 외웠던 불경에 치유를 받으셨는지 아니면 꼿꼿한 성품으로 몸 관리를 철저히 하신 덕분인지 아홉 살 아래인 엄마가 돌아가시고 20년이나 더 사시다가 99세에 소천하셨다.
아버지의 불경 소리를 듣고 자라서인지 우리 형제들은 자연스럽게 불교와 가까워졌다. 몇 해 전 여동생과 어린 시절을 추억하다가 우리가 들었던 경전을 궁금해하자 액운을 피하고 건강을 구할 때 외우는 ‘고왕경’이라고 한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나 건강이 안 좋아 힘들 때는 나도 ‘광명진언’이라는 주문을 외운다. ‘옴 아모가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릍 타야 훔’이라는 짧은 주문으로 15년 전 뇌수술로 고생하는 내가 딱하여 지인이 스님께 부탁하여 얻어 온 나름의 처방전이었다.
그 당시 큰아이는 마음이 절박하여 병문안 오는 사람들에게 책을 내밀며 한 번씩 사경을 부탁하였다고 한다. 인연이 있는 사람들의 기도가 모여 나는 서서히 일상을 되찾았다. 현대 의학이 환부를 직접 치료하면 마음을 주고받는 온갖 기도가 함께 회복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결혼하여 아기를 낳아 시댁에 있을 때였다. 백일도 안 된 아기의 눈에 자꾸 눈곱이 끼는데 좋아지지 않았다. 병원에 다녀와도 소용이 없었다. 급기야는 눈꺼풀이 붙어 아이가 답답하여 울고 보챘다. 친정어머니께 하소연했더니 그 당골 할머니를 시댁으로 모셔서 물려 보자고 하셨다.
시아버님은 젊은 시절 성당을 다시셨던 분이라 미신은 질색하신다는 말씀을 시어머님께 들어서 말도 꺼낼 수 없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여러 날이 지나도 아이의 눈이 좋아지지 않아 시어미님께 우선 말씀드렸더니 ‘내리사랑’ 이라더니 시아버님께서 허락을 하셨다는 것이다. 여러 날 식구대로 고생하는 걸 보시고는 어떻게든 낫기를 바라셨는 모양이다.
읍에서 한 시간 쯤 버스를 타고 당골 할머니가 오셨다. 나를 물려 주실 때도 할머니였는데 20년이 지난 후라 여든은 넘어 보였다. 할머니는 흰 천을 둘둘 말아 보자기에 싸 오셨다. 집을 한 바퀴 휘돌아보시더니 아기를 안고 마루에 앉으라고 하신다. 당골은 방마다 돌아보고 마당도 걸으며 주문을 외우시더니 길게 편 흰 천을 두 손으로 쭉 찢으며 아기 눈을 깨끗이 해주시라고 천지신명을 찾았다. 그리고 예전처럼 바가지에 물을 담아 칼로 두드리더니 휘익 던지고는 금방 좋아질 것이라고 걱정 말라시더니 밖으로 나가셨다.
그런데 당골이 다녀가고 이튿날부터 아기의 눈이 깨끗해졌다. 당연히 보채는 일도 없어졌다. 시어른들도 반색하며 좋아하시니 보는 내 마음도 편했다. 물론 나을 때가 되었거나 그동안 치료받았던 것들이 결과로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미신이라고 치부하기엔 그 효과가 즉시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서 부정할 수도 없었다.
지금은 큰일이 아니고서는 집으로 직접 찾아와 무당이 굿을 하거나 당골이 물림을 해주는 일은 없다. 내가 알기론 그렇다. 대신 필요한 사람이 손님이 되어 신당을 찾아가서 굿을 하기도 하고 신점을 보기도 한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타로점’이라고 하는 카드점을 보는 곳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드나드는 사람도 제법 있다. 젊은 친구들은 재미 삼아 보기도 한다. 병원이나 약국에서는 받을 수 없는 불안을 이기는 처방, 불안한 미래에 도전장을 내미는 처방전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