쳇- 하는 민성의 볼 맨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전화하길 잘 했다.”
“그래, 이쪽이 내용전달도 빠르고 편하긴 하지.”
“......네 목소리...... 듣고 싶었는데.”
“에? 너, 무, 무슨 말을.”
내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난 그 이유에 대한 갖은 추측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오해의 소지가 충분한 낮은 속삭임에 힘없이 주저앉아 버렸다.
고작 말 한마디였는데 얼굴이 걷잡을 수 없이 뜨거워졌다.
“영화, 토요일 5시에 시작이야. 그 시간이면 같이 볼 수 있어?”
질문에 조금 더듬거리는 투로 긍정의 대답을 내뱉었다.
조금만 생각한다면 또 다른 핑계를 대서 거절할 수 있었지만 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거 물어보려고 전화한 거야. 그럼 약속 시간에 늦지 마. 물론 그 전에도 연락 할 테지만. ......그럼 잘 자라.”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을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1분도 안 지난 것 같은 짧은 통화였다.
만약 민성의 여자 친구가 이걸 알게 된다면, 자신이 바쁜 탓이었다고 생각 하겠지만 역시 기분은 나쁠 것이다.
혹시 영화관에 쫓아와 꼬리치지 말라며 내 뺨을 때리는 건......?
그러자 상상일 뿐인데도 뺨이 얼얼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언제 여자 친구가 있는 지도 물어봐야겠다.
토요일 아침.
장마가 시작된 듯 며칠 전부터 쏟아지던 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다.
난 물이 뚝뚝 흐르는 바지를 벗어 빨래 통에 던져 넣었다.
내 옷이 얹어지자 젖은 옷들이 가득한 빨래 통이 입구까지 차 버렸다.
이렇게 습한 날엔 빨래도 잘 마르지 않는데.
문득 TV에서 광고했었던 건조 가능한 세탁기가 떠올랐다.
“사치, 사치!”
내 마음을 대변하는 듯 한 다진의 말소리가 화장실 밖으로 흘러 나왔다.
확실히 그렇다.
세탁기가 고장 나지도 않았는데 바꾼다는 건 사치다.
“휴지는 6칸만 있으면 된다! 그 이상은 사치, 사치.”
6칸?!
믿을 수 없는 소리가 귓가로 팔고 들어왔다.
난 ‘휴지 더 풀어!’ 라고 소리치며 화장실 앞을 지나쳤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갈 쯤 드르륵 거리는 철제 휴지걸이의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지금까지 6칸으로만 닦아 왔었다고 생각하니 내가 다 찝찝해졌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난 방안 구석에 자리 잡은 옷장 문을 열었다.
어제 밤에 잘 개켜 둔 밝은 티셔츠와 그에 어울리는 치마를 꺼내 들었다.
치마는 나에게 한 벌 밖에 없는 것으로, 인터넷 주문했다가 어제 받은 새 옷이었다.
민성이 예쁘게 하고 오란 소리만 안 했으면 앞으로도 사지 않았을 옷이었다.
“누나, 어디 가?”
옷을 입고 전신거울 앞에 서있는 나에게 던진 다진의 말이었다.
“영화 보러. 말 안했던가?”
“안했으니까 물어 보지. 엇, 옷도 못 보던 거다. 누구랑 가는데 옷까지 샀어?”
“......입을 게 없어서 산 거야! 그리고 나 영화만 보고 금방 올 거니까 밥 먹지 말고 있어. 맛있는 거 사다 줄게.”
“흐응~ 수상하다?”
“수상하긴 뭐가. 어떤 거 먹고 싶어?”
팔짱을 낀 다진이 ‘삼거리 치킨’이라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배달이 안 되는 곳이라 언제 사온 적이 있었는데 꽤 맛있었던 모양이다.
“친구 불러도 되니까 집 잘 지키고 있어. 싸움하러 가지 말고.”
“내가 언제 싸움 했다고!”
“여기, 여기, 여기. 증거가 있는데 어디서 발뺌이야?”
터진 입술과 멍들어 부어 오른 눈, 긁힌 상처를 콕콕 눌러 주었다.
그러자 아팠는지 팔을 들어 얼굴을 감싸 보이곤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흙탕물이 고인 골목길을 빠져나가자 문자가 한 통 도착했다.
[지하철 타지 말고 역 밖에 서있도록 해.] 앞뒤의 내용이 없는 달랑 한 문장이 적힌 문자였다.
지금 타도 늦을 것 같은 상황에 역 밖에 서있으라니.
난 서둘러 달려가 역 계단에 올라섰다.
그 때 빵- 빵- 하고 울리는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렸다.
무시하고 계단을 마저 올랐다.
하지만 더 시끄럽게 울리는 소리에 주위 사람들과 함께 뒤를 돌아보았다.
그 몰상식한 사람에게 창피를 주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차라곤 버스 한 대와 그 뒤에 서있는 검은색의 고급 세단이 전부였다.
모두들 보이지 않는 세단의 운전자를 주시하는 가운데 운전자가 내렸다.
민성이었다.
값비싸 보이는 수트 차림이었는데 마치 ‘재벌 2세’ 인 느낌이었다.
“야, 서 있으라고 한 문자 못 봤어?”
“봤어.”
“근데 지하철은 왜 타려고 한 거야? 하마터면 여기까지 왔다 혼자 가는 줄 알았잖아.”
“저기 일단 타고 얘기해도 될까?”
난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차 문을 열었다.
“어, 그러자. 예쁘게 꾸몄는데 젖게 할 순 없지.”
부끄럽게 만드는 말을 태연히 떠들고 차에 오르는 민성을 멈칫 쳐다보았다.
저런 말을 하던 애가 아니었는데 최근 그런 말들을 이상하게 자주 떠든다.
듣기 싫은 말은 아니었지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 지 몰라 슬슬 고민이 되던 차였다.
우산을 접고 뒤따라 차에 타자 날씨에 맞지 않게 붙어 있는 햇빛가리개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영화관에서 만나는 거 아니었어?”
“네가 주소를 말해 주기 전엔 그럴 생각이었지.”
“그리고 이 차, 네 꺼야? 나이가 몇 인데 차를!”
“23살.”
내가 허둥지둥 말하는 반면 민성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둘째 형은 안 빌려 주겠다 해서 큰 형 차 갖고 온 거야. 있으면 편할 거 같아서. 그렇게 놀랄 일이야?”
말을 계속하며 민성은 차를 부드럽게 출발시켰다.
“아니, 옷도 그렇고. 오늘 전체적인 느낌이......”
“근데 너희 집, 생각보다 영화관이랑 가깝더라. 여기서 5분? 그 정도 밖에 안 걸려.”
“어, 나 거기 알아! 하지만 약속 장소는......”
“착각했나 봐.”
하아? 어떻게 하면 일주일 가까이 착각할 수 있는 거야.
더구나 내가 아까 지하철 탔더라면 완전히 헛걸음 하는 거였잖아!
난 한숨을 내쉬며 손에 들려준 2장의 영화표를 펼쳐 보았다.
영화는 최근 인터넷 포털사이트 배너광고에도 뜬 적 있는 공포물이었다.
첫댓글 재밌어요!남주 왠지 재벌 스멜이ㅋㅋㅋㅋ
재밌다고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ㅠㅠ 너무 짧아요 ㅎㅎㅎ 완전 아쉽!!! 담편은 좀~길~~~게 써주세용 ㅎㅎㅎㅎ 너무 재밌어요!!!
내용은 떠오르는데 글로 표현이 잘 안되네요ㅜㅜ 길~게 쓰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너무 재밌어요 ㅋㅋㅋ남주가 부잣집 도련님인건가 ㅎㅎㅎㅎ 남주가 맘에 아주 드네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빨리 업업업 ㅎㅎㅎ
하하. 많이 늦죠? 죄송합니다. 그리고 댓글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