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 변증법 절망의 소망(롬7장)과 소망의 소망(롬8장)
로마서 7장14~로마서 8잘15절(8장1절 KJV 포함)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8장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느니라-KJV 추가부분)
There is therefore now no condemnation to them which are in Christ Jesus (who walk not after the flesh but after the Spirit-KJV)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KJV-condemned sin in the flesh - 그 육신 안에 죄를 정죄하사)
8:4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 정답이냐 오답이냐만을 따지는 것을 흑백논리라고 한다. 그러나 세상 이치나 진리를 추구하려면 그 이상을 필요로 한다. 그것을 동양에서는 주역(周易)의 압축(엑기스)으로 몹시 양인 것은 몹시 음이며 몹시 음인 것은 몹시 양이다(치우치지 말라). 그러나 양일 때는 최대한 양이어야 하며 음일 때는 최대한 음이어야 한다(극대화 하라). 동양의 지혜인 것이다.
서양에서는 이원론과 이분법의 흑백논리를 넘어선 것을, 쉽게 말해서 서로 반대되는 것을 종합 통일하는 것을 변증법이라고 하는데 본래의 의미에서는 사물의 본질 그 자체의 모순(矛盾)의 연구이다. 변증법은 대립물(對立物)의 통일(統一)에 관한 학문인데 칸트의 분석론과 변증론, 헤겔의 관념변증법, 마르크스·앵겔스의 유물변증법, 키에르케고르의 실존변증법, 칼바르트의 변증법 신학 등이 있다.
여기서는 성경에 있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뜨겁거나 차거나 하라, 믿음과 행함, 은혜와 율법, 예정과 인간책임 등등 상호간(相互間) 변증법적(辨證法的)인 말씀 들이 많이 있지만 로마서에 있는 절망(絶望)과 소망(所望)이라는 두가지 서로 다르면서도 같은 변증법적인 말씀을 다루어 보겠다.
一元化 시킬 수 없는 二元的 眞理, 矛盾的 對立의 二元性을 다루는, 二律背反을 극복하고 二分性 자체를 그대로 존재케 하면서도 그 둘을 통합시키는, 思惟(觀念)가 아닌 實存이 있는 역설변증법(逆說辨證法-paradoxical dialectic), 역설변증법 하면 “절망은 죽음에 이른 병이다. 그러나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다” 라고 한 유실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생각나는데 원조는 사도바울이다. 사도바울을 가리켜 원조 역설변증법의 대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고후11:23) 라는 말씀은 사도바울 특유의 강조형 문장이다.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자기자신이 정신없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정신없는 말에 대하여 글자 그대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정신이 없다니? 혼이 없는 상태에서 말했다는 것인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으나 해석의 흐름상 격한 감정적 표현으로 강조형 문장이라는 것을 읽는 순간 알아챌 수가 있는 것이다. 말씀을 강조하기 위해서 반대로, 反語法으로, 逆說(paradox)로 정신없는 말을 한다고 하는 것인데 로마서7장과 8장에 와서 역설변증법의 절정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영화 미션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은 불가능한 임무라는 뜻이다. 불가능한 임무라니? 역설(逆說)이 이 영화의 제목이다. 영화의 제목을 미션파서블(가능한 임무)이라고 하면 영화가 재미가 없겠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임무라니 볼 것도 없다고 하고 안 볼 수도 있으나 불가능한 것을 수행해야 재미가 있는 것이다. 악당이 쎄야 재미있지 약하면 재미가 없는 것이다.
불가능한 임무를 가능하게 하면서 수많은 도전을 물리치는 과정이 영화의 흥미를 주고 있는 것이다. 참복음도 복음의 미션임파써블을 수행하는 것이다. 육신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영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이 참복음이다.
로마서7장은 너무나 逆說的이어서 너무나 反語法的이어서 곡해를 하기쉽다. 로마서7장은 절망장이며 8장은 소망장이지만 7장의 절망이 잘못되면 절망의 절망이 되고 잘되면 절망의 소망이 되는 것이다. 8장의 소망은 잘못되면 소망의 절망이 되고 잘되면 소망의 소망이 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단단한 음식(히6장)을 못먹고 7장에서 절망의 소망이라는 꿀과 버터(먹는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삿14:14,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미쳐 뻐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사7:15)를 취하지 못하고 절망의 절망에 빠져있다. 성경을 곡해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8장에 와서도 소망의 소망 상태로 가야 되는데 성령을 좇지않고 육신을 좇다가 소망의 절망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로마서 7장과 8장은 둘을 하나로 만들면서 둘로 각각 남게하는 역설변증법으로 짜여진 장들이다. 7장은 절망의 소망장, 8장은 소망의 소망장이다.
7장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O wretched man that I am! who shall deliver me from the body of this death?)
범죄하여서 탄식하는 것이 아니다. 패배자의 부르짖음이 아니다.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하기 때문에 24절의 고백, 절망이 있는데 이 절망은 절망하기 위한 절망, 절망으로 끝나는 절망이 아니라 소망 하기 위한 절망이다.
누가 나를 건져낼 줄 몰라서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알지만 말씀을 강조하기 위한 反語法, 逆說(paradox)인 것이다. 로마서 전체에서 절망의 소망의 정점인 것이다. 범죄자, 패배자의 고백이라면 25절에서 회개가 나와야 하는데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절망적으로 탄식하다가 언제 그랬느냐 하면서 즉시 감사하고 있다. 전무후무한 지독한 역설이기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해독을 못하여 허다한 곡해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러므로 7장24절은 절망의 소망으로 소망하기 위한 절망(탄식)이다. 자신의 죄성(내속에 거하는 죄)을 바라보면 절망(탄식)할 수 밖에 없지만 소망하기 위한 절망(탄식)의 소망이다
8장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생명의 성령의 법에 거하기 때문에 영적전쟁에서 승리하는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소망한다는 소망의 소망 장이다.
그러므로 7장의 절망의 소망과 8장의 소망의 소망은 서로 반대이지만 서로 같이 조화를 이루어야 올바른 신앙의 길을 갈 수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7장-자기를 바라보면서 또한 8장-자기를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이 역설변증법이다.
◉인격은 그 토대에 따라서 무의식 위에 서 있지만, 그러나 인격은 예민한 자의식(自意識)의 모든 변화 속에 그 고유한 통일의 의식을 필요로 한다.
◉실존한다는 것은 내적으로 그 자신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존하는 자아는 끊임없이 자기자신을 초월한다.
자아가 완전히 자기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과 타인과 스스로를 초월하는 신앙(성령충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2020년 7월26일 kalits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