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전속력으로 달리는 기관차에 브레이크가 없다면? 영화 「폭주 기관차(Runaway train)」, 「스피드(Speed)」, 그리고 「언스토퍼블(Unstoppable)」 등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채 과속으로 질주하는 기관차를 세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왜 기관차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가? 기관차가 선로를 이탈해서 튕겨나가게 되면, 안에 타고 있는 승객들은 물론이고 충돌 지점 주변 사람들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 또한 마찬가지이다. 절제되지 않은 채 분출되는 욕망의 폭류는 자칫하면 욕망의 당사자는 물론이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심각한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순간적으로 솟는 충동과 멈춤(止)의 필요성
욕망이라고 불리는 다양한 심적 양태 가운데서도, 특히나 무반성적, 반사적, 순간적으로 분출되는 ‘충동’은 가히 브레이크가 없는 기관차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충동에는 성 충동, 공격 충동, 자살 충동, 살인 충동, 소비 충동, 도둑질 충동, 방화 충동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충동은 주체가 미처 자신의 내면 상태를 반성하거나 점검해볼 틈도 없이 순식간에 분출되는 탓으로, 사태가 발생한 뒤에 때늦은 후회를 유발하거나 돌이킬 수 없는 허물을 초래하기도 한다.
근간에 이슈가 된 ‘땅콩 회항’ 사건이나 백화점 주차장 ‘갑질 모녀’ 사건, 그리고 어린이집 보육 교사의 아이 폭행 사건 등은 모두가 순간적으로 솟구치는 분노 충동을 적절하게 조절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들이다. 또한 전직 국회의장의 골프장 캐디 성추행 사건, 병영 내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상급 장교들의 부하 성추행 사건, 심지어 대학 내에서 가끔씩 일어나는 성희롱 사건 등은 모두가 순간적으로 솟구치는 성 충동을 제어하지 못해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순간적으로 분출되는 격한 충동을 적절하게 제어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당사자에게는 씻을 수 없는 불명예와 법적 처벌이 주어지고, 피해 상대방에게는 치유하기 어려운 심리적 상흔을 안겨주게 된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이 순간을 즐겨라! 멋진 말이다. 즐거움이 없는 삶은 고통 그 자체이거나 무료함의 연속일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을 즐기라는 말이 이 순간을 무절제하게 즐기다가 내일은 알거지가 되거나 감방에 들어가도 좋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더 많이, 더 오랫동안 매 순간을 즐기기 위해서는, 즐기는 일에도 적절한 제어가 필요할 것 같다. 『대학』에서는 멈춤(止)의 필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멈출 ‘지’(止)는 “마땅히 멈추어야 할 곳”(所當止之地) 즉 윤리적 마지노선을 뜻한다. 마땅히 멈추어야 할 곳에 대한 윤리적 자각은 심리적 안정으로 연결되고, 심리적 안정은 합리적 인식 능력의 증진으로 이어지며, 합리적 인식 능력을 사용해서 우리는 최적의 결과에 다가서게 된다. 기관차가 마땅히 멈추어야 할 곳에서 멈추어야 하듯이, 사람에게도 각 상황마다 마땅히 멈추어야 할 지점들이 있다. 자신과 타인에게 누가 되거나 해가 되는 바로 그 지점이야말로 “마땅히 멈추어야 할 곳”이 아닐까싶다. “멈추어야 할 곳을 아는 일”(知止)이 불가능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대학』의 위 문장을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위 글에 아니 ‘불’(不) 자를 넣어서 부정문으로 바꾸어보면 아래와 같다.
마땅히 멈추어야 할 곳에 대한 자각의 결여는 심리적 불안정으로 연결되고, 심리적 불안정은 합리적 인식 능력의 결여로 이어지며, 이는 결국 자아를 파멸과 불행으로 이끄는 계기가 된다. 매 순간, 미처 반성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용암처럼 솟구쳐 오르는 무의식적 충동은 어떻게 하면 제어할 수 있는 것일까?
“미세한 의식이 싹 트는 순간, 살피고 점검을”
북송 5자의 일원인 주돈이(周敦頤: 1017~1073)는 이에 대한 해법으로 ‘신동’(愼動)의 수양법을 제시한다. ‘신동’이란 “움직임을 삼가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움직임(動)이란 의식의 움직임을 말한다. 우리의 의식은 아직 대상을 향해 뻗어나가기 이전인 미발(未發)의 상태와 이미 대상을 향하여 활동을 개시하기 시작한 이발(已發)의 상태로 크게 나뉜다. 그리고 이 사이에는, 미발의 상태에서 이발의 상태로 막 이행하려는 미세한 기미가 있다. 주돈이는 이 작고 미세한 의식의 틈새를 “있음과 없음의 사이”(有無之間)라고 특징짓고, 이를 ‘기’(幾)라고 명명한다. 미세하기 그지없는 의식의 싹이 막 솟아나오는 순간, 여기로부터 선과 악이 나뉘고 길과 흉이 갈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터럭처럼 미세한 의식의 싹이 막 터져 나오려는 순간, 이를 면밀하게 살피고 점검하는 일이 바로 ‘심기’(審幾)의 공부이고 ‘신동’(愼動)의 수양법이다. 주돈이는 ‘신동’의 수양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조선 시대 선비들이 중시했던 경(敬) 공부도 의식의 ‘동’과 ‘정’을 관통하는 자기점검(self-monitoring)의 수양법이다. 털끝처럼 미세한 의식의 틈새마저도 소홀하게 방과하지 않으려는 자기점검의 노력이 익는다면, 몸에 욕 입을 일도 없으려니와 타인에게 해 끼칠 일도 없게 될 것이다. 이처럼 자기가 자기 의식의 주인이 되는 일을 주재(主宰)라 한다. 자기가 자기 의식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노예처럼 끌려 다닐 때, 몸에는 욕이 미치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해를 끼치는 불행한 결과를 빚게 된다. 옛 사람들의 마음공부법을 되돌아보아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필자 이승환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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