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 나오는 사막여우가
생각이 났습니다.
어린 왕자만 사막여우와 얘기하고 고뇌할 이유가 없다.
누구라도 사막여우와 대화하며 함께 길들여져 갈 수 있는 것이다.
나도 사막여우와 얘기를 나누며 마음을 풀어볼 시간을 갖기로 마음 먹고
사막여우를 찾아 나서기로 하고 대전으로 내려갔다?
대전? 많
고 많은 동물원 중에 굳이 ‘대전 오월드’의 동물원에 있는 사막여우를 찾아간 이유를 대라면
B612라 칭해진 지구의 사막을 찾아온 어린 왕자처럼,
대전에는 현충원이 있어 하늘나라와 영혼을 교감하기 가까운 곳에 있다는 마음 속 지리적 공감대 때문과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The Alchemist)’에서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는 믿음이 마음 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절실하면 우주가 도와준다’는 얘기가 브라질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의 작품에서 나왔다고
놀라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것 같다.
사람들도 북적거리는 한낮 뜨거운 태양의 열기로 휩싸인 동물원은
걸어만 가도 졸음이 쏟아질 정도로 나른함이 몰려왔다.
하물며 우리에 갇혀있는 동물들은
더위와 나른함에 밀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낮잠을 청하기 일쑤였다.
이정표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막여우 찾기에 집중하다 보니 다른 동물들은 눈에 전혀 들어오질 않는다.
출장지로 떠날 때 수행업무에 대한 부담감으로 좋은 풍경이나 관광지 등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이치와 매한가지다. 드디어 사막여우 우리 앞에 우뚝 섰다.
이미 내 마음의 영혼의 동료로 길들여진 사막여우라 하더라도
염력으로 깨울 수 없는 인간의 한계 때문에
그가 깨어나기를 한참 동안 기다리고 있었더니 그 정성 때문인가?
아님 영혼의 울림이 전달되었는지 앞다리를 쭈욱 펴며 일어나 내게로 다가오더니 눈빛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안녕, 난 어른 왕자야” 나도 모르게 어린 왕자 흉을 냈다.
다만 어린 왕자를 어른 왕자로 바꿔불렀을 뿐이다.
“어른 왕자라구요?
난 어린 왕자를 기다리고 있는데요,,
,” 말끝을 흐리는데 살짝 기분이 상한다.
아무리 부탁이나 요구를 위해 찾는다손 치더라도 누구나 상대가 표정이나 말투에서 이런 느낌을 받는다면
썩 기분이 내키진 않을 것이다.
“왜 어른 왕자하곤 영혼 교감이 어려워?”
기분 나쁜 표정을 숨기고 가능한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질문을 툭 던져봤다.
“아무래도 고착된 사고(思考)를 떠올리게 되니까요”
“아, 요새 유행하는 단어인 꼰대 같았구나?
하지만 어른들도 유한 사고(思考)를 지니면서 많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기도 해”
“보통 그렇게 얘기들은 하더라고요. 자신은 해당하지 않는다면서”
심드렁한 표정이 나오고 등을 돌리려는 자세가 보인다.
“넌 친구를 찾는다고 하지 않았었니? 아니면 어린 왕자와 이미 관계가 형성되었고
그에게 길들여졌으므로 새로운 친구가 필요 없다는 뜻이야?” 나도 심드렁하게 대응하기로 했다.
“그건 아니지만”
“그럼 순수함이 가득한 어린아이들만 친구로 삼을 거니?”
“딱히 그런 건 또 아니에요.
하지만 편견, 증오, 불신이 자리한 마음을 지닌 기성 세대의 고착된 삶이
아직은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거죠”
“넌 이미 나랑 눈빛을 교환했고 함께 대화를 하고
서로의 마음을 알아가려고 탐색하며 살펴보고 있으므로
내게 길들여져 가고 관계를 형성 중인 걸?”
“아, 인간은 말만 섞어도 관계를 형성한다고 하나요?
그리고 그걸 길들여진다고 할 수도 있어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걸요?”
나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난 네가 이해를 하지 못하는 걸 되려 이해하지 못하겠어”
“…”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이 없어진 사막여우에게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답해 줄 수 있을까?
너도 ‘그리움’이란 걸 품고 살지?
예를 들면 너를 길들게 한 어린 왕자에 대한 그리움 이라든지, 꽃, 사냥꾼, 어떨 땐 괴롭힘까지,,,”
“그렇긴 하지만 어른 왕자는 아니거든요?”
“좋아. 그렇다고 치더라도 넌 마음에 그리움을 하나 품고 산다는 건 어떻다고 생각 해?”
“마음에 그리움 하나 품고 산다는 거요? 그건 당연히 축복 받을만한 일이죠”
“축복 받을 만 하다고? 그리움엔 아픔이나 회한이 내재되어 있어 고통이 뒤따르는데도?”
“그리움이 고통이 수반한다면 그렇다면 그리움이란 포기해야 하는 개념인가요?
그리움이란 결국 소망과 기쁨을 기다리기 위한 희열의 산물이 아닌가요?”
사막여우의 귀가 빨갛게 달아오르며 더더욱 쫑긋해지기 시작하며 나를 노려보기까지 한다.
그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맹수가 초식동물을 공격할 때 쏘아보는 그런 섬뜩한 눈빛이다.
“그 희열이 완성되지 못할 수도 있잖아?”
단호한 사막여우의 주장과 눈빛에 내 말투가 슬슬 자신 없는 말투로 바뀌고 있다.
“내가 이래서 어른 왕자와 관계 형성이 싫은 거에요.
어린 왕자라면 희열을 목표로 하지 이렇게 포기를 일삼는 것 같은
부정적인 말을 절대로 하진 않을 거거든요”
목소리가 높아져가고 있다.
도대체 어린 왕자는 얘를 어떻게 길들였다는 거지?
의문이 앞선다.
“아니, 있잖아.
그리움이 때론 슬픔이 되고 슬픔은 본성이기도 해.
그렇다고 슬픔이 모두 부정적인 표현만은 아냐.
그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감정의 표현 중 하나이고”
나도 덩달아 언성이 높아졌다.
“어른 왕자라고 하셨나요?”
물음이 떨어지자마자 다음 말은 듣지도 않고 대답을 해버렸다.
“응” 다음 해야 할 대화의 맥락이 끊겼는지 더욱 실망한 사막여우 표정이 어둡기까지 한다.
속으로 ‘아차, 내가 말을 끊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난 그리움이 귀한 이유는 이렇게 생각해요.
그 그리움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쉼 없이 달려가야 하고,
그 그리움이 곧 살아가는 이유이고 삶의 목표가 확실하게 설정되기 때문이에요”라며
어느새 이성을 찾았는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간다
“아, 삶의 목표와 이유라”
“그리움은 무기력한 일상으로부터 생명과 사랑을 지켜야 하는 희망이기 때문이거든요”
사막여우의 답변엔 거침이 없고 논리 또한 정연하게 전개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그리움이 곧 ‘내 삶의 중심’이 되는 거네?”
“느끼는 사람들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마도 그렇겠죠?
삶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면 당연히 삶의 중심이 되는 거에요.
그리움이라는 것이 남들에게는 어쩌면 부질없이 보일지 모르지만
절실한 사람들에겐 특히 한줄기 희망의 끈이기 때문에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그리움도 수많은 감정 중 하나의 감정이고 그 감정을 수양하는 방법이 있을까?”
어느새 내가 사막여우에게서 길들여지고 있는 느낌이다.
아니 이미 길들여졌음이 확실하다.
어린 왕자가 그립고 부럽다.
그도 사막여우에게 길들여졌지만 동시에 사막여우를 길들여졌으므로.
“그리움은 당신의 영혼을 채워주는 양식일 뿐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고 봐요.
그런데 감정의 수양이라구요?
감정의 수양은 대응 방식에 달려있다고 봐요,
제 의견으로는” 힘주어 말하는 사막여우의 카리스마가 절정에 다다른 것 같다.
“대응 방식으로 감정을 수양한다?
난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인데?”
자꾸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는 문맥과 단어의 구사에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어 댄다.
“그래서 어른 왕자인 당신의 몫이 되는 거랍니다.
대응한다는 것은 표현이고 느낌이니까요.
당신의 몫을 내가 나누고 싶진 않아요” 단호함이 베어난다.
혼란스럽다.
‘그리움’으로 풀어나가려던 명제들이 내가 선택한 단어로 말미암아 또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게다가 어린 왕자처럼 관계 형성을 통해
사막여우와 함께 길들여보겠다던 내가 사막여우에게 일방적으로 길들여졌다는 것이
확실한 현실이 되어버렸다.
“경계를 얘기하는 건가? 대응이라는 건?”
내 물음이 훨씬 조심스러워졌다.
“혹시 당신은
‘그래도’ ‘그리고’ ‘우리’라는 세 단어가 무얼 뜻하는지 아세요?”
갑자기 뜬금없는 단어의 나열로 화제를 돌려댄다.
나는 대응에 대한 답을 구하려던 참이었는데.
“‘그래도’ ‘그리고’ ‘우리’라?” 머뭇거릴 수 밖에 없다.
평소에 그냥 잘 써온 단어가 아니던가? 그
런데 설명을 하려니 도무지 표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할 뿐이다.
쯧쯧 하며 사막여우가 혀를 차는 것처럼 보였지만 증거가 없으므로 뭐라고 나무랄 수가 없다.
느낌만 믿고 ‘어디 어른에게 감히 혀를 차?’라고 말했다간
‘그러면 그렇지. 꼰대가 확실하네’라는 확증만 줄 셈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다툴 때
논리적으로 비약한 상황에 처하거나 불리한 형세를 맞이하면 의례히
‘너 몇 살이야?
어린 게 어디서 까불어?’라는 말이 쉽게 튀어나온다.
나는 지금 사막여우에게 이미 자격지심의 본심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 확실하다.
얘는 지금 사막에서,
아니 동물원 우리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고 공부를 하고 있나?
아니면 후고구려,
아니다 태봉 왕국의 ‘궁예 대왕’처럼 ‘관심법’을 연마한 것인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기 시작한다.
“눈을 한번 감아 보세요.
그리고 이 세 단어들을 어떤 경우에 사용하는지 문장을 한번 만들어 보실래요?”
“’그래도 이승이 저승보다 났다’
‘네가 힘든 거 알아, 그래도 넌 그걸 잘 이겨낼 거야’
‘우리 얼굴 한번 볼래?’ 뭐 이렇게 문장을 만들 수 있겠는걸?”
“그래서 떠오르는 것이 없나요?”
“희망이 실리는 단어 같은데”라고 말끝을 흐리자,
“하하하, 맞아요.
이 세 단어는 희망을 주는 단어랍니다.
역시 어른들의 경험은 무시할 순 없네요”
그가 어린아이들만 찾는 것이 아닌 이유 중에 하나일 것이다.
“흐음,
그렇다면 감정의 대응도 경계도 이 세 단어로 풀어갈 수 있다는 것이로군”
“그리움이 희망이 되는 이유가 멀리 돌고 돌아서 자리를 찾아온 거죠”
눈이 번쩍 떠졌다.
얼굴이 상기되면서 가슴이 쿵쾅쿵쾅 마구 뛰기 시작한다.
“한가지 더 물어봐도 되나?”
염두에 두고 있던 단어를 꺼낼 참이다.
“죄송해요.
밥 시간이 되어서 가야겠어요.
사람들은 꼭 정해진 시간이 아니더라도 아무 때나 먹을 수 있죠?
여긴 그렇지 않거든요.
지금 차려주는 밥 한끼를 놓치게 되면 내 일생 동안 그 밥은 절대로 찾아 먹을 수가 없거든요”
뒤돌아서며 하는 말이다.
먹는 것, 무척 중요하다.
사막여우의 현실적인 상황 전개에,
추상적이고 공상적인 관념적 사고에 가끔 깊게 빠져버리는 우리 인간의 모습을 투영시켜본다.
교집합이 있을 리 없지만 가상의 공간에 교집합이 있을 것만 같은 이 느낌은 무엇인가?
난 사막여우와 한 단어의 설정을 통해 관계가 형성되었을까?
서로에게 길들여졌을까?
다음 기회에 찾아오게 되면 날 친구로 맞이해줄까?
마음엔 의문 부호들만 차곡차곡 쌓여졌다.
그래서 무거울 것 같은 마음은 그리움은 희망이라는 등식과 삶의 중심이라는 준칙으로 받아 드려져
오히려 많이 가벼워졌다.
동물원을 나사는 발걸음이 석양에 잠겨도 얼굴은 환하다.
삶의 중심을 위하여!!!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돼
나에게 너는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거고,
나 역시 너에게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거야..."
- 어린 왕자 (사막여우와의 대화)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