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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의 자기사랑에 관한 고찰
안양규 - 동국대학교(경주) 불교학부 교수
佛敎學報 第76輯 - http://abc.dongguk.edu/abc/c4/sub1_1.jsp#
I. 서언
II. 초기불교의 자기사랑
1. 초기경전의 자기사랑 개념
2. 자아와 자기사랑
III. 자기사랑의 교학적 논의
1. 연기와 자타불이(自他不二)
2. 자리이타(自利利他)
3. 자기사랑과 무아
IV. 결어
<한글요약>
자기사랑에 대한 논의는 자기사랑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긍정적으로도 진행될 수 있고 또는 반대로 비판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 본고에선 자기사랑을 긍정적인 의미로 이해하여 초기불교 경전에 나타나고 있는 자기사랑에 대한 정의를 살피고 자기사랑을 불교의 주요 교리와 연관하여 논의하였다.
붓다에 의하면 진정한 자기사랑은 결코 다른 존재를 해치지 않는 마음을 전제하고 있다. 자기 사랑은 적어도 다른 존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며 적극적으로는 다른 존재의 행복을 염원하는 것이다.
초기경전에선 자애(自愛, atta-piya)라는 표현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자기자신에 대한 사랑을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붓다는 자기사랑을 자기 보호, 자념(自念), 자애념(自愛念), 자기이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경전에서 자기 자신의 중요성을 다루고 있는 내용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자기사랑이 부정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사랑이 바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있다. 자신 내지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것은 본능적인 것이다. 붓다는 이러한 본능적인 자기애를 먼저 인정하고 있다. 일체 생명이 갖추고 있는 자기애는 악행으로 갈 수도 있고 선행으로 갈 수도 있는데 붓다는 진정한 자기애는 선행에서 완성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연기관과 자타불이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리와 이타가 모순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호혜의 관계에 있다. 붓다는 자리가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일방적인 자기희생이 장려되지 않는다. 붓다가 건강한 자기 사랑을 부정하지 않지만, 동시에 무아(無我)를 가르치고 있다. 무아는‘나’라는 배타적인 자아의식과 그릇된 자아 애착을 부정하고 있다. 자아 애착의 소멸은 자타(自他)의 차별과 분별(分別)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아의 지각을 통해서 자만심을 소멸시킨다는 것이며 ‘아만심’의 소멸을 통해서 열반을 성취한다. 궁극적으로 무아에서 자아 애착이 부정되고 열반에서 자기사랑이 완성된다.
주제어 : 자기사랑, 자애(自愛), 자기애, 자애(慈愛), 무아, 자리이타, 자타불이
Ⅰ. 서언
서구에선 최근 자기사랑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심리적인 건강을 증진 시키고 있다. 특히 현대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우울증, 스트레스, 불안 정서와 같은 정신질환에 자기사랑 프로그램이 적용되어 긍정적인 임상효과가 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Neff와 Germer가 공동으로 개발한 Mindful Self-Compassion(MSC, 알아차림 자기사랑)은 대표적인 자기사랑 프로그램이다.1)
서구에선 중세의 기독교 신앙이 지배하면서 대체로 자기사랑은 부정적인 낙인이 찍혀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게 되었다. 종교 개혁자 장 칼뱅(John Calvin, 1509-1564)은 인간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무서운 전염병인 ‘페스트와 같다’고 했다.2) 그에게 있어 자기사랑이란 타인들에 대한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죄악이다. 칸트 역시 이기심에서는 올바른 도덕적 행위가 나올 수 없다고 보았다. 자기사랑을 이기주의로 비판하고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 이들은 자기 사랑을 오로지 자기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고 자기 사랑을 비판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사랑이 도덕의 기초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때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4)
근대에 이르러 프롬의 자기사랑에 대한 긍정적인 주장은 자기사랑의 철학적 ․ 심리학적 이론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프롬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자기 자신의 인격과 개념에 대한 존중,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다른 개인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이해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을 시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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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0년대 이르러 불교의 자비 사상에 근거하여 자기-사랑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활용되고 있다. 특히 낮은 자존감이나 자기비하로 심신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에게 치유효과가 있다는 임상 자료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영국에서는 Gilbert가 Compassion training(자비 훈련) 프로그램을 개발하였고 미국에선 Neff와 Germer가 Mindful Self-Compassion (MSC, 알아차림 자기-사랑)을 개발하여 보급하고 있다. Paul Gilbert, 조현주 ․ 박성현 공역, 자비중심치료, 서울: 학지사, 2014. ; Kristin D. Neff, Christopher K. Germer, “A Pilot Study and Randomized Controlled Trial of the Mindful Self‐Compassion Program,” Journal of Clinical Psychology Vol.69(2012).
2)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vol.2, trans. Henry Beveridge(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5), book 3, chapter 7, section 4.
3) Allison, Henry, Kant's Theory of Freedom(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p.124.
4) 아리스토텔레스, 최명관 번역, 니코마코스, (서울: 을유문화사 1986),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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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에 대한 사랑은 다른 개인에 대한 사랑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5)
20세기 중반에 형성된 인본주의 심리학의 매슬로우(Maslow)와 로저스(Rogers)는 자기 사랑의 심리학적 이론을 제공하였다.6)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을 실현하려는 자아실현 욕구는 자기사랑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서양에선 기독교 신학의 영향으로 자기사랑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풍조가 지배적이었으나 최근엔 기독교계 내부에서도 자기사랑을 긍정적으로 다루려고 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7)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중요시하는 기독교에선 아무래도 자기사랑을 강조하기 힘든 구조이다.
반면 불교에선 자기사랑이 교학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으나 이에 관한 연구가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8) 자비에 관한 연구는 일찍부터 불교학계에서 많이 이루어져 왔으나 자기 사랑에 관한 연구는 최근 심리학계에서 자기자비라는 주제로 건강과 관련되어 이루어지고 있다.9) 국내에선 안옥선이 불교의 자기사랑을 서양의 철학자나 기독교와 비교하는 논문이 있다.10) 본고에선 불교 교학적인 관점에서 자기사랑을 살펴보고자 한다.
자기사랑에 대한 논의는 자기사랑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긍정적으로도 진행될 수 있고 또는 반대로 비판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 본고에선 자기사랑을 긍정적인 의미로 이해하여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줄여 자기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긍정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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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프롬 에리히, 황문수 옮김 사랑의 기술(서울: 문예출판사, 1976), p.67.
6) 이장호 외 2인, 상담 심리학의 기초(서울: 학문사, 1999), p.70.
7)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신들에게 가치를 부여하고 스스로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질 것을 강하게 권면한다.(Robert H. Schuller, Self esteem: The new refor mation. (Word Books, 1982)). 트로비취는 자기사랑(self-love)이 우리의 이웃을 사랑 위한 행위의 기준과 전제조건(prerequisite)이 된다고 주장한다.(Walter Trobisch, Love Yourself (Downer Grove: Inter-Varsity Press, 1976), p.11). ; 이창호, 「“자기사랑”에 관한 현대 기독교윤리학계의 담론 탐색」, 기독교사회윤리 25권(서울: 한국기독교사회윤리학회, 2013), pp.121-164.
8) 무아사상이나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에 익숙한 사람은 자기사랑이라는 표현에 거부감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9) 심리학계에선 정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자기-자비의 효과에 관한 연구가 다수 이루어져 있다. 최근에 건강과 관련하여 자기자비를 다룬 박사 학위 논문이 나왔다. 고은정, 2014, 「자기자비와 자존감이 부정적 생활사건 경험시 정서에 미치는 영향」, 박사학위논문(고려대학교 대학원, 2014). 불교계에선 안양규의 관련 논문이 있다. 안양규, 「자기-자비(self- compassion)에서 본 MBCT (Mindfulness-Based Cognitive Therapy, 알아차림 명상에 기초한 인지치료)의 치유기제」, 불교학보 69집(서울: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2014, pp.147-168.
10) 안옥선, 「불교와 기독교 윤리에 있어서 자기애와 이웃사랑」, 범한철학 23집(서울: 범한철학회, 2001), pp.295-323. ; 안옥선, 「불교윤리에 있어서 자기애와 타자애의 상호적 실천」, 철학 76집(서울: 한국철학회), 2003, pp.79-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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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에서의 자기사랑은 결코 다른 존재를 해치지 않는 마음을 포함하고 있다. 자기 사랑은 적어도 다른 존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며 적극적으로는 다른 존재의 행복을 염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사랑은 자기만을 생각하여 타인을 배척하거나 이용하거나 착취하는 것이 아니다. 초기불교 문헌을 중심으로 자기사랑의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II. 초기불교의 자기사랑
1. 초기경전의 자기사랑 개념
모든 생명체는 자기사신을 보전하고 고통 없이 살기를 바란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라서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려고 한다. 이런 자기 보호는 자기 사랑이다. 자기 사랑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죄악시 될 수 없다. 오히려 생존과 번식 그리고 인류의 문화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 생물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자기 사랑은 필수적인 것이다. 자기사랑이 단순히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타인을 배려하지 못한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최근 심리학 분야에서 자기존중감(self-esteem), 자기사랑(self-love), 자기중시(selfregard), 자기가치(self-worth) 등의 용어가 등장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자기사랑이라는 용어로 사용하고자 한다. 자기사랑은 자신을 좋아하거나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자기사랑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자신의 불행을 제거하는 것과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 자기사랑은 종종 이기주의, 개인주의, 나르시스즘 등과 혼돈되기도 한다.
불교의 자기사랑은 다른 존재의 이익과 행복을 무시하거나 침해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진정한 자기사랑은 이웃사랑과 모순되지 않고 양립가능하다.
초기불교 경전에선 자애(自愛)라는 표현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자신 내지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것은 본능적인 것이다. 붓다는 이러한 본능적인 자기애를 먼저 인정하고 있다.
일체 생명이 갖추고 있는 자기애는 악행으로 갈 수도 있고 선행으로 갈 수도 있는데 붓다는 진정한 자기애는 선행에서 완성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만일 제 몸을 사랑하거든/
지켜야할 바를 삼가 보호하고/,
(법을) 이해하고자 원해야 하고/
바른 법을 배우되 게을리 하지 말라.”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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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법구경(대정장 4, p.565下), “自愛身者 愼護所守 悕望欲解 學正不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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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사랑은 타인에 대해 선업을 행함으로써 실현된다.
“몸으로 착한 행위를 하고, 말로 착한 행위를 하고, 생각으로 착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이들에게 자신들은 사랑스럽습니다. 비록 그들이 ‘자신이 사랑스럽지 않다’고 해도 그들에게
자신들은 사랑스럽습니다(piyo attā).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사랑스러운 자가 사랑스러운 자에게 하는 것을 그들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자신들은 사랑스럽습니다.”12)
신업, 구업, 의업을 모두 선으로 행하자는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이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사람에게 10선업을 행하게 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자기자신에게 행하기 때문에 자기자신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세 가지 악한 의업 (탐 ․ 진 ․ 치), 네 가지 악한 구업(망어 ․ 양설 ․ 악구 ․ 기어), 세 가지 악한 신업(살생 ․ 투도 ․ 사음)을 하지 않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자기 사랑임을 붓다는 가르치고 있다.
붓다는 모든 중생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경멸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중생들/
누구나 다 자기 이익 구하고/
이 중생이나 저 중생이나/
제각기 필요한 것을 구한다.”13)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는 목적은 결국 자신이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사는데 있다. 불교 수행을 통하여 불자는 자신의 행복을 추구한다. 마하로(摩訶盧)라는 한 늙은 비구가 있었는데, 그는 우둔하여 5백 도인들이 돌아가면서 가르쳤으나, 여러 해 동안 한 게송도 외우지 못하였다. 여러 사람들은 그를 업신여겨 같이 어울리지 않고, 항상 절을 지키면서 청소나 하게 하였다. 마하로 비구는 자신의 우둔함을 비관하여 자살하려고 하였다.
이 때 붓다는 이 게송을 설하였다.
“자기 자신을 제일로 삼아 언제나 스스로 힘써 배워라
… 중략 … 자기 자신도 이롭게 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겠느냐?”14)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모든 중생의 본성인데 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는가라는 붓다의 말씀이다.
자신을 진정으로 이롭게 하기 위해선 먼저 계학을 통해 다른 중생을 해치지 아니하는 것이고 나아가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조언하고 있다.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며/
이익되어 없어지지 않나니/
자신을 이롭게 하기를 알려고 한다면/
계율과 많이 들음[聞]이 제일이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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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SN. I, p.72. “Ye ca kho keci, kāyena sucaritaṃ karonti, vācāya sucaritaṃ caranti, manasā sucaritaṃ caranti, tesaṃ piyo attā. Kiñcāpi te evaṃ cadeyyuṃ “appiyo no attāti”, atha khotesaṃ piyo attā. Taṃ kissa hetu. Yaṃ hi , piyo piyassa kareyya, taṃ te attanā va attano karonti.Tasmā tesaṃ piyo attāti.”
13) 잡아함경(대정장 2, p.296下), “一切眾生類 悉皆求己利 彼彼諸眾生 各自求所應.”
14) 법구비유경(대정장 4, p.593中), “身爲第一 常自勉學 … 중략 … 身不能利 安能利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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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경전에서 자기사랑은 자기보호로 표현되고 있다.
“만일 자신이 사랑스럽다는 것을 안다면 자신을 잘 지키며 보호해야 한다”16).
“만일 자기를 사랑하고 생각하는 이라면/
자기를 스스로 잘 보호하기를/
나라를 잘 보호하는 임금이/
밖으로 국경의 성 막듯이 하라.”17)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자신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한다. 죽음을 회피하고 생명을 보존하려는 욕망은 모든 생명체의 기본이다. 그리고 고통을 피하고 쾌를 추구하는 욕망도 모든 생명체의 기본이다.
만일 어떤 이가 몸으로 선행을 행하고 입과 뜻으로 선행을 행하면 그들은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다. 그들은 코끼리 ․ 말 ․ 수레 ․ 보병의 네 군사로써 자기를 보호하지 않더라도 실로는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안을 보호하는 이를 자기를 잘 보호한다고 하고, 밖을 보호하는 것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18)
악업을 짓는 사람은 비록 코끼리 부대 등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자신을 보호할 수 없으며 반대로 선업을 짓는 사람은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자신을 보호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이면에는 업보의 작용법칙이 있다. 자신이 지은 업은 반드시 자신이 그 결과를 받는다의 자작자수(自作自受)의 법칙이 있는 것이다.
자기사랑은 자념(自念) 즉 자기를 생각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만일 몸으로 선행을 행하고, 입으로 선행을 행하고, 마음으로 선행을 행하는 자, 이런 사람은 자기를 생
각하는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한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 몸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더라도, 그들은
실로는 자기를 생각하는 것이다.”19)
자념은 자신의 보존과 성장을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선업은 자신을 보존시키고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자신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선업을 짓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자기를 생각하는 자는 악업을 짓지 아니하여 자기로 하여금 안락을 얻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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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법구경(대정장 4, p.566上), “自利利人 益而不費 欲知利身 戒聞爲最.”
16) Dhp, 157, “Attānañce piyaṃ jaññā, rakkheyya naṃ surakkhitaṃ.”
17) 잡아함경(대정장 2, p.336上), “若自愛念者 善護而自護 如善護國王 外防邊境城.”
18) 잡아함경(대정장 2, p.336上), “若復有行身善行 行口善行 行意善行者 當知斯等則為自護 彼雖不以象馬車步四軍自防 而實自護. 所以者何 護其內者 名善自護 非謂防外.” ;SN. I, pp.72-73. 참조
19) 잡아함경(대정장 2, p.335下), “行身善行 行口善行 行意善行者 當知斯等則為自念 斯等自謂 不自愛惜己身 然其斯等實為自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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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자기를 생각하는 이는 마침내 나쁜 행 짓지 아니하고 온갖 착한 업을 지어서 자기로 하여금 안락을 얻게 할 수 있다.”20)
자념은 자신의 안락을 도모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누구나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올 것인가를 생각한다. 본능적인 자기 안락 추구는 자념의 핵심 사항으로 여겨지고 있다.
앞서 나온 자애(自愛)와 자념(自念)을 결합하여 자애념(自愛念)이라는 말도 경전에 보인다.
“만일 자기를 사랑하고 생각하는 이라면 /
지극히 자기를 보배로이 잘 간직한다.
잘 지키는 나라 임금이/
안으로 국경의 성을 방어하듯이.”21)
초기경전에선 자애(自愛, atta-piya)라는 표현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자기자신에 대한 사랑을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붓다는 자기사랑을 자기 보호, 자념(自念), 자애념(自愛念), 자기이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붓다는 가르치고 있다. 붓다는 인간은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타인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자기사랑은 중생에 대하여 10가지 선업을 행함으로써 완성되므로 자기사랑은 이웃 사랑을 내포하고 있다. 붓다는 자기애의 보편성과 자연스러움을 인정하면서 더 나아가 타인에 대한사랑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2. 자아와 자기사랑
초기경전에서 자기 자신의 중요성을 다루고 있는 내용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자기사랑이 부정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사랑이 바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가르쳐지고 있다. 사랑에는 자식보다 더한 것 없고 재물에는 소보다 귀한 것 없으며, 광명에는 해보다 나은 것 없다고 하자 붓다는 다음과 같이 바로 잡아 가르치고 있다.
“사랑에는 자기보다 더한 것 없고, 재물에는 곡식보다 나은 것 없다. 광명에는 지혜보다 나은 것 없다.”22)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사랑보다 우선시 하는 경우도 있지만 생물학적으로 보면 자신의 생명을 가장 우선시 한다.
코살라(Kosala)의 왕인 파세나디(Pasenadi)와 그의 왕비 말리카(Mallikā)의 대화에서 우리는 누구나 자신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왕과 왕비는 나자신보다 더 소중한 것은 그 어느 누구도 없다는 결론은 가지고 그 결론의 진위를 위해 붓다를 찾아간다. 붓다는 그들의 결론을 인정하면서 그들의 결론이 이기주의로 빠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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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잡아함경(대정장 2, p.336上), “謂為自念者 終不造惡行 造諸善業者 令己得安樂.”
21) 잡아함경(대정장 2, p.336上), “若自愛念者 極善自寶藏 如善守之王 內防邊境城.”
22) 잡아함경(대정장 2, p.263中), “愛無過於己 財無過於穀 光明無過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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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경계하면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동서남북 사방을 주의 깊게 돌아다녀 보아도/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사람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식으로 각 개개인은 자기 자신을 가장 소중히 여긴다./
그러므로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다른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23)
다음의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자기 자신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붓다가 우루벨라(Uruvelā)에 유행하고 있을 때 50명의 부부가 동산에서 즐기고 있었다. 그 중 한 남자가 부인이 없어 음녀(淫女)를 고용하여 데리고 왔다. 그 음녀는 사람들이 놀고 있는 틈을 타서 귀중한 재물들을 챙겨 도망 가버렸다. 부부들이 재물을 훔쳐간 음녀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붓다를 보게 되고 그 음녀의 행방을 물었다.
붓다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반문하고 있다.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 나은가? 부녀를 찾는 것이 나은가?”24)
자기 자신을 찾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달아난 여자를 찾으면 재물을 되찾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찾으면 자신의 이익을 획득할 수 있다. 붓다는 유녀를 찾는 것, 즉 재물을 쫓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되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재물을 추구하다 보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자기 자신을 찾으면 자신의 내면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해하게 된다. 자신의 내면을 이해한 만큼 자신의 삶에 더 충실해 질 수 있고 주체적으로 살 수 있다.
붓다의 유훈인 자주(自洲) ․ 법주(法洲)의 가르침은 개인의 수행이 무엇보다도 더 중요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난다는 붓다의 임박한 죽음을 목격하고 교단의 유지라는 관심사에서 후계자를 지목해달라고 붓다에게 요청하지만 붓다는 후계자 지정 대신에 아난다에게 가르친다. “너희들 개개인은 자신을 자신의 섬으로 만들지, 다른 어떤 것도 의지처로 삼지 말라. 너희들 개개인은 법을 자신의 섬으로 만들지, 다른 어떤 것도 의지처로 삼지 말라.”25) 이상의 인용문에서 ‘자기 자신을 자신의 섬’으로 삼으라고 하는 것이나 ‘법을 자신의 섬’으로 삼으라고 하는 것은 먼저 자기 자신의 자존과 자립을 확보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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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SN. I, p.75, “Sabbā disā anuparigamma cetasā, Nevajjhagā piyataram attanā kvaci, Evaṃ piyoputhu attā paresaṃ, Tasmā na hiṃse paraṃ attakāmoti.”
24) 사분율(대정장 22, p.793中), “云何童子 寧自求耶 求婦女耶.”
25) DN. II, p.100, “attadīpā viharatha attasaraṇā anaññasaraṇā dhammadīpā dhammasaraṇāanaññasaraṇ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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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믿기만 하면 구원해 주는 이른바 전능한 구제자가 아니다.
“너 스스로 수행해야 한다. 붓다는 단지 길을 가르쳐줄 뿐이다. 명상하고 길을 걷는 수행자들은 마라의 구속에서 벗어난다.”26)
길은 각자 스스로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붓다가 중생을 짊어지고 열반이라는 목적지에 데려다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붓다는 당신의 역할을 제자들에게 상기시키며 다음과 같이 권고 하고 있다.
“스승은 제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제자의 마음을 바로 잡아 줄 수 없다.
비구들은 마땅히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야한다.”27)
“자기 자신에 의해 악(惡)이 행해지고, 자기 자신에 의해 더러워진다.
자기 자신에 의해 악이 행하여 지지 않고 자기 자신에 의해 깨끗해진다.
청정과 오염은 각자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깨끗하게 만들 수 없다.”28)
우리들 각자가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자업자득은 자신이 한 행위는 자신이 책임진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선업이든 악업이든 무슨 업을 지었든 그것은 자신의 소유물이다. 자신이 지은 행위는 없어지지 아니한다. 반드시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 29) 자신이 지은 업에 의해 그 결과를 받게 되고 결국 평가받게 된다. 선업을 지으면 좋은 결과를 얻게 되고 악업을 지으면 나쁜 결과를 받게 된다. 선업을 지은 자는 주위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는데 비해 악업을 지은 사람은 비난받게 된다. 자신이 지은 업이 자신을 높이기도 하고 비천하게 만들기도 한다. 자신의 업, 즉 행위를 하는 주체는 자기 자신이므로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
III. 자기사랑의 교학적 논의
1. 연기와 자타불이(自他不二)
연기에 의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은 그 자체 독립해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요소가 결합하여 이루어져 있다. 모든 존재는 그것을 형성시키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만 그리고 상호관계에 의해서만 존재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타(他)와의 관계없이 고립되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존재는 상호 관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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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Dhp. 276, “Tumhehi kiccaṃ ātappaṃ akkhātāro Tathāgatā, Paṭipannā pamokkhanti jhāyinoMārabandhanā.”
27) 불반니원경(대정장 1, p.166中), “師同不能入弟子心中 端弟子心 比丘當自淨.”
28) Dhp. 165, “Attanā va kataṃ pāpaṃ, attanā saṃkilissati, Attanā akataṃ pāpaṃ, attanā vavisujjhati, Suddhi asuddhi paccattaṃ, nāññamañño visodhaye.”29) AN. V,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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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하면 세 개의 갈대를 빈 땅에 세울 때 서로서로 의지해야 서는것과 같은 이치이다.
만일 그 하나를 빼버리면 둘도 서지 못하고, 만일 둘을 다 빼버리면 하나도 또한 서지
못하게 되니, 서로서로 의지해야 서게 되는 것이다.”30)
연기의 상의성(相依性)은 내가 나의 존재근거가 아니라 내 앞에 놓인 모든 네가 나의 존재근거라는 뜻이다. 따라서 너와 나를 분립적, 대립적, 투쟁적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다.
연기의 시각에서 보면 세상의 어떤 것도 고립되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연기로 볼 때, 존재간의 상호연계성(interconnectedness)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남을 위하는 일이 곧 나를 위하는 일이며, 나와 남은 서로서로가 생명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나의 존재는‘나’아닌 타자와의 관계없이 홀로 성립할 수 없다. “나의 생명은 타인에게 의존 되어 있다.”31) 타인을 배려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자신을 사랑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타인도 나의 존재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참된 자기애는 타자를 배려하는 사랑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타인에 대한 사랑은 나의 입장에서 보면 적어도 타인에게 악업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악업을 행하지 않으면 결국 자기 자신에게 안락을 가져온다.
연기에 의거해 생명 전체를 보면, 모든 존재는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만큼 늘 공존과 조화를 통해 함께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다른 생명과 함께하는 것이고, 우리 목숨을 유지하는 것 또한 다른 생명체와 관계를 맺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
자타불이에 의하면 나와 남이 각각 별개의 존재로 단절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이므로 나의 행복이 타인의 행복이 될 수 있고 타인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서로 모순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호혜 평등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자기사랑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거나 스스로에게 도취되어 다른 사람을 부정하지 않는다.
붓다고사(Buddhaghosa)는 자타불이의 입장에서 모든 중생들에게 자애를 방사하여야 한다고 밝히면서 흥미로운 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자신을 포함하여, 좋아하는 사람, 무관한 사람, 원한 맺힌 사람과 함께 넷이서 한 자리에 앉아 있을 때 강도가 와서 네 사람 중 한 사람을 요구하는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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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잡아함경(대정장 2, p.81 中). “譬如三蘆立於空地 展轉相依 而得豎立 若去其一 二亦不立 若去其二 一亦不立 展轉相依 而得豎立.”
31) AN. V, p.87, “parapatibaddhā me jīvit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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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 비구가 아무개나 아무개를 잡아가기를 하고 생각한다면 한계를 부수지 못했다.
만약 이 세 사람은 잡아가지 말고 나를 잡아가기를 하고 생각한다 해도 한계를 부수지 못했다. 왜 그런가? 잡혀가기를 바란 사람에겐 해로움을 원하고 나머지 세 사람의 이로움만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 사람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강도에게 줄 수 없다고 보고, 자기와 그 세 사람에 대해서 평등한 마음을 일으킬 때 한계를 부순 것이다.32)
자기자신을 포함하여 네 사람 도두 똑같이 평등하게 여길 때 한계를 부순다는 것은 자타불이를 보여준다. 불이(不二)는 나와 너의 개별 내지 분리를 부정하고 있다. 자신과 타자는 둘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학적으로 자타불이는 자리이타의 윤리적 실천행의 근거가 된다. 타인의 고통이 자기 자신의 고통으로 여겨지는 것은 자타불이의 자각 속에서 자연스럽다. 자타불이에 근거한 자리이타의 사랑은 삶속에서 동고동락(同苦同樂)하는 공동체의 삶으로 진행된다. 동고동락에는 자타 분별의식을 떠난 자타불이가 실현되고 있다.
2. 자리이타(自利利他)
초기경전에 의하면 자리는 이타의 기초가 된다. 자기 마음을 미루어 보아 남에게도 그렇게 대하거나 행동(行動)한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타인의 경험을 공감하는 것이다. 자신이 고통을 싫어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고통을 싫어한다고 추론할 수 있다. “모두 폭력을 두려워한다. 모두 죽음을 두려워한다. 나 자신을 견주어서 남을 죽여서도 안되고 남을 괴롭혀도 안 된다.”33) 나에게 불쾌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불쾌한 것이다. 따라서 자기 자신에게 원하지 않는 살생을 다른 생명체에도 해서는 안 된다는 황금률을 붓다는 가르치고 있다. 자기에게 비추어 타인도 자신처럼 죽음보다는 삶을 선호하고, 고통보다는 즐거움을 선호할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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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붓다고사, 대림역 청정도론 2 (울산: 초기불전연구원, 2005), p.159. Vism p.307, “Tatraceso bhikkhu 'asukaṃ vā asukaṃ vā gaṇhantū'ti cinteyya, akatova hoti sīmāsambhedo. Sacepi'maṃ gaṇhantu, mā ime tayo'tipi cinteyya, akatova hoti sīmāsambhedo. Kasmā? Yassa yassa higahaṇamicchati, tassa tassa ahitesī hoti, itaresaṃyeva hitesī hoti. Yadā pana catunnaṃjanānamantare ekampi corānaṃ dātabbaṃ na passati, attani ca tesu ca tīsu janesu samameva cittaṃ pavatteti, kato hoti sīmāsambhedo.”
33) Dhp. 129, “Sabbe tasanti daṇḍassa, sabbe bhāyanti maccuno, Attānaṃ upamaṃ katvā, nahaneyya na ghāta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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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경전에는 자애명상의 대상으로 먼저 자기 자신을 하라는 지시가 없는데 붓다고사(Buddhaghosa)는 먼저 자기 자신에게 자애 명상을 하라고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여기서 서로 모순이 되지 않는가라고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 의문에 대해 붓다고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내가 행복하기를’하고 닦을 때 ‘마치 내가 행복하기를 원하고 고통을 두려워하고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다른 중생들도 참으로 그와 같다’라고 자기를 본보기로 삼을 때 다른
중생들의 이익과 행복에 대한 원이 일어난다. 마치 내가 행복하기를 원하고 고통을 두려워하고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다른 중생들도 참으로 그러하다.34)
자기 자신을 본보기로 만들고 나서, 다른 존재의 복지와 행복에 대한 바램이 일어난다. 요컨대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다른 생명체도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자리의 본능적 욕구에 기초 하여 타인 배려를 호소하고 있다. 자기 보존과 행복의 추구로 나타나는 자리는 타인에 대한 사랑의 근원이 된다. 자기 자신에 비추어 타인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대해야 한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보존하고 행복을 추구하듯이 타인도 똑같이 그러하므로 타인을 배려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자리이타라는 용어는 표현상 남을 위한 일방적인 이타행(利他行)이 아니라 자리(自利)를 앞세우고 있다. 자기 자신의 이로움을 무시하거나 남의 이로움을 빼앗으려고 해서는 안 되며, 남의 이로움에 대한 지나친 관심 때문에 나 자신이 추구해야 될 당연한 이익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된다. 자리이타는 자기보존, 자기존중, 자기애 등의 자연적 욕구에 근거하여 자신을 보살피는 마음을 타인에게 확대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붓다는 자리가 먼저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타를 위해서는 자신의 수행이 완성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도 이롭게 하지 못하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겠는가.”35)
자기 사랑은 자기희생이 아니다.
“남을 위한다는 일이 아무리 크더라도 자신의 의무를 등한히 하지 말라. 자신의 의무를 알고
그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36)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자기 자신의 행복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무엇이 자신의 행복인지를 분명히 인지하여 자신의 행복 성취에 정진하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이익을 도모한 나머지 자기의 참다운 이익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것은 자신의 행복을 희생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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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붓다고사, 대림역, 앞의 책, p.141. Vism p.297, ‘‘Ahaṃ sukhito homī’’ti bhāvayato pana yathā ahaṃ sukhakāmo dukkhapaṭikkūlo jīvitukāmo amaritukāmo ca, evaṃ aññepi sattāti attānaṃ sakkhiṃ katvā aññasattesu hitasukhakāmatā uppajjati.”
35) 법구경(대정장 4, p.566上), “身不能利 安能利人.”
36) Dhp. 166, “Attadatthaṃ paratthena, bahunā api na hāpaye. Attadattham abhinnāya, sadatthapasuto siy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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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사랑이 이타적인 사랑의 기초기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자기 자신도 이롭게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리와 이타의 관계를 다음 경전은 잘 보여주고 있다.
상가라마납은 브라흐민은 이타적인데 비해 출가한 불제자는 불법을 따라 수행하여 열반을 얻어 자신만 이익되게 한다라고 힐문하였다. 브라흐민은 스스로 재를 지내거나 남을 시켜서 재를 지내게 하면 그 재로 인하여 그의 모든 행은 한량없는 복의 자취를 남기게 된다. 그런데 붓다의 제자는 출가하여 도를 배워 스스로 제어하고 스스로 쉬며 스스로 열반을 얻으니 한 가지 복, 즉 자신의 행복만 성취하고 다른 이의 한량없는 복은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힐문에 붓다는 불제자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위한 이타적인 삶도 살고 있다고 역설한다. 불제자는 불도를 행하여 해탈을 성취한다. 그러한 연후 그는 이타행을 행한다.
그는 남을 위해 설명하고 남은 또 남을 위하여 설명하고 이렇게 계속하여 한량이 없는 백 천까지 이른다면 마납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내 제자가 족성자를 따라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지극한 믿음으로 집을 버리고 집이 없이 도를 배운다면 도를 배움으로 인하여 한 가지복의 자취만을 행하고 한량없는 복의 자취를 행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37)
상가라마납은 석존의 제자들의 자리적 측면만을 보고 타인을 위한 이타성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석존은 자신이 열반을 성취하고 또 남을 위해 설명하고 이러한 과정이 계속 이어지게 되면 그 복은 한량이 없다고 역설하고 있다. 자신이 법을 성취한 것은 자리임에 틀림없다.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증득한 법을 타른 이에게 가르쳐 주어 행복의 법을 증득하게 만든다. 이런 식으로 계속 법을 널리 알리면 많은 중생들이 법문을 듣고 행복하게 되니 한량없는 이타가 되는 것이다. 브라흐민은 단지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그 혜택을 보는 자가 한정되어 있지만 불제자의 불법의 전파는 수많은 중생들에게 행복을 가져오므로 한량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도 자리이타의 온전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자기자신을 이롭게 하고 타인을 이롭게 한다는‘자리이타’라는 말은 자신과 타지를 모두 동등하게 배려하는 상호평등의 원칙이 내재해 있다. 따라서 이웃사랑도 자신을 희생시키면서 실천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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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중아함경(대정장 1, pp.650下-651上), “知如真彼為他說 他為他說 如是展轉無量百千.於摩納意云何 我弟子隨族剃除鬚髮, 著袈裟衣, 至信, 捨家, 無家, 學道, 行一福跡, 不行無量福跡, 因學道故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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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이타는 타인을 배척하는 배타적 이기주의도 아니며‘이타’를 위한 자기희생도 아니다. 자타가 함께 행복하게 되었을 때 자리리타가 완성된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배타적인 자리만 추구하는 삶을 쉽게 목격하다 보니 자기희생을 통한 이타를 미덕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이상적인 삶은 나와 남이 함께 이익이 되는 삶이다.
자타카 문헌에서 주인공인 보살은 자기희생적인 선행을 수없이 행하고 있다. 이런 자기희생적인 행위는 깨달음의 실현을 위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살의 행위는 단순히 남을 위한 자기희생적이라고 할 수 없다.
자기희생을 전하는 전생담을 하나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붓다는 전생에 수사제(須闍提) 왕자로 태어나 부왕의 총애를 받으며 성장하였다. 반역이 일어나 왕은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다른 나라로 피신하였다. 며칠을 지내자 양식이 떨어졌다. 부모는 어쩔수 없이 아이 살을 베어 먹었다. 날마다 베어 먹으니 살은 차츰 없어지고 오직 뼈만이 남아 있었다.
왕자는 곧 서원을 세웠다. “나는 지금 몸의 살로써 부모님께 공양하였다. 이 공덕으로써 불도를 구하고 일체 중생을 두루 제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나 열반의 즐거움에 이르게 하리라.”38)
제석천이 내려와, 시험하려고 거지로 변하여 왕자의 살을 구걸하였다. 왕자는 곧 자신의 살을 보시하였다. 제석천은 다시 사자와 호랑이로 변해 와서 왕자를 잡아먹으려 하였다. 왕자는 남아 있는 뼈와 살과 골수를 모두 다 주었다.
왕자는 부모에게, 그리고 동물에게 자신의 육신을 공양한 이유를 부명하게 밝히고 있다.
“나는 삼계의 쾌락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 공덕으로써 불도를 구하여 한량없는 일체 중생을 제도하기를 원합니다.”39)
자기 희생적 행위는 중생을 이롭게 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자신에게 이로운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자리(自利)를 침해한 것이 아니다.
“이타를 위한 자기희생적 행위마저도 자리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이타’를
추구하면서도 ‘자리’를 실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40)
보살의 자기희생적 행위는 불도의 완성을 통한 일체 중생의 구제라는 큰 목표를 위한 것으로 단순히 자기 자신을 포기하거나 양보하는 것이 아니다. 자리이타(自利利他)는 나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이 서로 상충하지 않고 함께 성취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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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현우경(대정장 4, p.356下), “我今身肉 供養父母 持是功德 用求佛道 普濟十方一切衆生 使離衆苦至涅槃樂.”
39) 현우경(대정장 4, p.357上), “我不願求三界快樂 持此功德 用求佛道 願度一切無量衆生.”
40) 안옥선, 앞의 논문, 「불교와 기독교 윤리에 있어서 자기애와 이웃사랑」,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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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자리와 이타가 함께 이루어지는 것임을 당기놀이로 설명하고 있다.
당기 재주의 스승은 어깨에 당기를 세우고 제자에게 말하였다.
‘너는 당기 위에서 밑으로 향하여 나를 보호하라. 나도 너희들을 보호하리라.’
그리하여 서로 번갈아가며 보호하고 재주를 부려 많은 재물을 벌었다.
때에 제자는 그 스승에게 말하였다.
‘그렇게 하지 말고 제각기 자기를 사랑하고 지키면서 재주를 부려 많은 재물을 벌어야 하겠습니다.
몸은 사고없이 편안히 내려올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승은 대답하였다.
‘너희들 말대로 제각기 자기를 지켜라. 그런데 그 이치는 내가 말한 것과 같다. 자기가 스스로 보호할 때
그것은 곧 남을 보호하는 것이고, 남을 자신이 보호할 때 그것도 또한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다.’41)
제자의 방식은 자신을 보호하겠다는 태도로 타인을 보호한다. 그리고 스승의 방식은 타인을 보호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보호와 타인보호가 서로 양립 가능한 것으로 결론짓고 있다. 붓다에 의하면 참된 자기애는 타자애(parapiya)를 함축한다. 자기애는 타자애의 준거로서 활용되며 타자애를 통해서 실천되기도 한다. 타자애의 실천이 자기애적 결과로 귀결되어, 타자애의 실천은 자기애의 실천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여 자기애와 타자애는 대립적이지 않으며 상호 독립적이지도 않다. 양자는 상호적인 것으로서 어느 하나의 실천은 다른 하나의 실천을 의미한다.42)
사랑에 해당하는 불교 용어는 자비이다. 자비라는 말은 중생의 행복을 바라는 자(慈,mettā)와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비(悲, karunā)가 결합된 복합어이다. 초기불교 경전에선 자와 비 중 자에 관한 내용이 더 자세하게 다루어지고 있다.43)
본질적으로 자(慈)는 사랑이 넘치는 이타적 태도로,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어머니가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모든 중생에게 확장하여 일체 중생을사랑하는 마음이 자(慈)이다.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보호하듯이 모든 중생에 대해서 무량한 마음(사랑)을 일으켜야 한다”.44)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듯, 자애(慈愛)는 아낌없이 주는 사랑으로 어떠한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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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잡아함경 (대정장 2, p.173中), “幢伎師 肩上竪幢 語弟子言 汝等於幢上下向護我 我亦護汝 迭相護持 遊行嬉戲 多得財利. 時伎弟子語伎師言 不如所言 但當各各自愛護 遊行嬉戲 多得財利 身得無為安隱而下 伎師答言 如汝所言 各自愛護 然其此義亦如我說 己自護時即是護他 他自護時亦是護己 心自親近 修習隨護作證 是名自護護他.”
42) 안옥선, 앞의 논문, 「불교윤리에 있어서 자기애와 타자애의 상호적 실천」, p.81.
43) 대승불교 문헌에선 비에 관한 내용이 더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최근 국내에선 mettā를 자애(慈愛)로 번역하고, karunā를 연민, 동정 등으로 번역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본고에서도 자(慈)를 자애(慈愛)로 사용하기로 하겠다.
44) Sn. 149, “Mātā yathā niyaṃ puttaṃ āyusā ekaputtamanurakkhe. Evampi sabbabhūtesū mānasaṃ bhāvaye aparimāna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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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의 행복을 비는 자애수행(mettā-bhāvanā)은 삼독 중 분노를 대치하는 수행으로 권장되고 있다.
“자애관를 닦으면 악의(byāpāda)가 제거 될 것이다”45).
분노는 어떤 대상을 향하여 적개심이나 악의를 품는 것이다. 자애수행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은 분노와 적의가 제거되면 먼저 자기 자신이 편안하게 된다. 자애심은 미워하거나 적대적인 감정을 없애주어 마음의 평화를 가져온다.
“자애를 개발하여 내적인 평화를 얻는다.”46)
내면의 분노와 적의가 사라지면 먼저 자기자신에게 유익하게 된다. 자애수을 하면 다음과 같은 11가지 이득을 얻을 수 있다.
“편안하게 잠든다. 행복하게 깨어난다. 악몽을 꾸지 않는다. 동료들의 사랑을 받는다.
사람 아닌 존재(amanussa)들의 사랑을 받는다. 천신(deva)들로부터 보호받는다. 불이나
독과 칼 등이 해치지 못한다. 빨리 마음이 삼매에 든다. 안색이 맑다. 혼돈되지 않은 채 죽
는다. 최상의 단계를 통찰하지 못한다면, [죽어서] 범천에 태어난다.”47)
자애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기원하는 것이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자애가 기쁨을 가져다주는 까닭은 우리를 불편케 하고 괴롭히는 미움, 혐오, 반감, 적의, 악의 등의 부정적 상태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증오 등 부정적인 감정은 삼독 중 진(瞋, dosa)에 해당하는 것으로 진(瞋)은 심신을 해치는 독으로 비유되고 있다. 독을 복용하면 심신이 괴롭듯이 진심을 품고 있으면 괴로움에 빠지게 되는데 자애 수행은 분노의 독을 제거한다. 자애로 진심이 제거되면 마음은 평정을 찾게 되고 기쁨을 느끼게 된다.
“모든 존재에 대하여 미움과 적의를 갖지 않는 자의 마음은 즐겁다.
모든 존재에 대하여 자애로운 사람은 어떤 존재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지 않다.”48)
자애는 타자애이지만 그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자애는 자기를 보호해주며 여러 가지 혜택을 줄 뿐만 아니라 수행자 자신에게 기쁨을 준다. 자애 수행은 미움, 적의, 악의 등을 포함한 진의 지멸을 의미하며 결국 수행자를 열반으로 이끈다. 자애 수행은 자신을 행복하고 이익되게 한다는 관점에서 자기사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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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MN. I, 424, “mettaṃ hi te Rāula bhāvanaṃ bhāvayato yo byāpādo so pahīyissati.”
46) MN. I, 284, “evaṃ mettaṃ bhāvetvā labhati ajjhattaṃ vūasamaṃ.”
47) AN. IV, p, 150. ; AN. V, p.342, “Sukhaṃ supati, sukhaṃ patibujjhati, na pāpakaṃ supinaṃ passati, manussāaṃ piyo hoti, amanussānaṃ piyo hoti, devatā rakkhanti, nāssa aggi vā visaṃ vāsatthaṃ vā kamati, tuvataṃ cittaṃ samāhiyati, mukhavaṇṇo vippasīdati, asammūḷho kālaṃ karoti, uttariṃ appaṭvijjhanto brahmalokūpago hoti.”
48) SN. I, p.208, “Yassa sabbam ahorattam ahimsaya rato mano mettaṃ so sabbabhūtesu veraṃ tassa na kenacī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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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자비 수행을 통하여 정각을 성취할 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보살 마하살은 자비삼매의 힘으로 마군들을 부수고 아뇩다라삼약삼보리를 얻었다.”49)
자비 수행의 최종적인 완성은 정각의 성취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정각의 성취는 모든 중생들에게 유익함을 가져다 줄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자기자신에게 가장 유익한 일이다. 정각의 성취는 적어도 자기자신을 완성시키는 것으로 진정한 자기사랑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3. 자기사랑과 무아
붓다가 건강한 자기 사랑을 부정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무아를 가르치고있다. 무아(無我)의 가르침은 보통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이기적인 자아의식(自我意識)이 허구임을 보여준다. 무아는 ‘나’라는 개체의 독립적 실체가 있다는 거짓 인식을 부정하는 것이다. ‘나’라는 자아의식(自我意識)과 자애(慈愛)는 서로 모순관계에 있는 것을 다음 경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땅히 나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홀로 머물며 자애심을 닦는다. 욕망을 제거하고 더러움을 없앤다.”50)
아상은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이기적인 자기애이다.
자신만 생각하는 아상의 제거는 자연스럽게 이타를 지향하는 자애심과 연결이 된다.
“만일 비구가 무상하다는 생각을 얻으면 반드시 무아라는 생각을 얻을 것이다.
미혜여! 만일 비구가 무아라는 생각을 얻으면 곧 현재에 있어서 일체의 아만을
끊고, 식(息) ․ 멸(滅) ․ 진(盡) ․ 무위(無爲) ․ 열반(涅槃)을 얻을 것이다.”51)
‘나’라는 이기적인 자아의식은 그릇된 자아 애착으로 무아에서 부정되고 있다. 즉 무아는 아만을 제거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만으로 가득 찬 자아는 무아에서 부정되며 아만의 자기를 이긴 자는 칭송된다.
“전쟁에서 백만 인을 정복하는 사람보다 자기 하나를 이긴 자가 진실로 가장 위대한 승리자
이다. 자기를 이기는 것은 남을 이기는 것보다 낫다. 항상 자기 자신을 정복하고 바르게
행위하는 사람을 신(神), 건달바, 범천(梵天)과 악마도 패배시킬 수 없다.”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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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잡아함경(대정장 2, p.167中), “菩薩摩訶薩以慈悲三昧力破魔兵眾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50) 장아함경(대정장 1, p.32下), “當捨我人想 獨處修慈心 除欲無臭穢 乃得生梵天.”
51) 중아함경(대정장 1, p.491上), “若比丘得無常想者 必得無我想 彌醯 若比丘得無我想者 便於現法斷一切我慢 得息滅盡.”
52) Dhp. 103-5, “Yo sahassaṃ sahassena saṅgāme mānuse jine, Ekañ-ca jeyya attānaṃ sa vesaṅgāmajuttamo. Attā have jitaṃ seyyo yā cāyaṃ itarā pajā. Attadantassa posassa, niccaṃ saññatacārino. Neva devo na gandhabbo, na Māro saha Brahmunā, Jitaṃ apajitaṃ kayir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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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에서 백만명을 정복한다는 것은 외부의 수많은 적을 이긴다는 것이다. 자기자신을 이긴다는 것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부정적인 것을 정복한다는 것이다. 아만 등 번뇌에 굴복당하지 않고 선한 생각을 키우고 유지한다는 것이다. 남을 이기기 위해서 무기 등 외적인 수단을 동원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정복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번뇌를 완전히 제거하게 되면 마라와 같은 악신도 다시는 패배자로 만들지 못한다. 이렇게 자신을 이긴 자는 존경의 대상이 된다.
“매달 천 번씩 백년을 지내는 제사보다도, 잠시도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늘 절제하는 이를 존경하는 것이 낫다.”53)
천신에게 백 년 동안 제사지내는 것보다, 일념으로 수행하는 수행자를 찾아가 잠깐 동안 존경의 예를 표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이다.
무아의 개념이 자기애를 허용할까?
우리는 앞서 붓다는 자기애(attapiya)를 가르치고 있는 것을 살펴보았다. 붓다는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사랑스러운 것은 자기이니 자기를 사랑하라고 한다.
무아에서 부정되는 자아 애착은 건강한 자기 사랑(自己愛)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이기적(利己的)인 집착이다. 건강한 자기 사랑은 배타적인 이기심이 아니다. 자기 사랑이 자기만 존중하며 귀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이런 자기사랑은 자기 애착의 이기심이다. 이기심은 자신에 대해서 진정한 사랑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남을 배려하지 않는 탐욕심이다. 이기적인 집착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심에서 나온다.
아만심(asmimāna)의 소멸은 자타(自他)의 차별과 분별(分別)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을 상대할 때 동등 ․ 열등 ․ 우월 등의 비교를 하지 않는다.
“성자는 자신이 낮은 사람들 사이에 있다거나 우월, 자신이 높은 사람들 사이에
있다거나 열등, 대등한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평안으로 돌아가서 취착하지 않고 거부하지 않는다”54)
성자는 어느 누구와 함께 있어도 비교하지 않아 열등감이나 우월감 등이 없다.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고 평가하여 발생하는 모든 차별이 존재하지 않게 되어 평온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은 타인을 자기 자신과 같이 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무아라는 지각을 가진 자는 내가 있다는 ‘아만심’을 단절시키고 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증득한다”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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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thārūpassa jantuno.”
53) Dhp. 106, “Māse māse sahassena yo yajetha sataṃ samaṃ, Ekañ-ca bhāvitattānaṃ muhuttam-api pūjaye, Sā yeva pūjanā seyyā yañ-ce vassasataṃ hutaṃ.”
54) Sn. 954, “na samesu na omesu na ussesu vadate muni, santo so vitamacchero nādeti na nirassatiti.”
55) AN. Ⅳ, p.358, “anattasaññī asmimānasamugghātaṃ pāpuṇāti diṭṭ'eva dhamme nibbānan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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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의 지각을 통해서 아만심을 소멸시킨다는 것이며 ‘아만심’의 소멸을 통해서 열반을 성취한다는 설명이다. 열반을 성취한
아라한에게는 자만심이 남아있을 수 없다. 아만심이 소멸되면 자연적으로 자타불이(自他不二)의 평등심이 형성된다.
IV. 결어
자기 사랑은 이기적인 행위로 비난되거나 무시되는 풍조가 있다. 진정한 자기사랑은 결코 타인을 괴롭히고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주의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사랑에 대한 오해에 의해 무조건적인 자기희생을 절대적으로 칭송하거나 자기의 행복은 도외시하고 타인의 행복을 먼저 추구해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도덕론자도 있다.
자기사랑의 부재가 모든 심리적인 문제에 근원이 되고 있다. 많은 심리적인 장애와 거기에서 파생한 행동이상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데서 기인한다고 심리학계에서 진단하고 있다. 우울 등의 광범위한 심리적장애(psychological disorder)가 주로 낮은 자기 존중감, 즉 자기 사랑이 부족한데서 비롯된다.
초기불교는 건강한 자기 사랑을 부정하지 않는다. 붓다에 의하면 진정한 자기사랑은 결코 다른 존재를 해치지 않는 마음을 전제하고 있다. 자기 사랑은 적어도 다른 존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며 적극적으로는 다른 존재의 행복을 염원하는 것이다. 초기경전에선 자애(自愛, atta-piya)라는 표현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자기자신에 대한 사랑을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붓다는 자기사랑을 자기 보호, 자념(自念), 자애념(自愛念), 자기이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붓다는 가르치고 있다. 신업 ․ 구업 ․ 의업이 모두 선업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고, 악업 짓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악업을 방지하는 것이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중요성을 다루고 있는 내용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자기사랑이 부정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사랑이 바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있다. 자신 내지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것은 본능적인 것이다. 붓다는 이러한 본능적인 자기애를 먼저 인정하고 있다. 일체 생명이 갖추고 있는 자기애는 악행으로 갈 수도 있고 선행으로 갈 수도 있는데 붓다는 진정한 자기애는 선행에서 완성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연기에 의하면 ‘나’는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이다. 자타불이의 가르침은 자기사랑과 이웃사랑이 모순되지 않고 상호 호혜 관계에 있는 것을 보여준다. 자리이타는 남을 위한 일방적인 자기희생도 부정한다. 자기 자신의 이로움을 무시하거나 남의 이로움을 빼앗으려고 해서는 안 되며, 남의 이로움에 대한 지나친 관심 때문에 나 자신이 추구해야 될 당연한 이익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된다.
자리이타는 자기보존, 자기존중, 자기애 등의 자연적 욕구에 근거하여 자신을 보살피는 마음을 타인에게 확대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건강한 자기 사랑은 이기적인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 다른 중생을 사랑하는 것이다. 무아의 가르침은 이기적인 욕심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지 건강한 자기 사랑(自己愛)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건강한 자기 사랑은 이웃 사랑의 토대가 된다.
초기불교의 자기사랑은 이타행을 강조하는 대승불교의 보살행과 비교될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의 자기사랑은 자리이타로 요약될 수 있다 자리가 타인을 침해하여서는 안되며 이타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반대로 타인을 위해 자신의 이익이나 행복이 희생되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초기불교의 자기사랑이 이타를 표방하는 대승불교의 보살행과 비교될 수 있다.
<참고문헌> : 생략
논문접수일: 2016년 7월 24일, 심사완료일: 2016년 8월 24일,
게재확정일: 2016년 8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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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동체자비는 자기자비가 전제될 때 가능하겠습니다._()_
잘 읽었습니다
먼저 자아가 있고 자아를 부처님이 가르치는대로 사랑하고
그 다음에 이타이군요
새로운 관점이 생깁니다
무아만 알았는데 자리 즉 자기사랑이라는 것도
초기불교에는 존재하는군요~~
말씀 감사합니다.^^
<자아>와 <자기>를 구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는 행위자이고, <자아>는 대상화된 <자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배타적인 이기심은 <자아 사랑>에서 나오고, 동체자비는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대상화되지 않은 <행위자로서의 자기>는 오직 행위할 뿐 내용규정이 불가능하여 육체를 제외하고는
남과 구별할 수 없기에 모든 생명과 동체일 수 있는 것이라 이해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무아>를 언급하고 있기에..._()_
따라서 <자기 사랑>은 스스로를 대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지지하는
온전한 긍정의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_()_
@수연 자기를 사랑하는 만큼 타자(사람 동물 식물)를 사랑해야 겠습니다
자아를 사랑해도 괜찮다 고 하니 더욱더 불교가 좋아 보입니다
무아와 자아사랑(자리) 그리고 이타(타자의 사랑)에 대한 주제는
다시 한번 큰 틀에서 심사숙고해보고 싶습니다
무아를 생각하며 자아와 타자에 대한 사랑...
고맙습니다
원 글의 자기존중감(self-esteem), 자기사랑(self-love), 자기중시(selfregard), 자기가치(self-worth) 등과
다른 글의 자기-자비(self-compassion)는 모두 자아(ego)가 아니라 자기(self)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래는 자아와 자기에 대한 참고 글입니다.
자기를 궁극적 실재라 하는 점에서는 문제가 없지 않으나,
자아와의 차이를 크게 드러내는 점에서 참고할만 글이지않나 싶습니다.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CF4Q&articleno=9300109
//ego는 자아, self는 자기로 구분해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자아와 자기는 둘 다 ‘나’를 뜻합니다. 그러나 자아나 자기가 가리키는, '나'란 존재의 차원이 다릅니다.
자아는 의식의 중심부로서 내가 의식하고 있는 나를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self)는 자아(ego)가 의식하지 못하는 자신의 잠재성입니다.
자기는 자아가 태어나는 토대이자, 선악, 미추, 시공을 초월한 궁극적인 실재입니다.
자아가 나 자신에 대한 이미지라면 자기는 잠재되어 있는 신성(神性)의 이미지입니다.
자기(self)는 발견되어야 하고 수용되어야 하고 실현되어야 할 어떤 것이지만 자아(ego)는 그렇지
않습니다.
각 문화권에서는 자기를 불성, 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등등으로 불렀습니다.//
(‘자아(ego)’와 ‘자기(self)’의 차이에 대해서
[류가미의 문예기행(15) 인터메조…십우도, 자기를 찾아서] )
'류가미'님이 <자기>를 내재하는 <불성>으로 이해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있으나 여기서 더 나아가
궁극적 실재라고 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가 말하는 궁극적 실재로서의 도나 신은 <자기> 안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기>는 물론
그 이외의 다른 일체를 포괄하며 동시에 그 모두를 초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하는 궁극적 실재는, 대승불교에서는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에 해당할 것입니다.
따라서 '류가미'님이 <자기=불성>을 궁극적 실재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곧 비로자나불이라고 하는
것으로서, '김아무개'씨의 일부인 새끼손가락을 '김아무개씨라고 하는 것과 같은 오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