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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4 / 가시 면류관의 은혜 (마27:27-37)
구세군을 창설한 윌리엄 부스가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자신이 갈보리 언덕 같은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정상에는 십자가가 서 있었고 거기에 한 사람이 매달려 신음하고 있었는데, 직감적으로 ‘아, 예수님이시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한 청년이 오더니 십자가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이미 못 박혀 있는 예수님의 손과 발에 다시 큰 못을 박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부스가 청년을 향해 “야, 넌 도대체 누구기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 또 못을 박는 거야? 그만두고 내려와!”라고 하자 청년이 망치질을 멈추고는 “나는 너다!”라고 합니다.
이에 부스가 재차 “너 누구냐니까?”라고 묻자, 청년이 “나는 너다.”라고 하며 뒤를 돌아보는데 보니 진짜 자기였던 겁니다.
잠에서 깬 부스는 너무도 생생한 꿈으로 인해 그동안 살아 온 삶을 돌아보다가 “아! 내가 정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또 못 박았던 거였구나.”라고 하며 무릎을 꿇고 회개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십자가의 원래 의미나 용도는 주로 노예나 하층민들에게 적용하던 사형 방법인데 대상자로는 적에게 투항하는 자, 비밀 누설자, 반역 선동자, 살인자, 통치자에 대해 불길한 예언을 하는 자, 야간에 음란한 행위를 하는 자, 마술하는 자, 변절자 등을 처형하던 형벌이자 형틀이었습니다. 단 로마 시민권자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참수형만 가능했습니다.
처음엔 티자 모양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후 단순한 기둥이나 오늘날의 십자가 형태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나무에 달아 죽이는 것이 로마가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구약을 보면 유대인들이나 인근 나라들에서도 적이나 자기 백성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고자 하는 의도에서 적장이나 악행을 저지른 자를 나무에 달아 죽이는 형벌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처형 방법이 얼마나 끔찍했었던지 신명기 21:23절을 보면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을 보면 그런 저주의 나무 곧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이유로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만 했을까요?
이유는 로마서 5:8절에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결국엔 죄로 인해 죽어야만 하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예수님이 대신 돌아가신 것입니다.
믿음에서는 이 사실을 믿는 게 중요하기에 초대 교회 이후부터 예수님이 스스로 잡히시고 고난받으시고 돌아가신 한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기념했으며, 올해도 내일부터의 한 주간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되새기는 고난주간입니다.
흔히들 ‘인생은 60부터’라고들 하는데 여러분 생각엔 어떠신가요? 인생은 60부텁니까? 아니면 현대인의 수명이 늘었기에 인생이 70부터라 해야 할까요?
다 아닙니다. “인생은 몇 살부터다가 아니라, 인생은 십자가로부터다.”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누구의 인생이든 예수님 전과 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없는 인생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로서도 이 한 주간을 진정한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아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기회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론 어떤가요? 여러분은 평소 일주일을 사시면서 예수님을 얼마나 찾았으며 기억하고 사셨는지요?
모르긴 몰라도 사는 게 바쁘단 이유로 많은 시간 예수님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살아왔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예수님 없이 사는 것과 예수님을 잊고 사는 것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사람이 예수님 만나기 전과 후가 다르다고 했을 때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사는 것은 ‘예수님 전’에 해당하는 것이기에 불신자들이 예수님 없이 사는 것과 매일반인 것입니다.
우리네 믿음에서 부족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예수님을 잊고 사는 것! 그렇기에 고난주간 같은 특별한 기간을 정해 예수님을 늘 기억하고 사는 믿음을 새롭게 결단하는 것이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매우 중요하고 꼭 필요한 과정인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사형 방법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방법이 십자가형이라 했는데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과정을 잠깐 보자면, 먼저 십자가 형틀을 땅에 눕혀 놓은 후 그 위에 죄수를 묶어 놓고는 산 채로 손과 발에 못을 박습니다. 그다음엔 십자가를 똑바로 세워 땅에 박아두면 사형 절차는 일단 끝나는데, 그다음부터는 가만 놔둬도 중력으로 인해 죄수의 몸이 아래로 처지면서 횡격막을 압박하게 됨에 따라 질식해서 죽게 만드는 것이 십자가 처형입니다.
그런데 더 끔찍한 것은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즉시로 죽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에 따라 수 시간 만에 죽기도 하지만 모질게는 며칠이 지나도록 숨이 끊기지 않고 고통만 계속되는 때도 있다고 하는데, 바로 이런 십자가형을 예수님이 지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묵상하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다른 죄수들과는 달리 예수님만이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더 쓰셨다는 점입니다.
가시와 면류관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고통의 가시면 가시고, 영광의 면류관이면 면류관이지 가시 면류관이 도대체 무슨 의미이며 왜 예수님께만 가시 면류관이 더해진 걸까요?
단순히 로마 병정들의 희롱과 장난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거기엔 영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당시 세상의 왕들은 자기 머리엔 금 면류관을 쓰고 부귀, 영화, 존귀를 자랑하면서도 저주와 고통과 아픔은 백성들에게 전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친히 저주의 관을 쓰셔서 고통과 아픔을 담당하심으로써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백성에겐 구원과 평화만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와 제일 먼저 확인하신 것도 “너희에게 평안이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고난은 예수님이 담당하셨으니, 우리에겐 평안만이 있을 것을 알게 하시려는 말씀인 것입니다.
실제로 가시 면류관이라고 할 때의 가시는 저주를 상징합니다. 창세기 3;17절로 18절을 보면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태초의 에덴동산에는 가시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인간이 타락하여 저주를 받고 에덴 밖으로 쫓겨나 보니 저주받은 땅이 온통 가시투성이 세상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타락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 가시이기에 가시 면류관은 곧 저주의 면류관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저주는 원래 우리가 받아야만 했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몽땅 뒤집어쓰시고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큰틀에서의 구원을 확증하신 것이라면, 예수님의 가시 면류관은 인생의 세세한 부분에서 우리에게 있는 저주와 불행을 대속하시는 속죄의 면류관, 구속의 면류관, 용서의 면류관이 되는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의 머리에 상처를 주던 가시 면류관이 이제는 우리의 상처와 허물을 치료하는 은혜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가시 면류관의 재료는 탱자나무처럼 촘촘한 가시가 덤불을 이루고 자라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로마 병정들은 그런 가시나무 가지로 왕을 흉내 낸 면류관을 만들어 억지로 예수님의 머리 위에 씌우다 보니 삐죽삐죽한 가시들이 예수님의 머리와 이마를 사정없이 찔러 피를 흘리게 했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찌른 이 가시가 우리 인생을 치료하는 은혜의 면류관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살다 보면 세상에는 우리를 찌르는 가시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정에도, 직장에도, 또한 만나는 사람에게도 가시가 있어 상처를 받습니다. 잊을 수 없는 과거의 실패, 지울 수 없는 아픈 상처들 또한 가시가 되어 매일 같이 나를 찌릅니다.
교회에서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도 상처를 받고 충성하고 봉사하다가도 가시에 찔려 힘들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내 안에 있는 불만과 근심, 불안과 내적 갈등들도 가시가 되어 내 영혼과 마음을 찔러 아프게 합니다.
이럴 때면 사람들은 위로한다면서 ‘너만 그런 게 아니야.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면서 살아.’라고 하지만, 그런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될진 모르겠지만, 그런다고 상처와 아픔이, 실수와 허물이 없어지거나 없던 일이 되진 않습니다.
세상에는 그 어디에도 우리의 괴롭고 상한 인생을 치료할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위에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며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만이 우리의 상처를 치료해 주십니다. 그래서 인생의 고난은 예수님 만나면 끝나고, 삶의 문제는 십자가 붙들면 끝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고 말 못 할 허물이 있다고 하면, 이젠 예수님 앞에 나가 예수님께 ‘영적 진료와 치유’를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해결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만 여지껏 그렇게 살아왔기에 이젠 사는 방법을 바꿔 매 순간 ‘주의 이름만 부르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주여!’가 한숨 대신이든, 여러분의 ‘주여!’가 주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든, 주님이신 예수님을 찾기만 하면 예수님께는 십자가 보혈이 있습니다. 치유와 치료의 능력이 있으시기에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저와 여러분의 상처를, 문제를, 아픔들을 예수님이 고쳐 주실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가시 면류관이 우리에게는 승리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당시 로마 병정들은 예수님께 가시 면류관을 씌워 마치 실패한 왕처럼 꾸며 놓고는 재밌어라 했지만, 그러나 그 가시 면류관은 승리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부활의 영광으로 바꾸셨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도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세상 도처에서 찔러오는 가시들이 삶을 괴롭힐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시가 오는 것을 막아 주지 아니하시고 그 가시들을 두고만 보시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 고난의 가시로 인해 부활의 면류관을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선교사가 오지 마을로 가다가 큰 개울 앞에 당도해서 보니 건너오는 사람들마다 큰 돌을 머리에 이거나 가슴에 안은 채 개울을 건너와서는 개울가에 버리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까닭을 물었더니 개울 한 가운데는 물살이 대단히 세서 아차 하면 물결에 휩쓸려 넘어져서 떠내려가다 폭포 아래로 떨어져 목숨을 잃게 되는데 돌을 이거나 들고 개울을 건너면 혹 넘어지더라도 돌만 잘 붙들고 있으면 떠내려가지 않고 다시 일어날 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보면 인생에서도 몰아치는 급류와 같은 고통과 시련이 자주 있겠기에 하나님께서는 그걸 대비해 우리에게 십자가의 믿음을 꼭 붙들고 살라고 하시는 겁니다. 십자가가 죽음과 연결되는 것이지만 그 십자가가 죽음에서 우릴 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 오지 원주민들에게 있어서 돌은 분명 힘들고 살아가는데 아무 데도 쓸데없는 거추장스러운 짐인 것은 분명하지만 개울을 건너는 중이라면 돌이 무겁다고 그 돌을 버리면 그 돌이 나를 버리게 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고난이 당장엔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에게 믿음만 있으면 찬송가 373장에서의 고백처럼 세상 사람들은 인생의 풍랑 탓에 죽게 되었다고 한탄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은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간다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만큼 어렵고 힘든 시간이면 그간 뜸했던 기도에 다시 전심을 다하게 될 것이고 그동안 잊고 살았던 하나님을 다시금 찾고 또 찾을 테니까요.
이렇게 고난 때문에 기도할 수만 있다면, 시련 때문에 하나님을 찾을 수만 있게 된다면 결국엔 기도 응답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있을 것이니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서의 고난과 시련은 아예 없으면 좋겠지마는 있더라도 승리하는 인생을 위해 통과해야만 하는 믿음의 한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종종 성도의 모델로 제시되는 사도 바울에게도 남모르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육체의 가시라 불렀습니다. 이 가시가 찌르는 아픔이 너무나 괴로워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시기를 세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이 혹 가시로 고통을 받는다면 모르겠지만 바울과 같이 믿음 충만한 사람은 복을 받아야지, 왜 가시로 인한 고통을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하나님을 위해 충성하는 그이기에 다른 복은 몰라도 하나님의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을 만큼의 건강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지요?
그런데도 바울에게도 가시는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가시가 피해 가는 것은 아니라는 얘긴데,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요?
바울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하시며 자기에게 있는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기에 이제까지의 ‘가시로 인한 기도’를 ‘가시로 인한 감사’로 바꾸는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인생 가시로 인해 기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기도 후엔 그 가시로 인해 곧 있게 될 은혜를 소망하며 감사해하는 믿음도 가지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우리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일본의 뇌성마비 시인 미즈노 겐조는 입과 눈동자만 움직일 뿐 온몸을 꼼짝할 수 없는 장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눈짓으로 혹은 입술로 글자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시를 써서 “감사는 밥이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등의 시집을 냈는데, 그중 ‘내가 만일 괴롭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시를 보면 ‘내가 만일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모든 형제자매가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그의 시는 일본 전역에 큰 감동을 불러왔고 신자들에게는 큰 은혜를, 불신자들에게는 큰 전도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그런 그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사랑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은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나에게 이토록 큰 가시가 없었던들 어찌 그토록 우상과 미신에 찌든 내 동포 일본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겠는가?
나의 아픔과 잔인한 고통을 통하여 일본인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만 있다고 한다면 나는 지금보다도 열배 백배 천배의 고통이라도 감사할 수 있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고난과 시련을 찾아 당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피해도 어차피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들로 인해 힘들어할 시간에 오히려 그런 가시들이 은혜의 면류관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붙들고 이겨나가기를 힘쓰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가시 면류관을 쓰신 이유는 십자가를 믿는 우리에게는 ‘가시는 빼고’ ‘오직 면류관만’을 쓰는 인생이 되게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 인생은 언제든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바뀔 수가 있게 됩니다.
아닌 말로. 마이너스 통장이 플러스로 바뀔 수만 있다면. 마이너스 건강이 플러스 건강으로 바뀔 수가 있다면, 또한 마이너스 성공이 플러스 성공으로 바뀔 수 있다면, 이젠 선택해야만 합니다. 인생의 가시를 붙들고 힘들어할 건지 아니면 믿음을 붙들고 이겨내려고 힘을 다할 것인지를.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하신 일이 십자가이기에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해야 할 일 또한 십자가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계획하셨고 명하셨고 예수님이 행하셨기에 우리가 믿기만 하면 가시 면류관은 예수님이 쓰셨기에 우리에게는 은혜와 승리의 면류관만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믿는다는 이유로 인생의 가시가 없기만을 기대하지 마시고, 믿었는데도 가시가 있다고 실망하지도 마시고, 인생의 가시보다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더 크게 그리고 더 굳게 붙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미 계획하신 일이기에 우리 인생에서의 가시들도 곧 은혜와 승리로 바뀌는 기쁨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라도 이번 고난주간엔 예수님의 가시 면류관을 깊이 묵상하시고 예수님이 주시는 면류관의 소망을 크게 가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