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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1918년 6월에 조선 식산 은행령을 제정, 공포한 후 10월에 주식 회사
조선 식산 은행을 설립하였다. 식산 은행은 일제의 식민지 수탈을 위한 전위 기
구였다. 일본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한국이 식량 및 원료 공급 기지와
대륙 침략을 위한 첨병이 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는 1918년 6월에「조선식산은행령(朝鮮殖産銀行令)」을 공포하였다. 일찍이 1906년 이래로 농공은행(農工銀行)을 운영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식산은행의 설립을 의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은 조선식산은행령을 발포함과 아울러 조선총독부의 탁지부장관이었던 영목목(鈴木穆)이 조선식산은행의 설립에 관한 취지를 밝히는 성명서에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농공은행조직(農工銀行組織)에 근본적인 혁신을 가하여 농공은행의 분립제(分立制)를 개정하고 통일함으로써 조선전도(朝鮮全道)의 자력(自力) 및 신용을 일단(一團)으로 하고 내선양지(內鮮兩地)로부터 널리 자본(資本)을 모집하여……반도(半島) 장래의 경제에 공헌하려고 한다.」
이와 같은 설립이유는 사실과 어긋나는 것이며, 진상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가 조선식산은행을 설립하지 않을 수 없었던 최대 이유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첫째, 종래 농공자금(農工資金)의 공급기관으로 역할하여 왔던 농공은행의 제도가 심각한 파탄에 빠졌기 때문에 조선총독부는 농공은행과는 명칭이 다른 장기산업(長期産業) 금융기관을 설립함으로써 스스로가 저질러 왔던 농공은행의 파탄을 수습 극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16년 당시에 조선총독부의 탁지부장관이었던 망정현태랑(**井縣太郞)은 일본의 권업은행(勸業銀行)과 동일한 은행을 한국에 설립할 것을 그 당시 일본수상 계태랑(桂太郞)에게 구신(具申)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일본수상은 일본 내에서 경영되고 있는 권업은행의 권익이 침해될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권업은행을 한국에 설립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다. 어쨌든 조선총독부가 권업은행을 설립하려고 의도한 것은 농공은행제도의 파탄을 수습하기 위한 하나의 혈로를 찾으려 하였던 사실의 반증이 되는 것이다.
농공은행이 파탄에 빠진 원인은 한국에 이주하여 온 일본인들이 농공은행을 마치 사금고(私金庫)처럼 이용하여 그 본연의 사명과 기능을 발휘할 수 없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사례를 인용하기로 하겠다. 1911년 대구에서 발간된 일본인의 저서(著書)『대구일반(大邱一班)』은 농공은행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일본인들의 사용물(私用物)처럼 악용되었는가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행장(行長) 이하 중역을 조선인으로 하고 지배인 및 기사(技師) 기타 행무(行務)의 간부에는 일본인을 고빙(雇聘)하였으며……농은(農銀) 초대 지배인은 법학사(法學士) 토옥수태랑(土屋壽太郞)씨이고 다음이 법학사 석정광웅(石井光雄)씨였다. 설립 당시는 목적하는 바 농공사업이 아직 발달하지 못하였고……농은(農銀) 정당(正當)의 대출은 사실상에 있어서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다른 방면에 방자(放資)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였다. 그리하여 초대 토옥지배인시대에는 일본인 중 특종(特種)의 영업자에 대하여 대출이 이루어져서 농은목적(農銀目的) 이외의 방면에 자본(資本)을 고정시키고 말았다.」
이 기록이 말하고 있는 바대로 농공은행 운영에 관한 실권을 잡고 있었던 일본인 지배인들은 농공은행 자체의 목적에 따라 농공자금을 공급하지 않았고, 다만 일본인들의 상업자금만을 융자하는 일에 주력하여 왔던 것이다. 더구나 농공업이 발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농공은행을 설립하여 농공업의 발달을 진행시키겠다는 것이 농공은행을 설립한 최대의 목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지배인들은 농공업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농공자금을 융자하지 않았다고 하니,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투기에 눈이 어두웠던 일본상인들만을 상대로 해서 모든 자금을 공급하였으니 회수불능의 불량대출이 누적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농공은행이 불량대출을 거듭하여 왔기 때문에 야기되었던 경영상의 손실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볼 수 있다. 1917년에 이르러 한호농공은행(漢湖農工銀行)의 결손액(缺損額)은 680,203원이었으며, 평안농공은행(平安農工銀行)의 결손액은 917,521원이었다.
또한 이 점에 관해서는 조선식산은행의 설립 입안자였던 조선총독부의 탁지부장관(度支部長官) 스스로가「회수불능에 의한 업무삽체(業務澁滯)」라는 말로 농공은행의 말로(末路)를 형용하였다는 사실로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1920년부터 1937년에 이르는 18년간을 조선식산은행의 두취(頭取)로 지냈던 유하광풍(有賀光豊)의 인물을 평가하는『일본인사지(日本人事誌)』는 그의 최대의 업적을「난마(亂麻)와 같이 흐트러진 농공은행시대(農工銀行時代)」의 불량 고정대출을 정리함에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한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몇 가지 사례에 비추어 본다면 조선식산은행의 설립은 농공은행제도의 파탄을 수습 극복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가 조선식산은행의 설립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던 두 번째 이유는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가 그 설립의 근본취지를 유린한 나머지 그 업무영역을 만몽(滿蒙)지역 뿐만 아니라 남양군도(南洋群島) · 남미제국(南美諸國) 등 일본인의 식민대상지역에까지 확장하였기 때문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가 1917년 7월에 그 회사법(會社法)을 개정하여 본점을 동경으로 옮기고 서울의 본점을 지점으로 격하시킨 사실은 그 업무활동의 중점을 한국으로부터 일본이민들의 새로운 개척지로 옮기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가 한국 안에서 이룩하는 영업활동이 적어지면 질수록 그 회사가 한국 안에서 공급할 수 있는 산업자금의 분량은 적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조선총독부나 조선식산은행은 일찍이 이 점에 관하여 솔직히 언급한 바가 없었다.
그러나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동경에 본사를 옮기고 한국 안에서의 영업활동에 대해 급격한 제한조치를 한 것은 조선총독부나 일본정부로 하여금 산업자금의 공급면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의뢰한 마음을 버리게 하려던 것이며, 산업자금의 공급을 전담하는 독자적인 금융기관의 설립을 위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식산은행령을 공포함과 동시에 그 설립을 위하여 수많은 설립위원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위원장에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政務總監)이었던 산현이삼랑(山縣伊三郞)을 임명하였다. 일본측으로부터 임명된 설립위원들로서는 척무성(拓務省)의 척식국차장(拓殖局次長), 대장성(大藏省) 은행국장(銀行局長), 일본권업은행총재(日本勸業銀行總裁), 동양척식주식회사총재(東洋拓殖株式會社總裁), 제일은행두취(第一銀行頭取), 제삼십사은행두취(第三十四銀行頭取), 제백삼십은행두취(第百三十銀行頭取), 일본은행이사, 동양척식주식회사이사 등이 임명되었다.
한편 한국측으로부터는 17명의 설립위원이 임명되었는데, 그 중에서 조선총독부와 조선은행 간부들이 여섯 자리를 차지하였으며, 조선척식주식회사(朝鮮拓殖株式會社)의 이사와 조선우선주식회사(朝鮮郵船株式會社)의 사장으로써 두 자리가 메워졌다. 나머지 9명의 설립위원들은 한국인들이었는데, 그 중 3명이 한일은행장인 민영휘(閔泳徽), 한성은행 전무취체역(專務取締役)인 한상용(韓相龍), 조선상업은행장인 조진태(趙鎭泰)였고, 나머지 6명은 조선식산은행의 조직모체(組織母體)였던 농공은행장(農工銀行長)들이었다. 한성농공은행장 백완혁(白完爀), 평안농공은행장 이진태(李鎭泰), 경상농공은행장 이병학(李炳學), 전주농공은행장 박영근(朴永根), 광주농공은행장 김형옥(金衡玉), 함경농공은행장 김병유(金秉洧) 등이 설립위원이다.
이 설립위원회는 허수아비명단의 대표적인 사례에 지나지 않지만 조선식산은행의 설립을 계획하였던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더구나 대장성(大藏省))가 어떻게 조선식산은행을 설립하려고 하였는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조선총독부의 탁지부장관은 앞에서 보아온 성명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현재 조선 각지에 분산되어 있는 6개소의 농공은행(農工銀行)을 통일 합병하는 동시에, 자본을 증대하여 조선의 식산상(殖産上) 중요한 금융기관으로써 설립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조선식산은행의 설립기반으로서 1906년에 설립되었던 농공은행을 이용하려는 취지를 말하는 구절임에 틀림없다. 또한 그러한 취지에서 6명의 한국인 농공은행장들을 설립위원으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식산은행의 설립을 본 후에는 6명의 한국인 농공은행장들에게 아무런 직위도 주지 않았으며 직책도 맡기지 않았다. 조선식산은행의 휘장(徽章)은 6개의 농공은행이 하나로 통합된 사실을 상징하는 것으로 고안되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더라도 농공은행은 조선식산은행을 설립함에 있어서 불가결의 배경이었던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농공은행을 설립하고 운영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다하여 왔던 한국인들에게 아무런 직위조차 주지 않았다는 것은 배신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탁지부장관은 그 성명서에서
「조선은행과 자금의 관계상 충분한 연락을 보지(保持)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대하여서는 부동산, 금융상 밀접한 관계를 맺을 뿐만 아니라, 식산은행채권을 인수토록 하며 나아가서 일본권업은행(日本勸業銀行)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대리대부(代理貸付)의 방법에 의하여 동 은행의 풍부한 자금을 조선에 묘치(描置)함으로써 식산자금(殖産資金)을 윤택(潤澤)토록 하는 것」
등이 조선식산은행의 자금조달책(資金調達策)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한 취지에서 설립위원에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총재와 2명의 이사가 임명되었고, 조선은행의 총재와 2명의 이사가 임명되었다. 또한 일본권업은행의 총재도 설립위원명단의 으뜸가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식산은행의 설립 입안자(立案者)들이 예상하였던 것처럼 동양척식주식회사나 일본권업은행으로부터 자금의 지원을 받을 수가 없었다. 바로 이 때문에 조선식산은행은 1918년 10월 1일 그 창립 사무소였던 한성농공은행(漢城農工銀行)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기에 이르기까지 형용하기 어려운 자금조달의 난관을 겪었던 것이다. 조선식산은행의 설립위원의 한 사람이었던 한상용(韓相龍)은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당시의 조선에 있어서는 아직 주식(株式)의 관념이 박약(薄弱)하였고 일본의 조선에 대한 이해가 적었기 때문에 영목장관(鈴木長官)은 크게 걱정하였다. 6월 26일 오전 10시 총독부로 장관을 방문한즉, 주식(조선식산은행의 주식을 말함)의 모집(募集)에 대하여 크게 걱정하고 있었으며, 과연 성공할지 어떨지를 분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편찬한 조선식산은행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주식의 응모자수는 발행주식수의 30배에 달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에 어긋나는 기록이다. 설립자본금의 조달이 난관에 부딪치자 조선식산은행의 설립 주도자들은 농공은행의 구주주(舊株主)들에게 63,500여주를 할당하는 방편까지 안출(案出)하였다. 그리하여 일반에 공매(公賣)하는 주권수(株券數)를 되도록 적게 하였던 것이므로 조선식산은행의 주식에 대한 응모율이 피상적으로는 높았던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조선식산은행은 일반은행법이 아니라 조선식산은행법이라는 특별법에 의거하여 설립된 은행으로 설립의도는 조선식산은행을 일본정부나 조선총독부의 의도대로 지배할 수 있는 감독권을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선식산은행법을 보면 감독권은 조선총독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조선총독은 조선식산은행의 정관(定款)을 변경하는 일, 지점 및 대리점을 설치하는 일, 이익금을 배당하는 일, 업무의 방침을 결정하는 일, 채권(債券)을 발행하는 일 등에 걸쳐서 인가를 얻도록 하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조선총독은 조선식산은행 감독관을 파견하여 조선식산은행의 행동을 감시할 수 있는 권한을 아울러 영업상의 계산과 경제동향을 보고토록 하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조선총독은 조선식산은행의 은행장과 이사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사실은 조선총독에게 맡겨져 있는 감독권은 조선총독이 사용하기에 앞서서 일본정부가 직접적으로 행사하는 사례가 허다하였다.
조선식산은행법에 의하여 은행장의 임명은 조선총독의 권한에 속하는 사항으로 되어 있으나, 실지로는 일본정부가 그 권한을 행사하였다. 가령 조선식산은행의 초대 은행장에 삼도태랑(三島太郞)이 임명되었는데, 그를 은행장으로 임명한 사람은 조선총독이 아니라 그 당시 일본의 수상겸 대장대신이었던 계태랑(桂太郞)이었다. 삼도태랑은 일본 제일은행의 은행장이었던 삽택영일(澁澤榮一)의 심복인(心服人)으로서 제일은행 한국총지점에 있다가 그 지점의 시원(市原)지배인이 조선은행의 총재로 임명됨에 따라 수석이사(首席理事)로 부임하였던 사람이다.
이와 같은 배경을 가진 삼도태랑이 조선식산은행의 초대은행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일본정부에 대한 삽택영일의 발언권이 얼마나 강하였느냐를 말하는 동시에, 조선식산은행에 대하여 조선총독보다도 일본정부의 대장대신(大藏大臣)이 보다 강력한 지배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기도 한다.
조선식산은행의 초대이사에는 앵정소일(櫻井小一) · 석정광웅(石井光雄) · 심미도서(深尾道恕) · 삼오일(森悟一) · 박영효(朴泳孝) 등이 임명되었고, 감사(監事)에는 광뢰만정(廣瀨滿正) · 윤덕영(尹德榮) 등이 임명되었다. 유하광풍(有賀光豊)은 조선식산은행의 창설과 더불어 조선총독부의 참사관겸(參事官兼) 이재과장(理財課長)으로부터 수석이사(首席理事)로 영전하였고, 1920년에 초대 은행장인 삼랑태랑이 사거(死去)하자 뒤를 이어 은행장으로 승진하여 1937년까지 그 자리를 지켜 왔던 사람이다.
앵정소일은 통감부의 재정감사관으로 임명되어 내한하여 경기도 재무부장과 인천 세관장을 지낸 바 있던 사람이다. 석정광웅은 함경농공은행의 지배인으로 있다가 조선은행의 검사역(檢査役)을 거쳐서 조선식산은행의 이사에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삼오일은 함경농공은행 · 평안농공은행 · 광주농공은행 등의 지점장을 역임하였던 사람이다. 그리고 박영효는 표면상 식산은행의 이사로 임명되었으나 실지로는 명예이사였다고 한다. 한국인 한 사람만이라도 이사로 임명한다는 전시효과를 노리기 위하여 일본정부로부터 후작(侯爵)의 칭호를 받은 박영효를 임명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감사 윤덕영(尹德榮)도 후작의 칭호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왕직(李王職)의 시사장(侍司長)의 직위에 있었던 사람이므로 정치적 고려에 의하여 임명되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더구나 윤덕영은 조선식산은행의 감사로 있으면서 1910년 6월에 해동은행(海東銀行)이 창설됨과 더불어 그 은행장에 취임하였다. 이 사실은 윤덕영이 조선식산은행에서 차지하였던 감사라는 직위가 얼마나 한산한 것이었는가를 단적으로 말하여 주는 것이다.
조선식산은행은 농공은행을 조직모체(組織母體)로 하여 설립되었고, 또한 그 때문에 농공은행의 지배인경력을 가진 일본인들이 이사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통감부나 조선총독부는 백완혁(白完爀) · 이병학(李炳學) 등 일류(一流)의 한국인자산가들을 농공은행장으로 이용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이사가 되는 길을 막아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확실히 한국인에 대한 차별대우의 표본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전북지사를 지내다가 1933년에 조선식산은행 이사가 되었던 임무수(林茂樹)는「조선의 회고(回顧)」에서 조선식산은행이 설립된 직후인 1920년 3월 14일에 일본전국에 걸쳐서 대공황(大恐慌)이 발생하여 은행마다 심각한 자금난에 봉착하였고, 예금금리를 1할 이상으로 인상하는 조치를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예금흡수(預金吸收)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여 조선식산은행으로서도 심각한 자금난에 허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태 아래서 조선총독부나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대는 갖은 압력을 가하여 한국인자산은행(韓國人資産銀行)의 대주주명단에서 제1위를 차지할 만큼 많은 주권(株券)을 매입하였다.
조선식산은행의 최대주주는 조선총독으로서 1,679주를 가지고 있었으며 박우현(朴宇鉉)은 1,185주를 가지고 있었다. 박우현 다음가는 대주주는 조선식산은행으로서 1,800주를 보유하였다. 그러므로 박우현은 개인으로서는 조선식산은행의 최대주주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박우현이 순수한 주식업체에서 최대주주였다면 그는 대표이사가 되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식산은행의 경우에 있어서는 박우현이 최대주주로서의 권한을 발휘할 수 있는 제도적인 보장이 없었던 것이다.
박우현은 일제가 한국을 병합한 전후에 걸쳐서 개성군수를 역임한 바가 있었다. 그가 개성군수를 지내게 된 것은 직업적인 지방관리였기 때문은 아니고 오히려 박우현이 개성의 대표적인 부호였기 때문에 군수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진상(眞相)에 가까운 해석일지도 모른다. 박우현이 거대한 부력을 쌓았던 기본수단은 인삼의 무역이었다. 박우현은 인삼의 재배를 독점하고 인삼의 무역을 독점할 목적으로 1914년 2월 고려삼업사(高麗蔘業社)를 설립하였다. 박우현을 사장으로 하는 고려삼업사는 한호농공은행(漢湖農工銀行)으로부터 725,000원의 융자를 받은 일이 있었다. 따라서 박우현이 개인의 입장에서 조선식산은행이 발행하였던 주식을 가장 많이 가지게 된 것은 이와 같은 한호농공은행과의 거래관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박우현 뿐만 아니라 송성진(宋星鎭) · 조진태(趙鎭泰) · 송병준(宋秉畯) · 민대식(閔大植) · 장길상(張吉相) · 정재학(鄭在學) · 서병조(徐丙朝) · 김종익(金種翊)도 조선식산은행의 대주주였으나 중역의 자리에 앉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식산은행의 행동과 정책을 일본인보다 한국인을 위하는 방향으로 시정하게끔 간접적인 영향조차 미칠 수 없었다. 한국의 자산가들이 조선식산은행의 주식을 대량으로 소유하였다는 사실을 일본정부나 조선총독부는 일본정책에 대한 협조의 척도로 밖에 보지 않았으며, 한국인 주주들로서는 그와 같은 인정을 받을 목적으로 조선식산은행의 주식을 소유하였을지도 모른다.
조선식산은행은 1922년에 농업자금으로서 42,554,000원, 공업자금으로서 9,857,000원, 상업자금으로서 43,597,000원, 잡자금(雜資金)으로서 25,991,000원을 대출하였다. 각종 대출자금 중에서 상업자금은 60.3%라는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면서 제1위에 있었다. 이에 반하여 조선식산은행이 참으로 주력(主力)해야 할 농업자금 및 공업자금의 대출비율은 각각 17.7%가 된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농공은행제도가 일본인들의 이익만을 보장하기 위하여 농업 및 공업자금보다 상업자금과 잡자금(雜資金)을 과다하게 대출하였기 때문에 파탄(破綻)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1922년의 대출동향을 보면 조선식산은행은 농공은행이 거듭하여온 대출상의 과정을 거듭할 뿐만 아니라 농공은행의 파탄을 반성하는 표시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1930년 말에 이르러 조선식산은행의 대출에 있어서는 상업자금이 62,826,000원으로 총대출액의 약 24%를 차지하게 되었다. 농업자금의 대출액은 162,804,000원이었으니 총대출액의 약 62%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공업자금은 그 절대액에 있어서 660만원으로 오히려 감소하였으며, 총대출액의 비율에 있어서도 약 2%에 지나지 않았다. 농업자금의 비율이 증대되었던 것만은 확실하지만, 그것이 한국농가를 위하여 살포(撤布)된 것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어떤 일본인은 조선식산은행의 영업방침을 평론함에 있어서 수리사업자금(水利事業資金)은 일본인들이 허위담보를 제시하고 거액의 자금을 대출하여 갔기 때문에, 대개 결손(缺損)을 보아 왔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수리사업자금의 많은 방출을 비난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1930년에 이르러 농업자금의 비율이 증대되었다 하더라도 자금의 혜택을 받았던 사람들은 투기동기(投機動機)에 입각한 일본인수리사업가들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더구나 공업자금의 비율이 조선식산은행의 대출총액에 있어서 겨우 2% 정도에 머물렀으니, 한국의 공업화란 일본의 대한정책(對韓政策)에 있어서 완전히 망각된 과제였음을 명확히 증명하여 주는 것이다. 이제 농업자금이 어떠한 목적을 위하여 많이 방출되었는가를 구체적
으로 검토(檢討)하기 위하여 불이흥업주식회사(不二興業株式會社) · 조선개척주식회사(朝鮮開拓株式會社) ·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朝鮮米穀倉庫株式會社)의 경우를 보기로 하겠다.
불이흥업주식회사는 1900년에 설립된 대판등본합자회사(大阪藤本合資會社)를 모체로 하였으므로 대판등본주식회사가 도산상태에 빠지게 되자 소생의 길을 찾기 위하여 1904년 이래로 한국의 미곡(米穀)과 농우(農牛)를 일본에 수출하고, 일본의 공업제품을 한국에 수입하는 무역업에 종사하여 왔다. 사업의 호전에 따라 1914년에 그 상호를 불이흥업주식회사로 바꾸고 영업분야를 농토개발과 부동산 신탁업에까지 확장하였다. 말하자면 한국농민들에게 고리대금(高利貸金)을 주고 그들로부터 토지를 빼앗는 한편, 대규모의 농토개발과 수리사업을 전개하여 왔다. 그리하여 전북 익산군과 평북 용천에 대농장을 창설하여 농토의 매수, 농토의 개발, 수리사업 등으로부터 거액의 이익을 차지하게 되었던 불이흥업주식회사는 조선식산은행이 설립될 무렵에 대일무역의 업무를 전담하는 상사회사(商社會社)를 독립시키고, 조선식산은행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대농장의 창설에 매진하게 되었다. 조선식산은행이 창설된 다음 해인 1919년에는, 전북 옥구군(沃溝郡)에 대농장을 창설하였으며, 그 다음 해에는 강원도 철원에 대농장을 창설함과 동시에 그 자본금을 100만원으로부터 500만원으로 증가시켰다.
1934년에 이르기까지 불이흥업주식회사는 2,000만원의 사업비를 투하하여 3만수천정보의 농토를 점유하였으며, 연간 80만석의 수확량을 거두게 되었다. 불이흥업주식회사가 이처럼 거대한 농토를 소유하고 한국농민들을 소작인으로 부려가면서 연간 80만석의 수확고를 올리는데 소요되었던 사업자금은 어느 은행으로부터 대출되었던 것인가. 1937년에 조선식산은행은 불이흥업주식회사가 가졌던 자본의 51%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것은 조선식산은행이 한국농민들로부터 농토를 탈취하여 비대화하였던 불이흥업주식회사에 거액의 농업자금을 지급함으로써 그 회사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였고, 불이흥업주식회사로서는 수많은 한국농민들을 소작인으로 지배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조선개척주식회사(朝鮮開拓株式會社)의 모체는 1920년에 일본 장강시(長岡市)에 설립되었던 선만척식개발주식회사(鮮滿拓殖開發株式會社)이다. 이 회사는 1927년에 그 본사를 서울에 옮김과 동시에 상호도 조선개척주식회사로 바꾸고 조선식산은행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농토개발에 주력하여 왔다. 그 결과로 경기도의 김포군, 황해도의 연백군 · 벽성군 · 수안군 · 신계군 등에 걸쳐 대농장과 임업지대를 점유하게 되었다.
조선개척주식회사가 점유한 농토의 면적은 1,922정보였으며 산림 면적은 6,160정보였다. 불이흥업주식회사와 마찬가지로 조선식산은행은 조선개척주식회사가 가진 자본의 51%를 지배하였다.
한걸음 나아가서 조선식산은행은 한국미곡의 대일수출을 촉진하기 위하여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朝鮮米穀倉庫株式會社)를 창설하였다. 이 회사의 창설에 있어서 조선식산은행의 은행장 유하광풍(有賀光豊)의 역할이 거대하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는 1930년에 한국미곡의 매수와 대일수출을 조절 통할하는 중앙기구로서 설립되었다. 조선식산은행이 지급하는 풍부한 자금을 가지고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는 부산의 공동창고, 군산의 신탁창고, 인천의 상은창고, 진남포의 미곡창고 등을 매수하여 각각 지점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마산 · 여수 · 강경 등지에서 지점을 신설하였다.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는 1940년에 그 자본금을 처음의 100만원으로부터 500만원으로 증액하였으며 78,600평의 창고를 갖게 되었다. 미곡창고에 투자하는 것은 조선식산은행의 업무대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식산은행은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의 최대주주로써 그 주식의 21%를 소유하고 있었다.
첫댓글 그러길래 남의 흉이 하나면 내흉은 열가지라고 했잖아요 ㅎㅎㅎㅎㅎ
아주좋은 자료입니다,다음은 정동영 이를 철저히 조사해 보아야함이...
열길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생각 난다
더불어 유시민조사도 부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