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미르
소아시아의 서부에서 에게해에 면한 터키공화국의 제2대 도시다. 양항(良港)을 낀 이즈미르는 옛날부터 소아시아 연안 항로의 중심에 위치한 중계무역지였으며, 상업도시로서 번성하였고 공업도시로서도 중요시되어왔다. 이즈미르는 기원전 3000~2000년경에는 소아시아 중부의 보가즈쾨이(Bogaz Köy)를 중심으로 한 하투사(Hattusa)국(히타이트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당시 취락의 위치는 현 이즈미르의 서북부다.
이곳은 북방의 트로이와 함께 당대 소아시아 서부에서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기원전 2000~1200년 기간에는 소아시아 전역을 지배한 히타이트국(신 히타이트국)의 판도에 속하였다. 기원전 1100년경 그리스인들이 에페수스에 이주하자 이곳에 있던 아카이아인들이 밀려서 이즈미르로 이주하였다. 그후 이오니아인들의 이주가 시작되자, 그들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즈미르는 이오니아인들의 본거지인 그리스 본토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기원전 688년에는 이오니아 동맹의 한 구성(構成) 도시로서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호메로스가 이즈미르에 거주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기원전 6세기에 이르러 이즈미르는 사르디스를 수도로 하여 아나톨리아 서부에서 세력을 확보한 리디아 국왕 아르야테스의 공격을 받고 파괴되었다. 그후 비록 재건은 되었으나, 도시의 규모는 전보다 축소되었다.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가 소아시아 서부에 세력을 확대하며 리디아를 제압하자, 이즈미르는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치하에 들어갔다.
마케도니아의 페라로부터 서아시아 세계까지 패권을 장악한 알렉산드로스는 군사를 이끌고 타나크가레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에 상륙한 후, 에게해 연안을 따라 남하해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는 이즈미르를 점령하였다. 이즈미르는 알렉산드로스의 지배를 받으며 다시 번영을 누렸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그의 영토는 사분오열되어, 이즈미르는 안티고노스조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기원전 2세기에 로마가 마니사 전투(기원전 191)에서 안티고노스조를 격파하자, 이즈미르는 로마에 복속되어 로마로부터 자유도시의 지위를 보증받았다. 이즈미르가 사상 가장 번성한 때는 바로 이 자유도시로 존재한 기원전 1세기경이다. 기원전 27년 이즈미르는 로마의 직접 지배하에 들어가 자유도시로서의 권리를 상실하게 되었다. 178년과 180년에 대지진에 휩싸여 이즈미르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에 따라 부흥되었다.
385년에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되자, 이즈미르는 동로마제국에 편입되었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흥기한 무슬림들은 그 세력을 서아시아로 확대하여 우마이야조는 695년에 이즈미르를 공략하였다. 그러나 이슬람 세력은 얼마 유지하지 못하고, 이즈미르는 다시 동로마제국(비잔틴)의 치하에 들어갔다. 1071년 대셀주크제국은 반(Van)호(湖) 북방의 만지케르트 전투(Battle of Manzikert)에서 동로마제국을 격파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투르크계 여러 종족이 대거 소아시아에 진출하였다.
그들은 코니아(Konya)를 수도로 한 소아시아 셀주크조를 건설하였다. 소아시아 셀주크조는 동로마제국에도 세력을 확장해 11세기 술라이만 치세 때 이즈미르를 점령해 타카 베이가 이곳을 통치하였다. 이로써 이즈미르는 처음으로 투르크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서아시아에서의 무슬림들의 강세는 유럽 나라들과 로마 교황에게는 커다란 위협으로 인식되어 드디어 십자군이 편성되었다.
십자군이 팔레스타인 지방을 점령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건립할 무렵, 이즈미르도 십자군에 의해 다시 동로마제국의 판도에 편입되었다. 13세기에 이르러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라틴제국을 건립하자, 동로마 황제는 니케아(이즈니크)에 도피하였다. 그리하여 이즈미르는 니케아조의 치하에 들어갔다.
13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동로마제국으로부터 이탈해 동지중해 일원으로 세력을 확장한 제노바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1320년 소아시아 셀주크 계열의 소국 중 하나인 아이둔 오르의 카지 우름 베이에 의해 다시 투르크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셀주크 소국의 하나로 세력을 확대한 오스만 후국(侯國)은 바예지드 1세 때 아이둔 오르를 병합함으로써 이즈미르는 오스만제국에 편입되었다. 그후 티무르가 소아시아에 진출해 1402년의 앙카라 전투에서 오스만군을 격파하고 셀주크 산하의 소국들을 부흥시켰다. 때를 같이하여 아이둔 오르도 부흥하자, 이즈미르는 그 치하에 들어갔다.
티무르가 중앙아시아로 철수한 후, 오스만제국은 발칸 반도의 재부(財富)를 이용해 소아시아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여, 1415년에는 이즈미르를 다시 영유하게 되었다. 그후 이즈미르는 오스만제국의 상업도시로서 번영을 누렸으며, 거기에는 그리스인 · 베네치아인 · 제노바인 등 투르크족 이외의 민족도 다수 거주하였다. 1688년 6월 10일과 1776년 7월 3일에 발생한 두 차례의 대지진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으며, 도시의 규모는 축소되었다. 1867년에는 아이둔주(州)의 주도(州都)가 되면서 이즈미르는 다시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오스만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패하자, 그리스는 영국의 후원하에 에게해 연안 지방을 할양해줄 것을 오스만제국에 요구하였다. 이에 1919년 5월 15일 그리스군은 이즈미르에 상륙해 무력으로 할양을 단행하였다. 이듬해(1920)에 오스만 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 전승국들 간에 소아시아 서부를 그리스에 할양하기로 한 세브르 조약을 승인하였다. 오스만제국의 이러한 전후 처리는 전승국의 요구를 수용한 셈이다.
이에 대응해 무스타파 케말 파샤는 앙카라에 신정부를 수립하고, 세브르 조약의 파기를 요구하였다. 이 요구는 당연히 그리스군의 소아시아 진주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케말 파샤는 소아시아의 전체 투르크인의 결집을 호소하고, 1922년 8월 사카리아 대회전(大會戰)에서 그리스군에게 참패를 안겼다.
그리고 9월 9일에는 그리스군의 소아시아 거점인 이즈미르에 입성하였다. 1923년에 오스만 정부를 대체한 앙카라 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들과 새로이 로잔 조약을 체결하고 세브르 조약을 파기하였다. 1924년 10월 29일 터키공화국이 성립됨에 따라 오늘날까지 이즈미르는 이 나라의 한 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이즈미르
고대명 스미르나(Smyrna). 소아시아 반도의 서해안 이오니아 지방의 항만도시. B.C. 3000년대 전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발전한 도시로 B.C. 10(또는 B.C. 11)세기 이후 그리스 인이 이주하였다. 헬레니즘 ∙ 로마 시대에는 에페소스와 겨루는 이오니아의 대도시로 발전하였다. 1948~51년 쿠크(J.Cook)와 아쿠르갈(E.Akurgal)에 의하여, 66년 이후는 아쿠르갈에 의하여 고고학적인 발굴이 행해졌다. B.C. 9~A.D. 6세기의 건축, 미술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출토품의 대부분은 시내의 고고박물관에 있다. 시내에는 2세기 중반경에 세워지고 178년의 지진 뒤 재건된 아고라의 건물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