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蓮池大師 전기 蓮池大師(公元1523~1615年)는 명나라 때 항주 인화현 사람으로 성은 심씨(沈氏)이고 명망있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주장(株宏)이고, 법명불혜(佛慧)이며 호가 연지 (蓮池)이고 정토종의 제 8대 조사이다. 40이 넘어서 출가하였는데 세상에서 연지대사(蓮池大師) 또는 운서화상(雲棲和尙)이라 불렀다. 처음에 대사의 이웃집에 한 노파가 있어서 불명 수 천 번을 일과로 부르므로 그 연고를 물으니 노파가 말하기를.. 「선부(先夫)가 염불하다가 병 없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염불 공덕 이 불가사의함을 알고는 그 후부터 정토에 마음을 두어 안두(案頭)를 만나 진리를 깨달았으나 더욱 연종을 널리 퍼뜨려 실행되게 함에 전력하여 널리 염불을 권장하였다. 二十七세에 부친을 여위고 三十二세에 모친이 돌아가시자 대사는 출가하여 수행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래서 부인과 결별할 것을 고하면서:「恩愛한다 하나 무상앞에서는 생사를 대신할 수 없으니 나는 출가하려고 합니다. 당신은 스스로 알아서 잘 사십시오.」하니 부인 湯氏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당신이 한 발찍 먼저 가십시오. 저는 제가 알아서 하리다.」하였다. 大師가 가정을 등지고 서산에 性天和尚에게 출가하니 그 부인도 따라서 삭발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大師는 具足戒를 받은 후 시방에 다니면서 參知識을 두루 참방하였다. 遍融禪師를 참배하니老禪師께서 가르침을 주시기를:「명예와 이익을 탐하지 말고 오직 수행에만 함쓸지니 착실하게 계를 지키면서 염불(老實持戒念佛)하라.」고 하시니 대사께서 받들어 봉행하기를 맹세하였다. 후에 笑巖寶祖를 참배하고 東昌으로 돌아오던 길에 북소리를 듣고 홀연히 크게 깨달았다. 이에 게송을 지어 이르기를: 「二十年前의 일이 의심스럽더니 三千里 밖에 만난 일이 무슨 대수겠는가? 향사르고 창을 던지고 괜한 일을 참견하니 부처와 마구니가 쓸데없이 시비를 다투누나.」 隆慶五年(公元1571年),杭州雲棲山에 들어가서,山水가 수려함을 보고 토굴을 지어 念佛三昧를 닦았다. 산 속에서 호랑이가 항상 마을 주민들을 상하게 하여 대사께서는 자비로 시식을 베푸니 호랑이가 더 이상 사람들을 해치지 않았다. 어느 해 가뭄이 들어 마을 주민들이 대사에게 기우제를 청했다. 대사께서 목탁을 들고 논두렁을 돌면서 염불을 하니 순식간에 비가 쏟아졌다. 마을 사람들과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대사를 위해서 절을 지었다. 이때부터 시방에 납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서 순식간에 大叢林이 되었다. 大師는 永明延壽선사 이후로 선종과 정토사상과 계율을 한 가지로 융합하여 집대성하였다. 禪淨不二를 주장하여 念佛로서 萬法의 요체를 귀납하였다. 大師는 말법시대 중생들이 정토가 없다하며 불교에 영향을 끼치고 교리를 설하는 강사들이 글만 알고 말만하여 실제로 수행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였다. 그래서 오직 염불수행법만이 생사를 뛰어넘고 상중하 세 가지 근기의 중생들을 두루 섭수함을 아시고 오로지 정토수행을 제창하여 《彌陀疏鈔》十餘萬言을 지어 圓頓의 모든 경의 이치를 회통하여 一心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大師는 華嚴의 一即一切의 圓融理念으로 念佛法門을 해석하여 念佛이 大總持法門이라고 인정하고 菩薩의 六度萬行을 다 섭수하고,대장경의 모든 교리의 진수가 다 염불법문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大師는 마땅히 一心으로 念佛할 것을 주장하였다. 大師는 인과를 밝게 알고 두려워하였다. 말법시대의 중생들 업장이 두텁고 교리가 쇠퇴하여 계율정신이 느슨해질 것을 매우 염려하였다. 그래서 이 때에는 마땅히 계율로서 근본을 삼고 정토로서 돌아갈 본향으로 삼으라 하셨다. 그리고 청규를 다시 정비하고 계단이 오래도록 설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계를 받고자 하는 신출가자들에게 三衣를 갖추고 부처님 앞에서 받게 하고 대사가 증명하였다. 이미 계를 받은 사람들은 보름마다 《梵網經戒》와《比丘諸戒品》을 독송하게 하였다. 大師는 소박하고 겸허하였으며 모습이 항상 온화하고 마음에 걸림이 없고 목소리는 종을 울리는 듯 우렁찼다. 검소하여 복을 아끼고 보시를 즐겨하여 의약과 승가에 보시하기를 항상 힘쓰셨다. 일상생활에 고행을 하며 일생동안 베 옷 한 벌을 입고 모기장 한 개를 수십년간 사용하셨다. 大師의 덕과 도력이 당시 널리 알려져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다. 李太后가 내시를 보내어 가사를 선사하고 법의 대의를 물으니 大師께서 게송의로 답하였다.. “존귀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이는 숙세에 지은 복덕인연이라. 복을 닦고 지혜를 닦지 않음은 해탈의 因이 아니니 복덕과 지혜를 함께 닦음이 세간과 출세간에 제일이라네. 중생이 본래 지혜의 성품을 구족했으나 잡념으로 어두워짐이라. 지혜를 닦는 주요한 방편문은 오직 일심으로 염불함이니 염불함이 지극해지면 마음이 청정해지고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 또한 청정하여 연화대에 최상품으로 태어나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무생법인을 깨달아 구경에 성불함이라. 삼계에 비할 자 없으니 이것을 대부귀라고 이름한다네. 대사는 계살방생문(戒殺放生文) 등을 지어 계율을 다시 일으키고 放生을 숭상하여 중선(衆善)을 널리 닦아서 정업에 돕고 또 아미타경소초(阿彌陀經疏抄)、《雲棲法匯》、 《竹窗隨筆》、《往生集》、《淨土疑釋》의 저서가 많이 있는데, 후세의 사람이 집록(集錄)하여 운서법휘(雲棲法彙)라 하였다. 대사가 만력 40년 7월 7일 저녁에 말하기를..「나는 내일 가겠다.」하더니 이튿날 저녁에 미질(微疾)이 있어 눈을 감고 앉았다가 다시 눈을 뜨고 대중에게 말하기를..「진실하게 염불하라.」하고 서쪽을 향하여 염불하면서 앉아서 화(化)하니 나이 81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