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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기다린다. 약속시간에 늦은 줄 알고 금광면에 위치한 미평 문학관에 달려가 보았더니, 문이 잠겨 있다. 차 문을 닫고 금광호수 주변을 걷는다. 덕분에 숨을 돌린다. 가을햇살이 화살촉같이 따갑다. 손으로 햇발을 가리며 그늘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간만에 호수 주변을 걸어본다. 고요하다. 전깃줄 위에 고추잠자리가 점점이 앉아 있다. 제각기 날개를 펴고 명상중이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가을바람이 건 듯, 날개를 조금 흔들 뿐. 그 무엇도 잠자리의 집중을 깨지 못한다. 시인이 도착한다. 자동차 경적이 울린다. 김윤배 시인이다.
김윤배 시인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떠돌이의 노래』(창비, 1990년)라는 시집 때문이었다. 대학시절 새로 나온 시집을 무조건 사서 읽던 때였다. 그런데 뜻밖에 안성 남사당 이야기가 나왔다. 시인이 안성과 어떤 인연이 있기에 남사당을 시로 써냈을까, 그게 궁금했다. 만나 뵙고 싶었다. 그러다가 작년 바우덕이 축제 제목('강물 따라 흐르는 떠돌이의 노래')을 보고 그 시집을 떠올렸다. 그러던 차에 유연복 판화가의 전시 마지막 날, 우연하게 전시장에 들렀다가 시인을 만났다. 한번쯤 뵙고 싶었는데, 눈앞에 나타나다니. 더군다나 안성에 작업실을 갖고 있다니, 놀라웠다. 순간, 기분이 이상했다. 김윤배 시인은 원래 초등학교 교사였다. 마흔을 넘은 나이에 시인으로 데뷔를 하였고 2006년 교육장으로 명예퇴임을 하고 안성에 집필실을 마련하였다.
"안성은 제 문학의 고향이에요. 시를 따라 내려온 것이지요."
말마따나 그는 오래 전 서운면에서 12년간 교편을 잡은 적이 있다. 그리고 안성과 인연이 깊은 시집 두 권을 펴낸다. 『떠돌이의 노래』와 장편서사시 『사당 바우덕이』이다. 안성은 자석처럼 시인을 끌어들였다. 시가 먼저 안성에 와 있고, 시인의 몸이 시를 따라 안성에 정착한다. 남사당 유랑광대의 이름으로 안성은 시인을 불러들였다. 문득, 김윤배 시인은 경건함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다.
"얼마 전 문학관 근처에서 산책을 하는데 커다란 늙은 오이를 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늙은 오이 앞에 있으니 마음이 경건해지더군요. 오이가 노상에서 자라기까지 비바람과 햇살이 얼마나 혹독했겠어요. 그 과정을 이겨낸 늙은 오이가 당당해 보이더군요. 그러고 보면, 이 세상에 경건하지 않은 게 없어요. 제가 문학을 대하는 태도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요. 예전에, 이삿짐이 마당에 널브러져 있는 걸 본 적이 있는데, 마침 햇살이 강렬하게 내리쬐고 있었어요. 이삿짐이라는 게 바로 내 삶이잖아요. 햇빛에 적나라하게 노출되는데, 그것만큼 남루한 것도 없더라고요. 그렇게 삶은 남루하지만, 또 그렇게 경건하지요."
이 말을 들으니, <수제화>라는 시가 떠오른다. "유리문 힘겹게 열린다 아내는 깊이 허리 숙인다 흘끔 가게 안으로 들어서던 남자가 가슴을 들여다본다 아내는 사내의 시선이 박힌 가슴을 한 손으로 여민다." 수제화 하나를 팔기 위해 뭇 남자에게 "허리"를 숙이고 "시종처럼 사내의 뒤를 따"르는 아내를 바라보는 시이다. 아내는 수제화 구두를 파는 가게를 한다. 구두 파는 일조차 말로 담기 어려운 굴욕이 (간혹) 있다. 그 순간을 바라본 남편은 가녀리게 떨리는 아내의 다리를 본다. 아내의 울음을 느낀다. 남루한 순간이다. 이 장면을 묘사하는 시인의 시선은 경건하다. 비천하게 추락하지 않고, 묵묵하게 가슴으로 감싸 안아준다. 아내의 마음을 달래는 장면은 꿈속에서 완성된다. 시인은 "나는 나의 가죽을 벗겨 아내의 발에 꼭 맞는 수제화 한 켤레 짓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현실의 비참한 굴욕은 꿈에서 보상받는다. 시인은 아내의 고단함을 어루만지며, 아내만을 위한 수제화를 만든다. 그것도 온몸으로. 시인의 경건한 시선이 남사당 바우덕이로 이어진 것일까. 김암덕(金岩德). 바우덕이는 안성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전설적인 예인이다. 안성 축제의 대명사로 불러질 만큼 익숙하다. 고종2년(1865년) 경복궁 중건 당시 소고와 선소리를 선보여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옥관자를 하사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화려함 이면에는 아직도 은밀하게 뒷구멍이 가려운 불명예가 따라다닌다. 사당패들의 매춘이라는 불명예이다. 요즘 시대야 '이효리' 하면 노래 잘하고 뛰어난 예능감각이 있는 연예인으로 쳐주지만 조선 말기, 근대화가 시작될 무렵 사당패들은 지역 마을에 돌아다니면서 걸립이나 하는 유랑광대들이었다. 지금 시대에 태어났다면 김암덕은 '이효리'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유명 예인이 되었을 법한 여성이다. 그러나 김암덕의 시대는 여성이 사회생활하기 쉽지 않았다. 사당패의 매춘 행위가 바우덕이를 깎아내리는 심리로 (은밀하게 암초처럼) 숨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김윤배 시인은 달랐다. "『사당 바우덕이』에 대해 장편 서사시를 쓰려고 보니, 자료가 없더라고요. 그런데 한편으로 좋았어요. 상상할 수 있었으니까요. 벗음새라는 게 있어요. 무아경(無我境)의 순간을 말하는 거지요. 저는 민중예술을 담당했던 남사당패에게 예술의 최고 경지라고 할 수 있는 벗음새가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바우덕이도 벗음새의 경지를 알았던 예인이었던 거예요." 김윤배 시인은 남사당패 사설에 주목하며 바우덕이의 역사적 위치를 재조명한다. 어름사니의 '녹두장군 행차' 사설에 주목하면서 그녀를 동학의 후손으로 설정한다. 아홉 마당으로 구성된 『사당 바우덕이』중 둘째, 셋째 마당이 그러하다. 동학의 초군 두목이었던 바우덕이의 할아버지 이야기가 둘째 마당이고, 동학 마름 접사였던 바우덕이 아버지와 어머니 이야기가 셋째 마당이다. 당시 양반을 조롱하고 시대를 비판하는 사설이 가능했던 이유는 양반 자제들이(예인 기질이 넘쳤던) 남사당패 비가비로 흘러들었기 때문이라는 논리이다. 그들의 영향으로 어름사니 사설에 비판의식이 담겨 있다는 얘기였다. 제법 타당하고 설득력 있다. 시인은 바우덕이를 개인의 예술적 성취에 국한하지 않고, 시대적 맥락 속에 자리매김시킨다. 한 대목을 떼어내도 율격의 긴장감이 살아있는 장편 서사시이다.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한 허전함이 뿌듯하게 채워진다. 바우덕이가 역사적 위상 속에서 자리매김하니, 그 느낌이 새롭다. 보편성의 맥락 위에서 되살아난 바우덕이 삶이 실감나게 저며온다. 김윤배 시인은 바우덕이를 시대적 모순과 여성적 억압이라는 역사적인 맥락에서 예인의 기질을 펼쳤던 유목민으로 본다. 고향을 두고 떠돌아야 하는 역사적인 유랑광대 예인으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가던 도중, 김윤배 시인이 새로운 사실을 털어놓는다. 바우덕이가 경복궁 중건 당시 옥관자를 하사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기록에 보면, 바우덕이는 1920년도에 죽은 것으로 나와 있다는 거다. 특히 필자(심우성)는 1959년 10월, 1967년 10월, 동년 12월, 1968년 1월 등 네 차례에 걸쳐 현지를 답사한 바 안성읍에서 동남쪽으로 약 17킬로미터 떨어진 서운산상에 자리잡은 청룡리 본동 태생 이시용(李時鎔·72세) 옹의 증언에 의하면 …(중략)… 그러나 1920년대부터 남사당패들이 하나둘 이곳을 떠나기 시작했으며 그들이 떠난 후 간혹 남아 있던 덜미(人形) 등도 금기의 물건이라 하여 본동 주민들에 의하여 소각되었다고 한다. 말년에 바우덕이의 거사(남편격)였던 이경화도 1920년경 바우덕이가 병사하자 2년쯤 혼자 살다가 이곳을 떠나고서는 다시 보지 못하였다 한다.(심우성, 『남사당패 연구』, 1989, 동문선.) 안성 남사당패 실력이 뛰어나 옥관자를 하사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바우덕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1910년 한일합방 당시를 두고 "나라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라는 사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도 옥관자를 하사받은 연도가 맞지 않다는 거였다. (나는 이 말을 듣자마자 대학 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아보았다. 시인의 말이 맞았다. 기록에는 1920년도에 바우덕이가 죽은 것으로 나와 있었다. 더군다나 민속학자인 심우성 선생이 직접 채록한 기록이었다). 바우덕이에 대해서 막연하게만 알고 있지, 직접 자료를 찾으며 공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바우덕이에 관해 조사하고 연구해야 할 빈 구석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신화를 만들어갈 후대의 몫이다. 밑도 끝도 없이 올라오는 부끄러움을 감추며 바우덕이 축제로 화제를 돌린다.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 축제는 지역축제로 성공한 케이스예요. 작년에 보니까, 체험 프로그램도 많더라고요. 좋았어요.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바우덕이를 중심으로 안성의 전통적인 문화가 골고루 융합되었으면 좋겠어요. 너무 상업적으로 흐르지 않았으면 해요. 또 안성의 드넓은 평야처럼 사람들 마음도 넓어지기를 바랍니다. 그게 다예요. 하하하." 남루함 속에서 경건함을, 비천함 속에서 예술성을 끌어올리는 시인의 눈이 새삼 감동적이다.
* 나는 이 시집 한 권을 위헤서 수많은 시편을 쓰고 버렸다. 나는 그녀로 인해 신열을 앓았고 한 슬픔을 맞았으며 한 슬픔을 보냈다 그녀가 청룡천변 작은 돌무덤으로 누워 있을때 들국 몇 송이 무덤 위로 청옥빛 가을 하늘 흔들어 나를 아프게 했다 그 이후 나는 그녀의 거사가 되어 그녀의 가파른 생을 등짐으로 지어날랐다
이제 그녀의 모든 것을 벗는다
2004년 가을, 용인 서천 우거에서
김윤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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