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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세기말을 넘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인류는 그 이전 시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많은 변화를 겪었다. 정치·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예술과 문화 분야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스스로 쌓아 올린 것을 허물기도 하고, 때로는 완전히 변형시켜 버리기도 했다. 오늘날에야 자고 나면 세상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시대이지만 19세기 이전 세상은 비교적 완만히 흘러가며 앞날을 예幣?수 있는 시대였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말을 거쳐 20세기가 시작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전 인류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 붙인 제1차 대전, 극심한 경제적 계급분화, 사회주의의 대두와 소련의 등장. 이런 정치적 급변은 예전에 믿어왔던 것들을 믿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새로운 것이 요구되었고 새로운 시도가 싹트는 시기였다. 이 시기 무용에서도 새로운 시도가 시작됐다. 이전에는 발레리나가 짜여지고 정형화된 동작을 고통스럽게 표현하던 것과는 달리 춤추는 사람 스스로의 내면을 표현하고 관객과 공감하는 새로운 무용이 나타난 것이다. 그 새로운 무용, 이른바 현대무용(Modern dance) 을 만들어 낸 사람은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can)이었다. 이사도라 던컨은 1877년 5월 26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은행의 출납계원이면서 시를 썼고 어머니는 음악 선생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노처녀와 사랑에 빠져 어머니와 이혼을 했다. 이사도라가 태어난 직후의 일이었다. 어머니는 네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힘겨운 살림을 꾸려나갔다. 이혼의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불가지론자, 로버트 그린 잉거솔의 적극적인 추종자가 된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종교에 있어서나 인습에 있어서나 반항적인 태도를 심어 주었다. 거기다 타고난 예술가 기질까지 더하여, 아이들은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자라났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그녀는 한번도 제대로 된 무용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 몸으로 표현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춤을 추었다는 이사도라는 언니 엘리자베스와 함께 10세가 되기 전부터 이미 동네 어린아이들에게 춤을 가르쳐 생계를 벌었다. 그녀는 십대에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마음속의 생각과 느낌을 몸으로 표현하는 법을 가르쳤다. 15세가 되자 시카고로 간 이사도라 던컨은 프로 무용수가 되고 싶었지만 아무도 그녀의 춤을 이해하지 못했다. 춤으로 돈벌이를 해보려는 노력은 싸구려 뮤직홀에서 춤추는 일로 이어졌고, 이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먹고살기 위해 술집에서 캉캉과 비슷한 것을 추면서 돈을 벌었다. 돈벌이는 괜찮았지만 이사도라 던컨은 이 일을 1주일만에 그만두었다. 그것은 춤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흥행사의 눈에 띄어 단역을 맡은 것을 계기로 뉴욕의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정식 발레가 아니라 음악이나 시에 맞추어 즉흥적 춤을 추는 소녀는 관객들에게 일시적인 흥미밖에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뉴욕으로 건너간 이사도라 던컨은 2년 간을 더 삼류 무용수로 보낸다. 아무도 그녀의 춤을 제대로 바라 봐주지 않았다. 마침내 20세기를 1년 앞둔 1899년, 이사도라는 가축수송선을 타고 유럽으로 건너간다. 신대륙 미국에서 건너온 무용수 이사도라 던컨(1877∼1927)은 맨발의 자유로운 춤으로 유럽 예술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20세기 초 유럽의 예술계는 혜성같이 등장한 한 여인으로 인해 술렁거렸다. 아름다운 무대 장치도 없이, 몸에 딱 붙는 무용복도 없이, 결정적으로 이제까지 춤을 춘다면 반드시 신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토슈즈도 없이, 맨발에 헐렁하고 속이 비치는 드레스를 걸친 무용수는 처음 보는 춤을 사람들에게 선보였다. 아름답고 기교가 뛰어난 전통 발레와는 전혀 다른 춤이었다. 하지만 그 춤을 보고 있노라면 춤을 추는 무용수의 절절한 마음이 그대로 다가왔다. 그녀는 영국과 독일, 러시아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의 춤으로 인해 무용에 대한 인식은 180도 전환되었으며 토슈즈의 발레를 떠나 자유롭게 인간의 몸과 마음을 표현하는 현대 무용이 등장하였다. 이사도라 던컨, 그녀는 맨발로 고전적 무용세계에 혁명을 일으켰다. 영광과 갈채의 나날 속에 깊어가는 열정 유럽행을 결심한 것은 스물 한 살 때부터였다. 거의 빈털터리나 다름없이 가축운송선을 타고 런던에 도착한 그녀와 형제들은 우연한 도움으로-달밤에 춤을 추다가 정상의 여배우 캠벨의 눈에 띄어서라는 것이 전설적인 설명이다 런던 사교계에 소개되었다. 이후로는 갈채의 나날이었다. 나무의 요정과도 같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사지를 드러내는 얇은 의상을 걸친 채 맨발로 자유롭게 걷고 달리고 뛰고 구르는 것만으로 내면의 정서를 표현하는 이 아름다운 무용수는 런던, 파리, 베를린, 가는 곳에서 마다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뮌헨에서는 학생들이 공연이 끝나고 돌아가는 그녀의 마차에서 말을 떼어버리고 자신들이 마차를 끌기까지 했다. 1903년에는 형제들과 함께 그리스에 가서 고대적인 풍광 가운데 자신을 풀어놓고 일년 내내 마음껏 춤추며 지냈으며, 1904년에는 독일의 그루네발트에 학교를 세우고 빈민층 소녀들을 가르치랴 재원 마련을 위해 순회 공연을 하랴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꿈과 포부가 그대로 펼쳐지는 시절이었다. 그 무렵에는 춤에 대한 그녀의 생각도 무르익어 있었다. 파도나 바람 같은 자연 현상에서 영감을 얻은 유연한 동작으로 내적 감정을 표출하던 그녀는 대영박물관에서 고대 그리스의 조각들을 보고 그 흐르는 듯한 인체의 곡선이야말로 항구적인 아름다움의 이상임을 확인했으며, 독일에서는 니체의 사상에 깨우침을 받아 춤이야말로 인간의 영혼을 가장 자유롭게 표현하여 종교의 경지에까지 이르는 고도의 예술임을 선언했다. 무용수는 오랜 연구와 기도와 영감의 작업을 통해 자신의 육체가 영혼의 빛나는 표현임을 터득한다. 그의 몸은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악에 맞추어 춤추면서 보다 심원한 세계로부터 오는 무엇인가를 표현하게 된다. 이런 무용수야말로 진정 창조적인 무용수이다. 자연을 본받되 모방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우러나는 동작으로 말하되 모든 자아보다 위대한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편협한 청교도 사상에 사로잡혀 그녀의 춤을 이해하지 못했던 미국과는 달리 세련되고 폭이 넓은 유럽의 예술계는 그녀의 춤을 단번에 받아 들였다. 많은 예술가들이 그녀의 춤을 보고 감명을 받았으며, 찬사를 보냈다. 이사도라 던컨의 성공은 특히 독일과 러시아에서 눈부셨다. 특히 정통 발레의 본고장이었던 러시아에 던진 충격은 대단했다. 새로운 무용에 대한 전폭적인 관심으로 그녀는 무용 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자유로운 사상과 영혼에 깊이 감명받은 그녀는 그것을 춤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에서 자신의 춤을 더욱 발전시키기도 했다. 전통과 관습에 반항한 비운의 여인... 열정적인 무용가였던 만큼 이사도라 던컨의 사랑도 열정적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어머니를 보며 자란 그녀는 결혼 제도를 믿지 않았다. 전통이나 관습에 반항적인 태도는 사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모의 불행한 결혼을 보고서 이미 열두 살 때 독신을 맹세한 터였지만, 사랑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녀였다. 1906년에는 런던의 무대 디자이너 고든 크레이그에게서 첫 딸, 디어드리를 낳았으며, 1910년에는 미국의 재력가 패리스 싱어와의 사이에 패트릭을 얻었지만 결코 그들과 결혼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유롭게 춤을 추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자신이 추고 싶은 춤을 추며 두 자녀를 둔 어머니의 행복을 느끼던 그녀에게 닥친 첫 번째 불행은 너무나 끔찍한 것이었다. 보모와 함께 나들이 나갔던 아이들을 차 사고로 인해 모두 잃은 것이다. 이사도라 던컨에게 이제 남은 것은 춤밖에 없었다.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춤을 추며 전 유럽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자유롭고 강인했던 그녀는 춤을 통해 실의로부터 점차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불행을 딛고 파리에 다시 학교를 열려던 계획이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무산되자 이사도라 던컨은 파리에서 새빨간 튜닉을 입고 『마르세예즈』를 무대에 올린다. 그녀는 이 공연 마지막에 “시민이여! 무기를”이라고 외치며 전쟁에서 밀리고 있던 프랑스인들의 용기를 북돋우었다. 미국으로 돌아갔던 그녀는 세 번째 아이를 사산했고, 종전 후 남아메리카, 독일, 프랑스 등지에서 순회공연을 계속했지만 이전 만한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1920년에는 모스크바 무용학교 설립을 위촉받아 러시아에 갔다가 17세나 연하인 천재 시인 에세닌을 만나 결혼했으나, 당시 반공산주의 분위기가 팽배해 있던 미국에서 두 사람은 ‘볼셰비키’로 낙인 찍혀 다시금 방랑길에 올라야 했다. 에세닌과의 사랑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의 재능과 사랑을 질투한 에세닌이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한 채 혼자 러시아로 돌아가 1925년 자살해버리고 만 것이다. 화려하고도 파란 많은 삶, 마침내 극적인 죽음... 사랑하는 자녀들의 죽음, 사산, 예술가로서의 좌절, 불행한 결혼 생활, 남편의 자살……. 그녀의 말년은 비운으로 얼룩졌다. 그리고 그 화려하고도 파란 많은 생애는 극적인 죽음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1927년 9월 14일,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의 휴양지 리비에라 해안의 니스에서였다. 그녀를 숭배하는 젊은 청년이 스포츠카를 가지고 와서 드라이브를 권했다. 다소 차가운 날씨였으므로, 그녀는 쇼올을 둘렀다. 가장자리에 달린 술 장식의 길이만 45센티나 되는 길고 붉은 비단 쇼올이었다. 머플러를 휘날리며 그녀는 가볍게 차에 오르며 친구들에게 “안녕, 나는 영광을 위해 떠나!”라고 외쳤다. 그리고 머플러자락을 뒤로 넘기고 차가 출발했다. 그 순간, 유럽 무용사의 혁명가이자 자유로운 여성의 삶을 온 몸으로 살았던 이사도라 던컨에게 죽음이 왔다. 쇼올의 술이 바퀴에 말려 들어갔고, 그녀는 목이 졸려 즉사했다. 그 뒤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의 지하 납골당에 유해가 안치되었다. 한 발은 록키 산맥의 정상에 딛고 양손으로는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를 품어 안은 채, 머리로는 하늘을 이고 그 이마에 무수한 별들의 왕관을 쓴, 우주적인 무용수가 되기를 원했던 여성은 길지 않은 생애를 이렇게 마감했다. 그러나 그녀가 온 몸으로 보여준 모범을 통해 무용은 음악이나 미술, 시와 나란히 정상의 예술로서 자리잡게 되었으며, 그녀가 모색한 이른바 “미래의 무용”은 오늘날 현대 무용의 토대가 되었다. 그녀의 춤은 그 춤이 너무나 자유로워 후대까지 춤사위 하나 하나가 전해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20세기 초반 발레 위주의 무용계에 던진 자유로운 정신만은 길이 남아 현대 무용의 넋이 되어 살아있다. 여성에게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요구하고 순종적인 삶을 기대하던 20세기 초반, 이사도라 던컨은 자신의 온몸을 불살라 자유로운 삶을 살아낸 여성이었다. 전통적인 격식이나 관습의 일정한 규준을 깨뜨린 무용의 혁명가.. 그녀는 어쩌면 무용의 새로운 기법뿐만 아니라 무용과 인생의 새로운 개념까지도 이세상에 가져온 디오니소스적 무용가 였는지도.. 춤으로 영혼의 자유를 구사했던 이사도라 던컨 그녀가 가졌던 자신과 자연과의 연계를 몸으로 나타냈던 무위의 그 순간을 생활로 돌아온 그녀의 삶속에서 얼마큼의 접자연적인 그녀였을까를 생각해 본다. 문득, 한 시대를 대미했던 영혼의 자유를 누렸던 여인들의 삶을 생각하다가 이사도라 던컨을 기억하게 되고 그녀의 삶을 회고 해보며 대리 삶을 연상해보기도 하고 그녀를 통해서 간접적 혼의 자유를 느껴본다. -이사도라 던컨이 되던날 ^^ - 다을
첫댓글 그저 넘쳐흐르는 기운으로 ...무위의 기운이 만들어낸 몸짓이여서... 한소식 접하셨는지도 궁금^^ 이사도라를 맨처음 알게된 동기가 ㅋ 기타 연습하다가 알았다는....'맨발의 이사도라' 삶을 불꽃을 태우며 살다간 이들을 한명씩 소개시켜주는 시간을 가지심도 좋을듯 하옵니다.
이사도라 던칸처럼 살다가진 못하더라도 이름없는 산골의 촌부처럼 살더라도 맘편히 하루를 살아야지요. 대리 삶은 살수 없지요,,ㅎㅎㅎ
그녀가 춤추는 순간만큼은 인간의 몸으로 승화된 최고의 영혼자유를 누렸을것...그것보다 더 편안한게 어딨을까요...누구든 추구자체가 대리삶을 살아보는것이겠지요..^^
이사도라 던컨이 되던날.......좋은 시간 보내셨군요......조용히 살지만 때론 열정이 필요하지요......^^
멋진인생! 멋진애기... 감사합니다
글이 이사도라 같네요
이사도라의 자유로움 삶을 동경하기도 하지만 이사도라가 갖지 못한 알콩달콩 지지고 볶는 내 삶도 그 못잖게 값 있는삶인것을....
그녀의 삶이나 목수의 삶이나 평화로운 그날을 위해 끝없는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