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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웃대 안영준님 -> 오유 공포게시판
2) 소 리
"준영아 이사는 잘 했니?"
학교 식당에서 만난 형민이 식판을 들고 앞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형민은 함께 민법스터디를 하는 법대동기였는데 음악적 취향이 비슷해서 신입생 때 함께 보컬그룹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형민이 군대를 가기 전이었던 2년 전, '위스퍼‘라는 낯 뜨거운 이름의 밴드에서 나는 기타를, 형민은 드럼을 맡았었다.
형민은 식판을 내려놓고 입술을 달싹거리며 기도를 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한때 같은 교회에서 성가대 반주팀을 하기도 했지만 모태신앙이었던 나는 형민에 비해 신앙에 대한 열정이 미지근한 편이었다.
형민이 기도를 하는 사이 나는 그의 식판에서 소세지부침 하나를 집어 내 입에 날름 집어넣었다.
“미안하다야. 내가 좀 도와줬어야 하는건데..”
형민이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리고 웃으며 계란국을 떠먹었다.
소세지가 없어진 것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런 쥐구멍만한데 들어가는데 도와줄 것 까지 있냐.
등산용 배낭으로 두 번 나르니까 끝이더라.
집에서 가져올 건 가져오고 살 건 사고 이제 거의 다 정리됐어."
"피곤해 보이는데?"
"말도 마. 어저께 침대가 삐걱거려서 3시까지 잠도 못 잤다.
이건 뭐 야전침대도 아니고. 옆방에선 조용히 하라고 계속 벽을 쳐대지 아주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새벽엔 또 웬 모기가 그렇게 극성이던지."
잠을 못 자서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것처럼 골이 띵했다.
팔 다리도 밤새 긁어서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나저나 기타도 팔았다며? 이제 음악 안 하려구?"
"일단 생활비가 없으니까 할 수 없지."
"에이 같이 합격해서 판검사밴드 만들기로 했잖아."
"걱정 마 임마, 올해 합격만 하면 훨씬 좋은 걸로 다시 살테니까"
나는 말하는 틈틈히 밥과 반찬을 볼이 미어져라 입에 쑤셔 넣었다.
돈을 아끼느라 밥 다운 밥을 먹어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어느 고시원이야?"
"S고시원."
"다행이다. 혹시 그쪽에 H고시원이라고 들어봤어?"
"H고시원? 처음 듣는데?"
"에? 이 바닥에 떠도는 신림동 H고시원 사건 몰라? 유명한 건데..."
형민은 아예 자기 식판도 옆으로 밀쳐놓고 상체를 내 쪽으로 기울였다.
"뭐야 그건"
"90년대에 있었던 일인데, H고시원이라는 곳에 한 여자 고시생이 살았데. 한 5순가 6순가 했던 장수생이었나봐"
"90년대면 거의 15년 전 아니야? 무슨 전설의 고향이냐?"
"좀 끝까지 들어보라니까. 왜 지방에서 상경해서 친구도 없이 공부만 하는 얘들 있잖아?
밥도 혼자 먹고 공부도 혼자 하고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안하고 사는 얘들. 그 여자도 그런 유형이었나 봐.
그래도 이 바닥에서 몇 년을 꿀었으니 짬밥이 있는지 실력은 왠만한 학원강사 뺨쳤다는군.
학원에서 누가 물어봐도 척척이었대."
"으음, 한마디로 요즘의 나와 같은 상태였군. 실력은 딴판이지만."
"암튼 몸매도 날씬하고 얼굴도 예뻐서 꽤 눈에 띄는 여자였나봐. 하긴 당시엔 고시 공부를 하는 여자 자체가 희소성이 있는 시대였으니 오죽했겠어.
근데 이상하게도 그 여자한테 찝적대는 남자는 없었데."
“성격이 안 좋았나?”
“아니, 그 여자의 특이한 모습 때문이었어. 일종의 징크스였던 거지.”
“어떤?”
“특이하게도 그 여자는 스스로 맹세하기를 시험이 끝날 때까지...”
"야 형민이! 준영이! 오랜만이다."
그때였다. 또 다른 스터디 멤버인 동현이가 나타난 것은.
그 뒤로 대화의 주제가 어찌어찌 고시 쪽으로 흘러가는 바람에 나는 형민의 뒷이야기를 못 듣고 말았다.
당시에는 별로 궁금하지 않아서 형민은 물론 나조차도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당분간은 말이다.
나는 스터디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총무실부터 들렀다. 택배가 올 것이 있었다.
왠만한 우편물은 총무실에서 받아두었기 때문에 낮에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 있어 편리했다.
“혹시 246호실로 택배 온 것 있나요?”
문을 열자 총무실에는 왠 낯선 여자가 와 있었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는데 기품 있어 보이는 단아한 정장차림에 자연스런 갈색 퍼머머리가 나이에 맞지 않게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
“아, 준영씨 우리 원장님 처음 뵙죠? 최경란 원장님이세요.”
“아..안녕하세요.”
얼결에 인사를 하자 여자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만 들으면 무슨 미용실 원장 같았다.
“우리 원장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세요. 이곳 건물주이신데다 현직 변호사이시거든요,
당시에 여자가 사시에 합격했으니 정말 대단했죠.”
“대단하긴 뭘, 누구나 노력만 하면 할 수 있는 걸. 박군도 열심히 하면 올해 꼭 합격할 수 있을거야.”
원장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웃을 때 양 볼에 보조개가 옴폭 들어가서 나이를 무색케 하는 섹시함 마저 풍기고 있었다.
“최준영씨라고 했죠? 불편한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 총무실 통해서 말씀해 주세요.
제가 이곳을 인수한 이유도 후배들이 보다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기를 바라서이니까요. 열심히 하셔서 꼭 합격하시구요”
원장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나이가 들어서 주름이 있었지만 여전히 희고 긴 손가락이었다. 약지 손가락에는 십자가모양 반지가 있었다.
십자가의 4끝이 갈고리 모양으로 휘어진 변형된 십자가였다.
“참, 잊을 뻔 했네. 준영씨 앞으로 택배 온 게 있어요.”
그제야 총무가 나에게 종이 상자를 내밀었다.
내 방에 들어와서 상자를 열자 신문지에 돌돌 싸인 조그만 화분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
파리지옥’이라는 식충식물이었다. 요즘 들어 모기가 기승을 부렸다.
낮에 환기를 위해 잠깐 창문을 열어놓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 틈에 잠입하는 것 같았다.
새벽 2시까지 공부를 하고 잠을 청하다보면 윙윙 거리는 소리도 없이 허벅지나 팔뚝이 따끔거렸다.
불을 켜고 찾아봐도 이 영악한 놈들은 어디에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F킬라나 전자모기향을 사자니 특유의 냄새 때문에 꺼려졌다.
그 때 생각난 것이 바로 언젠가 tv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이 있는 ‘파리지옥’이라는 식충식물이었다.
이를테면 무당벌레를 키워서 벼멸구를 잡는 식의 천적요법이었다.
그러나 화분을 꺼내 본 순간 나는 실망을 금할 수가 없었다. 택배기사의 부주의로 화분의 흙이 쏟아졌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식물의 크기가 내 예상보다 훨씬 작았던 것이다.
신문이나 인터넷뉴스의 클로즈업 사진으로 봤을 때는 숟가락만한 덫으로 철컥 철컥 파리나 모기를 잡아대는가 보다 싶었는데
실제로 보니 귀후비개만한 여린 입사귀가 자그마한 본체에 안쓰럽게 붙어있었다.
이래서야 모기는커녕 진드기 한 마리도 제대로 잡지 못 할 것 같았다. 심지어 내가 죽은 모기를 덫에 놓아주었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나는 그것을 책상위에 관상용으로 놔두기로 했다.
고시원에 온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나는 그날 목표한 분량의 공부를 끝내고 파김치가 되어 침대에 드러누웠다.
등이 침대매트에 닿자마자 뚜두둑 소리가 나며 침대가 한쪽으로 씰구러 졌다.
그 바람에 나는 침대에서 떨어져 민망할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월 26만원짜리 고시원에서 고급침대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이건 좀 심했다.
다시 조심스럽게 눕는다. 안락한 쿠션감은 고사하고 뒤척일 때마다 녹슨 스프링에서 작은 동물의 뼈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옆방에 들릴까봐 신경 쓰여서 잠도 오지 않았다.
옆방 사람은 지나치게 민감했다. 아니 거꾸로 옆방이야 말로 소음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벽을 두드려대는 통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자리에 누워서도 한동안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다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서니 또다시 침대가 비명을 질러댔다.
쿵쿵. 옆방에서 벽을 두드렸다. 나는 내일 당장 침대를 들어내고 대신 요를 깔고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뒷굼치를 들고 살며시 방문을 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벽을 두드려대는 소리는 계속되었다.
내 방, 즉 246호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조금 특이했다.
시도 때도 없이 벽을 두드려대는 옆방 사람도 그랬지만 내가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 이상했던 점은 거울의 배치였다.
거울이 벽이 아니라 책상정면의 책꽂이에 걸려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도 완전한 정면이 아니라 좌우로 약간씩 비껴서 두개의 거울이 붙어있었다.
'이건 마치..'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바로 내 등 뒤를 살필 수 있는 그런 거울. ‘자동차의 백밀러 같잖아?’
아마 나보다 먼저 이 방을 썼던 사람이 부착한 거울일 것이다.
도대체 이 좁은 방에서 고개를 돌리는 것조차 귀찮아서 그랬을까? 아니면..차마 고개를 돌려서 확인하기 조차 꺼려지는 것이 등 뒤에 있는 것 같아서?
하긴 나부터도 밤중에 혼자 공부하다보면 종종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누군가가 가만히 서서 내 등을 쏘아보는 것 같은 느낌. 괜히 목덜미를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서 등골이 스멀스멀하고
자꾸만 어깨가 움츠러드는 그런 느낌. 사람이란 자신의 시야로 확인할 수 없는 곳에 도사리고 있는 무엇인가를 제멋대로 생각하고
그 망상을 점점 구체적으로 키워간다. 외로움과 두려움이라는 본능적 감정에 어둠이라는 촉매가 융합하여
발생한 무색무취의 유독가스가 인간의 나약한 마음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거울을 백밀러처럼 부착한 것은 도가 지나치다 못해 좀 유아적이기까지 했다.
나는 그것을 떼어서 왼쪽 벽에 있는 큰 거울 밑에 나란히 붙였다. 두개의 작은 거울을 나란히 걸어놓으니
큰 거울의 폭과 거의 비슷해서 세 개로 분할된 전신거울처럼 되었다.
위쪽의 큰 거울이 내 얼굴부터 가슴부근까지 비추었고 밑의 작은 거울 두개가 몸통과 양쪽 팔을 비추었다.
나는 웃통을 벗고 보디빌더처럼 폼을 잡으며 마른 근육을 이리저리 비추어보았다.
공부를 시작하면서 수면 시간을 절반으로 줄였더니 체중이 4킬로나 빠졌다. 그나마 팔굽혀펴기로 만들어 놓았던 약간의 가슴근육도 다 사라졌다.
그래도 아직은 여자들이 보기에 매력을 느낄만한 군살 없는 몸매다.
복근, 팔 근육, 어깨근육..몸을 움직일 때마다 세 개로 분할된 화면에서 몸의 각 부위가 미묘한 시차를 두고 따로 노는 것 같아서 재미있었다.
“악!”
그때 내 잎에서 가느다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 오른손을 비추던 작은 거울 속에, 내 손 대신 창백한 여자의 손이 순간적으로 비추어졌던 것이다.
시체처럼 푸르스름하고 야윈 손에 몇 년 동안 깍지 않은 듯한 손톱이 이리저리 비틀리며 길게 자라나 있었다.
놀라서 다시 거울을 확인해 보니 빈약한 근육의 내 팔이 비칠 뿐이었다.
요새 갑자기 공부 양을 늘려서 신경이 예민해진 탓일까. 어쨌든 기분이 나쁘다.
불길하다. 나는 그 거울을 고시원 밖의 쓰레기통 옆에 가져다 버렸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주변에 자신의 온갖 흔적을 남긴다.
한 사람이 살다 간 공간은 아무리 깨끗이 청소를 해도 미처 지우지 못한 흔적들이 남는다.
물질적은 것은 물론이고 어떤 사념까지도 말이다. 흉가나 폐가에 으스스한 기운이 감도는 것은 유령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흔적’들 때문일 것이다.
요사이 만화나 드라마의 심령 미스터리 물에 단골로 등장하는 '사이코메트리‘라는 초능력도 알고 보면 3자리수 곱셈을 순식간에 해내는 것과 같이
조금 특이한 능력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결국 이러한 수많은 흔적들을 남들보다 조금 더 민감하게 감지해 내고 순간적인 통찰력으로 조합해서 과거의 일을 파악해내는 능력일 것이다.
그런 특수한 능력이 없는 보통사람이라도 조금 시간을 가지고 머리를 굴려보면 흔적들을 조합해서 의외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나의 경우가 그렇다. 하루에 한 번씩 방 청소를 하면 전 주인의 온갖 흔적들이 끊임없이 나왔다.
바닥을 닦을 때마다 긴 머리카락이 나왔는데 도대체 이것들이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오는지 알 수 가 없었다.
책상에는 ‘적당히 원하면 핑계가 생기고 간절히 원하면 방법이 생긴다’
따위의 명언이나 ‘어서 이 곳을 떠나고 싶다’와 같은 신세한탄이 칼이나 볼펜으로 낙서되어 있었고 책상과 벽 사이의 좁은 틈에서는 종이박스를
뜯어서 접어놓은 것과 레코드판이 발견되었다.
이 모든 흔적들이 주는 정보를 종합해 보았을 때 전 방주인에 대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음악을 좋아하는 고시 준비중인 여자-혹은 긴 머리의 남자-’라는 것이었다.
남성 전용고시원이니 여자일리는 없고 머리가 긴 남자일 확률이 높았다.
물론 이런 생각에 약간의 비약이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만약 레코드판에 담긴 음악이 70-80년대 하드록이라면 이런 생각은 상당한 근거를 가지게 될 것이다.
올드록 팬 중에는 록커처럼 머리를 기르는 사람이 많았으니까.
어쨌든 고등학교 때부터 레코드판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던 나는 책상과 벽의 틈새에서 레코드판을 발견하는 순간
숨겨진 보물이라도 찾은 것처럼 흥분했다.
아쉽게도 커버가 없어서 어느 앨범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손바닥으로 레코드판의 표면을 쓸어 먼지를 닦아내니 검은 광택이 살아났다.
참빗으로 빚은 머릿결같이 매끈하고 반질반질한 표면에 음의 흔적을 담은 동심원들이 육상경주트랙처럼 겹겹이 늘어서 있다.
우리 뇌의 주름에 정보가 저장되듯이 이 골에 음의 진동이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바늘은 그 골 사이를 다니면서 미세한 떨림을 감지해 내고 앰프는 그 떨림을 증폭시켜 스피커를 통해 장엄한 소리를 뿜어낸다.
어렸을 적 에디슨 전기를 읽다가 축음기의 발명원리를 읽고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있다.
턴테이블의 원리는 기본적으로 축음기와 똑같다. 축음기의 원통에는 얇은 주석으로 된 가느다란 골이 파여져 있고 그 사이를 바늘이 지나다닌다.
바늘은 음성을 감지하는 떨림판과 연결되어있다.
바늘을 골에 넣고 원통을 돌리면서 말을 하면 음성의 진동은 떨림판을 통해 바늘로 전달되고 바늘의 떨림은 그대로 원통 표면의 골에 기록이 된다.
즉 바늘은 ‘자신의 흔적’을 측음기의 골에 새겨서 남기는 것이다.
재생은 그 정반대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진동이 기록된 골에 바늘을 넣고 원통을 회전시키면 바늘이 골을 다니면서 떨림을 감지해 내고 그 진동을 떨림판에 전달해 소리를 재생시킨다.
물론 현대의 음향기술에 비해 턱없이 작고 질이 떨어지는 소리였겠지만 놀라운 것은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아이디어였다.
소리의 흔적을 저장해 두었다가 거꾸로 그 흔적을 통해 소리를 부활시킨다는 역발상에 나는 전율을 느꼈던 것이다.
내가 CD마저 MP3파일에 밀려 사멸해가는 요즘 시대에도 틈틈이 골동품가게에서 레코드수집에 열중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어떤 가수의 흔적이 담긴 레코드를 얻는 것은 그 가수의 신체일부를 소유한 듯한 묘한 만족감을 준다.
이제 이 흔적을 재생시키면 어떤 존재가 생명을 부여받고 부활할 것인가. 비틀스가 튀어나올지 아바가 튀어나올지 현재로선 알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틀어보고 싶었지만 내 오디오는 대전에 있는 집에 있어서 무리였다.
할 수 없이 나는 형민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 스터디 모임 때 턴테이블을 들고 오라고 했다. 조금 무겁긴 하겠지만 밥은 이럴 때 사라고 있는 것이다.
형민에게서 빌려온 턴테이블은 데논 dp-300f모델이었다.
고가모델은 아니었어도 가격대비 성능이 뛰어났다. 무엇보다 포노앰프 내장식이라 공간을 적게 차지한다는 점이 장점이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판을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헤드폰을 썼다. 맙소사. 낡은 레코드판에서 부활한 것은 다름 아닌 레드제플린이었다.
그것도 명반 중의 명반으로 꼽히는 4집앨범이었다. 록의 황제라고 불리우는 레드제플린답게 4집 앨범은 모든 곡이 명곡이었다.
그 중에서도 4번째 트랙에 있는 ‘Stairway to Heaven’은 나로 하여금 전공서적을 던져버리고 기타를 잡게 만든 바로 그 곡이었다.
막 바늘이 ‘Stairway to Heaven’을 지나 5번째 곡인 ‘Misty Mountain Hop'으로’ 이동할 때였다. 아주 미세한 잡음이 헤드폰에서 속삭이듯 들렸다.
‘뭐지?’ 신경을 긁는 미세한 쇳소리. 볼륨을 살짝 키워보았다. 잡음도 함께 커진다.
하지만 여전히 알아듣기 힘든 미세한 소리였다. 커버도 없이 오랫동안 방치된 레코드판이다 보니 표면에 잔 스크래치가 있어서 일까.
하지만 이 소리는 스크래치로 인한 소리가 아니었다. 뭔가 아주 약하게, 여자의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끊어질듯이 이어지며 들려왔다.
볼륨을 최대로 키워 보았다. 흐느끼는 소리도 나를 향해 달려들듯이 점점 커졌다.
이제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나는 플레이를 중단시키고 턴테이블에서 레코드판을 꺼내었다.
이것에 담겨있는 것은 레드제플린의 음악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누군가의 흔적이 함께 담겨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으로의 재생을 꿈꾸는 그 어떤 흔적이.
어떤 사람의 원한이나 바램이 너무나 강하면 그것이 사진기나 테이프레코더에 남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소위 말하는 심령사진이나 가수의 앨범에 귀신소리가 녹음되는 경우가 그렇다.
어떤 연예인은 그것을 마케팅 수단으로 이용해 먹기도 한다.
하지만 어지간한 레드제플린 광팬인 나조차도 4집에 이런 소리가 녹음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이것은 대량 생산품이다.
어느 하나에만 이런 소리가 삽입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문득 나의 뇌리에 ‘백워드 마스킹(Backward Masking)’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백워드 마스킹이란 한때 악마주의 밴드 사이에서 유행했던 수법으로 곡에 단어 철자를 거꾸로 삽입해서
자신들의 은밀한 메시지를 레코드판 뒷면에 기록하는 수법이었다.
메시지는 주로 악마를 찬양하거나 마약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레드제플린의 4집 앨범은 유난히 백워드 마스킹 논란이 많았던 앨범이다.
어쩌면 이것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백워드 마스킹의 일종일지도 모른다.
나는 판을 뒤집어서 아까의 위치에 바늘을 얹어놓았다. 내 생각은 맞았다.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기묘한 블협화음 속에 여자의 속삭이는 듯한 한마디가 선명하게, 반복적으로 들려왔던 것이다.
어두워..
답답해..
날 어서 이곳에서 꺼내어 줘...
후텁지근했다. 벌써 젖은 티셔츠 몇 개를 빨래바구니에 던져 넣었는지 모른다.
에어컨이 고장 나는 바람에 밀폐된 고시원 안은 밤이 되어서도 찜통이었다.
조그만 선풍기 한 대가 내 등에 점막처럼 들러붙는 땀을 간신히 말려주고 있었지만 찜통더위를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공부하는 틈틈이 문제의 레코드판이 생각났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레코드 뒷면에서 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다음날 나는 그것을 턴테이블과 함께 형민에게 들고 갔다.
형민은 판을 뒤집어서 몇 번 들어보더니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고 했다.
형민의 귀는 유난히 감각이 뛰어났다. 절대 음감에 가까워서 함께 밴드활동을 할 당시 멤버 중 누군가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귀신같이 잡아내곤 했다
. 그런 형민의 말이었기에 함부로 무시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다시 들어봐도 레드제플린의 신나는 곡만 들릴 뿐 어디서도 잡음은 들리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던 것이다.
저번에 거울 사건도 그렇고 모든 게 신경이 예민해진 탓이었다.
사람이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하고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다보면 확각이나 환청이 들리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한다.
요즘 나의 평균 수면시간은 4시간정도가 고작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레코드판은 안 쓰는 앨범 재킷에 넣어서 옷 수납상자 바닥에 보관해 두었다.
자꾸 시선이 닿으면 그 소리가 되살아나서 내 뒷덜미를 움켜잡을 것만 같았다.
레코드판에 대한 생각을 접고 다시 문제지로 의식을 돌려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날씨가 너무 더웠다. 얼린 컵에 맥주 한잔 생각이 간절했다.
모의고사 1회 분량을 풀고 편의점에라도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서늘한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벌써 고친건가? 내일 중에나 수리가 될 거라고 했는데...’ 누군가 드라이아이스를 입에 물고 입김을 불어주는 듯이 서늘한 바람이었다.
등줄기에서 살얼음이 부서지는 듯한 냉기가 느껴지며 축축한 땀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어디선가 이상한 냄새가 느껴졌다. 비오는 날 삽으로 땅을 파헤칠 때 피어오르는 듯한 비릿한 흙냄새였다.
끼익...하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린다. 쇠기둥에 천 같은 것이 마찰을 일으키며 나는 소리 같았다.
잘못 들었나? 또다시 끼이익..펜을 놓고 신경을 곤두세워보니 내 뒤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미묘한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돌아보지 않아도 내 뒤쪽에서, 그 것도 상당히 위쪽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분 나쁜 마찰음에서 묵직한 질량감이 실려 있었다.
선뜻 뒤돌아보기가 왠지 겁이 났다. 끼익.......끼이익.......빌어먹을, 거울을 치우지 말았어야 했는데..고개를 들어 커튼에 투사되는 시간을 확인한다.
새벽 1시25분. 그러나 곧이어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에 커튼에 투사된 시간은 검게 지워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끼익..끼익하는 소리에 맞추어서 규칙적으로. 내 등 뒤에서 흔들거리는 무엇인가가 시계추처럼 진자운동을 하며 프로젝션시계에서
투사되는 빛을 가로 막고 있었다. 저번에 총무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거 꽤 튼튼한 거에요. 쇠봉도 건물 지을 때부터 벽속에 묻혀 있던 거라 사람이 매달려도 끄떡없어요.
사람이 매달려도 끄덕없다라..그렇다면...? 누군가가 주사액을 척수에 찔러넣는 것처럼 등골이 싸해졌다.
그 순간에도 끼익 거리는 소음에 맞춰 흔들리는 그것은 시계의 빛을 규칙적으로 가로막고 있었다.
어쩌면 이런 일이 나에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나보다 먼저 이방에 살았던 누군가도 그런 이유로 거울을 달았을지도.
끼익..끼익..소리가 점 점 더 커진다. 그 때마다 내 심장은 나사처럼 바짝바짝 죄어들었다.
모의고사 문제지를 무심코 구겨 쥐었다. 문제지가 땀에 젖어 찢어진다.
정신적인 압박을 견디다 못한 내가 막 소리를 지르며 돌아보려는 순간. 툭. 무언가 묵직한 것이 내 어깨 위로 떨어졌다.
나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아서 튕겨오르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뭘 그리 놀라세요? 내가 더 놀라겠네."
창민은 화들짝 놀라서 내 어깨에 얹은 손을 거두어들였다.
"아직 안주무시면 출출하실텐데 이거라도 드세요.
요 뒤족 주차장 화단에 제가 심은 건데요. 벌써 먹을 만큼 여물었지 뭡니까."
창민이 큰 유리그릇에 든 삶은 옥수수 두개를 불쑥 내밀었다. 나는 놀란 표정을 간신히 추스리며 그릇을 받았다.
"혹시 아까부터 제 뒤에 서 계셨어요?"
"네? 아니요, 방금 들어왔어요. 지나가다가 불이 켜져 있길래 혼자 먹기도 뭐해서..실은 좋은 소식도 있어서 알려드리려고 왔어요."
“어떤..?”
“저번에 7급 시험 봤다고 했잖아요. 합격했어요. 오늘 발표가 났습니다. 이게 다 주님의 은혜예요.”
창민은 감격스런 표정으로 기도하듯 두 손을 모두어 잡았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기독교신자인 듯 했다. 합격률이 희박한 시험에 응시하는 절박한 심정이면 누구나 종교를 믿게 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창민의 합격 소식을 듣고 나니 나도 ‘다시 교회에나 나가볼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창민이 다녀가간 후 다시 평상시대로의 일상이 돌아왔다.
조금 전까지 나를 주술처럼 휘어 감았던 공포는 감쪽같이 증발해버렸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1시 28분이었다. 고작 3분이 지났을 뿐인데 30분 동안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난 기분이었다.
다시 공기가 후텁지근해진다. 등에서 구슬처럼 솟아나는 끈적한 땀이 티셔츠를 축축히 적시고 있었다.
7월이 순식간에 지나고 8월달이 되었다. 그동안 나의 일상은 극기의 반복이었다.
학원 독서실 남아 공부를 하다가 고시원에 돌아오면 밤 11시가 넘어있었다.
시험은 하루하루 피스톤처럼 무자비하게 공기를 밀어붙이며 다가왔다. 합격하기 전까지는 이 숨 막히는 생활에서 탈출할 구멍이 없었다.
나 뿐 만이 아니었다. 모두들 이번 여름이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분기점이라는 각오로 목석처럼 앉아 공부에 몰두했다.
그들보다 더 많은 고통을 인내해 내야 비로소 내가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 나도 분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인생이 걸려있다는 위기감을 생각하면 그동안 고시원에서 경험했던 몇 번의 이상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니, 그것은 그만큼 내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는 증거였다.
“후우..”
지친 몸으로 학원에서 돌아와 방문을 열어보니 책상이 엉망진창이었다.
시간이 없어서 며칠째 정리를 하지 못했다. 창가에 내놓은 파리지옥도 물을 주지 않아 누렇게 말라죽어있었다.
식충식물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이 무색하게 초라하게 죽은 녀석을 보니 왠지 안쓰러웠다. 잠깐, 뭔가가 달라져 있다.
항상 쩍 벌리고 있던 덫 한 개가 조개처럼 오무라들어 있었다. 덫의 양쪽 끝으로 기다란 털이 살짝 삐져나와있다.
조심스럽게 덫을 열고 그것을 꺼내어보았다. 그것은 사람의 머리카락이었다.
방 청소를 할 때마다 나오는 의문의 머리카락. 이게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청소할 때 바람에 날렸다가 우연히 파리지옥의 잎사귀 위로 올라갔을까.
머리카락의 주성분은 단백질이다. 파리지옥은 그것을 모기 대신 영양공급원으로 삼았을 것이다.
나는 파리지옥을 뿌리째 뽑아서 비닐봉지에 쌌다. 아무래도 전자모기향을 사야 할 것 같았다.
제길..또다시 팔뚝이 따끔거렸다. 나는 신경질 적으로 팔뚝을 북 북 긁었다.
‘이건 뭐지?’
팔뚝을 긁은 내 손톱에 머리카락이 한 올 걸려있었다.
긁은 자리를 자세히 보니 긴 털이 한가닥 자라고 있었다. 15cm정도 되는 긴 털이었다.
다리에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얇은 가닥이었기에 내가 그동안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내 몸에서 자란다기 보다는 외부에서 내 땀구멍을 향해 찔러 들어온다는 표현이 맞았다.
매일 밤 나를 물던 모기들의 정체는 이것이었을까? 도대체 이 머리카락들은 어디서 온 것들일까? 그 동안 얼마큼이나 내 몸 속에 들어왔을까?
이런 것들이 정충처럼 편모를 꿈틀거리며 내 몸 속을 파고들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말로 표현하기 힘든 혐오감이 밀려왔다.
톡, 털을 뽑자 뜨끔하는 통증과 함께 그 자리에 피가 한 방울 맷힌다.
끊어지고 남은 가닥이 유리파편처럼 내 몸 속에 박혀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찜찜했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이물질이 내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다가 심장이나 뇌에 박혀 기생하는 장면이 나도 모르게 상상되었던 것이다.
머리카락은 어디에서건 나를 따라다녔다.
고시원에 온 이튿날 한바탕 바닥걸레질을 했는데 이상하게도 긴 머리카락이 한 웅큼씩 나왔다.
그 후로도 청소를 할 때마다 몇 올씩 긴 머리카락이 발견되곤 했다.
파리지옥의 덫에 걸려있던 머리카락. 내 몸을 모기처럼 따끔따끔하게 찔어오던 바로 그 머리카락이었다 .
머리카락들의 평균길이는 50cm에서 70cm였는데 어떤 것은 1미터 가까이 되는 것도 있었다.
머리카락의 주인이 여자라고 쳐도 비정상적으로 긴 머리카락이었다. 내 머리카락일리는 없으니 밖에서부터 유입된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범인의 지문을 찾으려는 형사처럼 방안을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한 평도 안 되는 폐쇄공간에 특별히 이상한 곳은 없었다.
그때 우우웅-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건물 전체가 약동하는 듯한 진동이 느껴졌다.
실내 기온이 올라가자 중앙냉방장치가 가동했던 것이다. 차가운 공기가 낮은 소리로 그르릉 거리며 내 방 천장의 환기구로 샤워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때 환풍구에서 가느다랗게 흩날리는 몇 올의 머리카락이 내 눈에 포착되었다.
의자를 놓고 올라가보니 서너가닥의 머리카락이 환풍구에서 삐져나와 해초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머리카락들은 중앙냉방장치에서부터 에어컨 바람을 타고 날아 들어온 듯 싶었다.
나는 의자 위로 올라가 그 중 가장 긴 가닥을 잡아서 살살 당겨보았다. 머리카락의 근원은 내 예상보다 훨씬 먼 쪽에 있는 듯 했다.
몇 가닥을 꼬아서 잡아 당겨 봐도 끄떡없었다. 머리카락을 잡은 손에 힘을 주자 툭하고 끊어졌다.
그 순간 끼아아아-하는 날카로운 금속성 비명소리가 쨍 하고 나의 뇌 속을 파고들었다. 그 소리에 놀란 나는 균형을 잃고 의자에서 넘어졌다.
바닥에 쓰러진 나의 눈에 남은 머리카락들이 환풍구 속으로 살아있는 촉수들처럼 기민하게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총무실에 들어갔을 때 총무는 화분에 물을 주고 있는 중이었다.
넓은 입사귀가 갈퀴처럼 갈라지고 줄기에는 선인장처럼 가시가 나있는 기분 나쁜 모습의 식물이었다.
총무실에는 고시원 특유의 향냄새가 짙게 깔려있었다. 또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뭐죠? 이 냄새는. 그 식물은 또 뭡니까.”
나는 구역질을 참으며 말했다.
“아, 이건 ‘아키실론’이라고 아프리카에서 자라는 식물입니다. 향이 참 독특하죠?
이 냄새를 맡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정신집중이 잘 된데요. 진액에는 마취효과가 있어서 2차대전 때는 모르핀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답니다.”
“속이 울렁거리는 약효는 없나요?”
내가 비꼬듯이 묻자 총무가 대답했다.
“하하 저도 처음엔 그랬죠.
생김새도 괴상하게 생긴 녀석이 냄새까지 고약하니까요. 솔직히 향기라고 하기는 좀 힘들잖습니까?
그래도 일단 익숙해지니까 오히려 향기가 없으면 안절부절해지고 집중이 안 되더군요.
준영씨도 처음엔 괴롭겠지만 조금만 더 참아보세요.”
그것은 금단현상이다. 저 식물은 혹시 마약류가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의심은 설마 도심한복판의 고시원에서 마약을 재배할 리가 있겠나하는 상식에 가려져 금방 의식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아마도 요즘 유행하는 ‘향기요법’바람을 타고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과대광고로 팔리는 특이식물일 것이다.
“냄새도 냄새지만 제 방에 머리카락 좀 어떻게 해주세요.”
“머리카락이라뇨?”
“에어컨 환풍구로 끊임없이 들어와요. 길이는 한 50cm에서 긴 것은 1m까지? 아무튼 신경이 쓰이네요.”
“제가 한번 봐드리죠.”
총무가 드라이버를 들고 총무실을 나섰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드라이버로 환풍구를 뜯어낸 총무가 환기통로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자세히 살펴보세요. 머리카락같은 것 안보여요?”
나는 밑에서 의자가 돌아가지 않게 붙잡고 있었다.
“없어요. 아무것도. 먼지 밖에는요.”
총무가 의자 아래로 내려와서 검정으로 시커멓게 변한 마스크와 장갑을 벗었다.
“괜히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나는 아직 의구심이 풀리지 않았지만 일단 형식적인 사과를 했다.
“혹시라도 또 불편한 사항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공부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지셔서 헛것이 보인다고 해도
이렇게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나면 한결 나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기 혹시..”
“네?”
“아..아닙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죠.”
나는 옆방에 대한 것을 물어보려다가 꾸욱 참았다.
머리카락과 더불어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은 옆방 247호실의 소음이었다.
특정한 시간대-새벽 1시 전후-만 되면 어김없이 벽을 두드려댔다.
처음에는 내가 시끄럽게 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가만히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어도 난데없이 벽을 때려 부술 듯이 두드려대는 것이었다.
가끔 ‘싫어...어서 여기를...너희들은...죽여....’ 따위의 알 수 없는 소리도 섞여 들렸다. 일종의 잠꼬대 같았다.
가뜩이나 공부에 대한 부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데 같은 소음이 매일 반복되니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그제야 왜 총무가 처음에 이방을 내주지 않으려고 했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참다못해서 나는 포스트잇에 메모를 했다.
-매일 밤 벽을 두드리는 소리에 공부에 많은 지장을 받고 있습니다. 서로 조금만 더 배려해서 힘든 수험생활을 잘 이겨 냅시다-
그것도 내용을 겉에 떡하니 써놓으면 오고가는 사람들이 다 읽어볼 테니 메모지의 뒷장에 쓰고 겉으로 보이는 면에는
‘뒷면을 봐 주세요’하고 작은 화살표를 그려 넣었다.
나로서는 상대방에게 최대한의 배려를 한 셈이었다. 이 정도까지 예의를 갖춘 요구를 못 본 체 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눈에 띄기 좋게 옆방 손잡이 바로 위에 붙여놓고 밖으로 나갔다.
형민과 점심약속이 있었다. 요즘 친구를 만나지 못해서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 같았다.
가끔은 맛있는 식사와 적당한 수다도 수험생활의 활력소가 될 수 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 검은 구름이 낮게 감돌고 있었다.
나는 다시 올라가서 우산을 가지고 나올까 망설이다가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아서 그대로 뛰어갔다.
“김치가 맛있네”
형민이 연신 김치를 입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내가 요새 발굴한 맛집이야. 이곳에서만 벌써 30년째 하신데.”
‘할매 감자탕’이라고 TV음식기행 프로에도 소개된 맛집이었다.
리포터가 맛의 비밀을 묻자
시어머니로부터 가게를 물려받아았다는 주인아주머니는 김치냉장고가 아니라 땅에 묻는 방식으로 김치를 발효시키는 것이 비결이라고 대답했었다.
예전에는 고시원 뒤쪽의 텃밭에 묻었는데 건물 주인이 바뀌면서 이제는 서울 근교의 농가 마당에 묻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공수해 온다고.
“그나저나 머리카락이 뭐 어떻다고?”
“응 매일 바닥을 닦아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또 나와. 아무래도 에어컨 바람을 타고 날려오는 것 같은데
도대체 그게 어떻게 그쪽으로 유입되었는지 모르겠단 말야.”
“저번에 그 여자목소리도 그렇고 머리카락도 그렇고, 아무래도 그쪽은 터가 안 좋은 거 같아.”
“또 그 소리냐? 그 고시원에 무슨 귀신이라도 산다는거야? 독실한 크리스찬답지 않은데?
“성경에서는 귀신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고 있어.
신약 4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돼지무리들에게 넣은 기록도 있고, 또 광야에서 40일동안..”
“아이쿠 알았다 알았어, 사도 형민께서 오죽 하시려구. 내가 말을 잘못 꺼냈다.”
더 이상 듣다가는 먹다 체할 것 같아 내가 먼저 항복사인을 보냈다.
“그런 소리 하지 말아. 나도 실은 요새 시험 들고 있다구.”
“무슨 시험? 사법고시? 외무고시?”
“농담하지 마. 나 심각하니까. 일년전에 울 아버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거 알지?
안 그래도 그 후로 경제적으로 힘들었는데 이번엔 어머니마저 간암으로 입원하셨어. 의사가 그러는데 상태가 심각하시데.
어머니 연세도 있으셔서 수술을 하긴 하겠지만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것 같아.
내 뒷바라지하신다고 병원비도 아끼시더니 결국..휴우 어머니까지 어떻게 되시면 난 어떡하니? 이래서야 공부나 끝까지 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형민이 깊은 한숨을 토해내었다.
여지껏 한번도 나에게 약한 소리를 한 적이 없는 강인한 녀석이었다. 그만큼 요즘 형민의 주위를 둘러 싼 상황은 극악으로 치닫고 있는 모양이었다.
“너같이 착하고 신앙도 좋은 녀석이 왜 이런 일들만 생기는지 모르겠다. 아버님도 참 좋은 분이셨는데...”
“나도 잘 모르겠다. 나도 원죄를 타고난 인간이긴 하지만, 남에게 큰 해는 끼치지 않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요새는 주님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 의심스러워져”
“힘내 임마. 우리 인간은 당구공이고 하나님은 허슬러라고도 하잖아.
맛세이 몰라? 지금은 ‘어 이 방향이 아닌데’해도 결국에 씨네루에 쿠션 먹고 제일 곤란한 공에 딱 하고 맞는다니까.
왜 성경에도 의인인 욥의 고난이 나오잖아. 처음에야 재산도 잃고 자식도 죽지만 나중엔 더 큰 재산과 더 낳은 자식을 받잖아?
너도 결국 좋은 쪽으로 될거야. “
나는 어쭙지않게 옛날 설교시간에 주워들었던 일을 떠벌이며 형민을 위로했다.
“하지만 사랑했던 자식들을 다 잃고 나서 새로 얻은 자식들이 무슨 소용이 있지?
양적으로 보상받으면 그 끔찍한 슬픔이 다 잊혀진다는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에게 아무리 훌륭한 부모님을 새로 주신다고 해도 지금 우리 부모님하고 바꾸진 않을거야.
자식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게 당연하지 않을까?”
형우의 반론에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우린 둘 다 구렁텅이에 빠진 장님 격이군.”
“너도 마찬가지겠지만 나도 이제 한계야. 동생 2명이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어.
올해도 합격이 안 되면 막일이라도 해야 돼. 절박하다구. 아..요즘엔 신입생때 너랑 같이 음악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후훗. 재미있던 시절이었지.”
“그때 함께 음악하면서 했던 말 기억나? 우리의 모토 말야”
“물론.”
우리는 둘 다 입을 모아 동시에 말했다.
“합주는 혼자서 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멋쩍게 웃었다.
“힘들면 언제든 연락해.”
“너도.”
식사를 끝내고 문을 나서니 본격적으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산을 챙겨오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식당 텔레비전에서 태풍이 북상하고 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첫댓글 옆방 궁금하네
재밌어 여시야!!!!!!
말투가 좀 나이 있는듯한 사람이 쓴 것 같은 티가 난다
잘보고있어!ㅎㄷㄷ..옆방뭐야ㅜㅜ무서워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