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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6주일 [견고해짐을 얻는 믿음] 김성현감독
롬4:19-22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어떤 은혜도 받기 어렵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진 능력이 아니라, 믿음을 갖도록 간절히 원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이 말하는 믿음이란 무엇일까.
인간 자체 내에 있는 능력의 한 종류일까?
어떤 이가 마음을 결단하고, 집중하면, 끌어낼 수 있는 것일까.
그리스도의 복음이 말하는 믿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특성이 있을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런 믿음의 특성을 알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믿음은 성경 전체와 직결될 수 있는 바탕이다.
이것이 없이는 절대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믿음이란 어떤 성질?]
믿음은 인간 자체에서 끌어낼 수 없다.
믿음의 원천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람속에 심어주시는 것이다.
이 믿음은 아브라함의 경우에 분명히 드러난다.
[바랄 수 없는 바램]
아브라함을 통해,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한 믿음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오늘 말씀은 믿음이 무엇인지, 자세히 분석하여 나열해 놓았다.
롬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어떤 가능성 있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본질을 따지면, 어떤 일이 전혀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라도, 가능성과 상관없이 소망할 것을 소망하는 것이 믿음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인간의 상식, 자연적 이치와는 도저히 맞지 않아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라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룰 것을 믿는 것도 믿음이고, 또한 하나님을 믿는 것도 믿음이다.
결국 믿음은 인간 자신이 만드는 소망으로 보기 어렵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 주시는 소망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이 소망하라고 주시는 것을 소망하는 것이 믿음이다.
인간 스스로 원하는 것을 하나님의 힘을 빌려 이루려는 것이 본질은 아니다.
본질은 하나님이 소망하라고 주신 꿈을 완전히 인정하는 것이다.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음]
아브라함은 인간의 상식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약속으로 받았다.
그러나, 그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롬4: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아내 사라도 아이를 가질 나이를 훨씬 넘겼다.
아브라함이 보기에 자신도 그렇고, 사라도 그렇고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에 대해 하나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믿음이 약해진다는 것은 의심이 구름처럼 몰려와 생각을 덮고, 지배하려고 할 때, 내가 허용하는 것이다.
자기가 원래 믿던 것을 무너지도록 의심을 허락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불러들여서 용납하는 것은 자신이다.
미리 백기를 들고 자신이 포기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서 이런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첫부르심을 받고, 이삭을 가질 때까지 40년의 세월을 하나님을 신뢰했다.
그는 하나님과 잦은 교통을 하던 것도 아니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그런 자세를 가졌다.
그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고,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능히 부르실 수 있다고 믿었다.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 정확하고, 분명하게 신뢰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린다거나,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이적을 본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인간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가 와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라고 설명해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도 하실 수 있다고 믿었다.
심지어 100세에 얻은 아들을 제사로 드릴 때도, 그의 마음속에는 능히 아들을 살려주실 것을 믿었다.
방법은 모르지만, 아들을 번제로 드려도, 다시 돌려주실 것을 믿었다.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은 자신의 자연적 상태를 잘 알고 있었고, 아내의 상태도 알고 있었다.
문법적으로 완료분사형이다. 그 상태가 딱 정리된 것이다.
아브라함이나 사라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는 출산능력에 관한한 종결된 상태를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늙었기 때문에, 자손을 갖는 것은 확실히 불가능한 상태에 있었다.
그것을 아브라함 본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은 자신의 육신의 한계 때문에 좌절하지 않았다.
[연약함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음]
믿음 자체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좌절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무지함이 있어도,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그분이 계시한 것만 알았다.
반면 우리는 신학지식이 충분하다.
아브라함은 그런 것도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은 명확했다.
그리고, 육신적으로 연약하고, 무능한 면이 있어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에서는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인간적 상식으로 볼 때, 아이를 갖는 것은 끝났음에도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자기 몸도 죽고, 사라의 태가 죽은지 오래되었음에도 전혀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자연적 인간생식 능력은 이미 죽은 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은 전혀 그의 믿음을 감소시키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일을 능히 이루실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 자체를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하지 않음]
롬4: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상황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시고,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받았다.
그리고, 다시 나타나셔서, 이듬해 아들이 있으리라 하셨을 때는 아브라함도 사라도 생식능력이 종료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 약속에 대해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믿었다.
[흔들리지 않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의심으로 흔들리지 않았다.
누구든지 어떤 일에 대해서, 의심이 찔러본다.
믿음에는 의심이 가장 무서운 적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흔들리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은 여느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다.
인간의 관점에서 어떤 일이 잘되고 있으면, 하나님을 신뢰하기 쉽다.
50% 가능성이 있으면,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을 더 확신하는 것 같다.
가능성이 많을수록 하나님을 신뢰하기 쉽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이루어질 가능성이 적을 때는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똑같이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주저한다.
어떤 경우는 거기서부터 믿음을 내려놓고, 머릿속으로 가능성을 계산한다.
안되겠다 하고 처음 믿음을 철회한다. 이런 경우는 너무 많다.
아브라함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접근 자체가 다르다.
우리 말에 의심은 어떤 사실에 대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말한다.
우리 말에 쓰는 의심과 헬라, 유대에서 쓰는 의심은 좀 차이가 있다.
우리 말은 의심은 확실히 알 수 없어서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헬라어나 유대어에서는 의심은 판단하는 것이 둘 이상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나뉘는 것이다.
우리는 의심이 뛰어들면, 전체가 내려가지만, 헬라 개념의 의심은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살아서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불가능함을 인정하면서도, 아브라함은 개의치 않고,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사라도 믿음의 사람이었다.
히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사라가 일시적으로는 믿지 않았지만, 우리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로 나중에는 사라가 약속을 주신 이가 신뢰할만한 분임을 믿었다.
하나님의 성품을 명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이 일시적으로 혼란하고, 의심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의 종 엘리에셀에 관한 부분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믿음은 여전히 죽지 않았고,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 방법을 몰랐을 뿐이다.
그가 아들이 없으니까, 충실하고 착한 종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삼아야 할 것 같았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택정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로 만든 장본인인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이루실지 궁금할 수는 있다. 그것은 믿음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너무나 신기한 것은 될 것인지, 아닐 것인지 의심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만약 아브라함이 믿음이 약한 자였다면, 그는 그냥 의심에 굴복할 수도 있었다.
영적인 문제에서는 항상 믿음에 관한 상황이 나온다.
어떤 것이든 간결히 가는 것은 아니고, 투쟁이 있다.
신실한 자는 하나님이 주신 신실한 소망을 붙들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니, 구름속에서 내려오셔서, 가르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투쟁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절대 성취할 가능성이 없을지라도, 의심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이 오면, 좌절하고 포기한다.
인생의 시련이 오고, 불이익이 오면, 하나님이 주신 것도 버린다.
이 땅에 왔으면, 인생에 시련이 가득한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받으려면, 시련을 겪어야 한다.
어려움 속에서 흐믓하심으로 올려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시험도 받는다. 그 시험은 그 사람을 더 견고하게 하기 위함이다.
부모가 자녀를 강하게 하기 위해, 훈계하는 것과 같다.
아브라함의 경우 엄청 시험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어려움을 겪을 때,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시험을 받으면서, 이 때 믿음이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견고해졌다.
사람들은 어떤 것을 할 때, 너무 모르면 믿음을 가질 수 없다고 한다.
어떤 이치를 알아야 확신도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믿음은 지식과 완전히 무관하다. 오히려 지식이 믿음의 작동을 막을 수도 있다.
신자들이 밝게 깨어, 무지한 것이 하나도 남지 않을 경우는 없다.
영적으로 지식이 충만하여, 모든 것의 이치를 다 알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 일은 있지 않다.
오늘 우리 세대는 굉장히 지성이 너무 높다.
옛날이면 극소수만 누리던 신학지식을 너도 나도 가지고 있다.
신학지식에 대해서 무지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하늘 높은 곳에 있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 그려지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자기 자랑이다.
이것은 일종의 근사한 추정이다.
나름대로 이성적 근거나 과학적 근거로 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이성적 이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를 충만히 믿는 것이다.
믿음으로 견고해지는 것.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견고해지도록 외부의 작용에 의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견고해지게 된 것이다.
내가 정신 차리고, 세게 집중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먼저 내 사업 문제가 다 해결되면 하겠다, 나중에 잘되면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냥 지금 믿는 것이다.
나이 들면 생각하기도 힘들다. 내가 믿도록 하나님이 힘을 주시는 것이다.
내가 머리에 힘을 주어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셔야 한다.
[하나님의 명예를 위한 믿음]
또한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명예에 대한 생각이 한시도 떠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믿음 자체가 소임을 가졌다고 본다.
내가 믿음이 있다면, 당연히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에 궁극적 목적이 있다.
그래야 마땅하다고 보는 것이 믿음을 가진 자의 생각이다.
경건한 믿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믿음을 주셔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서, 그 능력과 배려와 은혜가 그분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분이 영광받으셔야 마땅하다.
음수사원이라는 말이 있다. 더울 때, 우물물을 마시면서, 우물판 자에 대해서 고마워한다.
자기가 받은 은혜의 근원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믿음은 소용없다.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의 믿음은 하나님께 속한 믿음이 아니다.
결국 그 사람은 믿음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 속한 믿음은 하나님은 신뢰하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성품을 선언하는 본질적 성격이 있다.
반면 믿음이 없는 자는 같이 예배하고, 찬양하지만, 아무 가치가 없다.
자기만 생각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릴 생각하지 않는다.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가짜로 짜낸다.
인생에서 하나님을 늘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자들이다.
요일5: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수십년간 보아왔다.
[충만히 확신함]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충만히 확신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분의 약속을 충분히 이루실 수 있다.
롬4: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내가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되는 것이다.
본문의 수동태 표현이 말하는 바는 아브라함 본인의 의지로 확신에 이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확신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문법적 구조로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는 강제적으로 믿어진 것도 아니었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확신을 갖도록 설득되었다.
[하나님의 반응]
롬4: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고, 의로 여기셨다.
인간은 자기가 훌륭하게 해서, 하나님 앞에 의를 내놓을 수 없다.
전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심어주시고, 그 믿음이 자라서, 그 믿음의 결실을 받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을 소유하도록 능력을 부여해주셔서, 참 믿음이 된 것을 취하신다.
그 믿음을 그 사람을 위하여, 신적인 의로 간주하여 선포하신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믿음이 큰 역할을 한 것 같기도 한다.
부분적으로 맞다.
내게 있는 믿음이 하나님에게 온 구원을 받고, 내 믿음이 내 영적 상태를 대표한다.
그 믿음을 받아들인 수락을 하나님께서 의로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의로 채워주시는 것이다.
다른 말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원래 자신에게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고, 하나님에게서 온 믿음이 나를 위해 구원을 수락하고, 신적 의를 받도록 도와준다.
죄인인 우리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다.
우리를 구원할 방법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밖에 없다.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충실하시고, 약속을 지키신다.
인간이 구원받으려면 믿음이 필요한데, 믿음은 인간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인생 한걸음 한걸음 걸을 때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기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