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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28 - 오현제 시대를 연 네르바 황제와 영토를 확장한 트라야누스 황제!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7권을 “악명높은 황제들” 이라며 티베리우스 - 칼리굴라 - 클라우디우스 -
네로의 4부로 적었으며, 8권은 “위기와 극복” 이라 한후 갈바 - 오토 - 비텔리우스 - 베스파시아누스 -
티투스 - 도미티아누스 - 네르바 순으로 적었고 제 9권은‘현자의 세기“ 로 트라야누스 황제 부터 시작합니다.
네르바는 로마제국 제12대 황제로 최전성기인 서기 2세기 동안 100여년을 통치한 네르바- 안토니누스 왕조의
창건자로,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지명해서 평화롭게 제위를 이양했는데, 즉위 과정과 양자 선정이
미스테리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니콜로 마키아벨리의“로마사 논고”로 부터 시작된 오현제 중의 첫 번때 입니다.
네르바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주의 나르니 출생으로 30년 11월 8일에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마르쿠스' 는 증조부때 부터 연이어 물려받은 이름이었으며, 이탈리아에
기원을 둔 로마 상류층 엘리트로 오래전 공화정 시절부터 원로원 의석을 차지해온 귀족 가문이었습니다.
네르바 가문은 대대로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협력한 정치 명문가
였으니 네르바의 증조부 마르쿠스 네르바는 내전기 때 삼두파 중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를 지지한 원로원 귀족이었고, 공화정 말기인 BC 36년도 집정관을 역임했습니다.
조부 마르쿠스 네르바는 법률가로 명성을 떨쳤던 원로원 의원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이자 후계자
티베리우스의 몇 안되는 친한 친구로 티베리우스의 법률 조언자였으니 황제 추천으로
서기 21년 7월 집정관에 올랐으며 카프레이아(카프리) 섬의 별궁으로 함께 옮긴 최측근이었습니다.
부친 마르쿠스 네르바 역시 원로원 의원으로 비텔리우스와 원로원내 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파의 대표적
인사로 칼리굴라 황제 집권중에 집정관을 지냈으며 외가 역시 공화정 시대로부터 내려온 명문가에
속했고, 4대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지지하던 원로원의 황제파 정치 가문으로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네르바는 네로시대 30대 젊은 나이에 원로원 의원 중에 이탈리아 귀족을 대표하는 정치가이자 황제파
인사로 제국의 행정과 외교 업무를 맡았는데, 성격이 원만해 적이 없었으니
네로는 네르바를 총애했고, 문학적인 재능과 능력을 높이 평가해 네르바의 문학 작품을 극찬했습니다.
가문 대대로 협력했던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네로의 자살로 막을 내리자,
네르바는 내전기간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대신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충성했으며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치세하에서 71년 집정관을 지냈습니다.
90년에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도미티아누스는 네르바와
함께 집정관직에 올랐으니.... 반란이 일어났던 민감한 시기에 도미티아누스가
그를 선택했다는 것인데, 네르바가 원로원 내에서 신망이 두터운 중진이었음을 의미합니다.
96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팔라티노 황궁 침실에서 암살당하자 네르바는 고령인데다가
병중에도 원로원에 의해 황제에 옹립되었는데, 네르바가 황제로 지목된
것은 조종하기 쉬운 노인을 자리에 앉히고는 원로원이 정국을 장악하려고 한 것입니다.
도미티아누스에게 조카를 잃은 네르바를 상징으로 삼아 플라비우스 왕조의 악행을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깔려있었는데, 도미티아누스가 실각한게 아니라 암살당했는데도 원로원은 사후
도미티아누스를 단죄했으니 분풀이 였지만 원로원이 그들 주도하의 정국을 구상했다는 것입니다.
네르바는 단죄당하는 원로원 의원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으며 사재를 전부 기부해 사심이 없음
을 밝혔는데,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리키니아누스를 저런
맹세에도 불구하고 네르바는 세번에 걸쳐 꼬투리를 잡아 처벌하려 한 것도 여러 말을 낳았습니다.
제위 계승이 잡음 없이 이루어진 덕분에 내전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군대의 인기가 높았던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노인이 들어앉은데 근위대는 불만을 품었으며 네르바도 알고 있었으니 플라비우스
왕조 세 황제 모두와 긴밀한 사이였고 베스파시아누스와 도미티아누스는 그에게 속마음도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네르바는 네로의 몰락과 “네 황제의 해” 기간 동안의 무정부 상태를 봤고, 직접 해결했던 사람인 까닭에
몇시간이라도 주저한다면 폭력적인 내전으로 치닫게 될 것을 인식했으니 즉위 직후,
원로원이 도미티아누스에 기록말살형을 통과시키고 이행하는 조치를 하는 것에 신중하도록 권고했습니다.
그렇지만 원로원은 도미티아누스의 모든 것을 없애고 싶어했으니 초상화는 모두 네르바의 얼굴로
교체된 뒤 재전시되었고 원로원 및 황궁 관료 세력은 네르바가 움직이기 전,
팔라티누스 언덕에 세워진 광대한 크기의 '플라비우스 궁전' 을 '시민의 집' 으로 명칭을 바꿨습니다.
이렇게 되자, 네르바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대한 향수가 강한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 로마군,
서민 모두의 불만이 클 것임을 직감했으니.... 어쩔 수 없이,
살루스트 정원 안에 마련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소유의 옛 별장에 거처를 마련해 살아야 했습니다.
네르바는 원로원이 내세운 방패막이 황제였으니 원로원의 도미티아누스 흔적 지우기를 막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으며, 원로원 의원들이 도미티아누스를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칼리굴라) 보다 암울하고 잔혹했다며 네르바에게 동료 원로원 의원의 특권을 보장할 것을 강요합니다.
네르바는 96년 즉위후 원로원 회의에서 "본인이 집권하는 이상 단 한명의 원로원 의원도 기소하거나,
죽이지 않겠다." 고 맹세하고는 선제 도미티아누스가 기소한 사건들을 폐기하고, 희생된 사람,
투옥된 사람, 유배된 사람을 사면하고 재산을 돌려줬으며, 새 화폐를 발행하면서
도미티아누스가 내세운 공평, 정의, 자유, 법치' 를 지우고 악의적인 기소의 폐지와 관용을 강조합니다.
그렇지만 네르바는 여전히 지지기반이 약했으니 유명하고 신뢰할 친구와 조언자들에게 크게 의존
하는 것은 원로원 내부의 친 도미티아누스 파벌을 자극할 것이 분명했으니, 당시
네르바의 친구들과 조언자들은 모두 고령이었고 이들은 무력집단인 군대를 통제할 힘이 없었습니다.
네르바는 신임 황제가 하던 관례대로 시민들에게는 1인당 75데나리우스(은화) 의 콩기아리움(3.48리터)
을 주고, 프라이토리아니 부대원에게는 1인당 5,000데나리우스의 충성 보너스를 즉시 지불
형식으로 주었으며 중위 소득 이하의 로마인과 그 가족의 세금 부담을 경감하는 일련의 조치를 실행합니다
무산자에게 최대 6,000만 세스테르티우스 가격의 땅을 할당한 조치도 있었으며이 외에도 부모와 자녀 사이
오가는 5% 상속세의 면제, 본국 이탈리아 농민들을 위한 무상 대출, 로마와 이탈리아 주민 자녀들의
교육과 복지를 위한 기금 마련, 본국 이탈리아 내 자치단체 및 시의회에게 5% 이자금 지불 등을 실행합니다.
그렇지만 네르바의 이런 관용책과 빵과 서커스는 선제 도미티아누스가 마련한 막대한 흑자의
국고에서 그만큼 부담할 금액이 많아짐을 뜻했으며 더군다나, 네르바는 앞뒤
따지지 않고 국고 자금 남용을 폐지한다며 잘못된 재정 운용책을 펼쳐 혼란을 유발시킵니다.
네르바는 지출을 대폭 줄여야 되는 현실에 직면하니 원로원의 협조를 받아 네르바와 함께 한 특별 위원들은
황제의 이름으로 황궁과 정부의 지출을 줄이겠다며 종교제, 황제가 맡은 빵과 서커스 축제, 전차경주
대회, 경마 대회를 폐지했고 황제 소유의 선박, 부동산, 가구, 보석류를 모조리 경매를 통해서 팔게 합니다.
도미티아누스가 건설한 포룸은 네르바 포룸이 되었고, 새 수도교, 곡물창고, 도로까지 모두 네르바가 한게
되었는데, 기록말살형이라는 상황을 고려하면 당연한 행동이었지만 도미티아누스는 프라이토리아니와
군대 및 대중에게 공정하고 미덕을 가진 황제로 호평받아 흔적을 지우는게 불만을 초래할 위험이 컸습니다.
불만을 감지한 네르바는 병사와 대중에게 원한을 사고있던 티투스 페트로니우스 세쿤두스를 해임하고
카스페리우스 아일리아누스를 근위대장으로 복직시켰는데, 이런 조치는 독이 되었으니
아일리아누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존경하고, 그가 내세운 법 아래 공평함을 찬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하들 처럼 시해된 도미티아누스가 기록말살형을 당한 것이 부당하다고 느꼈고, 오히려 그를
신격화 시켜야 된다고 생각했으니 아일리아누스는 "네르바와 원로원이 도미티아누스
암살자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는 주장을 펼치며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끌고 수도 로마를 포위합니다.
아일리아누스와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 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제어할 세력은 없었으니 원로원
대다수는 제 살길을 위해 방관했고 군부와 연이 있어 중재 역할을 해줄 이들은 이미
피소 프루기 사건 등을 보면서 네르바가 자업자득이라는 식으로 궁중 쿠데타 세력을 용인합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네르바가 제위에 오른지 2년이 지나기도 전인 서기 98년 1월 27일 청중들에게 자신의 처지
를 주제로 연설하던중, 고령의 나이와 최근 겪은 스트레스로 고생한 와중에 겪은 후유증 탓에 뇌졸중
증세를 호소하며 쓰러졌으며...... 며칠 뒤, 네르바는 별장 안에서 유폐된채 열병으로 고생하다가 붕어합니다.
화장된 유해는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안장되었는데, 네르바 황제를 마지막으로 아우구스투스 영묘의 묘실이
가득 차서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는 아일리우스 영묘를 새로 건설해 황제 일가의 무덤으로 삼게 됩니다.
포로 로마노에 포룸이 완공되었을 때 당시 황제였던 네르바의 이름이 붙어 '네르바 포룸' 이
되었지만, 도미티아누스가 착공을 지시했던 건축물이었고, 애초에 오현제에
들어간 것 자체가 원로원과 타키투스등 친 원로원 성향의 역사가들의 미화 때문이었습니다.
네르바가 트라야누스를 지명한 결단은 내전 직전까지 몰린 제국을 구해냈으니, 짧은 재위 기간 그가 취한
관용책과 선제 도미티아누스시대 발생한 희생자들의 명예회복 조치는 파탄으로 치닫고 있는 정국을
안정시켰고 이런 공로와 함께 네르바는 반은 타의였지만 어쨌든간에 양자 계승의 원칙을 확립한 것입니다.
다른 왕조들과는 달리 네르바- 안토니누스 왕조는 내전 없이 성립되었고, 원로원과의 관계가 좋은
편이으로 네르바의 공이 컸으니, 네르바로서는 반(半) 강제로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를 지명한 상태였고, 양자 지명은 후사가 없는 로마 귀족들의 관습상 늘상 있는 조치였습니다.
전해져 내려오는 애기로는 유배를 당한 사도 요한을 그가 풀어주었다고 하며 로마 황제 중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마지막으로 묻힌 황제로, 해당 영묘의 매장자들 중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와는 혈연 관계도 인척 관계도 없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트라야누스의 즉위는 계승이라기 보다는 성공한 쿠데타라는 평이 있으며 네르바를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 콤모두스 모두 부정하지 않았으니
네르바를 부정한다는 것은... 왕조의 실질적인 창건자 트라야누스의 정통성에 흠집을 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트라야누스는 로마제국 13대 황제이자 최전성기를 이룩한 황제로 5현제 시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두번째 황제이지만, 왕조의 실질적 창건자로 볼 수 있으며 최초의
속주 출신 로마 황제로, 로마인들이 미덕으로 여긴 실질강건한 생활을 보여준 황제였습니다.
재위기간이 짧아 명군인지 조차 의심되는 네르바나, 괴팍한 성격으로 사후 기록말살형을 당할뻔했으나
후계 황제인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가까스로 만류해 기록말살형을 모면한 하드리아누스
는 말할 것도 없고, 안토니누스 피우스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모두 옥의 티가
있었지만.... 트라야누스는 명군이자 시대적 한계에도 자유로운 황제니 청나라의 강희제와 비슷합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53년 속주 히스파니아 도시 이탈리카에서 태어났으니 누나 울피아 마르키아나는
법무관을 지낸 이탈리아 귀족이자 부유한 원로원 의원 파트루이누스와 결혼해 딸 살로니아
마티디아와 외아들 파트루이누스를 뒀으니 트라야누스 사후, 상호 입양을 통해 안토니누스
황실을 이었는데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콤모두스 입니다.
트라야누스의 울피우스 씨족 가문은 이탈리아 움브리아주의 페루자 근처 토디에서 기원한 라틴 혈통
의 이탈리아인 가문이지만, 조상은 일찍이 히스파니아의 이탈리카로 건너가 정착했으며,
황제의 가계는 현지 여성들과 혼혈이 진행돼 사실상 히스파니아인과 다름 없는 로마인 이었습니다.
트라야누스 가문은 히스파니아 내 소도시 출신이라 로마 중앙 정계에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며, 황제의 외가 역시 오래된 이탈리아의 마르키우스 가문인 것을 제
외하곤 중앙 정계 내 입지에선 히스파니아인 출신 상류 가문과 다름없는 상태였습니다.
트라야누스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 가문의 이름이 중앙 정계에 처음 나타나는데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귀족 칭호를 부여한 것으로, 아버지는 클라우디우스 1세 시절 원로원에 입성한 원로원
의원이었고 플라비우스 왕조 이전에 등장한 신참자니 연줄 덕분에 귀족 반열에 오른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부친 트라야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부하로 알려져 있는데, 네로 시대의 명장 코르불로 휘하에서
베스파시아누스처럼 군단장을 지냈으니, 제1차 유대 전쟁 당시 베스파시아누스 밑에서 로마군을
지휘하며 신임을 받았으며, 네로 사후 혼란기의 로마를 수습한 베스파시아누스를 따라 전공을 세웁니다.
69년 황제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과 두 아들의 권력 기반을 확대하면서, 네로 시대 문제를 타파할 해결책을
냈으니, 로마군 개방과 라틴권 확대 정책을 추진해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로마 시민권자들에게 로마군
입대 자격을 부여하고 라틴권 확대 혜택을 부여한 것이니 속주 로마인들에게 적극적으로 문호를 개방합니다.
그동안 소외된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태생 인재들이 대거 중앙 정계로 유입되는데, 이 흐름 속에서
본래 원로원 의원이었던 트라야누스의 아버지는 귀족 칭호를 부여받았던
것이며 이후 집정관을 지내고 시리아 총독에 임명돼 파르티아인의 침공을 격퇴하는 공을 세웠습니다.
트라야누스는 부모, 누나와 함께 이탈리카를 떠나 이탈리아로 건너갔으며 아버지를 따라 원로원 의원의 아들들
처럼 군 복무를 하면서 중앙 정계에 발을 들인 것으로 보이는데, 아버지가 군 사령관이었고, 대(對) 파르티아
전선의 긴장도가 높은 시리아에서 복무한 것에 트라야누스도 어렸을 때부터 군생활에 익숙했을 확률은 높습니다.
참모진으로 시리아에 근무하는 10년간 군 복무를 했으며, 많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제국의 다양한 환경 속에서
로마군 장교로 실력을 쌓았는데 트라야누스는 로마 또는 히스파니아를 오가며 생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86년 트라야누스는 외사촌 아페르의 유언에 따라, 아티아누스와 함께 오촌 조카인 하드리아누스 남매의 공동
보호자가 됐으며, 89년 히스파니아에서 제7군단 사령관을 맡았는데, 이 해에 라인강 상(上) 게르마니아
속주 총독이 황제였던 도미티아누스에게 반란을 일으키자.... 황제는 트라야누스에게 진압 명령을 내립니다.
트라야누스가 군대를 이끌고 라인강에 도착했을때 상황은 종료된 후였고, 트라야누스는 로마로 돌아
가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경호를 맡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트라야누스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공석이 되어버린 상(上) 게르마니아 속주 총독에 임명합니다.
도미티아누스는 트라야누스를 무척 총애했으니 황제는 트라야누스를 85년 법무관, 91년
집정관에 연이어 오르도록 후원했고 특히 91년, 트라야누스의 생애 첫 집정관 경험은
나이가 30대 후반임을 감안하면 얼마나 도미티아누스의 총애를 받았는지 알게해줍니다.
서기 96년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팔라티누스 황궁 안에서 암살을 당했고, 원로원의 추대를 받아
네르바가 황제가 됐는데, 네르바는 나이많고 명민한 인물로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를 도와 플라비우스 왕조가 세워잘때 공을 세운 명문가 후예였습니다.
하지만 네르바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에게 양자인 조카 오토 코케이아누스를 잃어, 군대와 근위대
에게 암살 배후로 의심을 샀으며.... 네르바는 즉위 연설과 맹세로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해범과 의심받는 인사 처벌 과정에서 몇 가지 언행으로 군대 내의 거부감을 사게 됩니다.
인기가 좋았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사후 처리를 네르바가 등한시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 선서와
맹세에도 네르바가 11월 열린 국가 축제에서 음모조차 꾸미는데 서툴고 유순한 원로원
의원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와 그의 아내를 어설픈 조작으로 숙청하려고 한 사건이 엮여 있었습니다.
근위대는 네르바가 뭔가를 숨긴다고 확신했고 네르바의 관용책과 큰 시혜는 여론과 군대 지지를 반전시키지
못했으며 그가 지명해 취임한 근위대장은 공교롭게 도미티아누스를 존경한 '카스페리우스 아일리아누스'
였으니 도미티아누스가 내세운 법 앞의 공평함을 신봉했고 기록말살형 선고 등 일련 조치에 불만이 컸습니다.
결국 근위대가 쿠데타를 일으켜 네르바를 협박해 도미티아누스를 암살한 실행범들인 궁정 관리들을
끌어내 참살했고, 네르바는 연금됐으며 원로원 대다수는 제 살길을 찾아 방관했고
네르바는 고립되니 황제의 권위는 약화되었고 남은 2~ 3개월은 군부의 뜻에 따라 좌지우지 됩니다.
유폐된 황제 네르바는 군대의 지지를 받을수 있고, 자신에게 등을 돌린 원로원 내의 뜻이기도 한
트라야누스를 97년 후계자에 지명했는데, 트라야누스는 군대의 지지와 존경을 받았고,
원로원 인사중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의 친구이자 인척이었으며 게르마니아에서 근무중이었습니다.
97년 트라야누스 양자 지명은 "네르바가 오현제에 포함된 이유는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골랐기
때문" 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파격적인 선택이었지만, 현대에는 트라야누스의
후계자 지명이 근위대가 결정하고 실권을 뺏긴 네르바는 추인만 해준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트라야누스를 도운 98년 보결 집정관 중 한명은 네르바의 친구 아리우스 안토니누스의
사위 푸블리우스 루푸스였으니, 그래서 트라야누스의 등장은 선양 조치 속에서
평화롭게 흘러간 안정으로 비춰졌지만 트라야누스는 전방에 나가 있었고 로마로 오지는 않았습니다.
트라야누스는 실권을 쥐었고, 원로원은 게르마니쿠스라는 칭호를 수여했으며 98년 초 네르바가 연설
중에 뇌졸중 증세 호소 후에 쓰러져 유폐된 별궁에서 사망하니 제위에 오르게 되는데,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로 군 경력이 화려했으니 총독 신분에 '게르마니쿠스' 라는 칭호도 받았습니다.
트라야누스는 98년 1월 상(上) 게르마니아 속주 총독 상태에서 황제 등극을 통고받았는데, 원로원
에서 황제의 권력을 넘겨받기 위해 로마로 돌아오지는 않고 네르바가 죽은 뒤 무려
2년간 레누스강과 다누비우스강 유역을 시찰하면서 국방 체제를 정비하고 강화시키는데 주력합니다.
동시대 원로원 의원이자 사가 소(小) 플리니우스는 "다누비우스 강에 선 트라야누스는 어떠한 적도 보이지
않자, 건널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용기와 절제를 모두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고 말하는데, 트라야누스
는 다누비우스 전선 일대에 주둔중인 로마군에게 신경을 쓰고 일어날 수 있는 문제 예방에 힘을 쏟았습니다.
황제에 오른 그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도미티아누스 암살 이후 계속되는 소요를 예방하고 새 황제가
로마군의 주력인 레누스- 다누비우스 일대 병력에게서 확실한 충성심을 받아내기
위한 일이었다는데.... 또 이 시기부터 트라야누스가 다키아 전쟁을 미리 계획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99년 늦여름이 되어서야 로마에 입성했는데 트라야누스의 모습은 철백색 머리를 가진 강인한 얼굴에
당당한 체구, 무뚝뚝한 인상에 로마인들이 말하는 군인 그 자체로 비춰졌으니 임페라토르
라는 직위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칭송을 받았고 원로원과 로마인들에게 큰 갈채를 받았습니다.
또 새 황제가 말에서 내려 로마에 들어온뒤, 반기는 원로원 의원들을 차례로 끌어안고 백성들에게도 외모
답지 않게 겸손하고 다정하게 대해 인기는 치솟았으니, 이런 연유로 트라야누스는 원로원에는
따뜻하고 겸손한 황제로, 일반 서민들에게는 무뚝뚝하지만 따뜻하고 수수한 황제로 이미지를 얻게됩니다.
트라야누스는 원로원에서 신임 황제로 승인받는데 6시간 걸려 낭독한 소 플리니우스 찬가로 알려진 연설은
로마 도착후 피곤함이 남아 있을 트라야누스에겐 매우 힘든 순간이었으니, 소 플리니우스는 작심하고
트라야누스황제 앞에서 전임황제 도미티아누스를 오만하고 비겁하며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인물로 묘사합니다.
새롭게 등극한 트라야누스를 원로원을 배려하고 반대파 의원까지 공정하게 대우하며 숙련된 행정가이며 절제력
이 뛰어나고 인내심이 있고 관대한 통치자로 추켜세웠는데.... 그는 연설에서 트라야누스의 누나 울피아
마르키아나, 아내 폼페이아 플로티나에도 찬사를 보냈으니 찬가는 로마인에게 아부의 극치로 평가받았습니다.
이 대목중 그나마 약한 아부는 이랬는데.... "숲을 돌아다니시며 굴에서 맹수를 몰아내고, 광활한 산 정상을
오르시며 도움의 손길을 내밀거나 길을 안내해주는 이가 없이 험한 바위산을 찾고, 무엇보다도 경건한
마음으로 신성한 숲들을 찾아가시어 그곳의 신들 앞에 서는 것을 좋아하시는 경건함을 곁들인 인물이시노라."
트라야누스 황제는 이날 지정석에 앉은채 6시간 동안 꿈쩍하지 않았으니 칭찬이 지나친 나머지 황제
본인이나 로마인들까지 "끝도 없는 최고의 찬사로 신물이 날 지경" 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길었던 찬사 일색이었다고 평가받는 상황을 떠올리면, 경이로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트라야누스는 자신의 허락으로 보결 집정관이 되고 발언권으로 6시간동안 듣는 동료들까지 신물이 난 나머지
질려버린 소 플리니우스의 《찬사》를 무표정으로 들어줬는데, 그는 매우 지쳐 있었음에도, 연설을
끊지 못하게 했고 연설이 끝나자 무표정으로 소 플리니우스에게 짧게 감사함을 전한 뒤 곧바로 퇴장했습니다.
소 플리니우스는 황제가 자신을 진심으로 신뢰한다며, 온갖 이유로 서신을 보냈으니 로마 도착 직후부터 하루도
쉬지 못하고 많은 업무에 시달린 트라야누스 입장에선 귀찮을 정도였는데도 트라야누스는 온갖 행정 문제를
묻고, 시시콜콜한 개인문제에 정치 자문까지 요구한 플리니우스에게 꼼꼼하면서도 간략하게 모두 답변을 해줍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발언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무명의 원로원 의원들에게도 자상했으니 그들이 한미한 집안
출신이거나 젊거나 너무 늙었다는 이유로 발언권을 행사할때, 방해하지 않았고 책임감과
애국심을 고취시키면서 성실함과 노력을 칭찬했으니 트라야누스 황제는 언제나 원로원과 사이가 좋았습니다.
다만 트라야누스 황제는 재위기간에 위엄과 절제있는 강력한 황제로 원로원을 다뤘다고 하는데, 도미티아누스
처럼 지나치게 전제적인 태도로 행동하지 않았음에도, 권위를 추구했으며 원로원은 경건하면서 엄격
하게 느꼈으니 이전 황제들처럼 실권은 황제가 행사하고 공허한 예의 범절이나 규칙은 철저히 지켰다고 합니다.
또 트라야누스는 자신이 집정관등 선출직 관직과 고위 관료등을 선정하면서도, 원로원을 대할땐 자진
해서 법을 지키겠다는 오래된 관행적 맹세를 했으니, 이런 황제의 태도는 지루하고
형식적인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었는데 과거 티베리우스와 갈바 등과 달리 그런 느낌은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트라야누스는 집정관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조차 예의를 갖춰, 황제 본인이 집정관
자리에 오른 이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늘 원로원의 한 일원인 것으로 행동하면서
끝까지 상대를 배려했기 때문이니 원로원은 자신들이 황제에게 존중받는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즉위후 그가 가장 우선시한 것은 도미티아누스가 중단한 다키아 원정이었는데, 원정에 주력한
이유는 첫째, 도미티아누스 암살의 간접적 원인이 다키아 원정 실패에 있었다는 점이고
둘째, 로마 제국의 중요한 북방 경계선인 도나우강 하류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트라야누스는 101년 다키아 전쟁을 시작했으니 다키아 지역 주민들의 주무기인 팔크스, 롬파이아와
투척 도끼 때문에 많은 피해를 본 로마군은 정강이 받이와 검을 드는
오른팔을 보호하는 찰갑, 안면 가리개를 도입하는 식의 중무장화를 통해 다키아를 정복하기 시작합니다.
2차례 원정에서 트라야누스는 다키아를 정복하고 속주를 창설했으니 아우구스투스가 유언한 제국확장 금지원칙
을 어긴 첫번째이자 마지막 사례가 되었으며, 다키아 원정 과정에서 피정복민들에 대한 잔인하고 단호한 말살
정책을 펴서 초토화시켰으니 다키아왕 데케발루스는 사력을 다해 항전했으나 끝내 패망을 면치못하고 자살합니다.
다키아 원정 이후 줄어든 군비, 다키아의 풍부한 금, 은광으로 인한 예산의 증가, 다키아로
부터 철저히 약탈해온 풍부한 전리품으로 인해 엄청난 추가 예산이
확보되자 트라야누스는 속주들과 이탈리아, 로마 등지에서 대규모의 토목 공사를 실시합니다.
도로 · 교량 · 수로 건설, 황무지 개간, 항구 건설이 이루어졌으니 스페인, 북아프리카, 발칸반도,
이탈리아에 유적이 남아있으며..... 특히 로마는 트라야누스의 토목 공사로 풍요롭게
변모했으니, 트라야누스의 건축은 포로 로마노의 트라야누스 포룸, 도나우강 중류에
있는 트라야누스 다리를 들수 있으며 트라야누스 기둥에는 다키아 왕 데케발루스가 새겨져 있습니다.
“박물지” 저자 대(大) 플리니우스의 양자이자 조카인 소(小) 플리니우스는 비티니아, 폰투스 속주에서
총독으로 재임한 동안, 놀라울 정도로 방대한 양의 서신을 트라야누스 황제와 주고 받았고
이를 ‘서한집’ 이라는 기록으로 남겼으니 원수정 시대의 로마 통치 체계 연구를 하는데 많이 참조됩니다.
황제들은 속주 총독외에 현지 유력자, 지식인 탄원서를 전달받고, 총독과 군단장들의 보고서및 동향 보고도
매일 올라왔기 때문에 업무량은 살인적인 수준으로 벅찼으니 황제들은 비서와 관료들에게 일부 사무를
담당하도록 하거나 매뉴얼에 따라 답변하고 때론 명령을 덧붙여 가이드라인을 보내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마찬가지로 시간을 쪼개 국정을 돌봤던 황제로 말안되는
보고서와 편지도 성실히 답변한 원칙주의자였으며 행정을 처리하는데 있어, 법으로만 해결하기 보다는
테두리 안에서 융통성있게 해결하도록 단호하게 지시했으니 유연하고 지혜로운 모습 많은 행정가 였습니다.
110년 플리니우스가 보낸 기독교도 처리 문제에 트라야누스는 기독교 공인된후 후대 로마인들에게 착한 이교도
황제로 칭찬받을 정도로 상식적이고 공정하게 플리니우스에게 조언했으니 마구잡이식 처벌을 피하고, 소송
절차에 따라 일방적으로 행정을 처리하면 안된다 말했으며 익명 밀고자들은 무시하라는 단호한 답변을 보냅니다.
서기 110년 트라야누스는 플리니우스에게 기독교도들의 행방을 밝히지도 캐지도 말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국가 제례를 거부하는 기독교인은 처벌하라는 국법을 따르면서도, 밀고를 받거나 마구잡이
식으로 처벌하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으니 종교조직으로 기독교는 탄압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공공연하게 로마의 국가적 의례를 거부하는 개인의 행동만을 문제로 삼은 것이니 당시 로마는 다신교
국가였고, 트라야누스 재위 기간에는 기독교 교세가 약했으나 콘스탄티누스 1세 이전까지
황제들은 로마 제국의 국가 제례를 거부하던 기독교를 사회불안 요소로 보았기에 탄압이 종종 있었습니다.
로마는 네로 황제 이후 아르메니아 왕위에 파르티아의 뜻에 맞는 인사를 앉히고 로마가 승인하는 형태로
양보해 파르티아와의 관계를 봉합하고 있었는데, 파르티아의 새로운 왕에 등극한 오스로에스
1세는 서기 110년 협정을 어기고 아르메니아왕을 폐위하고 파르타마시리스를 새 왕으로 앉힙니다.
로마의 동의를 받지않은 협정 파기였으니, 트라야누스는 로마에 우호적인 아르메니아왕이 폐위되자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서기 113년 가을 동방을 향해 출진했는데,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 전쟁을 통해 무역로 확보와 세수 확보 목적으로 전쟁을 벌였다고 보입니다.
허나 반만 맞는 말이니 오늘날과 같이 통관세가 붙지도 않고, 두 국가 모두 사치품 교역망 확보에 열을
올리며 경쟁하는 앙숙이 아니었기 때문이며 파르티아는 로마와 중국, 인도와의 무역을 중개만
하면서 방해하지 않았고 중간에서 폭리를 취하기 보단 자국 상인들에게 오롯이 맡긴 국가 였습니다.
로마사 학자들은 천상 군인인 그가 로마 군인들이 갖고있는 군사적 영예와 정복에 대한 강한 열망 때문에
전쟁을 계획했고 우려에도 밀어 붙였다고 설명하니 원로원 의원 비티니아 총독이었던 소 플리니우스
의 서한들, 후대의 디오 카시우스가 원로원 관보와 여러 기록을 토대로 기술한 저술에서 확인된다고 합니다.
트라야누스는 원로원 연설과 파르티아 전쟁 과정에서 파르티아 원정이 영토 확장과 군사적 위엄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강조했으며, 원로원 관보 등을 통해 기술한 1세기 뒤의 디오 카시우스의 증언 처럼 황제는
원정을 통해 얻을 군사적 영예에 집착했고 원정으로 어떤 로마인 보다 압도적인 군공을 세우고 싶어했습니다.
트라야누스의 동방 출정은 117년까지 계속됐는데, 전쟁 준비는 다키아 원정이 시작되기 전부터
차근차근 진행됐고 전쟁이 시작되었을때, 소모된 비용은 컸고 대부분은 동방의
여러 속주, 지방정부들에게 고스란히 청구돼 상상 이상으로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이 동원됐습니다.
트라야누스가 동방 원정을 시작했을 때, 10개 군단이 동부 전선에 집결했고 보급물자는 로마
제국의 동부 속주들이 분담했으니 식량과 무기 외에 각 속주마다 차출되는 보조병도
포함돼 실제 비용은 부유한 동부 일대 주민들도 부담을 가질만큼 꽤 컸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쟁 명분이 파르티아 협정 파기와 파르타마시리스 즉위니, 로마군은 트라야누스 지휘로 아르메니아를 침공해
파르타마시리스를 폐위시키고 아르메니아를 병합했으며, 코카서스 일대와 흑해 동부 연안까지 로마
속주로 병합시켰는데 루시우스 퀴에투스를 필두로 야전 사령관들이 로마군을 이끌고 파르티아를 공격했습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2년만에 로마 영토를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상류, 페르시아 만까지 넓혔으니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합병하고,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을 점령했으며 페르시아 만에 당도하게 됩니다.
로마 황제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메소포타미아를 점령하고 티그리스강을 내려가 페르시아만에
도달한 것인데....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 유럽 대륙의 군주로서 정복활동을 통해
동쪽 가장 먼 곳에 도달한 인물이 되었으며 나바테아 왕국을 굴복시켜 아라비아의 속주로 편입시킵니다.
고도 바빌론을 성지순례했는데 눈부신 군사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다키아 원정 때 초토화된 다키아를
생각한 파르티아 군소 영주들의 게릴라 활동과 보급선의 장기화, 보급 기지 안티오키아의
지진으로 말미암아 파르티아 전쟁은 점차 소득은 없고 비용만 많아지는 형태로 바뀌게 됩니다.
설상가상 제국 전역의 반란으로 확산됐으니 파르티아는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했고, 아르메니아도 로마에게
대항했으며, 다뉴브강 일대 사르마티아인과 록솔라니인들이 꿈틀거렸고, 브리타니아에서는 잠잠하던
칼레도니아쪽에서 불순한 움직임이 돌고 로마 수비대가 스코틀랜드 접경 지대에서 철수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동시다발적으로 반란과 소란이 터지자 셀레우키아, 메소포타미아, 아시리아까지 정신없는 상황이
벌어졌고, 키토스 전쟁이라고 부르는 유대의 반란까지 터졌으니.... 파르티아로 출정했던
로마군의 후방인 키레나이카와 이집트 및 키프로스 섬과 유대에서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수십만명의 로마 민간인들과 후방에 남겨진 소규모 로마군 수비대를 대량 학살합니다.
로마군에게 식량을 공급하던 곡창 이집트에서 유대인들의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로마군의 식량 보급이
위태로워졌으니 때문에 트라야누스 황제는 파르티아 원정을 도중에 포기하고 철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트라야누스는 신속하게 대응하면서 위기를 넘기려고 해도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유다이아 총독을 맡고
있던 베르베르 출신의 뛰어난 야전 사령관 루시우스 퀴에투스가 키레나이카, 키프로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유대인들이 일으킨 대규모 반란을 진압하고 리다를 함락해 상황을 수습합니다.
유대인들의 반란이 없어서 로마군의 후방과 식량 보급이 안정되었다면 아마 트라야누스
황제는 계속 파르티아를 밀어붙였을 것이고 어쩌면 파르티아가
완전히 멸망했을 수도 있었기에, 로마인들로서는 여러모로 아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116년 트라야누스와 로마는 동방 원정을 통해 파르티아에서 빼앗은 영토를 재정복하지 못하고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명목상 클리엔테스인 파르티아 왕자에게 넘기는 선에서 전쟁을 끝마치게 되며 트라야누스는
아시리아 속주와 대(大) 아르메니아로 불린 지역의 일부를 상실했는데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황제는 안티오키아로 돌아간 뒤 부족한 인적, 물적 자원을 한계치까지 징집해 메소포타미아
재탈환을 준비케하는데... 하지만 이 과정에서 로마 수뇌부는 우려를 표했고,
하트라 공성전까지 실패하고 본인은 열사병으로 건강이 안 좋아지는 결과까지 이어집니다.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 전쟁에 대한 실망감이 커졌고 로마군 분위기도 가라앉게 됐으며 서방과 달리 일교차가
심한 사막 기후에서 3년간 원정을 하면서, 황제의 건강은 악화된 터라 체시폰에서 돌아오던중
강철같은 건강마저 잃으니 트라야누스는 안티오키아에서 겨울을 지낸뒤 이듬해 봄에 로마로 귀환을 결정합니다.
트라야누스는 자신의 유일한 남자 친족이자 누나의 손녀 사위인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를 동방 사령관으로 임명한 뒤에, 육로로
킬리키아로 향했지만 귀환도중 중풍 증세를 호소하다가 결국에는 쓰러집니다.
오랜 긴장감과 원정 실패에 대한 자책, 아쉬움으로 힘겨워했던 몇달간의 모습 때문에 이렇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쓰러진 황제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며칠 뒤인 117년 8월 9일 킬리키아의 작은 섬 셀레누스에서 사망했으니 나이 64세였습니다.
장례가 치러졌으며 관례에 따라 신격화 되었는데..... 죽기 직전에 5촌 조카이자
시리아 속주 총독 하드리아누스를 양자로 지명해 후임
황제가 되게끔 했으니, 이를 두고 하드리아누스 재위 초반에 논란이 있었습니다.
트라야누스가 명시적으로 하드리아누스를 양자로 지명한 적이 없었으며, 양자 지명 자체가
트라야누스 사망 당시 플로티나 황후가 황제의 어명이라면서 대신 전달한 상황이었기
때문이고 게다가 트라야누스 사망 3일후 음료 담당 시종이 의문사하는 일까지 발생합니다.
로마 역대 황제 중 가장 뛰어난 군사적 업적을 세운 트라야누스는 사후 로마인들
에게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세운 다키아, 파르티아
원정 계획을 현실에 옮겨 영웅 같은 정복과 승리를 가져다준 황제로 기억됐습니다.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전쟁은 실패로 끝났고, 다키아 전쟁 승리 이후의 대처 역시 미완인 터라 하드리아누스
에게 넘어갔는데 하드리아누스는 전쟁으로 발생한 군사 비용과 인적, 물적 소비 관리 측면에 역량을
집중했는데 트라야누스 전쟁은 3개의 완충국을 없애거나 약화시켜 후임 황제들에게 재앙으로 찾아오게 됩니다.
Optimus Princeps 라는 칭호가 지고의 황제라고 번역되었는데..... 'Optimus' 라는 단어는 '완벽한'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즉, 트라야누스를 이미 동시대의 사람들은 완벽한 황제라고 여겼습니다.
트라야누스에 관한 로마인들의 찬사는 황제나 한 인간으로 모두 존경받았으니 로마 제국이 3세기
이후 쇠락기를 거치는 과정에서도, 후기 로마인들에게 트라야누스는 아우구스투스
와 함께 원수정 시대의 수많은 황제 중 유이하게 제국의 질서를 유지한 명군으로 찬사받습니다.
원로원 의원 소 플리니우스, 후대 사가로 네르바- 안토니누스 왕조와 세베루스 왕조
시대에 살았던 원로원 의원이자 사가 디오 카시우스 모두에게
황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최고의 찬가를 받은 거의 유일무이한 로마 황제였습니다.
소 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를 "권위주의 아래의 헌신으로 현명하고 공정한 황제이자 도덕적인 인간
의 표본이다" 라고 칭송했고, 디오 카시우스는 그가 "항상 고귀하고 공정했다" 고 말했습니다.
3세기 군인황제시대 로마황제 데키우스는 원로원에게 트라야누스라는 이름을 받은뒤, 자신과 아들들의
새로운 성씨로 '트라야누스' 를 삼을 정도로 위대한 황제로 여겼으며, 3세기 이후 로마
황제가 새로 즉위하면 즉위식에 참석한 군중들이 "Felicior Augusto, Melior Traiano!"
( "아우구스투스 보다 운이 좋고 트라야누스 보다 나은 통치를 빕니다!") 라며 축복하는 관습이 생깁니다.
아울러 기독교도들에게도 그는 여느 황제들과 달리 가장 이상적이고 선한 이교도로
기록될 정도로 평이 훌륭했으니..... 이런 이유 때문에《신곡》의 시인
단테의 작품에도 트라야누스가 림보도 연옥도 아니고 천국에 있는 것으로 등장합니다.
트라야누스 때 로마 경제는 풍요로웠고, 군사적으로도 적대국을 모두 격파한데다가 성격
까지 모나지 않아 원로원과의 사이도 좋았으며, 또한 일상 생활에서
구설수에 오른 적도 없으니 당대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말로 완벽한 황제라 불릴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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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네 믿음은 네 생각이 된다 .
네 생각은 네 말이 된다.
네말은 네 행동이 된다
네행동은 네 습관이된다 .
네 습관은 네 가치가 된다 .
네 가치는 네 운명이 된다
오늘 하루를 만끽하며 살아야 한다.
건강과 행운이 있는 행복한 시간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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