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이때쯤 되면 샤힌샤와 가까운 친인척들끼리 먼저 관계를 맺어 아이를 낳은 후 귀족들 양녀로 보내고 정식 결혼시키는, 조로아스터교에 걸맞으면서도 타국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괴악한 결혼방식이 정착되었다.
이 당시 관리였던 이스칸다르 문시는 퇴임 후 아잠 당시부터 페르시아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위대한 문서를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페르시아는 이 당시 북방에서 덩치를 키우고 있던 러시아와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간신히 동맹을 맺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으로 북방의 위협을 제거하고 트란스옥시아나의 영토를 사이좋게 갈라먹을 수 있을 되었다.
1621년 7월 15일.
"이제 우리는 옛 조로아스터 사원 성지에서 꺼진 불꽃을 다시 켜서 봉헌할 준비가 되었다. 왕의 불꽃을 다시 지필 것이다!"
화르르~
"와아아아아! 페르시아 만세! 아후라 마즈다 만세!!!"
조로아스터교의 상징인 신성한 불이 다시 점화되었다. 이제 조로아스터교는 다시는 멸망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호르무즈 무역 지대를 잡고 무역력을 바스라-페르시아 노드로 옮기기 위해 상인을 배치시켰다.
이후 샤힌샤는 무샤샤를 향한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로 했다.
전투는 너무나도 싱거웠다. 전투보다 공성 중에 죽은 사람이 더 많을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마병도 머스킷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공격을 중시하는 페르시아 기마병들은 예전 임모탈이 부럽지 않을 공격력을 확보할 것이다.
주변국들과의 교류가 이어지면서 아프리카 지역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것은 북동 아프리카를 다 처먹은 맘루크였다. 이들을 쳐야 옛 페르시아의 강역을 회복할 터였지만, 그 길은 멀고도 험할 것이다.
국가의 기술은 계속해서 발전해나갔다.
샤힌샤는 무역회사의 지불금을 일시불로 땡겨먹고 공장이나 대학 등을 짓는 선택을 했다. 그리고 방어적 이념을 완성하는데 성공하였고, 5번째 이념은 공격적 이념을 채택했다.
샤힌샤는 외교국방법을 페르시아의 첫 정책으로 채택했다.
그리고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다 먹기 전에 서둘러 트란스옥시아나로 진출해야한다고 결정하고 공격을 지시했다.
러시아의 도움이 없어도 페르시아는 트란스옥시아나를 충분히 요리할 국력이 되었다.
그리고 고대했던 옛 티무르 제국의 영지를 전부 빼앗는데 성공했다. 이제 페르시아는 옛날 아케메네스 왕조-사산조가 확보했던 동방 영토를 거의 대부분 확보했다. 신드와 델리가 차지하고 있는 지역만 차지한다면, 동방에 신경쓸 일은 없어질 것이다.
이후 제국은 마쉬리크 문화를 수용하여 이라크 일대의 치안을 안정화시키는데 주력했다.
그런데 델리와 페르시아의 관계가 틀어지는 일이 생겼다. 델리의 술탄이 페르시아 출신 황후를 내치는 참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런 모욕을 참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페르시아는 갑론을박이 일어났다. 하지만 아직 페르시아는 델리와 떼어져서는 안 되었다. 아직 서방의 오스만과 맘루크가 큰 위협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러시아는 폴리투와 분쟁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만 의존해서는 안되었다.
행정 이념의 확립과 함께, 페르시아의 모든 이념이 정립되었다. 이제 페르시아는 예전보다 더욱 강력한 사기를 가지고 달려들 준비가 되었다.
한편 오스트리아에서 빈 의회가 소집되었다. 여기서 가톨릭이 신성로마제국의 유일한 종교로 공인되었다. 물론 샤힌샤와 페르시아에게는 관계 밖의 이야기였다.
가지쿠무크가 제노바에 맞서기 위한 전쟁에 페르시아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페르시아는 즉각 도와주었다.
한편 정부는 정치적 절대주의 체제를 채택했다.
그리고 오스만과 가지쿠무크가 전쟁에 휩싸이는 사이, 페르시아는 그토록 고대했던 바그다드 정벌에 힘쓰기로 했다.
그런데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가지쿠무크가 제노바를 상대로 멋대로 종전 협상을 펼친 것이었다. 가지쿠무크는 곧 이라크에서 손을 떼라고 페르시아의 샤힌샤에게 요청했고, 샤는 그것을 거절했다. 동맹은 깨졌으나, 당장 맞붙지는 않았다.
결국 바그다드가 함락되었고, 샤는 소원했던 바그다드를 품에 안게 되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주변 국가들로부터 엄청난 미움을 사게 되었다.
페르시아는 가지쿠무크와 다시 동맹을 맺었다.
이후 새로운 샤인 후세인 1세가 등극했다.
한편 머스킷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따로 정예 연대를 유지할 필요성이 사라졌고, 곧 페르시아는 정예 연대를 폐지했다.
한편 페르시아는 테헤란을 국제 무역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이제 페르시아는 옛 실크로드의 영광을 되찾을 것이다.
한편 오스만은 서방 연합에게 엄청나게 두들겨맞았고-
발칸의 상당부분을 내주고 후퇴했다. 이것은 엄청난 변화를 불러왔다. 최소한 페르시아에게는... 그것이 득 될 일이 없었다.
페르시아는 당시 공격적 확장 부작용을 삭힘과 더불어 귀족들의 권력 다툼을 해결해야 했으니까.
일단 내부적으로 착실히 조로아스터교 일원화를 꾀했다. 그러기 위해 열심히 선교사들이 일을 했다.
한편 러시아가 크림을 상대로 전쟁을 결의했다. 지원요청을 받은 페르시아는 과감하게 가지쿠무크를 버리고 러시아 코인을 탔다.
크림은 너무나도 쉽게 러시아에 합병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페르시아에게 큰 도움이 된 것은 아니었다. 아직 페르시아에게는 목표가 아직 많았다. 아라비아의 호르무즈, 서방의 아크 코윤루, 그리고 그들의 배후에 있는 오스만과 맘루크, 그리고 동방의 호라산을 쥐고 있는 신드와 델리. 갈 길은 멀고, 시간은 하루하루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유럽 세력은 점차 페르시아가 최후의 목표로 한 그리스 지역으로 한 발, 한 발 나가고 있었다.
첫댓글 "가장 눈에 띄는것은 북동 아프리카를 다 처먹은 맘루크였다."
처먹다뇨... 맘루크에 대한 혐오를 멈춰주세요! ㅠㅠ
뭐, 혐오는 아니고 그냥 한 말이지만요.
러시아에 맘루크,오스만,이제는 유럽 세력..하지만 페르시아는 굴하지 않겠지요!믿습니다!
현관! 현관! 배화! 배화! 배덕! 배덕! (응?!)
진짜 때려치울 것을 겨우 멘탈잡고 하는데...
@민동균 이 판이 이렇게 말릴줄 알았다면 욕먹는다 셈치고 결선투표 가는 거였는데!
@박팽년과박원종 ㄷㄷ.이번 페르시아는 유독 피로가 심하신가 보군요.하기야 오스만,맘루크가 자꾸 동맹 맺고 진출로를 봉쇄하니 그럴만 합니다만..
@요녀석 그 사이 폴리투와 러시아가 너무 잘 커서 뭐 손을 쓰기가 어려워요. 마지막까지 머리만 쥐어뜯을듯요.
병목지역인 프로빈스에 요새깔고 우방준비하는거는 어떤가요?
요새깔 돈도 돈이긴 한데... 생각해볼게요.
빨리 크테시폰으로 수도를 옮깁시다!
바그다드 개발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