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사상구 모라동 백양산,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본사 범어사의 말사. 雲水寺 부산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 있는 사찰,
산이 높고 물이 깊은 곳에 위치한 운수사는 구전에 원효의 창건설, 또 가야국 때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전소되어 1660년(현종 1)에 중건하였으며, 이후 크게 사세가 확장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를 뒷받침해 줄 만한 사료나 유적은 남아 있지 않다.
조선 정조 때 제작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범어사와 더불어 부산을 대표하는 사찰로 불릴 만큼 큰 도량이었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웅전은 조선 중기 이후에 세워진 건물이며, 부산 지역에 남아 있는 사찰 당우 가운데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섬세하고 뛰어난 기법을 보여 주는 건물이다. 내부에는 17세기 초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여래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간행된 『동래부지(東萊府誌)』에서는 운수사에서 들리는 해질 무렵의 종소리를 뜻하는 운수모종(雲水暮鐘)을 '사상 8경' 중 한 곳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동래성을 함락하기 위해 우회하던 왜군들에 의해 종(鍾)이 사라졌다. 1974년에 범종각과 종을 다시 세웠으나 태풍으로 종각이 유실되면서 종만 다른 장소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대웅보전 (雲水寺 大雄寶殿) 2006년 완공, 정면 7칸, 측면 4칸 기존 경내 중심지보다 훨씬 높은 지대에 위치한 건물로,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주존불로 좌우에는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 그리고 관음보살과 지장보살 다섯 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운수사 대웅전
정면 3칸, 측면 3칸, 겹처마에 주심포계 맞배지붕이다. 공포의 형태는 주심포계가 기본이지만, 다포계나 익공계의 기법도 두루 절충되, 또한 전,후면의 공포 형식도 차이가 나는데, 이는 초창 이래 몇 번의 개,보수 탓으로 여겨진다. 즉, 어느 시기의 개,보수 때 후면의 공포는 처음 지을 당시의 것을 그대로 두고, 앞쪽의 공포는 당시에 유행하던 법식대로 교체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 전기에 세워졌다 임진왜란때 전소, 2013년 전면 해체 수리 당시 종도리에서 2개의 묵서명이 발견되 대웅전은 1647년(인조 25) 공사를 시작해 1655년(효종 6)에 완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366년 동안 유지된 대웅전은 조선 중기의 잘 정제된 건축 기법을 두루 갖추고 있는 특이한 건물로서 건축사적으로 크게 주목되며, 문화재적 가치도 뛰어난 소중한 건축 유구이다. 부산 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문화재적 가치가 커서 2016년 3월 2일 보물 제1896호로 지정되었다.
운수사 대웅전 석조여래삼존좌상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92호)
18세기 불상으로, 본존인 아미타여래는 팔각대좌 위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연꽃대좌 위에 앉아 있다. 1987년에 개금 불사(改金佛事)가 이루어져으며, 매우 양호하다. 석재는 일명 '경주 불석(佛石)'이라고 부르는 백색 석재로, 운수사 부근에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어 부산 지역 불교 조각상의 재료로 애용되었다.
정수리와 머리 중앙에 표현된 정상계주와 중앙계주의 뚜렷한 표현, 방형의 얼굴, 반달형의 긴 눈썹, 작은 코와 입, 짧은 목, 좁은 어깨, 볼록 나온 아랫배, 두꺼운 통견식(通肩式) 대의 등이 눈길을 끈다. 본존상은 아미타수인으로 판단되며, 보살상은 선정인을 취하고 있고, 좌협시인 관음보살상의 팔찌 4개도 역시 특징적이다.
운수사 아미타삼존도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3호 )
서방 극락세계의 교주 아미타불 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는 족자형 불화로, 아미타 정토 신앙에 입각하여 조성된 것이다.
중앙의 아미타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입상을 배치하였고, 본존의 아미타불은 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청색 연화좌 위에 앉아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을, 가슴 앞까지 올린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하품중생 수인을 취하고 있다. 좌협시는 보관에 화불을 모시고, 손에 여의(如意)를 잡고 있는 관세음보살을 배치하고, 우측 보살 역시 여의(如意)를 쥔 보살로 묘사하였다.
아미타불의 도상은 하품중생과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양손으로 모두 표현하고 있어 좌측의 관세음보살이 없다면 석가모니불로 보는 실수를 할 수 있다. 나발의 머리에는 정상 계주와 중앙 계주가 모두 표현되었는데, 원호를 그어 표현하였다.
대웅전 신중탱(神衆幀). 신중탱 신중도에는 제석천과 천부중을 그린 제석도(帝釋圖), 범천과 제석천, 그리고 천부중을 그린 제석범천도(帝釋梵天圖), 위태천(韋太天)을 중심으로 한 천룡팔부 신중과 사천왕 등을 거느린 신중탱
운수사 대웅전의 신중탱은 向좌측에 위태천(동진보살)을 중심으로 4분의 권속들이 시립하고 있는 반면, 向오른쪽 위치에는 제석천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는 홀을 든 일광천자와 월광천자를 비롯한 천동, 천녀와 많은 권속들이 시립하고 있어, 위태천 주변보다 제석천 주변의 권속들 훨씬 많이 배치된 구도이다.
삼성각과 용왕각은 대웅전 뒤로 배치됐다.
삼성각 편액 글씨는 서예가 소진(素珎) 남판숙의 필적이다.
우운대사 설화
운수사에서 전래하는 우운대사 설화는 진정한 보배를 성찰하게 한다. 운수사에는 모자란 듯이 보이는 팔푼이 스님이 살았다고 한다. 운수사 승려들은 이 스님을 업신여겨 궂은일을 다 시키곤 했다. 하루는 팔푼이 스님이 밤중에 나와 황급히 물을 바가지에 담아서 서쪽으로 뿌리는 게 아닌가. 스님들이 무엇을 하느냐고 묻자 해인사에 불이 나서 끄는 중이라 답했다. 모두 정신이 나갔다고 비아냥거리며 무시했다. 그런데 실제로 해인사에서 화재 소식이 들려왔다. 큰불이 났는데 동쪽에서 갑자기 구름이 몰려와 장대비가 내려 다행히 불이 꺼졌다는 것이다. 이후로 운수사 스님들은 팔푼이 스님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비와 구름을 뜻하는 우운대사(雨雲大師)로 불렀다고 한다. 이 설화는 바보같이 보이는 스님이 실은 신통력이 뛰어난 고승이며, 운수사의 빛나는 보배였음을 말해 준다.
운수사와 두꺼비 바위에 관한 설화
운수사와 두꺼비 바위에 관한 설화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첫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중엽에 한 걸인이 배가 고파 밥을 얻어먹기 위해 운수사에 들렀는데 주지가 문전 박대를 하자 그 걸인이 곡괭이를 들고 내려와서 운수사의 수호신인 두꺼비 바위를 내려 찍었다. 그리하여 두꺼비 바위가 둘로 쪼개졌는데, 그 후 운수사는 사람의 발길이 뜸해지고 결국 절이 쇠퇴하게 되었다.
운수사가 옛날에는 번창하여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는데, 운수사의 주지는 신도가 많이 오는 것을 귀찮아하고 불평했다고 한다. 하루는 초립둥이 운수사에 들러 주지를 찾아뵙고 며칠간 절에 머물고 싶다고 했더니 주지가 또 귀찮아하면서 불평을 했다. 화가 난 초립둥이는 "절에 신도가 많이 오면 고맙게 생각하고 중생 제도에 앞장서서 힘을 써야 할 스님이 신도가 오는 것을 귀찮아 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말하자 주지는 "제발 신도들이 많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초립둥이는 주지에게 신도가 오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하며,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두꺼비 형상을 한 바위가 있는데 그 두꺼비 바위의 턱을 쳐버리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주지는 행자승을 보내어 두꺼비 바위의 턱을 떼어 내었다. 그 뒤 이상하게도 운수사에 신도들이 찾아오지 않았다. 주지는 처음에는 좋아했으나 계속 신도가 한 명도 오지 않자 초립둥이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초립둥이의 행방은 묘연하고 절은 점점 쇠퇴해져 갔다. 당황한 스님들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니 그 두꺼비 바위가 바라보는 쪽은 김해군 상동면에 있는 모 암자(당시에는 초라한 암자였다고 함)인데, 두꺼비가 거기에서 모이를 주워 먹은 후 변을 운수사에 보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해군 상동면의 암자는 크지 못하고 운수사만 날로 번창했는데, 이제 두꺼비의 턱이 없어져 두꺼비가 먹지를 못하므로 변을 볼 수가 없으므로 운수사는 쇠퇴하게 되었다고 한다. 「운수사와 두꺼비 바위」는 손님이 오지 못하게 하려고 명당의 기가 흐르는 지맥을 끊어 사찰이 망하게 되었다는 풍수 설화 중 명당 파손담의 한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