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오는 밤 세상이 침묵하고 있을 때 당신은 귀 기울여 눈 내리는 소리를 들어 본적이 있는가. 한번 들어 보시구려 이 아름다운 소리를.
그제부터 내린 눈이 오고가는 길을 막고 누어 있다. 토굴에 갇혀 있다. 전봇대에 졸고 있는 외등 불빛이 마당에 가득하다. 저녁이 되자 또 눈이 내리기 시작 했다. *코쿨에 불을 지피고 창가에 홀로 앉아 눈내리는 소리를 듣는다. 사르르 사락 사락 그 신비하고 가냘픈 소리가 옷을 벗는다. 숨을 죽이지 않고서는 들을 수 없는 깊은 밤 눈 내리는 소리. 설야(雪夜)의 상념들이 폴폴 흩날린다.
시인 김광균(1914~1993)은 '설야'에서 이소리를 '머언곳에 여인의 옷벗는 소리'라 했다.
밤은 깊어 가는데 잊어진 추억의 조각들을 찾아 뒤척이다 시인 김광균 선생님을 토굴로 모셔왔다.
정중히 예의를 갖추고 희미한 코쿨 불빛 아래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다. 뿔태안경에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선생님, 설 밑인데 고향에는 다녀오셨습니까. 아믄 다녀왔지 자손들도 만나고 왔다네.
이렇게 모시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내가 고맙지 초대 해 주셔서 고마워.
선생님 고향은 이북땅 개성으로 알고 있는데 그곳을 다녀오셨다고요? 그래, 우리에게는 남과북이 따로 없어 고향도 가고 서울에 있는 자손들에게 종종 가지.
머루주를 내놓자 잔을 받으시며 이야기를 이어 간다.
1914년1월19일 개성에서 태어났지.선친의 함자는 창자훈자(김창훈), 선대부인은 한씨로 나는 3남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어. 송도상업학교(松都商業學校)를 졸업하고 고무공장 사원으로 근무했었지.
시는 언제부터 쓰기 시작 했습니까. 어린 시절부터 쓰기 시작했어. 열세살 때 中外日報(1926)에 '가신 누님'을 동아일보 (1930)에 '야경차(夜警車)'를 발표했으니까.
오성대감 이항복 (李恒福)의 깊은 골방 안 그윽한 밤에, 아름다운 여인의 치마 벗는 소리라 했어.
당대에 내노라 하는 대학자요 문장가요 정사를 좌지우지하는 정치가였지만 그들이 아무리 유학의 궤범에 얽매여 살아간다 할지라도 인간의 본성까지 *장삼이사(張三李四)와 다르겠는가
음란스럽기 보다는 그윽한 정감이 함부로 흉내내기 어려운 멋으로 다가 오지 않는가?
이들의 풍류와 해학과 멋 ! 정말 한 시대를 풍미하고도 남기에 족했지.
듣고보니 선생님의 시'雪夜'는 李恒福의 解裙聲을 뛰어 넘으셨습니다.백미중에 백미입니다. 기교 위주의 탈을 벗어 진솔한 서정의 시로 탈바꿈시키는 작품으로 평가 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봐주니 고맙구려.
선생님, 이조시대에 아름다운 여인이 치마벗는 소리를 엮은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어서 들여 주시게.
30년을 벽만 쳐다 보고 도를 닦은 스님이 계셨답니다. 황진이(黃眞伊)는 자신의 여자 됨의 매력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
비오는 어느 날, 절집으로 스님을 찾아가 이 깊은 밤 산 속에서 갈 데가 없으니 하룻밤 재워 달라고 애원 했답니다.
스님은 담담하게 그러라고 승낙했답니다. 이미 도의 경지에 있었던 터라 여인이 유혹을 해도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였지요.
비에 젖은 선정적인 여인의 모습,
산사(山寺)의 방에는 희미한 촛불만 타고 있고. 돌아 앉아 벽을 보고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스님의 등 뒤에서 여인은 조용히 옷을 벗기 시작했답니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여인의 치마 벗는 소리, 30년 수도한 스님은 이 소리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선생은 빙그레 웃으시며 그 답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도록 하자며 자리에서 일어 나신다. 문을 열어 드리자 눈길을 뚜벅뚜벅 걸어 가신다.
어둠속에서 여인의 옷벗는 소리보다 더 아름다운 소리가 있을까.
김광균 시인은 시 '설야(雪夜)'에서, 눈내리는 소리를 '머언 곳에 女人의 옷 벗는 소리'로 표현 하고 있다.
깊은 밤에 눈 내리는 소리가 시인에게 마치 어둠 속에서 치마끈을 풀어 치맛자락이 사르르 흘러 내릴 때의 신비롭고 매혹적인 소리처럼 들린 것이다.
그 감각을 감싸는 독특한 정서위에 동양의 미학 같은 분위기가 있는 것이다. 눈내리는 밤에 여인의 옷벗는 소리로 표현하는 것은 아무나 잡아낼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 선생은 특유의 천부적 언어감각이 있고 그 위에 밤의 흰눈, 처마 밑 호롱불, 밤 깊은 뜰, 추억의 조각, 슬픔이 '설야'를 이끄는 대표적 정서 언어들이다. 이 시에 이르러 김광균은 내용과 정서의 통일을 이루었다고 하겠다.
이 빼어난 서정시는 눈 내리는 소리의 신비경이 슬픈 시적 자아에 겹쳐, 민요 가락의 변형된 토속적 율조에 얹혀 김광균 특유의 음울한 애상이 너무나 잘 드러나 있다.
어떻게 들으면 서구적 현의 가락이 이미지로 떨린 첼로 소리 같기도 하고, 고요히 귀 모으면, 거문고의 깊은 울림 같기도 한 시 '설야' 는, 흰 눈밭에 붉은 몸으로 피어 옛 사내들의 심중을 흔들어 놓은, 저 사군자의 설중매 (雪中梅)같기도 하다.
황진이와 스님에 대한 일화는 지금도 답을 내지 못한채 저잣거리에 회자되고 있다.
십중팔구는 스님이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 갔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2017.1.30일 정문골 움막에서>
참고문헌: 1).김명옥, 「김광균 시 연구」, 교원대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99. 2).윤일광의 원고지로 보는 세상
*코쿨:강원도 산간지대 민가에서 볼 수 있는 벽에 설치하여 관솔을 지펴 어둠을 밝히고 난방으로 이용했던 시설. *장삼이사(張三李四):성명(姓名)이나 신분(身分)이 뚜렷하지 못한 평범(平凡)한 사람들