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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위험하지 않은 것은 철학이 아니다!
10주년 기념 개정 증보판 출간
논리학 분야 베스트셀러 저자 최훈 교수의 『위험한 철학책』이 출간 10주년을 맞아 개정 증보판으로 돌아왔다. 개정판에서는 윤리학과 인식론을 다루는 5개의 장을 추가해 다시 한번 독자들의 사고를 극단까지 몰고 간다. 소나 돼지는 죽이면서 왜 사람은 죽이면 안 되는가? 육식을 하면서 윤리적일 수 있는가? 다섯 명을 살리고 한 명을 죽이는 게 더 나은가? 외모나 인종을 이유로 차별하면 안 되면서 왜 지적 능력이나 실력으로 차별하는 것은 용인되는가? 등 사고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철학자들의 질문들을 통해 저자는 독자들에게 참된 철학의 맛을 선사한다. 오로지 이성이라는 등대만을 좇아 도달한 생각들은 “한명보다 다섯 명을 죽이는 게 낫다”나 “갓난아이는 죽여도 상관없다”처럼 상식에 반할 뿐 아니라 때로 위험하기도 하다. 이런 위험한 생각들은 당대의 상식에 균열을 일으키고 굳게 믿던 비합리적 신념을 뒤흔든다. 저자는 말한다. 위험하지 않은 것은 철학이 아니라고.
저자 소개
최훈
고대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이어온 철학 속에서 지금의 삶에 필요한 지식과 생각법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있는 철학자이다. 어떤 문제든 ‘놀라워’해서 출발하고 ‘아포리아’에 빠져 보는 경험도 해보고 그 ‘경이감을 생생하게 유지’할 수 있다면 누구나 철학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형이상학, 논리학, 윤리학 등의 영역에서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고, 강원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교양과정의 철학 교수, 자유전공학부 교수이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선임연구원, 세종대학교 초빙교수를 지냈고, 호주 멜버른대학교, 캐나다 위니펙대학교, 미국 마이애미대학교에서 방문학자로 연구했다. 박사학위 주제였던 심리철학과 인지과학 연구를 계속하면서 그 연구 성과를 논리적 사고와 오류 연구에 접목하고 있다. 그간 이론적 배경이 부족했던 이 분야에 학문적 토대를 쌓고 있다. 그 일환으로 나온 『논리는 나의 힘』은 논리학 교과서뿐만 아니라 논리적 사고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필독서로 널리 읽히고 있다.
플라톤은 좋은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통치자가 철학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저자는 온 국민이 철학적인 사고를 하게 되면 좋은 나라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학술 연구 못지않게 대중에게 철학적 사고가 무엇인지 알리는 것을 철학 선생의 중요한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약간은 거창하지만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한 사명감을 가지고 저술로써 대중과 소통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 데카르트와 버클리』, 『매사에 공평하라: 벤담과 싱어』는 그런 작업의 결과이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이어온 철학 속에서 지금의 삶에 필요한 지식과 생각법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있는 철학자이다. 어떤 문제든 ‘놀라워’해서 출발하고 ‘아포리아’에 빠져 보는 경험도 해 보고 그 ‘경이감을 생생하게 유지’할 수 있다면 누구나 철학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목차
들어가며
1. 세상은 물로 이루어져 있다
원시인의 정신세계 | 철학의 시조 |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 철학과 학문 | 신화에서 철학으로 | 만물의 근원, 아르케 | 철학과 비판 | 더 깊이 읽기
2.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없다
뷔리당의 당나귀 | 운명의 덫 | 자유의지라는 환상 | 가지 않은 길 | 모든 것을 아는 라플라스의 악마 | 유영철의 죄는 오롯이 그의 책임인가 | 내 책임이 아닌데 왜 처벌하나? | 뒤집어 보기 | 더 깊이 읽기
3. 다른 사람에게는 마음이 없다
철학자의 좀비 | 직접지와 간접지 | 너도 아프니? | 오직 나의 마음뿐 | 유비 추론 | 비트겐슈타인의 딱정벌레 | 뒤집어 보기 | 더 깊이 읽기
4. 이 돌멩이는 관념일 뿐이다
가장 솔직한 철학적 반박 | “감각에서 오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마음에 없다” | 외부 세계가 어떻게 관념이 되는가? | 로크와 그의 시대 | 표상적 실재론 |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 존슨 박사의 반박은 성공했을까? | 뒤집어 보기 | 더 깊이 읽기
5. 내일도 해가 뜰지는 아무도 모른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니까 | 개연성과 규칙성 | 자연법칙을 찾아서 | 탄탈로스의 저주 | 의심 많은 흄 | 뒤집어 보기 | 더 깊이 읽기
6. 동물은 고통을 못 느낀다
고통을 못 느끼면 좋겠다고? | 동물은 고통을 못 느끼는 기계일까? | 영혼과 물질 | 생각할 수 있다는 것 | 고통을 의식하지 못하는 존재들 | 반성적 의식이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별 짓는다 | 뒤집어 보기 | 더 깊이 읽기
7. 사람을 구하기 위한 거짓말도 나쁘다
거짓말은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을까 | 결과 때문에 선한 것이 아니다 | 마음이 끌리는 대로 한 일은 칭찬하거나 비난할 수 없다 | 선의의 거짓말까지 나쁜 이유는 뭘까? | 뒤집어 보기 | 더 깊이 읽기
8. 착한 것도 운이다
나의 성공은 순전히 나의 노력 덕분일까? | 응분의 원리 | 외모는 운 | 실력도 운? | 착한 것도 운! | 뒤집어 보기 | 더 깊이 읽기
9. 갓난아이는 죽여도 상관없다
스위프트의 과감한 제안 | 모든 생명은 소중한가? | 인간을 죽이면 안 되는 이유 | 갓난아이나 식물인간도 인격체라고 부를 수 있을까? | 가장자리 인간의 운명 | 뒤집어 보기 | 더 깊이 읽기
10. 죽음은 그리 나쁘지 않다
천 개의 바람이 되어 | 죽음은 남은 사람에게 나쁠까, 떠난 사람에게 나쁠까 | 그이가 더 살았더라면 행복했을 텐데 | 에피쿠로스의 동시성 조건 | 죽음이 나쁘다는 것을 느낄 주체가 없는가? | 뒤집어 보기 | 더 깊이 읽기
11.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저출산은 재앙인가? |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의무 | 출산의 윤리 | 양육과 가난 구제 |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희생인가? | 쾌락과 고통의 비대칭성 | 항상 적자인 삶 | 뒤집어 보기 | 더 깊이 읽기
12. 국가는 가능한 한 없는 것이 좋다
국가가 없는 남쪽으로 튀어 | 자유 지상주의 | 터럭 한 올도 건드리지 마라 | 내 동의 없이 내 돈은 아무도 가져갈 수 없다 | 세금은 합법적인 도둑질이다 | 국가의 쓸데없는 참견 | 뒤집어 보기 | 더 깊이 읽기
13. 한 명보다 다섯 명이 죽는 것이 낫다
트롤리를 아시나요? | 갈림길의 트롤리 | 누구 직관이 더 옳은가? | 현실적인 고민 | 뚱보를 밀어서 멈추게 하라 | 의도하지 않은 결과일 뿐 | 책임 회피 | 양도할 수 없는 권리 | 권리는 수로 결정할 수 없다 | 뒤집어 보기 | 더 깊이 읽기
14. 내가 한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다
집단이 끼치는 해악 | 나의 행동은 새 발의 피 | “모두가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겠니?” | 정말로 인과 관계가 있는가? | 문턱 넘어서기 |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안 했기 때문에 잘못이다? | 뒤집어 보기 | 더 깊이 읽기
15. 윤리적 육식은 가능하다
형용 모순 | 애정과 윤리 | 성차별 또는 인종차별은 왜 옳지 않은가? | 인간이라면 모두 평등하게 갖는 특성 | 동물의 기본적인 욕구 | 고통 없는 사육과 도살 | 윤리적 육식을 위하여 | 뒤집어 보기 | 더 깊이 읽기
16. 과학이나 미신이나 그게 그거다
침대는 과학입니다 | 과학의 지식은 왜 다른 지식보다 더 믿을 만할까? | 귀납 논증을 사용하지 않는 과학자들 | 추측과 반박 | 패러다임 | 퍼즐 풀이, 이상 현상, 혁명 | 공약 불가능한 개종 | 뭐든지 좋다 | 뒤집어 보기 | 더 깊이 읽기
17. 우리는 매트릭스에 살고 있다
매트릭스와 가상 현실 | 나비의 꿈 | 방법적 회의 | 꿈의 논증 | 전지전능한 악마 논증 | 현대판 전지전능한 악마, 슈퍼컴퓨터 | 악마 의사와 통 속의 뇌 | 게임 속 세상 |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뒤집어 보기 | 더 깊이 읽기
책 속으로
왜 위험하기까지 한 어떤 생각은 철학이 되었을까요? 그 생각들은 철학자들이 흔히 하는 말로 ‘이성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 이르게 된 결론입니다. 물론 철학에는 ‘정설’이나 ‘다수설’ 같은 게 없고, 어떤 주장이든 끊임없이 비판의 대상이 되므로 그런 비상식적 주장도 상식에 근거해 다시 비판받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철학적 사고 과정을 따라가 보는 것 자체가 철학적 토의에 직접 참여하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처럼 ‘이성이 이끄는 대로’ 생각하다 보면 철학자들이 내놓은 생각에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테고, 그럼 새로운 철학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겁니다.
--- p.12~13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철학에서는 나름 합리적이라고 제시했던 근거도 의심스러우면 얼마든지 비판하고 새로운 주장을 제시합니다. 세상은 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탈레스의 주장도 그렇습니다. 탈레스의 뒤를 이은 후배 철학자들인 아낙시만드로스와 아낙시메네스도 이 세상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지 각자 말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밀레투스를 중심으로 활동했다고 해서 밀레투스학파라고 부릅니다. 물론 탈레스의 주장이 현대 과학의 시각에서 보면 틀린 말이듯 그들의 주장도 틀렸습니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맞는 말이냐 틀린 말이냐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근원을 묻기 시작했다는 점, 신화적인 방법이 아니라 합리적 방법으로 그 대답을 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철학을 처음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 p.36
대중매체 속의 좀비는 그저 재미를 위해 만든 상상의 산물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시체가 부활하여 움직인다는 것은 현대 과학에 어긋나며, 혹시 그렇게 움직인다면 그것은 시체가 아니니, 비과학적인 것을 신봉하는 오컬트주의자나 좀비를 진지하게 생각하겠죠. 만에 하나 그런 좀비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좀비임을 금방 눈치챕니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어떻게 그런 좀비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하고, 더구나 겉으로는 우리와 구분되지 않는다고까지 말할까요? 이성에 따른다는 철학자가 오컬트 마니아처럼 현대 과학에 어긋나는 주장을 하는 걸까요? 부두교에서는 부활과 같은 종교적인 의미를 위해 좀비를 상상하고, 영화 제작자들이야 재미를 위해 좀비를 만든다고 하지만, 철학자들은 왜 좀비를 상상할까요?
--- p.71
내일도 해가 떠오른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우리한테 주어진 정보는 지금까지 매일 해가 떠올랐다는 사실뿐입니다. 물론 하루 이틀이 아니라 지구가 생긴 이후로 수십억 년 곱하기 365일 떠올랐다는 지식을 전제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전제에서 내일 해도 떠오를 것이라는 결론을 확실히 내릴 수 있을까요? 우리가 아무리 여러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과거에서 현재까지의 지식일 뿐이고 미래에 대한 지식이 전혀 아닙니다. 미래의 일은 일어나기 전에는 전혀 확신할 수 없습니다. 물론 내일 아침이 되면 아마 해가 떠오를 테고 우리는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이제 미래의 지식이 아닙니다. 이미 과거의 지식인 거죠. 우리는 내일도 해가 떠오를 것이라는 지식을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습니다.
--- p.129~130
우리가 따라야 하는 도덕적 의무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켜야 하는 것이지, 무슨 무슨 사정이 허락하는 한에서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거짓말을 하지 마라.”가 의무라면 무조건 지켜야지, “분명히 나쁜 결과가 생길 때가 아니라면 거짓말을 하지 마라.”는 식으로 조건을 붙이면 안 됩니다. 칸트는 전자와 같은 명령을 정언명령이라고 부르고 후자와 같은 명령은 가언명령이라고 부르며, 도덕적 의무는 정언명령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언명령이 허용된다면 사람들은 갖가지 핑계를 갖다 붙여 자기에게 유리한 명령을 만들지 않을까요? 칸트가 걱정한 것은 사람들의 그런 합리화 아니었을까요?
--- p.178
노력도 선천적인 요소가 상당히 강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부지런하게 태어난 사람도 있고, 게으르게 태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동물을 보세요. 나무늘보처럼 1미터 움직이는 데 몇 분씩 걸리는 게으른 동물도 있고, 너무 바빠서 슬퍼할 틈조차 없는 벌꿀, 아니 꿀벌 같은 동물도 있는데 부지런하거나 게으르거나 하는 것도 천성 아닌가요? 사람도 그렇게 부지런하고 게으른 정도가 태어날 때부터 다 다릅니다. 그리고 비슷비슷하게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역시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노력하는 정도도 강화되기도 하고 약화되기도 합니다. 노력의 모범을 보이면서 자꾸 북돋워 주는 집도 있지만 만사에 태평한 집도 있으니까요. 결국 운이 아닌 게 뭐가 있나요? 로또도, 외모도, 출신 집안도, 실력도, 노력도 모두 운에 좌우되는 것 아닌가요?
--- p.195
불행한 사고가 난 지성인의 사례와 비슷한 예로 ‘더 좋은 시대에 태어났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태어난 갑순이는 그 시대 여자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교육도 받지 못하고 시집가서 남편과 아이들 뒤치다꺼리만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알았고, 그 나름대로 만족스럽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갑순이는 시 쓰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습니다. 갑순이는 죽기까지 자신이 그 재능을 살리지 못한 것도 몰랐습니다. 만약 현대에 태어났다면 교육도 제대로 받고 재능도 계발하여 훌륭한 시인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현대에 태어나지 못한 것이 갑순이에게는 큰 불행이고 나쁜 일입니다. 갑순이는 비록 그 나쁜 일을 느끼지 못하지만, 다시 말해서 에피쿠로스의 동시성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갑순이에게 나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바보와 소크라테스를 비교하는 경우처럼 시인으로서의 삶이 전통 사회의 여성으로 사는 삶보다 꼭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 p.248
최근의 채식 또는 동물권의 트렌드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윤리적 육식’이라는 말을 들으면 이것이야말로 형용 모순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다이어트나 종교적 이유로 채식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채식주의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윤리적 동기의 채식주의를 떠올립니다. 동물의 권리를 존중할 때 채식이 실천적 귀결로 도출되는 것으로 아는데, 윤리적 육식이라니? 육식이 어떻게 윤리적일 수 있습니까? 그것은 둥근 삼각형만큼이나 그 자체로 모순적이지 않습니까? 엄격한 윤리적 채식주의자라면 윤리적 육식이 가능하다는 것은 ‘윤리적 살인’이 가능하다는 주장만큼 터무니없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 p.355
출판사 서평
상식에 균열을, 신념에 망치를!
진정한 철학은 모두 불온하고 위험하다
갓난아이는 죽여도 상관없다. 장애가 있는 아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태아를 죽이는 것도 괜찮다. 적어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 공리주의 철학자 벤담 역시 영아 살해를 ‘아주 소심하게 생각해보아도 눈곱만큼도 꺼림칙하지 않은 성질의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왜 그렇게 끔찍하고 섬뜩한 발언을 했을까? 도대체 무슨 논리로? 철학자들은 오로지 ‘이성이 이끄는 대로’ 생각한다. 비록 직관이나 상식과 어긋나더라도 그것이 이성으로서만 도달한 결론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인다. ‘갓난아이는 죽여도 상관없다’는 생각도 오로지 이성에 기반을 둔 생각이다. 왜 소나 돼지는 죽이면서 인간은 죽이면 안 되는가? 인간은 왜 다른 동물보다 더 존엄한가? 무슨 특징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 짓게 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답을 이어나가다 보면 ‘갓난아이는 죽여도 상관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철학은 기존에 있던 지식이나 상식을 의심하고 반론을 제기하고 새로운 생각을 내놓으면서 발전해왔다. 따라서 진정한 철학은 위험하고 불온할 수밖에 없다. 철학자들은 보통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든 없든 그 결과에 상관없이 이성의 냉철함과 엄밀함으로 끝까지 밀어붙인다. 『위험한 철학책』에 나오는 철학들이 대표적인 그 결과이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고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거나, 돌멩이는 머릿속의 관념일 뿐이라거나, 내일도 해가 뜰지 안 뜰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거나, 착한 것도 운이라는 생각은 보통 사람은 평생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 문제들이지만, 철학자들은 아직까지도 진지하게 고민하고 토론하는 철학의 핵심 주제이다.
사고의 지평을 확장시킨 위험한 생각들
17가지 ‘위험한 생각’으로 만나는 철학의 본질
# 대학 입시 시험에서 외모나 인종, 가난 등을 이유로 차별을 받는 건 금지되어 있다. 그런데 왜 지적 능력으로 차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는가? 지적 능력은 노력의 대가라고? 하지만 지적 능력은 유전자의 영향력도 상당 부분 좌우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공부하고 노력할 분위기를 조성해주는 부모를 만나서 아닌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나는 사람은 없으니 지적 능력도 운 아닐까? 그럼 성적이 낮다는 이유로 서울대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 오히려 지적 능력이 낮은 사람이 더 좋은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닐까?
# 아이를 안 낳는 경우가 늘어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결혼하면 아이를 당연히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철학자들이 있다. “왜 아이를 낳아야 하는가? 아이를 낳는 것은 윤리적이지 않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드는 엄청난 양육비를 제3세계 아이들을 구제하는 데 쓰는 게 더 옳지 않은가? 죽어가는 수만 명의 아이를 구하는 일이 행복할지 그렇지 않을지 모르는 한 아이를 낳지 않는 것보다 더 윤리적이지 않을까? 아이를 키우면서 얻을 큰 행복이 있지 않느냐고? 누가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닌데, 그 행복이 아이를 낳지 않았을 때 느낄 행복보다 크다는 것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는가?
# 열두 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마 유영철에게는 죄가 없다고 주장한 철학자들이 있다. 그가 그런 범죄를 저지르게 된 까닭은 그의 성장 배경에 있을 테고, 그 성장 배경은 그가 선택한 것이 아니므로 유영철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그런 환경에 있다고 해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 아니냐는 반문에는, 유영철 말고 완전히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되묻는다. 다만 그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니 ‘격리’ 조치만 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철학 이론이라는 것은 그 본성상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상식과 먼 내용이 있다면 철학의 독특한 방법론이 더 많이 적용된 것 아닐까? 상식과 어긋나는 만큼 더 눈여겨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람이 죽더라도 절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거나 ‘눈앞에 보이는 이 돌멩이는 그저 내 머릿속에 있을 뿐’이라거나 ‘죽음은 그리 나쁜 것도 아니고 오히려 태어나지 않는 게 더 낫다’ 같은 직관 혹은 상식과 거리가 먼 주장을 왜 철학자들이 펼치는지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철학자처럼 생각하는 법
최훈 교수는 이 책에서 ‘철학자들의 사고 과정을 따라가 보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철학 이론은 어떤 자연적인 사실과의 대조로 그 이론의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기 때문에 진리나 정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따라서 철학자들이 내세우는 주장이 맞는 말인지 아닌지는 알 수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 1장에 나오는 탈레스의 “세상은 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주장은 거짓으로 드러났지만, 이후 데모크리토스의 “세상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주장은 현대 물리학 이론에 딱 맞다. 그렇다고 해서 탈레스는 ‘틀린’ 주장을 했고, 데모크리토스가 ‘맞는’ 주장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철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 주장에 이르는 사고 과정이다.
수학자들이 어떤 것을 증명할 때 보면 마지막 단계까지 한 단계 한 단계 꼼꼼하게 진행된다. 공리에 따른다든가 기존 증명에 의존한다든가 하는 근거가 있어야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철학의 추론 방식도 마찬가지다. 이성의 힘에 의존해서 모든 사람이 납득할 수 있을 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그렇게 따라가다 보면 뜻하지 않게 엉뚱한 결론에 이를 수 있다. 너무 엉뚱해서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증명 과정 중 어떤 부분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부분을 찾아서 이 대목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다고 반박하면 된다. 아무리 찾아도 그런 부분이 없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성이 이끄는 대로 따라왔으니 말이다. 이렇게 철학자들처럼 ‘이성이 이끄는 대로’ 생각하다 보면 철학자들이 내놓은 생각에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테고, 그럼 새로운 철학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